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지리산 대원사 초입에서

산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지리산 종주를 한번쯤 생각해 보기 마련이다. 나도 지리산을 여러번 다녔다. 그런데 종주는 하지 못했다. 구례 화엄사에서 성삼봉을 거처 산청의 대원사까지 가는 길을 2박 3일동안 가는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직장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나도 이런 저런 이유로 종주를 하지 못했다. 지도를 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내 마음은 항상 대원사에 가 있었다. 간혹 산청에서 대원사에 갈 일이 있었지만 일부러 절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언젠가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러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퇴직을 하고 시간이 났는데 이젠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젊은 시절 너무 과한운동으로 관절을 상해 산행을 하기 어려워졌다. 한때 날랜 맹수처럼 산을 다녔는데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이 한 1년 꾸준히 치료하고 운동을 했더니 많이 나아졌지만 산을 다니는 것은 무리다.

물론 그 중간에 지리산은 이리저리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 항상 대원사는 그냥 지나쳤다. 꼭 시간을 내서 대원사에 가보아야 가겠다고 생각한 것은 친구 때문이었다. 영웅호걸이 판치는 시대에 태어났어야 할 친구가 시대를 잘못만나 지리산에서 별장을 짓고 칩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시간이 많이 나는 터라 찾아갔다. 워낙 강골인 친구라 아무리 추워도 집에 불을 넣지 않는다. 아무리 추워도 옷을 홀딱 벗고 잔단다. 나도 보통은 넘는데 상대가 안된다. 날 위해서 방바닥을 뜨끈 뜨끈하게 데워 놓았다. 오랫만에 이야기로 하루를 세우고 대원사 구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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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대원사는 우리말고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영하의 날씨는 사람들의 발을 모두 묶어 놓았는지 허허했다. 올라가다보니 부도탑이 몇개 서 있었다. 오가는 사람 없는 길가에 서 있는 부도는 답없는 질문을 던진다.

“너 사는 게 뭔지 아니 ?”

60년가까지 살아도 사는게 뭔지 모르겠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지만 나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

생각나는 것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그냥 이렇게 머물면 죽음이란 과정에 도달하는 것인가 ?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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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대청댐 현암사의 풍경

우리나라에서 경치좋은 곳은 절하고 군대가 다 차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경치 좋다고 소문난 곳을 가보면 여지 없이 절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알았는지 군대도 좋다는 곳만 골라가서 자리잡고 있었다. 절은 아무나 가서 보면 되지만 군대가 있는 곳은 함부로 가볼 수 없으니 아쉽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으니 그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절을 다녀보면서 경치 좋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면 부석사였다. 절 차체도 볼 것이 많고 절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데 우연히 대청댐을 지나면서 현암사라는 곳을 찾아보게 되었다. 절을 찾아가기도 어렵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라서 잘못하면 입구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나도 몇번 지나쳤다. 차를 산밑에 주차하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급경사에 계단이 놓여져 있다. 어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불평을 하면서 올랐다.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면 크게 다칠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힘들게 올라서 보니 경치가 일품이었다. 현암이란 이름도 바위에 매달려 있다는 뜻이다. 대청댐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고 저 멀리 산수화가 펼쳐져 있다. 대청댐 밑으로 흘러가는 강은 때마침 지는 해를 받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했지만 내려오기 싫어서 한참을 머물렀다.

절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손보면서 잘못해서 찍어온 사진을 모두 날렸다. 절터는 급경사의 아주 조그만 공터여서 자리가 협소했다. 옆으로 난 공터에 전각을 앉혔다. 그 꼭대기 까지 어떻게 기둥나무며 자재들을 날랐는지 알수 없었다. 그때 절 한쪽 구석에 백구가 졸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꽤 나이가 들었는데 마치 노스님이 객을 맞이 하듯이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고 낮잠을 잤다.

너무 한적하고 좋았다. 난 부석사의 경치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봄이나 여름에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조용히 앉아서 차한잔 마시면 선계가 따로 없다고 느낄 것이다. 다행이 그때 찍은 풍경사진이 있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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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종로 조계사안에서

조계사는 그리 넓은 곳이 아니다. 아니다. 매우 넓은 곳이다. 넓고 좁고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에 좌우되는 개념이다. 산속에 있다면 조계사는 그리 넓은 곳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금싸라기 보다 비싼 서울시내 한복판에 있는 그 정도의 땅이라면 무지하게 넓다고 할 수 있다. 종로에서 조계사 만큼 넓은 공터를 가지고 있는 곳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조계사를 들어가면 가운데 커다란 대웅전이 있다. 조계종 총본산 답게 대웅전이 크다. 대웅전 안에 어마어마하게 큰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몇년전 석탄절 저녁에 이곳을 지나다가 연등행사를 본적이 있다. 환한 전등불이 황금빛 부처님을 비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신 절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마치 어떤 것에 홀린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대웅전에 들어가기 위해 벗어 놓은 신발들이 놓여 있었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신발들이 마치 영혼을 잃어 버린 육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 신발을 신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와야 비로소 신발은 생명을 부여 받는다. 사람들의 발에 신겨진 실발과 그냥 단아래 놓여 있는 신발의 느낌은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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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쪽에 석탑이 있다. 거기서 중늙은이 한 사람이 절을 하고 있다. 저렇게 추운날에 저 사람은 무슨 일로 저렇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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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돌아 보았다. 건물에 둘러싸인 절의 모습. 부조화스럽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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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절은 산속에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내 사주에 중사주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젊을 때는 절에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드니 그런 일을 못할 것 같다. 사람 주변에 있는 것이 좋다. 사람들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예전에는 까칠해서인지 누가 옆에서 이야기거는 것도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부러 카페에서 사람들의 냄새와 소란스런 이야기를 들으며 일을 한다. 지금도 그렇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조계사는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다. 차라리 북한산이나 남한산 자락에 자리잡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계사를 나왔더니 허름한 상가에 스님 가사와 각종 불구를 팔고 있었다. 그림이 그럴 듯해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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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종로 조계사 사천왕상

서울에 산 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정작 종로에 있는 조계사는 제대로 가본적이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도 정작 조계사는 갈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다. 20대 한창 때 우리의 주무대는 종로였다. 학원도 종로에 집결되어 있었다. 종로서적에 가서 하루종일 책을 보기도 했다. 그때도 종로서적에서는 하루종일 구석에 앉아 책을 볼 수 있었다. 종로서적이 망해서 문을 닫았다는 소리를 들으며 내 젊음의 한 구석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교보문고가 새로 들어섰다지만 이상하게도 종로서적과는 느낌이 달랐다.

아리따운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던 곳도 종로였다. 물론 우리 윗세대는 명동이었다. 아마도 명동 세대들은 종로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교보로 가지 않았던 것 처럼 말이다. 종로 피맛골을 돌아다니면서 술마시고 취했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 있었던 조계사는 가보지 않았다. 인사동에는 뻔질나게 갔었는데 말이다.

그런 조계사를 가본 것은 작년 이맘때다. 조계사 앞을 여러번 지나치면서도 들어가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조계사에서 벌어진 볼성 사나웠던 싸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돈이 걸리면 추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불교계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자리가 돈을 만지는 자리라서 그런지 서로 총무원장 되겠다고 난리를 쳤다. 매번 폭력이 난무했다. 스님같지 않은 스님들이 서로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저런 짓할 것 같으면 왜 머리를 깍았을까 ?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조계사에 들어가게 된 것은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모른다. 그냥 지나는 길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조계사의 사천왕상이 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서울 한복판에 있으니 사천왕문을 만들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입구에 문을 만들고 그 좌우에 사천왕상을 쇠판으로 만들었다. 그 문은 일주문 양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재미있는 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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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주변은 모두 빌딩이다. 그 빌딩 숲속에서 청정한 기운이 흐르면 오죽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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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군위 인각사의 산신각이야기

절집마다 독특한 건축물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런 곳을 찾는 것이 답사의 기쁨이다. 삼국유사의 고향이라는 인각사에서 산신각을 발견한 것은 의외였다. 극락전 뒷편에 산신각이 있었다. 나무기둥위에 산신각이 있었다. 산신의 그림과 향 촛불이 전각 안에 있었고 사람들은 산신각의 문을 열고 기도를 해야 하는 구조였다.

문을 열고 기도해야 하는 조그만 크기의 산신각이라는 점에서 선암사의 산신각과 비슷했다. 그러나 선암사의 산신각이 회랑으로 연결된 것과 달리, 인각사의 산신각은 독립건물이었다. 그리고 전각이 나무기둥 위에 지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마치 작은 누각같았다. 크기는 작지만 형식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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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의 산신그림이 매우 특이했다. 기존의 산신그림과 차이가 많았다. 대머리에 주변머리가 검은 색이었다. 세상에 그런 부조화가 어디있단 말인가. 대머리면 대머리지 왜 주변머리가 있단 말인가 ? 그것도 백발이면 모르겠는데 검은 머리다. 이런 이상한 그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자세히 보면 머리 주변부터 어깨까지 보자기 같은 것을 둘러 쓴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머리에 쓰는 보자기는 처음 보았다. 뭔지 알 수없다. 그런 복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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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이 타고 있는 호랑이 그림은 전통 민화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이제까지 본 산신중에서 가장 이상했다. 거참.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설치와 세월호참사 전면재수사

청원에 목소리를 모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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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일연선사 승탑과 사리탑들

돌은 위대하다. 시간이 가고 역사가 흘러도 돌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변하지 않고 그자리를 지키는 것은 돌 뿐인 듯하다. 돌은 그 속에 아쉬움도 함께 지니고 있다. 나무가 썩고 타서 없어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부서진 돌을 보면 어찌할 수 없는 한숨을 쉬게 된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돌이 바람에 지쳐 그리고 비에 아파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의 한쪽 구석에서 울림이 퍼져 나온다. 변치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지극히 평범한 원리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한다. 특히 일연선사의 부스러진 탑비는 내 심사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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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선사의 탑비 바로 옆에는 그의 승탑이 서 있었다. 탑비와 달리 승탑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탑비였다. 건물은 타고 무너졌어도 그대로 변함없이 서 있는 승탑을 보면서 일연선사가 어떤 분이었을까 생각했다. 선사는 이름난 효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효자중에서 어머니를 잘 모셨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아버지를 잘 모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많지 않다. 아마도 아버지들은 빨리 돌아가시기 때문인 것 같다. 젊을때는 마구 살면서 부모님 속을 썩게 하다가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정신을 차리고 부모님을 돌아다 보게 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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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선사의 탑비는 고려시대의 다른 승탑과 비교해 보면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승탑 옆에 있는 간이 전시건물에는 승탑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탁본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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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의 대부분은 비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일연선사의 탑비를 보고 화려하다고 느낀 것은 인각사 뒷쪽 마당에 놓여 있는 무심한 모습의 사리탑때문이다. 인각사 뒤의 사리탑은 그 양식을 보건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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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초라하게 절의 뒷마당에 서 있는 쓸쓸한 사리탑을 보면서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답없는 물음을 나에게 던져 보았다.


노동•정치•사람 웹진 4월호

노동·정치·사람은 매달 노동, 정치, 사람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이야기 합니다. 노동·정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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