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과 지조

조동탁의 지조론을 읽었으나 나도 나이가 많은 편이다. 요즘 친구들은 조지훈이 누군지하는 경우도 있다. 조지훈은 일제를 거쳐 서슬퍼런 군사독재시대에 살면서도 꼿꼿했던 선비였다. 아마도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가 아니었을까? 간혹 TV에 나오는 엉터리 지식장사꾼들을 보며 동탁을 그리워하는 것은 내가 아마도 늙은 세대이기 때문이리라.

조지훈은 지조를 선비의 도라고 말했다.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조를 지키고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지조를 받치는 법이다. 선비에게 지조가 없다면 더 이상 선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에 선비같은 지식인이 없는 것같아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든다. 세상이 혼탁할 때 일갈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5공때는 김준엽 선생이 있었다. 나의 광복군시절이라는 책은 그 제목만으로 권위를 자랑했다.

권위는 계급과 직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적에 의해 드러나고 힘을 갖는다는 것을 느낀 것은 순전히 조동탁의 지조론과김준엽의 나의 광복군 시절 때문이었다.

갑자기 조지훈과 김준엽을 떠올리게된 것은 다름아닌 한사람의 군인 때문이었다. 그 이름하여 김장수 장군이다. 그 사람은 참여정부시절 국방부 장관으로 북한을 방문했을때 김정일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꽂꽂했다고 해서 꽂꽂 장수로 유명해졌다. 적장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그 당시 우리의 각료들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가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김정일을 노무현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김장수를 더 주목하게 된것은 그가 노무현이 대통령을 마치고 낙향할때 그를 배웅한 거의 유일한 각료였기 때문이다. 난 무릎을 탁쳤다. 야 우리 나라도 군인같은 군인이 있구나. 그러면서 난 조지훈의 지조론을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 나라라 제대로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며칠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김장수는 한나라 당으로 입당하고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민주당에서는 김장수를 잃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장수는 민주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택했다. 당시 신문에서는 이명박이 김장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한나라당으로 오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참여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권력은 한나라당으로 넘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난 김장수의 한나라당 선택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난 성향으로 보자면 살짝 중도 우파에 가깝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그런데 김장수는 어떤일이 있더라도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의리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앞서 인간적으로 김장수는 한나라당을 선택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언론 어디서도 김장수의 의리와 지조를 질타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세상에는 당파적 이익을 넘어서는 가치도 있는 법이다. 김장수는 이익을 위해 가치를 버렸다.

김장수를 보면서 한번 더 놀란것은 그가 박근혜의 심복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난 절대로 김장수 같은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한번 사용하면 그것으로 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 김장수에 대한 나의 평가이다. 그런데 김장수는 박근혜에 붙어서 국가안보실장을 하고 중국대사까지 하고 있다. 그는 이익이 된다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늘 반복하는 기회주의자이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김장수를 신뢰한다는 것이다. 지금 최순실이니 머니 해서 온통 시끄러운 것은 대통령이 사람을 잘못쓰기 때문이다.

김장수같은 사람을 발탁하면 우리나라의 군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군인들은 누구든지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 붙어 먹으려고 할 것이다. 이익에 눈이먼 군인들은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치려 하지 않는다. 군인들은 가치를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통수권자가 기회주의자인 군인출신을 중용하는 것은 모든 군인들에게 기회주의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나 똑 같다. 어떤 군인도 대통령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익을 따질 것이다.

어떤 사회나 국가이든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군인들에게는 정말 지조가 중요하다. 최근 문재인의 북한인권선언 찬반문제로 김장수의 이름이 잠시 오르내렸다. 그가 어떤 말을 할까 궁금했다. 그런데 별이야기 없이 지나갔다. 아마 김장수는 가슴을 쓰려내렸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그런데 김장수는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다 평가한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된다. 아마 김장수는 간신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간신의 후예라는 낙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후손들이 그런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인생 똑바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조를 잃어버린 군인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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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전쟁 그리고 평화


구글에서 퍼옴

인터넷을 보다가 문재인이 말하는 전쟁과 평화를 보고 놀랐다.
http://m.kmib.co.kr/view.asp?arcid=0011000442&code=61111511&cp=nv#cb

문재인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자신이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평화를 선택한다고 이야기 했다.

난 국민일보에서 본 그의 트위터를 보고 잠시 무엇인가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평화.
전쟁보다는 평화가 좋은 줄 모르는 바보는 없다.
그런데 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문제는 전쟁을 선택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평화를 선택했기 때문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오히려 전쟁을 불사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억제라고 한다. 억제는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있다. 그렇지 않으면 동맹을 맺는다. 친구가되어 싸우지 말자는 거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 동맹도 쉽게 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로 서로의 속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처한 현실도 다르다. 평화는 바로 이런 차이로 인해 붕괴된다. 생각해보라.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의 절반이 싸워서 헤어진다는 것을. 평화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수준이 낮지 않은가 생각한다. 적어도 국가지도자가 그런 유치한 수준의 전쟁과 평화관을 가지고 있으면 어찌되겠는가? 그의 말대로라면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군대도 필요없다. 최악의 평화를 택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에서도 평화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이야기 한바 았다. 문재인이 말하는 평화는 다름아닌 노예의 평화나 마찬가지이다. 만일 북한이 전쟁을 하겠다고 달려들면 문재인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가 할 것이라고는 항복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이 노예의 평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평화가 친일파 이완용의 평화와 무슨 차이가 있나?

필자는 이완용의 평화는 어찌어찌하다보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이해라도 해 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재인의 평화는 우리가 싸울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포기한다는 점에서 친일파의 평화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재인의 평화는 저항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질이 나쁘다. 당연히 저항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친일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친일파의 평화를 질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들이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항은 가장 위대한 인간정신이다. 압제에 저항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상징한다.

지금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 정부의 비민주적인 처사에 저항해야 한다. 패거리 정치에 저항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에 갖힌 정치인들의 정치에 저항해야 한다. 재벌들의 사악한 이익추구에 저항해야 한다.

남한에 저항한다고 해서 북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한의 권력자들이 작은 악이라면 북한의 권력자들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악이다. 아마 후세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들어가면서 악마의 화신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 저항하고 비판해야하고 반대해야 하는 것은 북한이다. 또한 현정부는 북한을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를 살펴보고 반성을 해야 한다. 비판과 저항이 진정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비판하는자가 그리고 저항하는 자가 도덕적 우위를 가져야 한다. 현재 정부는 북한을 비판할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북한문제를 이용하고 있을 뿐인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다루다가 옆으로 새버렸다.
문재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생각은 국가를 이끌려는 지도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의 생각은 조악하기 이를데 없다. 대학교 1학년 이념 동아리에서나 할 이야기를 국민을 상대로 한다는 것은 그가 국민들을 우습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쟁과 평화는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문제이다. 내가 평화를 선택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관리를 잘 해야 평화가 지속된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누려온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울 것이다. 내 자식이 노예의 굴종을 당하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내 처자식이 내가 누려온 자유보다 조금 이라도 더 낳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알고 일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난 어떠한 압제도 거부한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체제내의 억압도 거부한다. 그리고 단언컨데 목숨을 걸고 북한 노예제 군주국의 압제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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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의미와 역할


구글에서 그림을 퍼왔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이상하다.
지식인들이 현실의 문제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 침묵하는 지식인은 더 이상 지식인이라고 불릴수 없다.

최근 신문을 보면서 참담한 생각이 든다.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때문이다. 정권에 반대한다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뿌리는 것은 독재때나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생겼는데 모두 입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부러워했다. 자신의 체제를 부정하는 의견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했다. 미국의 참된 가치는 그런 것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그런 가치를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인과 보통사람들이 모두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을 현실속에서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서슬퍼랬던 매카시 숙청이후에도 좌파 지식인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난 노암 촘스키라는 미국의 언어학자를 보면서 미국의 힘을 생각했다. 언어학자이지만 좌파적 관점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평생 비판해왔다. 난 그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하지 않는 것도 많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은 높이 산다. 지식인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더 이상 지식인이 없는 것 같다. 먼저 자기가 지향하고 소망하는 이상을 분명하게 밝히는 자들도 없다. 재벌에 빌붙어서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하거나 권력에 빌붙어서 어디 한자리 하고자 하는 어용들만 난무할 뿐이다.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하는 자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자기의 정체성을 이념적 진영으로 포장하고 반대만하면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위장한다. 지식인은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생각이다. 어떠한 이념적 집단의 영향으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이야기해야 한다.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IMF 사태이후 우리 한국사회는 무수한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 어려움과 위기의 근본은 무엇일까? 난 그것을 한국의 지식인사회의 무력함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의 지식인들이 던져 놓은 좌표를 향해 가게된다. 그런데 지금의 지식인들은 아무런 등대도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냥 망망대해에 던져진 것이다.
아무런 방향타도 되지 못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각성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언론의 자유를 영어로 보면 다름아닌 freedom of speech이다. 즉 말하는 자유이다. 말하는 자유는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지식인의 의무이다. 자신의 기본사명을 무시하는 지식인들이 판치는 한 한국 사회의 미래는 요원하다.

나는 야당과 박원순 시장편에 들었다고 블랙리스트를 뿌린 청와대에 비분강개한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 아들의 병역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양승오박사인가 하는 그 사람을 나는 존중한다. 지식인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고 규명해야 한다. 지식인이 스스로 내가 어떤 진영의 논리를 옹호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지식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비 정치인일 뿐이다.

지식인의 주장은 사실에 바탕해야 한다. 사실에 바탕하지 않는 주장과 이론은 사이비인 것이다. 난 지식인들을 좌파니 우파니 진영을 나누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좌파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현실문제에 침묵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걱정된다. 전통적으로 좌파진영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들이 없다.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립다.

이제 지식인들은 검열이라는 족쇄도 당연하게 여기는 싸구려가 되어 버렸다.

청와대의 검열리스트에 침묵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기분이 처량해져서 두서 없이 한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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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대한 단상

한반도에서 평화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미 625전쟁을 한번 겪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당위성을 넘어 절박한 민족적 요구이다. 그리하여 평화라는 말은 상당한 위력을 갖는다. 그러나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우리가 평화를 이야기 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일까? 대화를 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일까? 베세티우스의 말처럼 전쟁에 대비하면 평화가 오는 것일까?

사실 나는 평화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무엇이 평화를 가능케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수없이 많은 평화연구소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필자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평화에 대한 많은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난 대화를 통해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거나 전쟁준비를 잘하면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모두들 문제가 있었다.

평화가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하는 주장들을 그게 구분해 보면 대화로 평화를 이룩하자는 주장과 군사력으로 평화를 유지하자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난 두가지 모두 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중에 한가지 방법을 택하라고 한다면 난 힘에 의한 평화를 택할 것 같다.

왜냐하면 역사상 대화를 통한 평화라는 것이 제대로 현실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고 더 큰 피해를 초래했고 더 큰 전쟁을 초래했다.
내가 북한에 특사를 보내서 평화를 달성하자고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경멸하는 것은 단지 대화라는 방식으로는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때문이다. 2차세계대전도 영국의 유화정책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전에 내가 북한과 대화를 통한 평화의 구걸이 일제 당시 노예의 평화보다 나쁘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독자 여러분들이 일제시대에 일경의 통치하에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김정은의 독재치하에 살아갈 것인가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난 김정은의 독재보다는 일제를 택할 것 같다. 삶은 한번이고 그런 기회를 김정은의 독재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내가 북한과 대화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노예의 평화를 구한 친일파보다 낮게 평가한 이유이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북한과 대화하자는 것이 북한 김정은 치하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냐? 라고 아니라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그렇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 역사속에서 평화는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의지와 의지가 대결하면서 서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때. 이것을 우리는 억제라고 한다.
두번째는 일방이 상대방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이다. 어느 일방이 상대방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전쟁을 통해서이다. 전쟁이 끝나고 승리하면 혹은 항복을 하면 결과적으로 평화가 온다. 일제시대에 우리는 전쟁도 안하고 무조건 항복을 한것이다. 어느 일방이 저항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상대방이 시키는대로 할때도 평화가 온다. 지금 북한과 대화를 구하는 사람들은 두번째의 경우에 가깝다. 따라서 아무 대책없이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자는 이들을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한반도에서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조건은 대화를 통해서도 아니고 군사적 대비책을 통해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아마도 평화를 위한 준비와 전쟁에 대비한 준비가 매우 적절하게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가 이룩할 수 있는 평화의 역량범위를 넘어가고 있다.
시간은 지나가고 우리는 무력하다.

결국 한반도에서의 평화도 어느 일방이 상대방에게 저항의지를 완전하게 상실하고 복종하거나 아니면 팽팽한 균형을 이루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중간이 가능할까? 대화론자들이 생각하는 방안의 대부분도 결과적으로는 어느 일방이 상대방에게 굴복하게 되는 경우의 수로 귀결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말해보라 어뗜 경우의 수인지?
세상은 복잡한 수학이 아니다. 매우 단순한 산술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너무 단순해서 다른 방책을 구하기 어려운 것.

그러나 능력있는 전략가는 그 가운데서 묘책을 찾아내야 하는 법이다. 이 시대의 제갈량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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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을 보고



시내 산책을 하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보았다. 밀정. 개봉할 때 부터 보려했는데 늦어 버렸다. 토요일 오후의 서울시내 한복판은 한산하다. 을지로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햇살이 고즈넉하기까지하다.
혼자 영화보기는 오랫만이다. 예전엔 혼자 영화 보는 것이 쑥스럽더니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나이가 든 건가? 송강호는 정말 연기 잘 한다. 우리나라 배우들 수준이 매우 높은 것 같다. 미국 배우들보다 잘하는 것 같다.

영화 포스터에 쓰인 말 적은 늘 우리 안에 있었다 가 아프게 다가 왔다. 난 적은 늘 내안에 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생은 그 선택으로 평가 받는다. 그것이 친일이든 머든. 인간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 가능성을 실재로 만드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런데 올바른 선택을 방해하는 것도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할까? 아마도 욕심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것이다. 한참전에 devil’ s advocate 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났다. 인권변호사가 욕망에 취해 자신의 삶을 망치는 내용이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 않을까.
왜 그들은 친일파로 살았을까. 그리고 일제 경찰의 정보원이 되었을까? 간도특설대라는 것이 그런 간첩을 만드는 것이었고 한다. 백선엽이 생각났다. 그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리고 자신을 위해 무슨 변명을 할까?

전번 포스팅에 친일문제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죽은 친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친일을 타도 해야할 것이다. 난 이완용보다 백선엽이 더 나쁜 인간이라 생각한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 먹었더도 노예의 평화라는 변명이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선엽에게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역사는 더 나쁜 악이 승리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인간들이여 악마가 되어라. 그러면 너희는 창궐할 것이다. 밀정의 하시모토에게서 백선엽을 보았다. 하시모토는 죽었어도 백은 살아 있다.

송강호는 번민하는 인간이다. 어찌해서 친일부역자가 되어 개 노릇을 했으나 인간적 번민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물론 현실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영화를 통해 그런 삶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이 좋았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나 할까? 영화의 카타르시스는 현실에서는 전혀 일어날 수 없을 것을 가능하게 만들 때 비로소 완성된다. 현실에서 송강호같이 될 확률은 희박하다. 인간은 여간해서는 만들어진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밀정을 보며 오늘날 우리의 삶을 반추해본다. 그들은 왜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을까? 그들은 일제의 앞잡이가 아니라 자기안에 있는 욕망의 앞잡이가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욕망의 한가운데서 흐느적거리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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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평화와 남북관계



우리 모두 평화를 바랍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전쟁이란 살과 뼈가 여기 저기 흩어져 나가고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 많이 발생했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 고통받는 것은 군인보다는 힘이 약한 여자들 어린이들 그리고 노인들입니다. 나라가 힘을 읽거나 전쟁이 나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젊은 여자들은 짐승같은 욕망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자신을 팔아야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습니다. 학살의 주요대상은 주로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요즘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어린아이가 죽음을 기다리며 쓴 글과 사진들이 뉴스가 되기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어린아이들의 목숨은 그야말로 파리목숨보다 못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는 전쟁보다 낫습니다. 그런가요?

한일합방을 노예의 평화라고 평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원저자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망할 나라이니 한일합방을 스스로 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한 것이 한일합방이라는 것이지요. 일제는 우리의 명성황후도 시해했습니다. 아마도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들은 정말로 대한제국의 국민들을 위해 그리고 황실을 위해 을사보호조약을 맺었는지 모릅니다. 이미 망해서 무너져가는 황실. 그대로 버티다가는 황실전체가 일본 사무라이 낭인들에 의해 뼈도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구한말의 의병들은 모두 힘을 잃은 상황. 대한제국을 도와줄 나라는 하나도 없는 국제환경. 이런 상황에서 무모하게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고 버티다가는 황실은 고사하고 지도층들로 도륙이 났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봉기하더라도 최신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평화를 지켰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노예의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을사오적이 한일합방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알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황실은 씨앗을 말렸을 것이고 소위 지도층 양반들은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살아남는 것이 최상의 목표일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살아남아서 우리의 역량을 보존하고 그래서 일본이 물러나면 다시 나라를 만드는 것. 을사오적들이 그정도까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최대한 양보해서 그정도 했다고 이해해줄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의 평화를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요.

친일에도 등급이 있고 정도가 있지요. 친일이라고 해서 모두 도매급으로 넘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친일에도 두얼굴이 있습니다. 어쩔수없는 상황에서 일본에 붙어 먹고 있지만 동포를 괴롭히지않으면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력한 사람. 또 하나는 동포를 괴롭히면서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추구한 사람. 비슷한 것 같지만 무척 다릅니다. 친일도 친일 나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친일파를 모두 뭉뚱그려서 그냥 욕만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살아서 있었다는 것 그 자체가 친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일제의 통치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일제시대에 살고 있었으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말한 첫번째 친일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책임과 비난이 분명하게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잘못을 구분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기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을 하나의 잣대로 나누어서 재단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잘 살펴보면 엄격한 기준의 잣대를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노예의 평화를 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의지에 일방적으로 굴복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이 노예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지상주의자들은 상황과 여건에 상관없이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칩니다. 그러나 그것도 올바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북한핵문제가 발생하면서 남북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말들이 오갔습니다. 평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북한에게 특사라도 보내어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들의 생각방식이 구한말의 을사오적과 얼마나 유사한지 보고 놀랐습니다. 무조건적 평화는 굴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화지상주의자들이 을사오적보다 못한 것은 지금은 주변상황과 여건이 무조건적 평화를 감수할 정도로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협박에 대응할 수단과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적인 여건도 우리가 유리합니다. 그런데 북한과 대화를 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릴것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을사오적이 추구했던 노예의 평화보다 한층 더 나쁜 평화입니다.

물론 전쟁불사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전쟁으로도 해결하기 어렵고 우리가 평화를 만들어가자고 해도 평화가 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서 평화가 온다면 얼마나 쉬운일입니까? 문제는 우리는 북한이요구하는 평화의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평화로울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평화는 을사오적의 택한 노예의 평화보다 훨씬 나쁜 평화입니다.

우리가 처한 안보상황의 문제에 낭만적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무실에서 수요일 오후 나근함을 즐기다가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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