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28. 장군 진급의 숨은 이야기

장우주 장군이 이야기해준 장군 진급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장우주 장군은 이대용이 장군 진급에서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단장 시절 연대장으로 근무했던 이대용은 청렴하고 능력있는 장교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은 장교였다. 그러나 7명의 심사위원이 투표로 결정하는 진급심사위원회에서 이대용은 항상 떨어졌다. 마침 장우주 장군이 장군 진급심사위원이 되었다.

당시 700여명의 진급대상자가 있었다. 그중에서 26명을 장군으로 진급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제일 먼저 700명의 대상자중 절반을 선발했다. 연대장 경력이 없거나 교육기관 성적이 나쁘면 탈락을 시켰다. 상급자의 평가와 진급심사위원들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진급대상자들은 상급자들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계급장을 금으로 만들어 바치기도 하고 아예 사발을 금으로 만들어 바쳤다. 부인들은 상급자 집에 가서 아예 몇년씩 식모살이를 하다시피 했다.

절반정도 1차로 선발된 사람들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았다. 당시 김상복 중장이 심사위원장이었는데 이 사람이 이대용의 사진을 벽에서 떼 내었다. 그것은 진급을 안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 사람은 연대장도 하지 않았고 전투경험이 없다고 했다. 김상복 장군은 아예 이대용의 기록카드도 보지 않고 연대장 경험도 없고 전투 경험이 없다고 한것이었다. 그것을 본 장우주 장군이 이대용의 기록카드를 가져다가 연대장도 했고 전투도 많이 했다는 것을 보여주자 마지 못해 그럼 그냥 두라고 했다.

2차로 200명 정도가 선발되었다. 200명의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김상복은 다시 이대용의 연대장 경험과 전투 경험을 문제 삼았다. 장우주 장군이 이대용의 근무기록카드를 가져다가 무슨 소리냐 ? 내 밑에서 연대장을 했고 그것도 제일 잘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별 4개를 달아줘도 될 사람이다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김상복 장군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육사 7기생중에서 이대용과 경합을 붙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부인이 김상복 장군 집에서 10년 가까이 식모살이를 하다시피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26명 선발에 27명이 대상자로 남았다. 김상복 장군과 장우주 장군이 팽팽하게 의견을 좁히지 않자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이던 황필주 장군이 합의를 해보자고 서로 기록을 가져다가 확인을 했다. 김상복 장군이 밀고 있던 사람은 이대용과 비교를 할 수 없었다. 전투경험도 없고 주로 군수계통에서만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상복 장군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할 수 없이 27명의 명단을 모두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가지고 가서 하나 하나 설명하고 박대통령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떨어뜨리기로 했다. 마침내 청와대에 가서 박대통령에게 설명을 했다. 워낙에 말이 없었던 박대통령은 다 듣고 있다가 이대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마침내 입을 열고 “이대용, 우수하지. 참 정직하고 성실하지. 장군이 되야지.”라고 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 면전에서 설명을 하고 나서야 이대용은 장군 진급이 결정되었다. 장군으로 진급하자 이대용은 2군 정보참모로 발령이 났다. 이대용이 2군 정보참모로 발령이 난 이유는 바로 직전에 있었던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문이었다. 충청남도 지역에 공비 6명이 침투했는데 한명도 생포하지 못하고 모두 사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포로로 잡을 수 있었는데 모두 사살해버렸다는 이유였다. 당시 정보참모이던 강신탁 장군이 자신이 책임을 질테니 후임은 이대용을 받으라고 당시 2군사령관이던 정래혁 장군에게 보고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앙정보부에서 호출이 왔다. 이대용은 간첩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정리해서 중앙정보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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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7. 기대하지 않았던 장군 진급

이대용은 3년간의 무관 임무를 마치고 1996년 귀국했다. 귀국을 했으나 어디 마땅하게 갈 곳이 없었다. 당시 한국군은 매우 부패한 조직이었다. 줄을 잘 대는 사람들만 승진을 했다. 한국전쟁 때 아무리 전쟁을 잘 했던 사람도 연줄을 찾아서 대지 않으면 진급을 할 수 없었다.

이대용은 월남에서 무관임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좋은 보직이라도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아무런 직책도 받지 못하고 허송세월 하고 있었다. 마침 육사 8기생으로 미국 OBC 교육 받을 때 같이 갔던 강신탁 장군이 찾아왔다. 이대용은 당시 전세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강신탁은 이대용에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면서 소위 운동이라는 것을 하라고 했다. 이대용은 웃으면서 보직이야 육군본부에서 내 경력을 보고 주는 것이지 자신이 찾아 다니기는 싫다고 했다.

대기하는 동안 이대용은 공원에 나가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약 3개월 정도 지나서 동국대학교 학군단 단장으로 가게 되었다. 동국대학교 학군단장 하면서 장군으로 진급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대용은 장군이 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모두들 장군진급을 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뛰어 다니기 바빴다. 장군 진급 대상자가 700명 정도가 되는데 그중에 26명이 진급을 했다.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진급은 포기했다.

마침 주한 월남 대사관 공사로 있던 티우 대통령 형이 찾아 왔다. 이대용은 티우와 인연으로 티우의 가족과도 가까운 관계였다. 티우 대통령의 형이 찾아와서 한국에서 압연공장을 만드려고 하는데 교섭을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이대용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티우 대통령의 형은 그 공장 만들어서 사장을 하라고 권유했다. 약 500만 달러 정도를 투자해서 공장을 만드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자금은 월남에서 내고 한국에서 물건을 대는 조인트 벤쳐 방식이었다.

이리 저리 수소문을 해보니 일본에서 귀국해 영등포에 압연공장을 하고 있는 신영술이라는 사람을 소개 받았다. 이대용은 신용술과 티우 대통령의 형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다. 사업이야기는 잘 추진되어서 이대용은 지사장으로 나가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월급은 2-3000불 정도였다. 무관이 1000 불 정도였으니 상당한 수준의 금액이었다. 이대용이 경영을 위해 필요한 기술을 3개월 정도 교육을 받기로 했다. 오전 4시간 정도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동국대 학군단장 근무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전역지원서를 제출하려고 했다.

당시 학군단장 인사를 담당하는 강경순 대령이라는 사람이 이대용의 전역지원서 제출을 만류했다. 혹시 모르니 진급결과는 보아야 한다면서 12월에 지사장으로 취임할 때 전역지원서는 그때 내라고 했다. 진급을 하기 위해서 뇌물을 바치고 돈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낀 이대용은 군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강경순 대령은 끝까지 만류했다.

어느날 교육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육군 참모총장 비서실장 이건영 장군이 전화가 왔다. 이건영은 이대용의 육사 7기 동기생이었다. 진급을 축하한다는 인사전화였다. 이대용은 처음에는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이건영이 착각한 것으로 생각하고 웃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방으로 빨리 오라고 했다.

마침 통화하는 것을 듣고 있던 신영술 사장은 진급하는 것을 만류했다. “별 달면 뭐합니까 ? 이거하세요 이거하면 돈 법니다. 그리고 봉급도 더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극구 만류했다. 비서실장 이건영의 방으로 찾아갔더니 장군 계급장을 추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아직 발표도 나기 전이라 긴가민가 하는 생각으로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연대장할때 사단장하던 장우주 장군이 전화를 했다. 장군 진급 축하한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진급심사위원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했다.

장우주 장군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이대용은 장우주 장군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윗사람들 집에도 와서 인사도 하고 해야지 우리집도 모르느냐고 하면서 사직동이라고 했다. 혼자오지말고 부부가 같이 오라고 해서 찾아 갔다. 장우주 장군은 장군 진급한 것을 족보에다 쓸때 박정희라는 이름을 크게 쓰고 장우주라고 조그맣게 하나 써 놓으라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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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6. 이훈섭 장군과 한국군의 단독지휘권 행사

이훈섭 장군은 전투부대 파병을 하기전에 김성은 국방부 장관에게 한국군이 단독으로 작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한국군이 한지역을 맡아서 작전을 하면 굳이 미군에게 지휘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이다. 김성은 장관은 이훈섭 장군의 주장에 동의했다고 한다.

전투부대 파병을 앞두고 다시 미측과 협상을 했다. 미측은 자신들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지겠다고 주장했다. 협상이 이루어졌다. 미측에서는 NATO에서 근무하던 쿡이란 이름의 대령이 대표로 참석했다. 미측은 지휘통일과 단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훈섭 장군은 끝까지 한국군이 한지역을 맡아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며칠간 협상이 계속되었으나 진척은 없었다. 사나흘째 되던 날에 쿡 대령이 짜증이 나는지 화를 내면서 가방을 싸서 그냥 나가버렸다. 미군 대령들은 한국군 장군보다 나이도 많았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미군들이 한국군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월남에서는 한국군 장군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인지 화를 낸 것이었다. 그러자 이훈섭 장군은 “야 쿡 대령 당신 너자리도 돌아오지 못해 ?” 하고 하더니 회의도 끝나지 않았는데 대령이 장군에게 경례도 하지 않고 나가는게 어디있냐고 큰소리를 쳤다. 어떻게 대령이 장군에게 경례도 하지 않고 가는 그런 군대예절은 어디서 배웠냐고 질책했다. 나토에서 그렇게 배웠냐 ? 하면서 꾸짖었다. 그러자 쿡대령은 자신은 가는게 아니고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이훈섭 장군은 “야 이새끼야 왜 거짓말을 하냐? 화장실 가는 놈이 무슨 가방을 가지고 가냐?”라고 하면서 크게 상소리를 했다. 쿡대령은 오늘 딴일도 있고 해서 가야 되겠다며 경례를 하고 가버렸다. 그자리에 있었던 미군 소령이 나중에 “그 한국 장군 대단하다”고 이야기 했다.

군수와 보급에 대해서는 미측과 협상이 끝났다. 미측이 모두 지원해주기로 했다. 작전지휘권만 합의가 되지 않았다. 당시 교섭의 총단장은 이세호 장군이었으나 작전지휘권관련 협상에 대해서는 관여를 하지 않았다. 이훈섭 장군은 미측에게 최후 통첩을 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으니 우리는 내일 오후 비행기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다.

미측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주월미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한국군 협상 단장인 이세호 장군을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당시 통역관은 안대위로 나중에 철도청장까지 한 사람이었다. 이대용은 이세호 장군에게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를 조언했다. 한국군과 미군 그리고 월남군이 서로 협조기구를 만들어 작전을 수행하자고 하면 통역장교가 영어로 잘 이야기 할 것이라고 했다. 아침 9시 이대용과 이훈섭 장군이 이세호 장군을 수행해서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사무실로 갔다. 그러나 미측에서는 웨스트모어랜드와 이세호 장군의 단독회담이라며 이대용과 이훈섭 장군의 배석을 거부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이세호 장군에게 자신들의 방침을 잘 알테니 전작권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이세호는 종이에 3개국 군이 서로 협조해서 작전을 하자고 이야기 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이세호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합의했다. 그리하여 한국군은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월남파병 당시 한국군의 단독작전수행에 대해서는 이세호 장군과 채명신 장군이 서로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이훈섭 장군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물론 이세호 장군이 웨스트모어랜드 장군과 최종협상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이훈섭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훈섭 장군이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단독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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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5. 월남파병과 작전지휘권 문제

월남에 파병을 하면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작전지휘권 문제였다. 미군은 파월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한국군들도 미군의 작전지휘권 행사를 수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한 것은 월남이었다. 월남은 한국군이 미군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지휘를 행사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파병과 관련된 본격적인 협상을 위해 이대용의 육사 7기 동기생인 이훈섭 준장이 도착했다. 이동외과 병원과 비둘기 보낼때까지도 한국의 지령은 미군의 지휘하에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안전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한국군의 태도에 반발한 것은 월남이었다. 월남군들은 자신들로 독립적으로 하고 있는데 한국군도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한국군 수뇌부들은 미군들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이미 미군들에게도 그렇게 이야기 해 놓았다. 그러나 월남은 월남, 한국군 그리고 미군의 3자 협조체제를 요구했다. 아마도 한국군의 작전에도 직접 관여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월남은 자신들 마저도 미군의 지휘를 받게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한국군들은 형식상으로는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되 실제적으로는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것으로 대충 정리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미군측에서 한미간의 입장을 월남에 노출하고 말았다. 한국은 자꾸 미군의 지휘하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왜 월남이 반대냐는 이야기를 월남에게 한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월남군 작전참모부장 웬 둑 탕(Nguyen Duc Thang) 소장이 이대용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웬 둑 탕 소장은 덩치도 크고 성질도 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대용에게 대한민국에게 실망했다고 이야기 했다. 대한민국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으로 부터 군대를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 했다. 미국에게는 작전지휘를 받겠다고 하고 월남앞에서는 3자 협조체제를 갖춘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고 항의했다. 이와 함께 그런식으로 하려면 한국군 파병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이야기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이대용은 사실 내용을 확인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이훈섭 단장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붕따오의 이동외과 병원과 비둘기부대는 그양 애매한 상황에서 파병하여 전개했다.

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위한 협상에서 이훈섭은 그 이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훈섭은 당시의 합동참모부장과 국방장관이 자꾸 미국지휘를 받으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며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올때에는 그 이전과 다른 작전권 협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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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4, 티우 대통령과의 인연

이대용은 1963년 9월에 도착해서 인수인계를 받고 10월 1일부터 베트남 무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고 딘 디엠(Ngo Dinh Diem)대통령은 11월에 발생한 구데타로 권력을 상실하고 피살되고 말았다. 디엠 대통령은 장기 독재 통치로 베트남 내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미국이 사주하다시피한 구데타에 의해 권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당시 구데타를 일으킨 두온 반 빈(Duon Van Minh)대장은 덩치는 커도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이어서 계속 구데타가 일어났다. 모두 6번의 구데타가 발생했다.

구데타가 자꾸 일어나면서 적이 아니라 아군끼리 서로 싸우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인 베트콩이나 월맹군과는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대용은 그 와중에 나중에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와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티우는 구데타에 개입은 했지만 직접 앞에 나서지는 않았다.

여러번의 구데타로 인해 정국이 혼란해지자 월남군들이 회의를 했다. 이렇게 계속 구데타를 하다가는 자멸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군인들 중에서 누구를 추천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티우가 추대되었다. 육사교장도 지냈고 참모총장도 했다. 육사교장을 했기 때문에 육사지지자들이 호응을 많이 했다.

이대용이 보았던 티우는 매우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월남 사회전체가 부패로 썩어 있어서 티우도 어쩌지 못했을 뿐이다. 이대용과 티우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사이었다. 티우는 코냑을 좋아했다. 이대용은 불란서에서 코냑을 구해서 같이 한잔씩 하곤 했다. 이대용의 부인과 타우의 부인과도 서로 좋은 관계였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말없이 통할 수 있는 사이었다.

티우가 권력을 장악하고 얼마지 않아 대한민국의 월남군 파병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한국간에는 이미 합의했지만 월남과의 합의와 협조가 남아 있었다. 월남파병과 관련한 협상은 이대용이 전적으로 맡게 되었다. 티우는 이대용의 파병제안을 흔쾌히 수용했다. 티우의 승인이후 이대용은 월남 국방장관 그리고 합동참모총장을 만나 협상을 마무리 했다.

제일 먼저 파병한 부대는 붕따오(vung Tao)의 이동외과 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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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3. 연대장을 마치고 주월 국방무관으로

연대장을 마치고 국방대학교 합동참모대학교 교수부 차장으로 보직되어 나왔다. 우선 살 집을 찾아 보았다. 이대용은 연대장을 마치고 수중에 남은 돈이 모두 5만 3천원 정도 있었다. 3만원은 어렵게 살고 있던 동생에게 주었다. 연대장을 하면서 봉급으로 모두 8만 3천원을 모았다. 연대장하면서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는 않았다. 살 사먹고 부식 사먹는 것 이외에는 별로 돈 들일이 없었다. 오이같은 작물도 직접 심어서 먹었다.

서울에 나와서 집을 얻으려 했는데 삭글세 보증금이 8만원은 되어야 했다. 어찌 어찌 융통해서 삭글세를 얻었다.
13평에 방하나 있는 집을 얻었다. 집주인이 육군대위였다. 어느날 몸이 좋지가 않아 집에 조금 일찍 들어갔더니 그 집 할머니에게 7살먹은 큰아이가 야단을 맞고 있었다. 이유인 즉, 큰 아이가 집의 흰 담벽에 숯검정으로 1,2,3,4를 써놓았다는 것이다. 마침 집에 아내도 없었는데 큰 아이가 야단을 맞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이대용을 보더니 죄송하다면서 하소연을 했다. 자신은 과부로 살면서 식모살이해서 애들 교육을 시키고 돈을 모사서 어떻게 하든 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집을 조그맣게 하나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은 자신에게 전부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낙서를 하는 것을 보고 야단을 쳤다면서 죄송하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

이런 광경을 본 이대용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제까지 전쟁터에서 사선을 수없이 넘었고 올바르게 살려고 했지만 이러다가 육군대령이라고 해도 아이들 중학교도 제대로 보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은 성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견제를 하고 있어서 장군으로 진급하기도 어려웠다. 이제는 뭔가 방향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부정하면서 군생활을 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육군대학에서 같이 교관을 하던 이석재를 찾아갔다. 당시 이석재는 총무처 장관을 하고 있었다. 큰 아이가 겪은 이야기를 하면서 월급을 조금 많이 받는 곳으로 갈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이석재는 해외 대사관 무관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무관의 한달 봉급이 720불을 받는 다는 것이다. 당시 이대용이 받았던 육군대령 봉급을 달러로 환산하면 60달러 정도였다. 무관은 대령의 1년치 봉급을 월급으로 받았던 것이다.

이대용은 자신은 일체 부정을 하지 못하니 내가 그만큼 일하고 봉급을 받으면 되지 않겠냐며 무관으로 나가는 방도를 물었다. 이석재는 5.16 이전에는 그냥 추천을 해서 무관을 보냈는데, 5.16이후에는 시험을 쳐서 파견을 한다며 시험을 치라고 일러주었다. 당시에 월남과 필리핀 그리고 태국에 무관 자리가 비어있었다. 영어와 제2외국어 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대용은 불어도 조금 공부를 했기 때문에 월남 무관에 지원을 하고 시험을 보았다. 합격을 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3년간 월남 무관으로 부임을 했다.

월남 무관으로 발령을 받았을때 나중에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Ngueyen Van Thieu)는 대령으로 사이공 외곽을 담당하는 비엔호아(Bien Hoa) 지역의 사단장이었다. 티우는 이대용과 미국 합동참모대 교육을 같이 받았던 동기생이었다. 그리고 티우는 미육군대학을 이대용보다 1년 먼저 졸업했다. 오키나와에서 미 합동참모대 교육을 받을때 티우와 이대용은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

젊을때 두부부가 같이 친했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냈다. 얼마 있다가 구데타가 나더니 티우는 장군으로 진급을 하고 곧이어 군단장을 마치고 참모총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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