(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천안 각원사 대웅전에서

우리나라에 3대불전이 있다. 오래되고 큰 불전이란 말이다. 화엄사 각황전, 법주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이 그것이다. 사실 그것 보다 오래되고 큰 불전이 있는데 왜 위의 세 전각만을 3대 불전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천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웅전이 있는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름하여 각원사라고 한다.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거대한 청동좌불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쨓든 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로 지은 절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 보았다.

입구에 차를 대고 들어가니 아직 주변 정리가 깨끗하게 끝난 것 같지는 않았다. 들어가자 마나 커다란 치미가 놓여 있는 2층의 누각이 있었다. 치미는 지붕 위 좌우측의 끝을 마무리 하기 위한 부제이다. 대웅전이 이정도로 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치미가 내 키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어떻게 저렇게 큰 치미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쇠로 만들었다면 그렇구나 하겠지만 그 치미는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다. 저 정도의 치미를 구을 수 있는 가마를 만드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성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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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미가 있는 누각을 지나니 앞에 대웅전이 서 있었다. 너무크면 크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법당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큰지 실감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떨어져서 보면 그렇고 그런듯 한데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절이다. 저렇게 큰 절을 어떻게 나무로 만들었을까 ? 기둥의 굵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물어보니 캐나다에서 들여온 것이라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저 정도되는 나무를 구할 수가 없단다. 가까이 있으니 내가 마치 난장이가 된 것 같았다. 거참 이상한 경험이다. 절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니 전각이 큰게 아니라 내가 작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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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도 무척 높았다. 높은 지붕에서 살짝 내린 눈이 녹은 물이 흘러내린다. 높은데서 물이 떨어지면서 낙숫물이 공중에서 날라 부숴진다. 물방울이 안개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현실적 느낌으로 마치 취한 것 같았다. 나만 그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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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삼존불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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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크고 화려한 교회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고, 크고 화려한 전각에는 부처님이 미안해서 계시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내 심성이 비뚤어져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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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용주사 대웅전을 보고 집으로 돌아 오다.

절집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대웅전이다. 가장 크고 화려하다. 당연히 정성도 많이 드린다. 그래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다. 용주사 대웅전은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아서 처음에는 많이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재미있는 것들이 있었다.

제일 먼저 관심을 끈 것은 제일 정면에 있는 용의 모습이었다. 용의 눈이 커서 매우 회화적으로 보였다. 인상이 부드럽기도 해서 다른 용의 모습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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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돌을 다룬 방식이 마치 궁궐의 초석과 비슷했다. 그 당시에 세워진 절들의 초석은 자연석위에 뎅그리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용주사 대웅전의 초석과 기둥은 대궐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대웅전에 궁궐기법을 적용한 것은 용주사의 위치가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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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둥의 크기도 다른 절과 달랐다. 어머니가 서 계신 곳 바로 옆의 기둥을 보면 얼마나 굵은지 알 수 있다. 당시 세워진 절들 중에서 이렇게 큰 굵은 기둥을 사용한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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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구경을 마지막으로 용주사를 떠났다. 어둠이 조금씩 내렸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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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수원 용주사 동종

절에 가면 종이 있다. 범종이라고 한다. 새벽과 저녁이면 종을 친다. 종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종은 소리가 중요하다. 전세계의 범종 중에서 우리나라 종 소리가 제일 좋다고 한다. 저녁에 해가 넘어갈때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있으면 참 좋다. 세상 시름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절에갈 때는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한다. 오전에 예불을 올릴때나 저녁에 종을 칠때 제격이다. 그런데 절을 구경다니면서도 그런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용주사에 가서 생각치도 않았던 동종을 보았다. 국보 제120호다. 설명해놓은 현판을 보니 신라말기 양식이지만 고려초에 만든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고 한다. 나무 창살이 워낙 촘촘해서 종모습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종두가 좀 특별하게 툭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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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울려나오는 용통도 잘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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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의 관심을 끈 것은 몸통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다. 특히 부처님 뒤에 그려져 있는 날아가는 듯한 기운이 아주 독특하게 느껴진다. 마치 하늘을 나는 선녀의 옷자락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부처님 뒤의 장식을 그렇게 날아가는 옷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우리나라 종의 특징인 것 같다. 그렇게 만들려면 솜씨가 매우 정교해야 한다. 다른 한면에 새겨져 있는 정교한 연꽃무늬는 이 종을 만든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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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을 만든 장인은 누구였을까 ? 무슨생각을 하면서 만들었을까 ? 마음대로 종을 치지말라는 경고가 붙어 있었다. 종이 오래가려면 자주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살짝 백원짜리 하나를 던져보았다. 소심하게 살짝. 소리가 났다. 내가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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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이야기) 수원 용주사 호성전 앞에서

수원 용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호성전이다. 호성전은 사도세자 부부와 정조임금 부부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다른 전각에 비해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대웅전 이전까지 용주사는 유교적 방식이 지배를 하고 있다고 지난 포스팅에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문을 지나서 건물에 들어오면 거기서부터는 불교적 방식이 장악하고 있다. 불교적 방식이 유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호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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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니 위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절을 세운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나서 다시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시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도세자와 정조임금의 위패는 두군데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종묘에도 모셔져 있다. 그럼 이분들의 혼백은 어떻게 하나 ? 혼백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영혼에도 두가지 종류가 서로 얽혀져 있다고 믿었다. 정한 것은 혼으로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란다. 성리학에서 매우 정치하게 따지는 문제이다. 각설하고 호성전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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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전은 이들 두분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위패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방식이다. 그런데 호성전은 불교적 방식이다. 불교적 틀안에 유교적 방식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위패를 호성전에 있는 것처럼 화려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절중에서 임금의 위패를 따로 모신 곳은 용주사 호성전이 유일한 듯 하다.

어머니와 호성전앞에 한참을 서서 정조임금의 효성을 생각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고 죽일때 정조임금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지고 나서야 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릴때가 있다.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려본적이 없는 것 같다. 정조임금이 성군이 된 것도 다 그런 심성이 있어서가 아닐까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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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수원 용주사 솟을 대문에서

대궐의 건축방식이 도입된 절이라서 그런지 대웅전에 들어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도 색다르다. 먼저 앞에 석물이 문 입구 좌우측에 서 있다. 아무래도 해태같은 생각이든다. 광화문에 가면 해태가 양쪽에 서 있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 난다. 물론 크기는 광화문의 해태와 비교할 수 없이 작다. 그나마 많이 닳아서 그냥 보면 무슨 동물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인상적인 해태의 얼굴이 매우 해학적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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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를 지나면 솟을 대문이 있다. 아주 전형적인 유교적 출입문이다. 솟을 대분의 앞에 있는 주춧돌과 기둥도 전혀 불교적인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춧돌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다. 큰 원에 작은 원이 있는 것을 보면 조계종을 표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조계종에 그런 문양이 정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야 조계종 문양이 정해진 것을 생각해보면 주춧돌에 문양을 새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 듯 하다. 모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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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조선시대에도 그런 문양이 있었는지. 어쨓든 문양을 새긴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면 왜 그렇게 새겼는지가 궁금하다.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유교적인 분위기를 상쇄시키기 위해서 조계종 문양을 새겨 넣었다고 할 수 밖에 없겠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솟을 대문을 지나, 대웅전 앞의 강당을 향했다. 강당은 원래 불교건축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그런데 그 주춧돌 기둥도 마치 궁궐의 기둥 같았다. 정조 대왕이 불교 사찰을 세웠지만 성리학자들은 그냥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도 여기까지 였다. 강당을 지나면 그 이후에는 그야말로 불교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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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용주사가 유교와 불교의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혼합되어 있다고 하기 보다는 그냥 분리되어서 각각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홍살문에서 솟을 대문 그리고 강당까지는 유교의 세계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불교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 묘한 조화와 대비를 보면서 절안으로 들어갔다.


문림 II

좋은 키보드 찾다 찾다 직접 만든 키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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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수원 용주사 앞에서

날씨가 매우 추웠다. 그래도 낮에는 조금 따스한 기운이 돌아서 어머니를 모시고 용주사를 찾았다. 수원용주사는 그리 멀지 않아서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조금 꾸물거렸다. 그래서 용주사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넘어가려고 했다. 바람이 차가웠다. 어머니는 기분이 좋으신지 연신 싱긍벙글이시다.

용주사는 들어가는 길이 조금 색다르다. 입구에 기와로 담이 세워져 있다. 기와로 쌓은 나지막한 담이 묘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길가에는 비석같은 돌들이 서 있다. 길가에 장승같은 돌들이 서 있는 경우는 처음인 듯 하다. 돌마다 무슨 글씨들이 씌여져 있다. 불교의 경구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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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는 다른 절과 달리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이란 주로 유교 시설에 세운다. 그런데 용주사는 불교 사찰인데 홍살문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용주사는 매우 특이하다. 유교와 불교가 서로 뒤섞여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유교와 불교가 용주사처럼 서로 섞여 있는 곳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숭유억불 정책을 지켜오던 조선조에서 이런 특이한 양식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주사는 그런 특성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유교와 불교의 혼합이라는 측면보다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이 더 주목을 받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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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때문인지 다른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왕문이나 금강문 해탈문 같은 문 건축물이 없다. 그것도 매우 특이했다. 주변이 개발이 많이 되면서 용주사 주변도 과거와 같은 느낌은 많이 없어졌다. 임금님이 행차하기 편하도록 산이 아니라 평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주변이 많이 개발되어서 이제 주택지가 되었다. 불과 몇년전에는 주변이 모두 녹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통팔달로 길이 생겼다. 좋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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