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평화와 남북관계



우리 모두 평화를 바랍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전쟁이란 살과 뼈가 여기 저기 흩어져 나가고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 많이 발생했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 고통받는 것은 군인보다는 힘이 약한 여자들 어린이들 그리고 노인들입니다. 나라가 힘을 읽거나 전쟁이 나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젊은 여자들은 짐승같은 욕망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자신을 팔아야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습니다. 학살의 주요대상은 주로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요즘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어린아이가 죽음을 기다리며 쓴 글과 사진들이 뉴스가 되기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어린아이들의 목숨은 그야말로 파리목숨보다 못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는 전쟁보다 낫습니다. 그런가요?

한일합방을 노예의 평화라고 평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원저자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망할 나라이니 한일합방을 스스로 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다라고 생각한 것이 한일합방이라는 것이지요. 일제는 우리의 명성황후도 시해했습니다. 아마도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들은 정말로 대한제국의 국민들을 위해 그리고 황실을 위해 을사보호조약을 맺었는지 모릅니다. 이미 망해서 무너져가는 황실. 그대로 버티다가는 황실전체가 일본 사무라이 낭인들에 의해 뼈도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구한말의 의병들은 모두 힘을 잃은 상황. 대한제국을 도와줄 나라는 하나도 없는 국제환경. 이런 상황에서 무모하게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고 버티다가는 황실은 고사하고 지도층들로 도륙이 났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봉기하더라도 최신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평화를 지켰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노예의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을사오적이 한일합방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알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황실은 씨앗을 말렸을 것이고 소위 지도층 양반들은 제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살아남는 것이 최상의 목표일수도 있었던 것이지요. 살아남아서 우리의 역량을 보존하고 그래서 일본이 물러나면 다시 나라를 만드는 것. 을사오적들이 그정도까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최대한 양보해서 그정도 했다고 이해해줄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의 평화를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요.

친일에도 등급이 있고 정도가 있지요. 친일이라고 해서 모두 도매급으로 넘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친일에도 두얼굴이 있습니다. 어쩔수없는 상황에서 일본에 붙어 먹고 있지만 동포를 괴롭히지않으면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력한 사람. 또 하나는 동포를 괴롭히면서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추구한 사람. 비슷한 것 같지만 무척 다릅니다. 친일도 친일 나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친일파를 모두 뭉뚱그려서 그냥 욕만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살아서 있었다는 것 그 자체가 친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일제의 통치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일제시대에 살고 있었으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제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말한 첫번째 친일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책임과 비난이 분명하게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잘못을 구분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기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을 하나의 잣대로 나누어서 재단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잘 살펴보면 엄격한 기준의 잣대를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노예의 평화를 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의지에 일방적으로 굴복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이 노예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지상주의자들은 상황과 여건에 상관없이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칩니다. 그러나 그것도 올바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북한핵문제가 발생하면서 남북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말들이 오갔습니다. 평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북한에게 특사라도 보내어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그들의 생각방식이 구한말의 을사오적과 얼마나 유사한지 보고 놀랐습니다. 무조건적 평화는 굴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화지상주의자들이 을사오적보다 못한 것은 지금은 주변상황과 여건이 무조건적 평화를 감수할 정도로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협박에 대응할 수단과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적인 여건도 우리가 유리합니다. 그런데 북한과 대화를 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릴것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을사오적이 추구했던 노예의 평화보다 한층 더 나쁜 평화입니다.

물론 전쟁불사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전쟁으로도 해결하기 어렵고 우리가 평화를 만들어가자고 해도 평화가 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서 평화가 온다면 얼마나 쉬운일입니까? 문제는 우리는 북한이요구하는 평화의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평화로울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평화는 을사오적의 택한 노예의 평화보다 훨씬 나쁜 평화입니다.

우리가 처한 안보상황의 문제에 낭만적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무실에서 수요일 오후 나근함을 즐기다가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습니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노예의 평화와 남북관계’

# kr, politcs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