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사 19-2 제5차 전역이후의 상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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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본 미국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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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년동안 전쟁기간 중 10만 여명의 부상 및 사망의 손실, 100억 달러의 군비를 소비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처음 1년간 보다 2배 이상

승리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으면서 미국 통치 집단내부의 모순을 더욱 첨예하게 만듬

맥아더 사임이후 미국 상원에서는 이 전쟁의 처리를 둘러싸고 50여일 넘는 논쟁을 지속

5차례의 전역이후 전쟁이 지구전으로 돌입되자, 미국 통치 집단은 인력과 물자가 장기간에 걸처 조선전쟁에서 소모될 수 밖에 없다는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유럽에 중점을 두는 세계전략에 심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파악하게 되었음

투르먼 미국 대통령은 주된 적은 소련임을 절대 잊지 않았고, 소련이 조선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전역량을 소비할 수 없다고 함

5월 16일 미국의 국가 안전보장회의는 협상을 통하여 적대행동 마무리할 것을 결정하였고, 휴전협상을 진행함으로써 “영광스런 정전”을 추구키로 준비(171)

6월 초, 미국정부는 유엔총장 ‘리이’를 내세워 휴전협상을 통해 적대행동 마무리를 원한다는 것을 밝힘

6월 중순, 중립국가 외교사절을 통해 중국정부의 의도를 탐색, 군사적으로는 전면적인 공격 대신 전략적 방어로 전환

중국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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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중앙과 모택동 주석은 전쟁이 지구전으로 될 것이며 적군이 아군에게 협상을 할 것임을 미리 예견

제3차 전역전에도 모택동 주석은 장기전에 대비해야 하며, 빨리 승리하려는 생각은 해로울 것이라고 명확하게 지적

제4차 전역기간 중에는
“아군은 반드시 장기작전을 준비해야 하며, 몇년의 시간에 걸쳐 몇십만명의 미군을 섬멸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어려움을 알게 하여야만 물러나게 되고 비로소 조선문제는 해결된다”(172, 1951년 3월 1일 모택동의 윤번작전 방침에 대한 지시)

제5차 전역이후 아군의 전쟁장기성에 대한 인식은 더욱 깊어갔으며, 이때 미국도 어쩔 수 없이 휴전협상을 제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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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19-1 제5차 전역이후의 상황 1

적군이 전장에 투입한 병력은 중국군이 참전할 때의 42만명에서 69만명으로 증가

중국군 병력은 투입초기의 30만명에서 77만여명으로

조선인민군은 11만명에서 34만명으로 증가, 중국과 조선의 군대는 112만명 선

적군과 아군의 병력대비는 1.6 : 1로 아군이우세

기술장비면에서는 불리한 상황

적은 경박격포 이상 화포 3,560문을 보유, 전차 1300여대, 비행기 1670여대 함정 270여척을 보유

중국군은 소량의 전차와 비행기, 화포를 지녔으며 성능은 비교 불가한 상황

제해권과 제공권은 완전하게 적의 수중

적은 병력이 부족하고 충분한 후방준비역량이 없었음. 전략예비는 일본에 주둔한 미군 2개사단과 국군 3개사단(실제 상황과 다름)

미국내에는 6개 정도의 사단이 남아 있었으며 한국으로 병력증강은 곤란,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도 추가적인 증파는 곤란

중조 인민군대는 현격하게 우세한 보병병력, 완벽한 방어선을 구축, 적은 전쟁초기처럼 아군을 손쉽게 격파하고 진격하기 어려운 상황,

아군 방어전선 어느 일부분을 돌파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상황

전쟁의 장기화는 이미 명확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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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18-28 제5차전역, 평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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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보급 문제

이번 전역에서 중국군의 후방보급 능력은 대규모 작전수요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남

전역 중 하루평균 소모량은 550톤에 달했으나 중국군 보급능력은 그 절반에 불과, 근근히 7-10일 작전이 가능

이로 인해 전역 1,2단계 모두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진공을 중지하게 됨

제2단계 작전시 현리에서 적을 섬멸한 후, 이틀간 보급을 기다리고 정지, 식량과 탄약이 공급되지 않아 전기를 상실했으며 부대가 기아를 참으면서 철수하게 만듬

중국군 부상병의 후송조건 역시 열악하여 철수시 8천여명의 부상병을 후송하지 못해 사기에 악영향을 줌

작전규모에 상응하는 후방보장이 없는 한, 참전병단이 현대적 기술장비를 지닌 적을 섬멸한다는 것은 불가능

승리를 위해서는 통일된 지휘하의 다양한 전문적 후방부대를 구비해야 하며, 현대화 장비를 갖춘 후근부대를 지녀야 함

현대적 전쟁에 적합한 군사과학 지식과 고도의 업무능력을 구비한 후근지휘기관이 반드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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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18-27 제5차 전역, 평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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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수작전의 어려움

현대전에서 대병단을 철수시키는 것은 복잡 세밀한 작업을 요구

특히 공세를 개시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하더라도 적의 유생역량에 충분한 손실을 주지 못한 상황에서 철수를 준비할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

적의 주력이 치명적 공격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는 즉시 역량을 집중하여 반격을 실시함

제5차 전역에서 적은 아군작전의 특징과 아군보급 능력의 약점을 이용하여 계획적인 반격작전을 실시

중국군과 접촉을 유지하면서 피로 소모케하는 것을 작전지도방침으로 삼음

전역 1,2단계에서 중국군이 공격을 정지했을때, 적은 곧장 반격을 실시

제2단계 작전종료시에는 전차와 차량화 보병으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 도로를 따라 반격함으로써 중국군의 배치를 분할하고 중국군을 수세에 빠지게 만듬

이번 작전의 교훈은 다음과 같음

  • 고도로 기계화된 적과 대항하면서 병력을 철수시키려 할때는 반드시 적의 반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함

  • 극히 적의 특수임무부대 반격에 주의해야 하며 이로써 안정되고 믿을 만하게 전쟁국면을 장악하고 주도권을 보호 유지할 수 있음

철수작전시 일시적으로 수세에 몰린 것은 전역지도면의 결함 때문임

  • 중국군은 적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반격을 개시하며 추격을 하는 것에 대한 계획이 없었음

특히 적이 특수임부부대를 선두로 반격과 추격하는 것에 대한 대책이 없었으며, 철수 이동계획이 주도면밀하지 못함

65군이 의정부 청평선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임무가 실현되지 못함

일부부대는 도로와 요지를 확고히 장악하지 못해 적의 특수 임무 부대가 아군의 방어종심에 뚫고 들어오게 허용함으로써 철수초기에 수세적 상황이 초래되면서 큰 손실을 당하게 됨

중국군은 고도의 현대화 기술장비를 갖춘 적과 대처하면서 철수할 때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방어를 준비실시해야 하며 주력과 후방부대의 전장이탈 엄호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

운동방어부대의 방어선은 반드시 제1, 제2선 심지어 3,4 선까지 계획되어야 하며, 요지와 교통요로를 통제해야 하고, 대공, 대전차 및 대공수 작전을 조직해야 하며, 부대간 접합부분에 잘 유념해야 하며, 진지에 의탁해 교대 철수를 상호 엄호해야 함

적극방어 작전사상으로 적시에 전기를 포착, 반격을 실시함으로써 주도권을 유지, 주력으로 하여금 축차적이고 질서있게 예정된 지역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함

철수중 특별히 주의할 것은 적이 전차로 증강된 특수임무부대를 간격으로 돌진시켜 아군의 배치를 분할하는 것
적에 의해 차단되면 지휘관은 부대를 확실하게 장악하여 빈틈없는 지휘를 질시하며, 각종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하고 , 곤경에 처했을때는 재치있게 적으로부터 탈출하거나 포위망을 돌파해야 함

12군 91연대의 경우

비교적 먼후방 삼거리 지역에서 격리당했으나, 간부들이 당황하지 않고 연대를 인솔 길을 돌아 포위망을 빠져나와 성공적으로 주력과 합류

27군의 경우

-후위로 철수하다가 적이 구만리에 공수낙하하고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자, 사령원은 적시에 결심을 내려 철수로를 바꾸어 성공적으로 철수

180사단의 경우

사단장이 전사단을 이끌어 포위망을 돌파하려사지 않고 잘못된 조치를 취함으로써 굉장한 손실을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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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18-26 제5차전역, 평가 3

스크린샷 2020-07-09 오후 10.03.53.jpg4. 전투장비와 지원의 중요성

중국군이 공군의 엄호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아군이 전략 혹은 전역적인 대우회를 실시하며 미군의 몇개 사단을 섬멸한다는 것은 매우 달성키 어려운 것이며, 1개사단, 심지어는 완전한 1개 연대조차 그 섬멸은 실제 불가능하였다”(163, 모택동 1951년 5월 26일, 팽덕회에게 보

낸 전보)

미군은 전부 기동화되어 있고 대규모의 포병 전차 및 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중국군이 주로 보병과 소량의 포병화력에 의지한채 야간작전을 실시함. 특히 야간작전을 실시함으로써 부대의 기동과 작전지속기간 및 후방보급에서 상당한 제한을 받음

이런 상황에서 중국군이 일대 우회포위를 실시하여 적의 작전 종심을 향해 깊숙히 공격 섬멸한다는 것은 불가능

공세를 개시해서 그날 저녁내에 전역우회 임수를 완수하여 적의 전략적 배치를 동요시키지 못하면 전술적인 분할 포위와 적 병력 섬멸이 불가능하게 되며, 그것이 다음 전역의 발전을 곤란하게 만듬

적은 우세한 장비와 조건으로 신속하게 포위부대를 구출하거나, 우세한 포병화력과 대량의 전차, 항공기의 엄호하에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음

유엔군은 주력을 후방으로 철수시키고 기동성을 지닌 일부 부대만으로 중국군과 접촉을 유지하다가 황혼무렵 공격을 개시하면 신속하게 철수, 그 철수거리는 20-30km 거리로 중국군의 일야 진격거리에 해당

다음날 새벽 중국군이 유엔군에 접근했을때, 유엔군 주력은 이미 새롭게 방어진지 편성을 완료

중국군은 적의 우세한 포병화력 상황에서 이미 편성된 적 진지를 주간에 공격해도 효 과가 없었음

전역 제1,2 단계중 적대대 연대 병력을 10여회에 걸쳐 포위하는데 성공했으나 섬멸하지 못함
이는 피아간의 장비차이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침

중국군 화력이 빈약하여 포위된 적을 그날 저녁에 섬멸할 수 없었고, 적은 다음날 주간에 공군, 포병, 전차의 엄호와 구출부대 지원을 받아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현상이 반복

전역 제2단계에서 중국군은 전역적 돌파구 형성에 성공하고, 현리지역의 적 대부분을 섬멸했으나, 적은 기계화장비로 돌파구의 첨단을 신속하게 폐쇄하고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중국군의 진출를 차단

제5차 전역중 발생한 이런 현상을 분석한 결과, 미국군에 대한 중국군의 적절한 작전방법은 전술적 소규모 포위와 적은 섬멸전이었음. 이를 통해 장비의 개선, 전술 및 기술 수준의 개선을 기다려 대규모 섬멸전을 실시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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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이 자랑하는 다부동 전투가 낙동강 방어선에서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는 증거

백선엽장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1사단의 전공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하는 증거가 있다. 작전상황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은 작전상황도이다.

몇년전에 한국전쟁 초기 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입수한 적이 있다. 영국의 문서고에서 확보했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출처가 정확하지 않다.

첫째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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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방송을 위한 자료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S.L. Andree 란 사람이 만들었다. 여기에서 당시 낙동강 전선의 상황을 전반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도가 있다.

8월 1일부터 8월 15일 까지의 상황은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군이 담당하던 지역은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이 주로 공격하던 안강기계와 포항전선이 가장 심각했다.미군이 담당하던 지역에서는 북한군 6사단이 공격하던 마산 진동 지역전투가 가장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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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당시 전정면으로 그냥 밀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 포위공격을 실시한 것이다. 이 당시 경부가도는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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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상황도는 8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군은 한국군이 담당하던 지역에서는 여전히 안강기계 방향으로 공격을 하는 한편, 영천지역에 공격을 집중하고 있다. 미군이 담당하던 서쪽지역에는 여전히 마산지역과 영산지역을 집중해서 공격했다. 북한군은 전력을 다해 마산지역을 뚫고 부산을 점령하고자 했다.

다부동 전투는 이시기에 벌여졌다. 위의 부분에 보이는 다부동 전투는 한국군 제1사단 좌측 연대가 뚫려서 북괴군 일부가 다부동까지 깊숙하게 들어온 상황이었다. 백선엽이 내가 돌격하겠으니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했다는 것은 이 상황이었다. 사실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알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 상황은 제1사단의 방어작전이 실패했던 것이다. 다부동을 뚫고 들어온 북괴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 상황도만 보아도 다부동 전투가 낙동강 전선의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군은 북한군 주력이 집중해서 내려온 안강 기계 방면과 영천지역이 가장 심각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백선엽은 마치 낙동강 방어선을 혼자 지킨 것 처럼 전사를 바꾸어 놓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싸운 사람중에서 구국의 영웅 아닌 사람 아무도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중에서 스스로 전쟁영웅이라고 하는 자는 파렴치하다. 진정한 전쟁영웅은 전쟁터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된 나라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이름없이 사라져간 무명용사를 최고의 영웅으로 치는 법이다.

전쟁터에서 살아 남아 스스로 영웅인체 하는 것은 산화한 전우를 보아서 할짓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파렴치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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