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선운사에 가시면 사리탑을 꼭 들러 보세요

선운사 가는 길 중간에 사리탑전이 있다. 생각없이 그냥 걷다 보면 사리탑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운사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곳이 사리탑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리탑으로 들어가는 길과 문이다. 길가에서 좀 안쪽 멀리 문이 하나 보인다. 뭔가 오래된 건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리탑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그 길은 그냥 보통길과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저 멀리 사리탑전의 나즈막한 대문은 마치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운사 주도로에서 사리탑까지의 길은 얼마 안되지만 주변의 나무로 조금 어둡게 보인다. 그리고 사리탑전은 훤하게 보인다. 피안의 세계라고 느끼는 것이 이유없는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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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전의 대문을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문은 전체적으로 둥근 느낌이다. 아마도 네모나지 않게 둥글게 문을 만들어 놓은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둥글게 난 문사이로 비석이 슬쩍 보인다.

문은 높지 않아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둥글게 만들어 놓은 문지방을 발을 들어 넘으면서 고개를 또 숙여야 한다. 스님들을 뵈러 가는데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사리탑들이 줄을 지어서 서 있다. 오래된 사리탑들은 다른 절의 그것보다 비교적 크기가 작다. 그리고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한세상 살았으면 그만이지 이름은 남기면 뭐하나 하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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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들로 비석이 있기도 하다. 어떤 사리탑은 바위위에 석탑처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석탑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는 조금 비위가 상하기도 했다. 원래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승탑이라는 형식의 탑이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따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형식이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모든 것은 인간의 무명이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선운사의 사리탑은 최고다. 사리탑에 들어가는 길과 사리탑앞에 서 있는 문이 최고다. 그 길과 문이 사리탑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그냥 그 길과 문을 보는 것 만으로도 최고다. 어떤 곳을 가더라도 이런 분위기를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이런 멋있는 곳을 그냥 지나간다.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곳을 보고 가시라고 하고 싶다. 수백년 동안 절을 지키면서 그렇게 주어진 인연을 살고 가신 스님들의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운사 온 본전은 다 뽑은 것과 진배 없다.

사리탑 볼때 마다 항상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없는 질문은 한번씩 떠올리시리라. 사리탑 주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인생은 그야말로 나그네 길이다. 한번 지나가는 삶이다. 나도 모르게 부여 받은 삶이다.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나에게 던져진 것이 삶이다. 그래서 삶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주체할 수 없는 부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소중한 선물이다. 사리탑을 볼때 마다 궁금하다. 여기 계신 스님들은 인생을 부담으로 살았을까 선물로 살았을까 ? 삶은 지금의 나에게 선물인가 부담인가 ?

사리탑을 여기에 만들어 놓은 이유는 그런 생각을 하고 절에 들어오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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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송창식의 선운사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

송창식의 선운사를 들으면서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떠올린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선운사를 부르는 송창식의 목소리에서 진달래 꽃을 즈려 밟고 가시는 님의 모습이 생각난 것은 무슨 연유일까 ? 아마도 둘 다 이별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은 학창시절때 한국인의 가장 대표적인 정서라고 하면서 배웠던 시다.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내가 송창식의 선운사를 들으면서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떠 올리게 된 것은 둘다 이별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둘 다 이별을 노래하지만 묘한 차이가 있다.

송창식의 이별이 아직 절망적이지 않은 상태라면 김소월의 이별은 절망적이다. 송창식은 그리하여 선운사의 뚝뚝 눈물 흘러내리듯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사랑하는 님이 마음을 돌렸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여운이 있기에 노래가 더 애잔한 것이다. 아무런 희망과 기대가 없으면 그 때는 암흑뿐이다.

그러나 김소월의 이별은 절망적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맞이했다. 아마도 님은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뭔지 모르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사연으로 떠나게 된 것이리라. 나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여지를 남겨 놓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내님은 나를 싫어해서 떠나가야 한다고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점에서 송창식의 선운사는 김소월의 이별과 조금 다른 듯 하다. 송창식의 님은 이제 사랑이 다해서 떠나는 것 같다. 그래서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은 나를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으면 매달리지 않고 잘 가라고 보내주겠다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다르다. 님은 내가 싫어서 그리고 역겨워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상황.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는 한편 진달래 꽃을 밟으면서 그 부서지는 모습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가라고 하는 것 아닐까 ? 나는 ‘사뿐히 즈려 밟고’라는 말에서 임을 떠나 보내는 여인의 마음을 절절히 느끼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신을 떠나 보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보여주기 위해서 꽃을 뿌려드리지만 그래도 살짝 밟아서 조금만 부서지게 하시라는 것이다. 꽃잎이 많이 찢어지면 떠나는 님의 마음이 너무 아플 것이니 내 마음이 조금만 아프다는 것을 아시고 가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이 시를 읽는 나를 더 슬프게 만들곤 했다. 여인 아픔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그야말로 절망의 끝이다. 그 절망의 끝에서도 사랑하는 님의 마음의 끝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에 이 시를 배울때 선생님께서 절망적인 사랑앞에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며 이것을 한이라고 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너무 절망적이고 한스러운 것은 나를 너무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같은 이별이지만 아직 돌아설 여지가 있는 선운사의 동백꽃이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송창식의 선운사를 듣는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사랑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다만 아직 절망을 맞이하지 못해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런 내마음을 님에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송창식의 이별이 더 슬픈지도 모르겠다. 김소월의 이별은 그 슬픔을 감내하고 있지만 송창식의 이별은 감내할 수 없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내할 수 없는 이별을 맞이 하는 사람은 절망과 한을 노래할 힘도 없다.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송창식의 이별은 절망을 맞이할 힘도 없는 상태를 그리는 듯 하다. 그래서 송창식의 노래가 더 슬프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사랑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처럼 길가에 뿌려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선운사 길을 걸었다.
선운사 가는 길 왼쪽에는 하천이 흐는다. 느리게 흐른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가듯이 물이 느리게 간다.
영변 약산의 진달래 꽃은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

김소월의 증손녀인 성악가 김상은의 노래다

https://youtu.be/XBK_VR-vz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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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선운사를 찾아가는 이유

고창 선운사로 향했다. 그것은 순전히 송창식 때문이었다. 갑자기 내 입에서 송창식의 ‘선운사’라는 노래가 튀어 나왔다. 나는 송창식이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시간이 흘러 젊은 사람들은 송창식의 이름도 잘 모르지만 그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우리의 전통음악을 접목시킨 사람이다. 송창식의 노래중에서 선운사를 제일 좋아한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은 이른 봄에 선운사를 갔나보다. 그러기에 이런 노래를 만들었겠지. 그의 노래를 들으면 바람부는 날 동백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는 여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마도 그녀는 그가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이기를 바랬던 모양이다. 그렇다. 그녀는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눈물을 흐리며 슬퍼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떠난다면 얼마나 모진 사람일까 ? 이미 봄은 지나 내년이나 되어야 기약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백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이 생각나서 선운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송창식의 선운사를 들으면 찾아간 선운사의 입구는 삭막했다. 절 입구에는 장어집이 가득하다. 선운사 초입에 있는 주진천은 풍천이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을 풍천이라 한다. 그래서 장어가 유명하다고 한다. 죽 늘어서 있는 장어집을 멀리하고 선운사로 들어갔다. 장어집들을 지나서 조금 가다 보니 선운사 입구다. 선운사 입구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각양 각색의 돌에 소나무 분재들로 꾸며져 있었다. 일견 화려해보이지만 좀 천박해 보이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절앞에 이렇게 야단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광객들에게 재미를 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하는가 보다.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은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도로 옆에 난 길을 맨발로 걸었다. 맨발은 언제나 상쾌한 느낌이 든다. 얼마를 걸었을까. 검은 돌이 보이고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비가 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 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아마도 선운사의 동백꽃이 유명한 것은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때문인 듯 하다. 미당은 서른 즈음에 선운사 근처의 주막에서 주모와 술을 한잔하면서 그녀의 구성진 육자배기를 들었다고 한다. 서로 이야기가 통해 미당은 운우의 정을 기대했으나 주모는 다음에 동백꽃이 피면 찾아 오라고 했다 한다. 한참을 지나 미당이 그 주막을 찾았더니 주모는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쓴 시가 선운사 동구다.
선운사 동구의 배경을 듣고 나면 선운사를 그냥 지나갈 수 없다.

미당의 행적때문에 그를 별로 좋아 하지는 않지만 그의 시는 좋아 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어렸을 때는 미당을 말당이라고 하면서도 그이 시를 읽었으니 말이다.

미당 이후 선운사 동백에 관한 이런 저런 시들이 있었다. 김용택과 신영미가 선운사의 동백을 노래했다. 동백은 그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 때문에 이별을 생각하게 하는 모양이다. 김용택과 신영미의 시는 이별의 아픔을 이야기 했다. 그것도 자신의 아픔이다.

그런 점에서 송창식의 선운사는 한 수 위다. 동백꽃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상대방이 헤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사람을 버리고 가면 너무나 잔인하다. 그러지 못할 사람이길 알기에 그에게 바람부는 날 동백꽃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시는 노래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 같다. 난 송창식의 선운사가 좋다. 정말로 너무 좋다.
선운사 미당의 시비옆에 송창식의 노래비가 하나 더 서 있었으면 좋겠다.

선운사를 찾아간 것은 여름이었다. 염소뿔도 녹아 버릴 것 같은 이번 여름에 난 선운사를 찾았다. 그래도 아련히 동백꽃앞에서 눈물 흘리는 여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없이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면 찾아가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일이다.

맨발에 송창식의 선운사를 웅얼거리며 선운사 들어가는 먼 길을 걸어 들어갔다. 선운사에 가려면 꼭 송창식의 선운사를 들으면서 가야 한다.

(https://youtu.be/e2rc8x0aC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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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횡설수설) 남북 정상회담을 보고 있는데 내머리 속에는 부동산 문제가 가득 차 있다.

요즘 부동산 문제가 시끄러운 모양이다.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마당이지만 주변사람들은 아파트 값 올라가는 것이 더 큰 관심인 듯하다. 아파트값이 단기간에 올라도 너무 올랐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보고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해법도 달라지고 처리하는 과정도 차이가 날 것이다.

정부의 대책을 보면 이번에 아파트값이 올라간 것을 소위 말하는 투기꾼의 소행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단톡방에서 아파트값 담합하는 글이 올라오면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고도 한다. 이런 식의 대책을 보면서 답답한 생각이 든다. 정부가 아파트값의 폭등이 투기꾼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투기꾼 잡아 넣고 처벌하면 된다. 그러면 지금의 아파트값이 떨어질까 ?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까 ? 지금 아파트값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가는 것은 과거에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인풋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여당과 야당은 이번 아파트 가격 사태의 원인 제공자를 서로 상대방이라고 떠넘기는 것 같다.
잘 안보던 TV에서 이번 아파트 값 대란은 이명박근혜 정부의 잘못된 금리 인하 및 부동산 부양정책 때문이라는 여당의 지적과 현정부의 무능력 때문이라는 야당의 주장이 서로 맞부딪치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둘다 틀리기도 하고 둘다 맞기도 하는 것 같다. 전정권에서 금리인하를 하고 부동산 부양을 해서 지금처럼 집값이 올랐다는 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세계적인 금융위기에서 금리인하를 하지 않고 그냥 버텼으면 우리나라는 아마 망했을지도 모른다. 자세하게 따져보지 않고 당시의 금리인하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부동산 부양을 했다. 나는 당시 정부에 있던 사람들에게 당시의 부동산 부양이 장기적으로 큰 문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어렵지만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기업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부양정책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만일 그때라도 집을 짓지 않았으면 집값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겪은 부동산 문제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돈을 무지하게 풀었고 그런 돈이 결국 부동산에 몰린 것이다. 돈이 몰리면 비싸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집값이 문제가 되는 곳은 서울이다. 세종시 같은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 지방에는 집값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아서 문제다.

박근혜 정부당시 신도시를 개발하고 집을 무지하게 많이 지었지만 서울의 집값을 잡는데 그리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서울 시내 특히 강남의 집값은 주변에서 많이 짓는 것과 무관하게 혼자서 올라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을 무조건 많이 짓는다고 제대로된 공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요구되는 곳에 요구되는 주택이 제대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서울은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강남지역에도 오래된 아파트와 주택지대가 많이 있다. 미리 대비를 했으면 강남지역에 많은 아파트를 지어서 공급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비싼 가격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런점에서 지금 겪고 있는 서울 부동산 가격의 비정상은 상당부분 서울시장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부임이래 강남지역의 재개발을 거의 원천 봉쇄하다시피했다. 벌써 오랫동안 강남지역에 제대로된 아파트가 공급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강남지역 아파트 값이 올라가지 않을 수 있을까 ?

강남지역 아파트를 공급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재개발 주택이나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불로소득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지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박원순 시장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상은 결국 그의 그런 정책이 자신의 지지계층에게 손해만 끼친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울 주택가격이 급등한 것은 박원순 시장이 용산과 여의도 개발을 들고 나오면서 부터였다. 강남지역의 재개발은 원천적으로 봉쇄하다가 갑자기 용산과 여의도 개발을 들고 나오면서 그동안 눌려 있는 힘이 터져 나왔다.

아마 박원순 시장은 용산과 여의도를 개발해서 강남의 수요를 돌리려고 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어머어마한 개발 프로젝트를 내세우는 것 보다 강남이외 지역에서 강남으로의 접근성을 제대로 보장하는 것이 훨씬 낫다. 강남집값이 왜 비싼가 ? 8학군 때문인가 ?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강남에 양질의 일자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사람이 많이 몰릴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용산이나 여의도 개발같은 프로젝트는 박원순의 지지세력에게 도움되는 정책이 아니다. 재벌 돈벌어 주는 일이다. 정말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런 프로젝보다 강남으로의 접근성을 개선하고 강남이외의 지역에도 좋은 일자리가 생길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같이 부동산에 대한 문외한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사고는 서울시가 쳐 놓고 뒷수습은 현정부가 하는 격인 듯 하다. 민주당은 같은 편이니 제대로 비판을 하지도 못하고 문제의 핵심을 따지지도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서울시가 그린벨트 해제에 부정적이라고 한다. 그럼 서울시는 어떻게 해서 집 값을 잡으려고 하나. 서울 집 값이 비정상적으로 오른 것이 현정부의 책임인가 아니면 서울시의 책임인가. 나는 서울시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닌가 ? 그런데 서울시는 자기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 처럼 하고 있다.

정부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무작정 세금이나 때리고 금리나 인상해서 두들겨 잡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잡힐 집 값이면 얼마나 좋을까 ? 집값 잡으려고 금리인상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

외교보다 중요한 것이 내치다. 내치의 핵심은 경제다. 경제가 흔들거린다. 지난번에 남북 정상회담 당시 현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무척 높았다. 지금은 정상회담하더라도 지지도는 그리 높이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국민들은 남북관계 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위기는 문제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는 듯 하다. 정부가 문제의 본질을 재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세계 경제가 잘못하면 위기에 빠질 지도 모른다. 지금 정부는 위기가 발생하면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괜히 불안하다. 부동산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잘되길 바란다. 너무 너무 중요한 일인데 우리 내부의 경제문제 때문에 그 중요성이 퇴색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결국 아무리 남북관계가 중요해도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야 한다. (2018.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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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천안 성불사, 속과 선의 경계에서

천안에는 가덕사라는 큰 절이 있다. 아마 대웅전의 크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갈 것이다. 거기에 동양최대의 철불도 있다.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철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네 삶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어 겨울 어느날 가덕사에 들렀다. 가다 보니 오른쪽에 성불사라는 절이 있다는 표식이 있었다.

홍난파의 가곡 성불사의 밤에 나오는 그 절은 이북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웬 성불사 ? 짝퉁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가덕사갔다 오는 길에 들렀다. 산속으로 한참을 올라갔다. 가파른 도로길에 눈이 살짝 덮혀 있었다. 조심조심해서 올라갔다. 여기저기 염화칼슘이 뿌려져 있었지만 혹시나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고개를 넘었더니 차 몇대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이렇게 험한 곳에 주차장이 없다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을 하며 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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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씨는 서서히 저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언덕 비탈길에 어떻게 절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하면서 돌아 보았다. 좁은 대웅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대웅전에 부처님이 없었다. 대웅전 벽이 유리창으로 되어있었고 그 너머 바위에 부처님 상이 세워져 있었다. 관촉사의 은진미륵이나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도 아니고 그냥 바위에 부처님 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기까지 했다. 이 절은 무슨 연유로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대웅전 부처님으로 모시고 있을까 ?
원래 태조산 성불사는 고려 태조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앞의 포스팅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지역에는 유난히 고려초기 왕명에 의해 세워진 절들이 많은 듯 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 깊은 산속 조그만 절을 무슨 연유로 세우라고 했을까 ? 바위에 세겨진 부처님 상이 궁금해서 대웅전 뒤로 나왔다. 적지 않은 바위에 여러 부처님들이 세겨져 있었다. 풍파를 겪어서인지 부처님의 모습이 점점 마모되고 있는 듯 했다. 정확하게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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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어두어지는 겨울저녁의 삭풍은 풍경을 때리고 있었다. 때로는 조급한 내마음 처럼 때로는 흘러가는 구름처럼 댕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웅전 오른쪽 옆에는 산신각이 있었다. 산속에 왔으니 산신께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라 산신각에 갔다. 마침 녹음해놓은 염불이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 불교는 잘 알지 못하지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내 마음 깊은 곳 마치 한겨울의 얼음같이 꽁꽁한 내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 했다. 산신각 벽에 앉아 한참을 기대에 있었다. 얼마나 있었는지 한기가 들었다.

대웅전 앞의 조그만 마당앞으로 내려왔다. 눈이 깨끗하게 치워저 있었다. 주변은 온통 하얀데 노란색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땅색이 예뻤다. 황토색이 이렇게 예쁘구나 하고 느끼면서 어깨를 펴고 산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저 멀리 천안시내의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아주 첩첩산중이었을텐데 이제는 산에서 아파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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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사에서 하루 저녁 머물고 싶었다. 겨울, 주변이 꽁꽁 얼어 붙은 어두운 성불사에서 바라보는 천안시내의 모습이 어떨까 궁금했다. 초저녁의 너울이 드리워지자 주변의 하얀 눈은 회색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푸른색을 머금은 듯한 회색으로 변하는 눈의 빛깔이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도리천과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낙원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추워졌지만 내려가기 싫었다.

홍난파의 가곡 성불사의 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성불사 깊은 밤에 고요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바로 그 곳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입안에 노래를 흥얼거리니 마치 내가 선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 밑에 사바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천안 태조산의 구석에 있는 성불사는 선과 속의 경계에 있는 듯 했다. 우리의 삶은 항상 경계에 있다. 나는 완전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실로 하찮은 것들일 경우가 많다. 태조산 성불사의 앞마당에 서서 천안시의 아파트를 내려다 보면서 나의 삶이 지금 이런 경계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싫은 발걸음을 옮겼다. (2018. 9.16)

https://youtu.be/VHhzvfdp9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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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논산의 절 집에서 느낀 국가와의 뭔지 알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많다. 사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아는 것이 얼마나 될까 ? 우리가 명확하게 아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서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 많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하는 이야기도 자세하게 들어가보면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오죽할까 ?

직장이 대전 근처에 있다보니 논산쪽으로 자주 답사를 다녔다. 이런 절 저런 절 다니다 보니 정확하게 이거라고 꼭찝어서 말할 수 없지만 대충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앞의 포스팅에서 그런 분위기를 혹시 느끼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림짐작했던 것은 논산의 절들이 모두 고려조 초기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하지만 논산의 절들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논산지역 절집을 다닐 때 필자를 가장 먼저 주목하게 만든 것은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대조사의 미륵이었다. 조성한 시기도 비슷한 듯 하고 만든 방식도 거의 유사했다. 관촉사의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의 지시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혹자들은 은진미륵의 얼굴이 너무커서 비례적 아름다움이 없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런 과장된 얼굴의 크기는 매우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건국당시 마지막으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백제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광종을 미륵이라고 믿도록 하기 위해 미를상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나칠 것인가 ? 그리하여 멀리서도 미륵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얼굴 부분을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조사의 미륵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대조사의 미륵상도 고려 광종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논산 주변의 절들은 유독히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개태사가 그러하고 논산 쌍계가사 그러하다. 그리고 개태사와 쌍계사는 마치 군대의 주둔지 같았다는 느낌마저도 있다. 개태사에 가면 볼 수 있는 1개 대대병력의 국을 끌일 수 있는 철확이 그러하고 쌍계사의 그 너른 앞마당이 그러하다. 승병들의 연병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아마 고려 태조와 이후의 광종때까지 고려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후백제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이쪽지방을 안정적으로 관리했어야 했을 것이다.

자연히 이쪽 지방의 절들은 고려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국가와 밀접한 관계는 거의 이지역 전체의 절들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모두 다 불탔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같이 불탔지만 논산지역의 절들은 국가와 어떤 방식으로든 긴밀한 관계를 지녔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관촉사에서 볼 수 있는 이승만 박사의 추모비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박정희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보면서 은진미륵에서 광종의 모습을 느끼는 것이 지나친 억측일까 ?

논산지역의 국가에 대한 관계는 조선중기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 같다. 논산지역은 노론의 출발지이지 중심지였다. 김집을 위시해서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중심무대가 황산벌 지역이다. 당시 노론에서는 송시열을 공자를 본따서 송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림의 중심이었던 영남에서는 지나가는 개를 시열이라고 한다고 했다. 당연히 노론은 국가와 유교적 질서가 매우 중요했다. 반면 사림의 영남에서는 이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일제시대에도 이어진다. 유독 이지역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많이 나서게 된다. 유관순 누나도 천안 사람이니 논산과 멀지 않은 동네 사람이다. 그리고 보면 구한말 풍운의 혁명가였던 김옥균이나 5.16의 주역이었던 김종필도 이동네 사람이다. 김옥균에 대해서는 일본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비난을 하지만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촉사 앞에 서 있는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이름을 새긴 자유수호순국지사비라는 것이 고려조 초기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그 어떤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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