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양도세 부과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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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에 양도세를 먹인다는 한국과 정반대의 일본

얼마전에 가상화폐에 양도세를 매긴다는 뉴스가 있었다. 민주당의 박용진 의원(이후 호칭을 생략한다)이 가상화폐 거래인가제 도입과 양도세 부과를 골자로 하는 가상화폐 관련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한다.

박용진은 국회정무위원회 소속이다. 어떤 사람이기에 가상화폐에 대한 법률개정안을 발의했을까 해서 찾아보았다. 그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다. 1990년 성균관대 사회학과에 입학해서 총학생회장이되었고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가했으며 이번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경력을 보아하니 가상화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가상화폐에 대한 법률을 발의했을까? 아마도 금융위에서 박용진에게 의원발의를 요청한 듯하다. 그것이 오래된 우리의 입법관행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박용진은 사안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것 같다. 자신이 끼일데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가상화폐에 양도세를 부과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인지를 모르는 것 같다. 아마 금융위에서는 자신들이 옴팡 뒤집어 쓰지 않으려고 정부발의가 아닌 의원입법발의를 선택한 것이리라.

주식도 양도세를 못하는 판에 무슨 가상화폐에다 양도세를 부과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만일 가상화폐에 양도세를 부과한다면 한국의 가상화폐는 전부 외국으로 탈출해버릴 것아닌가? 법을 만들면 제대로 준수하거나 이를 감독할 수 있어야한다. 가상화폐에 양도세를 먹인다면 얼마나 감독하고 법을 지키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법을 잘 모르지만 지키기 어렵고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감시하기 어려운 법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은 듯 하다. 가상화폐 양도세 부과는 주식 양도세 부과보다 감독관청이 감독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잘못하면 가상화폐 투자자 전체를 범죄자로 만들수도 있다. 나같으면 한국 거래소에서 환전하지 않을 것이다. 양도세 부과를 회피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단적으로 일본에가서 쇼핑하면 비트코인으로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일본에서 비트코인 엔화로 환전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상화폐에 양도세를 부과하겠다고 하는 것은 현정부의 정책방향인듯하다. 정부의 정책방향이라기 보다는 금융행정관료들의 생각들일 것이다. 지금의 문재인정부는 가상화폐에 대한 정책방향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오히려 안철수의 정책팀에는 가상화폐 거래소 사장도 들어가 있었다.

일본은 비트코인을 거의 화폐수준으로 운용하려고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비트코인을 악마의 코인처럼 보는 것 같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외부의 변화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는 엄청난 차이이다.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은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결정을 했고 우리나라는 외부의 변화를 차단하는 결경을 했다. 개방과 폐쇄, 뭔가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일본의 결정은 일본을 경제적으로 한단계 더욱 발전시킬 가능성이 많다. 다양한 화폐를 가진다는 것은 국가 경제적으로도 훨씬 유리하다. 기축통화인 미국의 달러화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미 일본은 플라자 합의때문에 한번 혼난 경험도 있지 않은가? 일본이 비트코인을 화폐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냥 우습게 보면 안된다. 미국이 달러를 그리고 환율을 무기로 쓸수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경험을 한 우리는 왜 정반대의 결정을 할까? 우리도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렇다면 외환을 다양하게 확보해야 한다. 비트코인은 국가가 돈 한푼안들이고 외환을 다양하게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미국의 환율정책에 상당부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 왜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를 위한 정책을 하지 않고 미국을 위한 정책을 하려고 하는 걸까?

가상화폐를 화폐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가 전작권 전환이나 사드반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미국에 일정부분 대립각을 세울 것 처럼하는 민주당 정부가 핵심적인 내용에서는 미국의 이익을 가장 보호하는 정책을 하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은 겉으로만 친미를 하고 우리는 뼛속으로 친미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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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비빔밥과 동부묵을 아시나요?

오늘은 먹방 포스팅을 한번 하려고 합니다.
부여 비빔밥과 동부묵에 관한 내용은 언젠가 한번 올리려고 했는데 지금 올리는 것은 7월에 부여 연꽃 축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여를 주말에 가시면 마늘도 사시고 연꽃도 보시고 비빔밥과 동부묵도 드시고 오실 수 있습니다.

음 저는 부여시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ㅎㅎ
취미가 여행이라 이곳저곳… 역마살이 끼여서…

비빔밥하면 전주 비빕밥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전주만 비빕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마다 다 비빕밥이 있지요. 방식은 조금씩 다릅니다만 비빔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음식인 듯 합니다.

그리고 전주비빔밥의 원조는 전주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익산의 황동비빔밥이 전주 비빔밥의 원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빔밥에 신선한 육회가 올라가는 것은 황동비빔밥이 원조입니다.

바로 이집입니다.


전통음식점으로 지정되었군요


이렇게 나옵니다.
전주비빔밥은 조금 더 잘 꾸며져 있습니다. 그런데 맛은 역시 황동 비빔밥이 더 좋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간 나실때 한번 찾아 가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가 포스팅 하려는 음식은 부여의 비빔밥입니다.
부여의 마늘장을 가는 길에 비빔밥 집에 들렀습니다. 부여 시장 옆에 있더군요. 조신하게 구석에 있어서 찾는데 조금 어려웠습니다.



이름하여 소부리 비빔밥이라고 합니다.

나오는 메뉴는 간단합니다.

특징은 고기류가 없다는 점입니다. 하기야 꽁보리밥 먹으면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좀 그렇지요.

나물로 비벼 먹습니다.

매우 간단하지만 맛이 미묘합니다. 참기름을 조금 뿌려주는데 그 맛이 여느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안 깊숙히 묘한 풍미가 돕니다.

보기에 별것 아닌 것 같은 된장의 향내가 비빔밥과 잘 조화를 이룹니다

사실 이집에서 정말 특별한 음식은 묵입니다.
그것도 도토리묵이 아닌 콩묵입니다.
저는 콩으로 묵을 만드는지 몰랐습니다.
송편 빗을 때 쓰는 동부콩이라고 있다고 합니다. 왜 송편 속으로 쓰는 콩 말이지요.
그것으로 묵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짜잔–


바로 동부묵입니다.
동부묵 한접시가 비빕밥만큼 값이 나갑니다.
자꾸 동부묵으로 손이 갑니다.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양념과 잘 조화를 이루었군요.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다 먹었습니다.
기분좋은 포만감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것보다 좋은 것이 있으랴구요.

그냥 가정집을 조금 고쳐서 식당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한번 가보시면 만족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가시면 스티밋에서 추천 식당으로 올라왔다고 보여주시면 서비스가 좋을 수도 있을 겁니다.ㅎㅎ
저도 이번 주말에 어머니 모시고 다시 가보려고 합니다.

부여에 가셔서 마늘사고 비빔밥 드세요. 7월에는 연꽃 축제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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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을 보았습니다.

Screenshot_20170703-131937.jpg요일 저녁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 제목이 “박열”이더군요. 예전에 얼핏 들었던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고 보았습니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당시의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식민지 시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기개가 놀라 왔습니다. 약관 20세 초반의 나이에 그렇게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나이가 제 아들의 나이와 비슷하더군요. 항상 어리게만 보이는 제 아들의 나이에 목숨을 바치면서 제국주의의 중심에서 항거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 그냥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편한 소리를 한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당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이념과 이상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던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념과 이상을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사상과 이념은 모두 압도당했습니다. 아니 압도당했다기 보다는 실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효용성을 상실한 것이지요. 이념과 이상의 상실은 한때 운동권에서 주체사상을 대안으로 생각하게 끔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종북이니 친북이니 하는 것이 사실은 실패한 이상과 이념의 반영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방향을 상실한 지금의 세대보다 추구할 이상이 있었던 식민시대의 젊은이가 더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되겠지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 조금 찾아보니 금방 나오더군요. 박열은 45년 10월 미군에 의해 석방된 이후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이승만을 지지합니다. 일체의 압제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중에 이승만이 독재로 흘러간 것을 보면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6.25때 납북되었습니다. 1974년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북한같은 압제적 사회를 박열이 어떻게 살고 느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제식민시대보다 더한 압제적인 북한 사회를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은 어떻게 지났을까요? 그래도 70이 넘어서 돌아가셨으니 천수를 누린 셈이지요.

영화를 본 이후 저의 가슴 한편에 내내 긴 여운을 남긴 것은 가네코 후미코였습니다. 그녀는 왜 자살을 했을까요? 영화에서는 타살이라는 의혹을 소개했습니다. 당시에도 타살의혹이 있었다고 합니다. 죽음은 많은 소란과 말썽거리를 청소해 버립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삶에 진한 여운이 남는 것은 그녀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꾸라가 절정에서 지듯이 가네코 후미코도 삶의 절정에서 떠나 버렸습니다.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쓴 평전을 쓴 야마다 소지는 수감이후 박열의 행적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했다고 하는 군요. 박열이 수차례에 걸쳐 전향서를 썼다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전향서 자체가 조작이라거나 강요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조작은 이해가 되지만 강요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겠지요.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그깟 강요로 전향서를 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열의 전향의혹과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연결시키는 것은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과 어떤 의미상 연관을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열의 전향의혹과는 별개로 이미 가네코 후미코는 그 자신만으로 훌륭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념을 지키고 거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 만으로도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먹물줄 튀기듯이 일관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이란 특히 그렇지요.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삶에도 굴곡이 있기 마련입니다. 영웅이 오래살게되면 더이상 영웅이 아닙니다. 삶은 위대한 인간을 평범한 생활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해방이후에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읽으신 기억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7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직 기억을 하고 계신 이유는 뭘까요? 아마 그만큼 그녀의 인생이 강렬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불꽃처럼 살다간 여자.
그녀의 사진을 찾아 보았습니다. 강한 인상을 지녔더군요Screenshot_20170703-121932.jpg

영화를 보고 나서 박열보다 오히려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기억이 더 남았습니다. 조만간에 한번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한번 읽어 보려 합니다.

영화 잘만들었습니다.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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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혁명가의 운명2, 김옥균

어제의 김종필에 있어서 오늘은 김옥균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전편에서도 밝혔지만 김옥균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산의 어느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김옥균의 무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김옥균이란 이름을 들으면서 그 동안 그에 대해서 많이 잊어 버리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라디오 드라마로 구한말의 역사에 관한 방송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프로그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기억이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저만 느끼는 착각인가요.

길가의 안내현판에서 김옥균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아! 한말의 풍운아라는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보다도 그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아련한 동정이 먼저 저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죽음앞에서는 누구도 숙연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살아온 날 보다도 살아갈 날이 짧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김옥균의 무덤입니다. 아산의 어느 시골길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덤앞 기록에는 1914년에 일본에 있던 그의 무덤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지만 가묘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인과 합장했다고 하니 부인은 묻혀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쉽게 살지는 못했겠지요. 일설에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안 전체가 도륙이 났으니 처첩이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들어와 목이 잘리고 팔도에 효시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김옥균을 사모하던 게이샤가 그의 목을 씻어서 일본으로 가져가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은 갑신정변이후 딸과 함께 관노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김옥균의 무덤사진 전경입니다. 사실 이번에 김옥균을 소개하려고 한 것은 무덤앞이 석상 때문입니다.

어떻게 느끼시는 지요. 저는 먼저 석상들이 매우 어지럽게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어려운 세상를 살다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요? 산만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김옥균에 대해서 포스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산만한 석상 때문이었습니다. 산만한 석상이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석상 제일 앞부분에 승려의 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국타향에서 비명횡사한 김옥균의 명복을 비는 의미인 듯 합니다.

승려뒤에 염소인지 말인지 알 수 없는 짐승이 있었습니다. 스님 염불소리 듣고 염소나 말타고 극락을 가라고 하는 의미인가요?

무덤 아래쪽에는 김옥균의 사당이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사진만 찍었습니다.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그는 명성왕후를 비롯한 민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진짜 그의 개혁이 성공했었더라면 역사는 지금과 다를 수 있었습니다. 청나라 군대에게 진압이 되면서 개화파는 모두 쫓겨나서 일본으로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중국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만든다면서 일본에게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갑신정변은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하게됩니다.
요즘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때는 갑신정변이 실패했지만 근대국가를 지향한 혁명이라고 했었거든요. 그때는 박정희 시대이기 때문에 갑신정변에 대해 심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듯 합니다.

김옥균은 끝까지 일본에게 이용을 당하게 되지요. 김옥균의 죽음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기까지도 합니다.

김옥균의 무덤에서 구한말 암울한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던 혁명가를 떠올렸습니다. 결국 청나라에서 민씨 일척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핵무기가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일부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중국과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구한말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바로 김옥균이 저지른 과오이지요.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편들었다 저편들었다 하면 나중에는 남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한말에 우리는 중국편을 들었다, 러시아편에 섰다가, 미국편에 섰다가, 결국에는 일본에게 먹혔습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당했습니다.

그런점에서 김종필이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편에 설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그리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한고향에서 시대를 달리하는 두혁명가가 나왔다는 것도 참 드문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종필 총재에게 김옥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앞으로 그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사람은 성공했고 한사람은 실패했습니다. 한사람은 비명횡사했고 한사람은 천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커다란 물줄기는 모든 것을 삼키고 지나갑니다. 역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

아마 앞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역사적 평가도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확신하던 것들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입니다.

구한말에 청나라 편에 설것이냐 일본의 편에 설 것이냐를 고민한 것 처럼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편에 설 것이냐 중국편에 설것이냐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구한말에 민씨 일족은 청나라 편에 서서 개화를 거부하다가 나라가 망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드문제로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역사는 항상 현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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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kr-newbie 홍보대사 및 보안관님께, 일부계정의 표절과 표절에 대한 보팅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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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불공정 담합과 보팅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고 입장정리도 되기전에 표절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https://steemit.com/kr/@think-big/kr-clean

https://steemit.com/kr/@marginshort/5knypz

정도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clayop 님이 다운보팅에 대한 분명한 의사를 표명하고 다운보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lifewordmission님은 업보팅을 했습니다. 이것은 @clayop님에 대한 도전을 넘어 kr 코뮤니티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시 다운보팅을 했습니다.

우선 제가 위임한 스팀파워로 활동하시는 홍보대사님과 보안관님께서는 위의 두개 포스팅에 언급된 계정에 보팅을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문제를 일으킨 @godknows에 업보팅한 계정에 대한 upvoting도 금지하겠습니다.

보안관과 함께 스팀클리너를 운영하는 방안도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기존에 스팀파워를 위임하신 분들께서도 위임해주신 분들께 분명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스팀파워 위임 공동합의서를 작성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kr코뮤니티가 분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스티밋 동지들께서도 각자 현명한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적당히 중재하고 타협해서 넘어갈 수준은 지난듯 합니다. 다들 현명한 중지를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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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혁명가의 운명, 김종필과 김옥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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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혁명가의 운명, 김옥균과 김종필

오늘은 한국의 대표적인 두 혁명가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 드려보자 합니다. 제가 오늘 이런 포스팅을 하는 것도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무슨 일이 있어서 김종필 전총리이자 자민련 총재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한시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공세리 성댱에 다녀왔습니다. 성당 방문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데 우연히 김옥균 묘소를 보게 되었습니다. 구한말의 마지막 혁명가인 김옥균과 한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꾼 김종필을 큰 시간적 차이없이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닌 듯 하여 언제가 이들 둘을 비교해서 한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이 두사람은 둘다 공주지역 사람들입니다. 한 고향사람들이지요. 시대를 달리하지만 한지역에서 두사람의 혁명가가 나온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먼저 김종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김종필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5.16 군사정변을 기획한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역사의 죄인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김종필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5.16을 기획했고 공화당을 창당했습니다. 한일관계 정상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었습니다.

육군 중령으로 당시 총리를 만나서 육군을 쇄신하라고 요구하였고 그 결과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군복을 벗고 물러났습니다. 그 일로 김종필도 군복을 벗었습니다.

5.16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하얀 와이셔츠에 카빈소총을 들고 이리저리 지휘를 하던 김종필을 보고 남미의 혁명가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박정희 시대에는 영원한 2인자로 머물렀습니다. 아마 박정희가 김종필을 좀더 일찍 후계자로 지명하고 권력을 물려주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일본의 턱밑까지 쫓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김종필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일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90을 훌쩍 넘은 김종필은 신당동의 한 주택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집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일층 거실에서 김종필 총리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른쪽 팔과 다리는 잘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은 잘하시더군요.

김종필의 여유와 유머는 당대를 풍미했습니다.
그는 저를 보고 “김가여?”하고 물어보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한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한가해보이지도 않는데 한가여”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웃었습니다. 저도 웃었습니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김종필 !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김종필을 만난 것을 무척 의미있게 생각합니다. 김종필 총리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아서 많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중간에 비서가 그만 하시라고 하니까 끝까지 더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더군요.

앉아 있는 것 조차 힘이 부친 상태에서 끝까지 품위와 위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김종필 총리를 보고 안스러운 마음과 대단하다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김종필은 혁명가입니다. 혁명가는 고금을 막론하고 제대로 천수를 누리기 어려운 법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일본의 메이지 혁명을 한번 보시지요.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서도 마친가지 입니다.
역사의 방향을 바꾼 많은 혁명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든지 아니면 암살을 당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사람들은 역사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영웅으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개인의 삶은 비참하게 끝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Hegel이 영웅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이라고 했을까요.

김종필은 헤겔의 예언이 들어 맞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본인들은 김종필을 보고 메이지유신의 3걸 중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닮았다고 했다고 합니다. 샤스마번의 하급 무사로서 하루한끼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던 오쿠보는 메이지 유신의 과정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완성시킵니다. 일본이라는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친구이자 혁명의 동지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사지에 내몰기도 하지요.

일본인들이 김종필을 비명횡사한 오쿠보와 비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김종필이 혁명을 완성시키더라도 제명대로 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는 것을 내심 보여준것이 아닐까요?

김종필 총리와의 인터뷰에서는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막내동생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막내동생은 6.25때 9사단의 포병중위였다고 합니다. 철수하는 와중에 용문산 일에대서 전투에 참가했는데 포신이 시뻘개지도록 포를 쏘았다고 합니다. 한참을 쏘다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고 포가 하늘을 향해 있더라고 합니다. 포가 위를 향하면 적이 매우 가깝다는 뜻이지요. 더이상 상급부대와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김종필의 막내동생은 포의 공이(방아쇠 같은 것입니다)를 빼서 짊어지고 후퇴를 했다고 합니다. 포의 공이를 빼면 적이 우리 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걸어걸어 대구로 와서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있던 김종필을 찾아왔더랍니다. 동생은 부상을 당해있었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동생은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김종필 총리는 동생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노혁명가의 눈물…
저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묘를 만들어 놓고 그옆에 동생을 묻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내동생 옆에 묻힐거야” 하더군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김종필 총리를 만나겠다고 과일을 사가지고 기다리고 계시던군요.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김종필은 혁명가이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까?
뭐니뭐니해도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었습니다.
당대의 어떤 사람도 그의 독서량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혁명가로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열정도 가지고 있었지만 음악과 미술 그리고 서예에 이르기까지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니까 제일먼저 감귤 농사를 장려하고 도입한 사람도 김종필입니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원성을 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욕심도 많지 않았던 듯합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던 것이지요. 아마 그런 것이 독서와 예술적 심성과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종필 총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제자신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과 그의 삶. 가히 족탈불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종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가까이서 보면서 역사와 혁명가가 어떤 관계인가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은 동생이야기를 자꾸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분이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더 건강하시길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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