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혁명가의 운명, 김종필과 김옥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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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혁명가의 운명, 김옥균과 김종필

오늘은 한국의 대표적인 두 혁명가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 드려보자 합니다. 제가 오늘 이런 포스팅을 하는 것도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무슨 일이 있어서 김종필 전총리이자 자민련 총재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한시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공세리 성댱에 다녀왔습니다. 성당 방문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데 우연히 김옥균 묘소를 보게 되었습니다. 구한말의 마지막 혁명가인 김옥균과 한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꾼 김종필을 큰 시간적 차이없이 대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닌 듯 하여 언제가 이들 둘을 비교해서 한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이 두사람은 둘다 공주지역 사람들입니다. 한 고향사람들이지요. 시대를 달리하지만 한지역에서 두사람의 혁명가가 나온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먼저 김종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김종필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5.16 군사정변을 기획한 사람입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역사의 죄인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김종필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5.16을 기획했고 공화당을 창당했습니다. 한일관계 정상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었습니다.

육군 중령으로 당시 총리를 만나서 육군을 쇄신하라고 요구하였고 그 결과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군복을 벗고 물러났습니다. 그 일로 김종필도 군복을 벗었습니다.

5.16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하얀 와이셔츠에 카빈소총을 들고 이리저리 지휘를 하던 김종필을 보고 남미의 혁명가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박정희 시대에는 영원한 2인자로 머물렀습니다. 아마 박정희가 김종필을 좀더 일찍 후계자로 지명하고 권력을 물려주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일본의 턱밑까지 쫓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김종필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일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90을 훌쩍 넘은 김종필은 신당동의 한 주택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집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일층 거실에서 김종필 총리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른쪽 팔과 다리는 잘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은 잘하시더군요.

김종필의 여유와 유머는 당대를 풍미했습니다.
그는 저를 보고 “김가여?”하고 물어보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한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한가해보이지도 않는데 한가여”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웃었습니다. 저도 웃었습니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김종필 !

저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김종필을 만난 것을 무척 의미있게 생각합니다. 김종필 총리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아서 많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중간에 비서가 그만 하시라고 하니까 끝까지 더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더군요.

앉아 있는 것 조차 힘이 부친 상태에서 끝까지 품위와 위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김종필 총리를 보고 안스러운 마음과 대단하다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김종필은 혁명가입니다. 혁명가는 고금을 막론하고 제대로 천수를 누리기 어려운 법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일본의 메이지 혁명을 한번 보시지요.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서도 마친가지 입니다.
역사의 방향을 바꾼 많은 혁명가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든지 아니면 암살을 당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사람들은 역사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영웅으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개인의 삶은 비참하게 끝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Hegel이 영웅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이라고 했을까요.

김종필은 헤겔의 예언이 들어 맞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본인들은 김종필을 보고 메이지유신의 3걸 중 하나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닮았다고 했다고 합니다. 샤스마번의 하급 무사로서 하루한끼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던 오쿠보는 메이지 유신의 과정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완성시킵니다. 일본이라는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친구이자 혁명의 동지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사지에 내몰기도 하지요.

일본인들이 김종필을 비명횡사한 오쿠보와 비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김종필이 혁명을 완성시키더라도 제명대로 살기 어려울지 모르겠다는 것을 내심 보여준것이 아닐까요?

김종필 총리와의 인터뷰에서는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막내동생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막내동생은 6.25때 9사단의 포병중위였다고 합니다. 철수하는 와중에 용문산 일에대서 전투에 참가했는데 포신이 시뻘개지도록 포를 쏘았다고 합니다. 한참을 쏘다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고 포가 하늘을 향해 있더라고 합니다. 포가 위를 향하면 적이 매우 가깝다는 뜻이지요. 더이상 상급부대와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김종필의 막내동생은 포의 공이(방아쇠 같은 것입니다)를 빼서 짊어지고 후퇴를 했다고 합니다. 포의 공이를 빼면 적이 우리 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걸어걸어 대구로 와서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있던 김종필을 찾아왔더랍니다. 동생은 부상을 당해있었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동생은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김종필 총리는 동생이야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노혁명가의 눈물…
저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묘를 만들어 놓고 그옆에 동생을 묻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내동생 옆에 묻힐거야” 하더군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김종필 총리를 만나겠다고 과일을 사가지고 기다리고 계시던군요.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김종필은 혁명가이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까?
뭐니뭐니해도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었습니다.
당대의 어떤 사람도 그의 독서량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혁명가로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열정도 가지고 있었지만 음악과 미술 그리고 서예에 이르기까지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니까 제일먼저 감귤 농사를 장려하고 도입한 사람도 김종필입니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원성을 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욕심도 많지 않았던 듯합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던 것이지요. 아마 그런 것이 독서와 예술적 심성과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종필 총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제자신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과 그의 삶. 가히 족탈불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종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가까이서 보면서 역사와 혁명가가 어떤 관계인가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은 동생이야기를 자꾸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분이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더 건강하시길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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