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두륜산 대둔사 침계루 앞에서

어떤 절이든지 찾아가서 가만히 살펴보면 최고의 자리가 있는 법이다. 그 최고의 자리라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듯 하다. 사람들마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방식이 다 다른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시를 공부하면서 그 시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적에 소설을 써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기 때문에 문학이란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했었다. 학교 국어시간에 시를 읽으면서 그 시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아예 지정해서 외워야 되는 것을 보고 질겁을 했었다. 한참이 지나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서 문학은 그렇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의 생각을 찾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 말이다.

요즘 여행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온다. 이름있고 유명한 사람들이 쓴 책들도 많다. 그런 책들을 보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하다. 그럴때 마다 사람들이 마치 고등학교 국어시간과 같이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닐까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느낌과 감상은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를 것이다. 저명한 사람의 느낌이라서 의미가 있고 잘모르는 사람이라서 그 느낌과 감상이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느낌과 감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투영한 것이다. 그래서 모두 가치가 있다. 오히려 가치없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 모두가 같은 느낌과 생각을 가진다면 얼마나 답답한 세상이 될 것인가 ?

오늘 대흥사에 관한 글을 쓰지만 혹시 이글을 보고 대흥사 가시는 분들도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 보시고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느낌이 그저 참고만 되길 바랄 뿐이다. 나중에 여행을 갔다 오시고 나면 각자 느낀 것을 서로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웅전을 찾은 것은 제일 마지막이다. 대흥사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웅전은 처음에 들르거나 아니면 제일 마지막에 찾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대웅전이 있는 북원은 두륜산이 내려오는 구릉의 낮은 쪽에 자리잡고 있다. 보통 대웅전은 그 절에서 가장 높이나 가장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대흥사의 대웅전은 한쪽 구석의 낮은 쪽에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북원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 절이 커지면서 남원이 좀더 높은 쪽의 넓은 곳에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고 자유로운 절의 구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절의 구성을 보면 조금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며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웅전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냇가의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가물었던 여름이라서 냇가에 흐르는 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냇가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돌들을 보니 비가 많이 올때는 물길이 무척 사나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천위의 돌다리를 건너면 문이 있고 그 틈을 통해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앞에 2층의 누각이 있다. 이름이 침계루다. 계곡을 베고 있는 누각이란 뜻이다. 하필이면 왜 침계루일까 ?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하천이 물과 바위소리로 시끄러우니 이힘을 내려 누르기 위해 이름을 그렇게 지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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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 앞에서면 침계루 문사이로 대웅전의 아래 모습이 보인다. 왜 침계루를 만들었을까 ? 냇가의 이편에서 바로 대웅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피안의 세계를 함부로 보여 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침계루를 세워 돌다리를 건너기 전까지는 대웅전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 것 같았다. 돌다리를 건너는 의식을 거치고 침계루의 문을 들어서야만 비로소 대웅전이 드러난다. 다른 절과 달리 대웅전 앞에는 탑이 없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있는 응진당의 옆의 한구석에 3층석탑이 서있다. 그 모습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슷하다. 2층의 탑신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의 작품인 듯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불국사 석가탑의 3층 석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웅전 앞의 공간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탑을 세우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돌다리앞에 서서 침계루 사이로 대웅전을 보는 것이 대흥사 구경의 백미였던 것 같다. 사실 대웅전은 이제까지 찾아서 구경했던 다른 곳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화마를 겪어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잘 만들었지만 조선후기 양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쌍계사에 비하면 오히려 소박한 모습이다.

다시 대흥사를 찾는다면 돌다리 앞에서 다시 침계루를 바라볼 것 같다. 아마도 비가 많이 와서 물소리가 마치 천지를 뒤흔드는 것과 같은 날이 제격일 것이다. 그러면 마치 피안의 세계 저쪽에 감추어진 진리의 세계를 갈구하는 구도사의 마음과 같이 돌다리 앞에 서 있을수 있을 것이다.

송광사의 돌다리와 하천 그리고 하천을 바라보던 정자가 생각났다. 전체적인 구도는 송광사의 그것과 비슷했다. 송광사의 돌다리와 하천이 화려하여 극락의 모습을 바로 보여주고 있었다면 대흥사는 단아하지만 훨씬 엄격하며 절실한 느낌을 주었다. 내려오는 길에 절로 침계루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처절한 마음을 품고 이 다리를 넘었을 구도자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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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대흥사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까닭

대흥사는 참 이상한 절이다. 여러 절을 다녔지만 어떤 연유로 대흥사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해남에 있는 매우 큰 절이니 등재될만 하다고 해서 그랬을까 ? 대흥사를 이리 저리 다니면서 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는지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려고 애를 썼다. 대흥사가 매우 큰 절인 것을 사실이지만 건축물은 다른 절에 비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규모는 컸지만 훌륭한 전각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절집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대흥사는 전각들이 좋게 말하면 자유롭게 그렇지 않으면 마음대로 서 있는 형태다. 대웅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뉘어있다. 실제 뭔가 감상할 만한 곳은 대웅전이 있는 북원이다. 남원은 초의선사가 팠다는 연못인 무염지가 있고 천불전과 같은 전각들이 있다. 다들 돌아보아도 불국사나 법주사 혹은 통도사 같은 전각은 보이지 않는다.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우리네 절중에서 그정도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 어디 대흥사만 있겠는가. 나의 부족한 소견으로는 대흥사가 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흥사의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은 대부분 역사성 때문이지 그 아름다움 때문을 아닐 것이다. 대흥사는 대흥사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난 대웅전이 있던 북원에서 그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점은 다음 기회에 다시 쓰기로 하겠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세계문화인류유산이라는 점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에 떠오는 것이 대흥사와 역사적 현실과의 연관성이었다.

처음 들어 오는 길부터 절이 현실문제와 많은 관계를 맺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초입의 여관에서 광주민주화 운동에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 말랐다는 것이 생각의 단초였다.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킨 본거지가 대흥사였다. 대흥사는 예부터 현실문제에 무관하게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절집중에서 유일하게 조정에서 내린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다. 비록 요즘은 별로 사람들이 찾지 않아 땅바닥이 푸석푸석하게 되었지만 서산대사는 당시의 시대적 현실과 승려의 본분에서 시대적 현실을 택했던 사람이다. 불살생을 제1의 계율로 지키는 승려가 왜군과 맞서서 칼과 창을 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저 그것을 자랑스런 전통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지금 북한이 처들어 온다고 천주교 신부님과 개신교 목사님들이 총을 들고 전투에 나간다는 것을.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들은 그냥 그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절대로 총을 들고 그들과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총을 들어 북한군에게 쏘는 순간 더 이상 신부거나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6.25 전쟁 당시 신부님과 목사님이 총들고 북한군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는 듯 하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라고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스님들이 노역에 동원되어 성을 쌓는 것 하고 전쟁에 나가서 죽이고 죽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아마도 그것은 조선의 불교가 중생구제의 염을 세운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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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동국선원이라고 쓰여진 건물앞에 까지 다다랐다. 스님들이 선공부 하는 곳이란다. 스님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발걸음을 돌리라는 팻말이 씌여 있었다. 마침 연못에서 청소하시던 스님을 보았다. 스님께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시험 공부하던 곳이 있다고 구경하라고 하신다. 들어갈 수 없는 곳 아니냐고 하니 지금은 안거 기간이 아니라 들어가도 된다며 직접 데리고 들어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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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방이다. 이 조그만 방에서 청년 문재인은 몇년을 앉아서 시험공부를 했다. 벽면에는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는 플랭카드가 붙어 있었다. 청년 문재인이 정치인이 되어 대통령까지 된 것도 대흥사의 현실문제에 대한 역사기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산대사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이 문재인 대통령으로 하여금 북한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을 걷게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그렇다면 대승의 견지에서 대흥사는 유네스코에 등재될 자격과 가치를 지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하면서 천천히 대웅전이 있는 북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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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여름을 떠나 보내며

오늘 저녁 친구를 만났다. 각자 하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중년의 두 남자가 마치 데이트 하듯이 3시간 넘게 이야기를 했다. 열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항상 즐겁다. 그 나이에도 아직 가슴 속에는 활화산이 타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버스를 타러 나왔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자니 한기가 느껴진다. 벌써 가을이 한참 서울 시내를 감싸고 있는 듯 했다. 불현듯 그 더웠던 여름이 생각났다.

서재에 들어가자 마자 그 더웠던 날에 찍었던 사진을 찾아 보았다. 여름 사진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난 여름을 제대로 보내는 의식을 지내지 못한 셈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길어졌다. 지나가는 계절 하나하나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름을 보내는 의식이라고 하지만 뭔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저 여름에 찍었던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그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그 기억이라는 것도 영원하지 않다. 얼마지나지 않아 이번 여름이 어떠했는지는 잊어버릴 것이다. 살아 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 버리고 또 잃어 버려 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름을 그냥 잊어 버릴 수 없는 것은 내가 은퇴하고 처음 맞이했던 여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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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은퇴하고 여름에 예전 직원들과 같이 저녁식사하고 차한잔 하면서 찍었던 사진이다. 그날 뒷산 봉오리를 넘어가는 여름햇살은 강력했다. 그 강력하고 찬란한 여름의 햇살을 머금은 채소며 나무들은 짙은 녹음을 나에게 자랑했다. 마치 나에게 자신들은 지금이 한창이라고 자랑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 찬란한 빛의 반사가 부러웠다. 여름과 녹음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들은 소중하다. 삶이란 결국 시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소중한 시간을 내가 어떻게 보냈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무엇을 추억할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육체의 힘을 빼앗아 가지만 나중에는 정신도 무력화시킨다. 그래도 인간이 시간에게 끝까지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추억하는 힘이다. 물론 그 추억도 사라질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위대한 정신의 힘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남아 있는 시간동안 끝임없이 추억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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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대흥사 앞마당 정원의 의미

보통 우리나라의 전통 건물에는 정원이 뒤에 있다. 그래서 후원이라고 한다. 창덕궁도 마찬가지다. 궁전의 정원도 궁궐뒤에 있다. 보통 양반님네들 가옥도 그렇다. 정원이 뒤에 있다.
건물의 앞에도 넓은 장소가 있다. 대부분 그런 곳은 공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궁궐의 앞에 있는 넓은 광장은 문무백관들이 조회를 하는 장소다. 보통 가옥에서도 마당은 사랑채 앞에 있다. 마당은 통상 넓게 울타리쳐져 있다.

대흥사는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통상적인 건축구성과 많이 다른 듯 하다. 정원이 앞에 있다.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대흥사처럼 절 바로 앞에 연못과 쉼터가 있는 곳은 별로 보지 못했다. 대흥사의 연못은 초의선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선불교를 이끈 초의선사가 있었기에 대흥사가 지금과 같은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초의선사는 무슨 생각으로 연못을 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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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형태는 마음 심자를 본떴다고 한다. 대흥사를 갔을 때는 무척 더운 여름이었다. 스님 한 분이 연못가에서 땀을 흘리며 녹조류들을 걷어 내고 계셨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인지 그리 크지 않은 연못에 녹조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스님은 덥지만 수양한다는 마음으로 청소를 하고 있다고 하셨다. 일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이들어서 고생을 면하려면 노후 준비를 잘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스님들도 늙어서 스스로를 보살피려면 돈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세상이 모두 변했는데 절간이라고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누구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강고한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법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너무 부족하면 삶의 자유를 상실한다. 물론 너무 많아도 삶을 구속당한다. 스님은 청소를 마치고 어디론가 가셨다. 나는 연못 옆의 느티나무 끝자락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500년된 보호수라고 한다. 마치 어떤 동네 어귀에 있는 정자나무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절앞에 이렇게 큰 나무가 있는 경우도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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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에 자락에 앉아 주변을 천천히 들러 보았다. 나무아래에 앉아 있자니 모든 것이 여유로워졌다.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서늘한 바람이 내 목주위를 흩고 지나갔다. 그렇다. 삶이 뭐 별거 있겠는가? 이렇게 더운날 정자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고 서늘한 바람을 느끼면 그것이 낙원이 아닐까 ?

초의선사께서 느티나무 아래에 연못을 판 이유를 알 듯도 했다. 무슨 대단한 각오나 기원을 가지고 절을 찾기보다는, 그냥 느티나무 아래 앉아 연못을 보면서 기분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하는 뜻이 아닐까 ? 세상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으니 내 마음하나 편안하게 만들면 세상이 편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절앞의 정원이 대흥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우리가 마음을 두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곳에 진리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뭔지는 모르지만 초의선사의 선에 관한 생각이 바로 느티나무와 연못에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더운 여름의 한때를 느릿느릿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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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대흥사 표충사를 거닐며

여관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바로 오른편에 사리탑전이 자리하고 있다. 통상 올라오는 길 한켠에 서 있는 것과 달리 대흥사 사리탑전은 절 입구 바로 앞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다. 절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리탑전을 그냥 모른척 지나칠 수 없게 되다. 이 절에 오는 사람이라면 꼭 사리탑전을 들리라는 무언의 부탁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대흥사의 사라탑전은 다른 절과 다르다. 보통의 절에 있는 사리탑전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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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누구인지를 굳이 밝히지 않는 것이 선가를 이어오는 정신일진데 대흥사 사리탑전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하나 하나 밝혀 놓았다. 그 사리탑전의 중심에는 서산대사의 승탑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서산대사가 대흥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정작 서산대사의 승탑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으나 이후 세워진 승탑은 서산대사의 사리탑보다 훨씬 화려한 듯 했다.

이미 사리탑전에서 서산대사의 흔적을 느꼈던 지라 절에 들어가자 마자 바로 표충사로 들어갔다. 대흥사가 유네스코에 등록된 이유도 바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싸웠던 서산대사의 역사적 의미 때문이기도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충사가 대흥사의 존재적 의미 한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찾아 오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아서 인지 땅이 푸석푸석해서 밟는대로 쑥쑥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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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서 제일로 치는 규율이 불살생이다. 그런 승려들이 칼과 창을 들고 일어나 왜군과 생명을 다투는 전투에 참가했으니 스님들로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 서산대사는 왜란이 끝난이후 조정에서 내려주는 벼슬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승병으로 싸웠던 스님들도 불살생의 계를 어겼다며 스스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그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모두 빠지고 말았다. 임진왜란당시 스님들이 약 3만명 이상 전사했다고 한다. 그정도 피해라면 조선의 절집들이 거의 모두 문들 닫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교과서에서 스님들이 호국불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왜군과 싸웠다며 애국심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승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불살생의 계를 깨고 전투에 참가했던 스님들이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했을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하지 않은 듯 하다.

이미 해는 하늘 높이 올라가서 머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대흥사에 가시면 표충사를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란다. 별로 사람들이 찾지 않는 표충사에 가보시기를 바란다. 그 당시 승려들이 왜 칼과 창을 들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숭유억불의 유교사회에서 승려들이 목숨보다 중요한 계를 버리고 칼과 창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 그냥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애국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라를 침탈당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지키기는 것이 불가의 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럴 듯 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스님들이 임진왜란 때처럼 나서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 ?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200년도 안되어 조선은 열감의 침입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조선은 일제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임진왜란때 그렇게 싸웠던 스님들이 일제의 침략에는 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을까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여름 뜨거웠던 표충사를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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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대흥사 가는길

(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대흥사 가는길

대흥사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 한번 가보아야지 하다가 마음먹고 찾은 것이 한달 전이었다. 한달 전만 해도 무지하게 더웠다. 인간이 간사한 것인지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시원한 것 보다 따뜻한 것을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절을 찾을 때 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절가는 길이 절구경의 7할은 되는 것 같다. 대흥사도 그랬다. 짙은 녹음이 우거진 길을 차를 타고 한참을 갔다. 녹음이 우거진 이길이 아름다워 유네스코에 지정되었나 보다 혼자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차를 운전했다. 창문을 열어 바람을 느껴보았다. 예전에 러시아에서 공부를 할 때 같이 있던 고려인 친구가 모스크바 주변의 그 넓은 숲길을 지나면서 창문을 열고 ‘공기가 너무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그는 그리고서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공기를 마치 얇은 비단 만져보는 흉내를 내곤 했다. 나도 그의 흉내를 내면서 공기를 만져 보았다. 한여름의 가뭄이 심해서 인지 눅눅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더위는 짙은 녹음을 그의 발아래 복종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짙은 녹음은 무척 단단한 갑옷인가 보다.

얼마간 가다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서 대흥사 가는 길을 그리 멀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너무 고즈넉했다. 평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절을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길을 오롯이 혼자서만 즐길 수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를 맨발로 걸었다. 대지의 시원한 느낌이 발바닥을 통해 내 안으로 전해 오는 듯 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카페가 눈앞에 나타났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고 쇼윈도우에는 천연염색한 천들이 매달려 있었다. 천연염색한 옷감으로 만든 개량한복이 멋들어지게 걸려 있었다. 천연염색한 하늘하늘한 천들의 색깔은 아침의 햇빛에 더욱 투명하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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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예쁜 카페를 여기에 세울 생각을 했을까 ? 가는 길을 멈추고 자리에 앉아 카페와 천연염색한 천들의 색깔들이 성하의 아침 햇볕에 부서지고 있는 구경을 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조금 더 가다보니 여관이 있다. 절 입구 바로 밑이었다. 여관이 예사롭지가 않다. 문이 열려 있기에 그냥 들어가 보았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묵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옛날 집이었다. 어릴적 아버지 따라서 여관에서 며칠 잔적이 있었다. 그때 여관에서는 아침에 밥을 주었다. 아버지와 겸상을 했다. 잘 먹어보지 못하던 계란말이가 나왔다. 맛있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계란말이를 좋아한다. 식당가서 맛이 없어도 계란말이만 주면 군말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여행을 하면서 지냈던 여관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때도 방앞의 마루에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방앞의 조그만 마루는 나에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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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주인이 그제서야 나를 알아 본 모양이다. 내가 여관안을 돌아 다녀도 아무말 하지 않는다. 옆으로 가보니 조그만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연잎이 펼쳐져 있었다. 두꺼비 조각상이 물을 내뿜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연못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대흥사에 오면 여기서 하루 묵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절에 올라가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았다. 여관 앞에 광주민주화 운동때 이 곳에서 밥을 해서 날랐다는 기록이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세상일에 무관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대흥사 가는 길은 이제까지의 절가는 길중에서 나를 가장 차분하게 만든 듯 하다. 사람없는 평일날 저녁에 올라서 카페에서 차한잔 하고 여관에서 하루를 보낸다음 절에 가면 좋을 듯 하다. 이런 차분한 느낌을 한 번 더 경험하고 싶다. 말없이 같이 걸어도 될 어릴적 친구하고 라면 더 좋을 듯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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