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혁명가의 운명2, 김옥균

어제의 김종필에 있어서 오늘은 김옥균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전편에서도 밝혔지만 김옥균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산의 어느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김옥균의 무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김옥균이란 이름을 들으면서 그 동안 그에 대해서 많이 잊어 버리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라디오 드라마로 구한말의 역사에 관한 방송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프로그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기억이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저만 느끼는 착각인가요.

길가의 안내현판에서 김옥균이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아! 한말의 풍운아라는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보다도 그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아련한 동정이 먼저 저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죽음앞에서는 누구도 숙연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살아온 날 보다도 살아갈 날이 짧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김옥균의 무덤입니다. 아산의 어느 시골길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무덤앞 기록에는 1914년에 일본에 있던 그의 무덤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지만 가묘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인과 합장했다고 하니 부인은 묻혀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쉽게 살지는 못했겠지요. 일설에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안 전체가 도륙이 났으니 처첩이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들어와 목이 잘리고 팔도에 효시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김옥균을 사모하던 게이샤가 그의 목을 씻어서 일본으로 가져가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은 갑신정변이후 딸과 함께 관노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김옥균의 무덤사진 전경입니다. 사실 이번에 김옥균을 소개하려고 한 것은 무덤앞이 석상 때문입니다.

어떻게 느끼시는 지요. 저는 먼저 석상들이 매우 어지럽게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어려운 세상를 살다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요? 산만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제가 김옥균에 대해서 포스팅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산만한 석상 때문이었습니다. 산만한 석상이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석상 제일 앞부분에 승려의 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국타향에서 비명횡사한 김옥균의 명복을 비는 의미인 듯 합니다.

승려뒤에 염소인지 말인지 알 수 없는 짐승이 있었습니다. 스님 염불소리 듣고 염소나 말타고 극락을 가라고 하는 의미인가요?

무덤 아래쪽에는 김옥균의 사당이 있었습니다.

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사진만 찍었습니다.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그는 명성왕후를 비롯한 민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근대국가를 만들려고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진짜 그의 개혁이 성공했었더라면 역사는 지금과 다를 수 있었습니다. 청나라 군대에게 진압이 되면서 개화파는 모두 쫓겨나서 일본으로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중국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만든다면서 일본에게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갑신정변은 일본의 배신으로 실패하게됩니다.
요즘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때는 갑신정변이 실패했지만 근대국가를 지향한 혁명이라고 했었거든요. 그때는 박정희 시대이기 때문에 갑신정변에 대해 심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듯 합니다.

김옥균은 끝까지 일본에게 이용을 당하게 되지요. 김옥균의 죽음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기까지도 합니다.

김옥균의 무덤에서 구한말 암울한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던 혁명가를 떠올렸습니다. 결국 청나라에서 민씨 일척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말들을 합니다. 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힘이 없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핵무기가 없지 가오가 없습니까?”

일부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중국과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구한말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바로 김옥균이 저지른 과오이지요.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이편들었다 저편들었다 하면 나중에는 남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한말에 우리는 중국편을 들었다, 러시아편에 섰다가, 미국편에 섰다가, 결국에는 일본에게 먹혔습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당했습니다.

그런점에서 김종필이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편에 설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그리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한고향에서 시대를 달리하는 두혁명가가 나왔다는 것도 참 드문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종필 총재에게 김옥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앞으로 그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사람은 성공했고 한사람은 실패했습니다. 한사람은 비명횡사했고 한사람은 천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커다란 물줄기는 모든 것을 삼키고 지나갑니다. 역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

아마 앞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역사적 평가도 시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확신하던 것들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입니다.

구한말에 청나라 편에 설것이냐 일본의 편에 설 것이냐를 고민한 것 처럼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편에 설 것이냐 중국편에 설것이냐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구한말에 민씨 일족은 청나라 편에 서서 개화를 거부하다가 나라가 망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드문제로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역사는 항상 현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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