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칼럼) 트럼프가 뭔가 이상하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사임한다고한다.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하는 문제로 트럼프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는 21세기의 군인 중 최고의 인물이다. 2003년 이라크 전에서 해병 1사단장으로 성공적인 작전을 이끌었다. 이라크전의 초기 전광석화같은 승리의 주역이었다. 이라크에서 주요 작전의 승리이후 미군은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작전의 실패가 아닌 전략의 실패였다. 작전적 승리를 전략적으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실패의 책임은 군인들보다 럼스펠드 당시 미국방장관 같은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병력을 줄여서 예상되는 상황에 대응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병력의 축소를 주장한 사람이 바로 럼스펠드였다. 럼스펠드에 반대하던 미육군참모총장 신세끼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상황을 방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런 실패는 고스란히 병사들의 희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트럼프가 왜 시리아에서 철수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시리아는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이다. 러시아는 중동지역의 발판을 시리아에서 유지하려고 한다. 러시아는 현재 시리아 대통령인 바사르 알 아사드의 독재정치를 지원하면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시리아는 북한으로 부터 핵기술을 수입하고 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2007년 이스라엘은 시리아 핵시설에 대해 공습을 실시하기도 했다.

지금 시리아는 내전상태다. 모두 세개 정도의 세력들이 다투고 있다. 바사르 알 아사드 현대통령의 정부군, 그리고 ISIS, 그리고 바사르에 반대하는 반군들이 그것이다. 러시아는 정부군을 지원하고있고 미국은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싸우면서 또 ISIS와 싸우고 있다. 원래 미국은 반군세력을 키워서 바사르 현 대통령을 축출하고 ISIS를 괴멸시키려고 했으나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무위가 되었다. 러시아는 ISIS보다 현 정부군을 위협하는 반군을 먼저 타격했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본다면 미국이 시리아에서 철수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바사르 정권 축출 보다 ISIS의 제거가 거의 목전에 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은 러시아 좋은 일밖에 안된다. 당장 이스라엘의 안전도 문제가 될 것이다.

트럼프가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은 대선과정에서 러시아의 개입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하는게 사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지금 트럼프는 대선과정에서 러시아의 개입을 요구한 이유로 특검조사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의혹을 살 수 있는 일은 안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을 한 것이다. 만일 트럼프가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 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혹시 트럼프의 그런 결정이 러시아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 충분한 의심이 가능한 일이다. 만일 그렇다면 트럼프가 무사히 대통령직을 마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매티스는 21세기 최고수준의 작전가이자 전략가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행정부내에서 트럼프를 막을 만큼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매티스가 더 이상 못하겠다고 사임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 누구가 들어가도 트럼프를 제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금의 상황을 미국의 주류사회가 어떻게 보고 있을까 ? 미국은 대통령을 신격화하는 파쇼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방제 공화국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기 보다는 공화주의국가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공화적 요소에 해당하는 미국 주류사회의 입장과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만일 이들이 곤란하다고 생각하면 대통령도 추풍낙엽이 될 수 있다.

트럼트는 선출과정에서 말이 많았지만 매우 뛰어난 인물들을 발탁했었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오래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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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3. KAL기의 월남 취항을 돕다.

녹취록 중에 이대용이 월남 정부가 KAL기 취항 승인과정에 개입한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녹취록에는 그 시기가 특정되지 않아서 정확하게 언제였는지는 확인이 필요함


KAL은 월남에 취항을 하고 싶었으나 월남 정부에서는 KAL의 취항을 승인하지 않았다. 동남아 지역까지는 모두 취역을 했으나 정작 승객이 많은 월남에는 취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KAL은 타임지에 월남에 취항한다고 선전까지 했는데도 월남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월남이 승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월남의 항공국장 때문이었다. 당시 월남의 항공국장은 매우 강직하고 고집스러운 인물이었다. 미국 유학파로 실력도 있었고 애국심도 있었기 때문에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대사관에서는 KAL의 취항과 관련하여 경제공사인 김자겸이 담당을 하고 있었다. 월남의 항공국장은 월남에도 국적이인 에어 베트남이 있으니 에어 베트남이 한국에 취항할때 KAL도 같이 취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KAL읕 태국을 거쳐서 베트남으로 가는 항로를 구상하고 있었다. 태국까지의 승객이 40명 정도였고 베트남까지 가야 이익이 나는 구조였다. 항공기에 약 120명이 타는데 그 중에 40명 정도면 운영비가 나오는 구조였다. 베트남까지 가지 않으면 이익이 나지 않았다.

먼저 KAL은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을 통해서 월남 국방장관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월남은 국방장관이 내무관련한 업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진척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KAL의 사이공 지점장으로 있던 이은현과 조중훈의 처남으로 퀴농지역에서 수송업무를 담당하던 김형배가 찾아와서 이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대용은 난처했다. 티우 대통령에게 자꾸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사를 통해서 해결하라고 이야기 했다.

당시 한진은 매우 심각한 입장이었다. 잘못하면 월남에서 벌어 놓은 돈을 항공사업에 모두 꼴아 박아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대사는 자신도 해결하기 어렵다면서 이대용에게 해결하라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우선 티우 대통령의 형을 만나서 상의를 하고 같이 티우 대통령에게 찾아 가기로 했다. 10월 1일 KAL기가 동남아 지역으로 취항을 해야 하는데 만일 사이공에 오지 못하면 태국까지 밖에 갈 수가 없었다. KAL은 월남 정부로 부터 항공운항면허도 받지 않고 먼저 덜컥 사업부터 시작해버린 것이다.

정상적으로 면허를 신청하려면 약 1년 정도가 소요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KAL기 취항은 1달정도를 앞두고 있었다. 티우 대통령을 만난 이대용은 사정을 이야기 했다. 월남에 1개 대대 밖에 보내지 않은 호주도 국적기를 취항시키고 있는데 한국 국적기를 취항시키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설명했다. 지금 1달 정도 남아 있으니 정식허가를 받기 전에 임시허가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티우는 한참 생각하더니 항공국장에게 KAL기 운항 임시 허가를 내주라고 지시했다. 이대용은 이은현 지점장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항공국장에게 가서 임시 운항 허가증을 받으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은현은 한국에 전보를 쳐서 승인이 떨어졌다고 보고를 했다. 당시 조중훈은 월남 취항이 안되자 망했다고 울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항공기가 출발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월남 항공국장이 그때까지 운항허가증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비행기는 하늘에 있는데도 운항허가는 나오지 않았다. 이대용은 다시 티우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때서야 항공국장이 이은현 지점장에게 허가증을 주었다.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서 KAL기가 취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간의 경과를 김자겸 경제공사가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고 해서 본부에 보고를 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취항해서 행사를 할때도 자신이 가운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조중훈은 이대용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대용이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돈은 드리지 않겠으나 나중에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시면 아주 좋은 집을 하나 지어 드리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것은 뇌물이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중훈은 그 이후에 태도를 싹 바꾸었다.

이대용이 월남에서 풀려난 이후 자유수호 운동을 하면서 필요한 비용을 헌금을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무시를 했고 사지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밥한끼 먹자는 이야기도 없었다.


내용으로 보아 두번째 정보공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일화로 보임.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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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2, 다시 경제공사가 되어 세번째로 월남에 가다.

박정희 대통령 팀이 바로 뒤에 있어서 앞으로 보내기 위해 숕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먼저 가시지요 하는 예의였다. 박대통령이 다가오자 6관구 사령관 방경원 장군이 경례를 했다. 박태롱령은 말없이 답례를 하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이대용을 보자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이 장군, 지금 어디 있나?” 이대용은 “네 6관구 사령부 부사령관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박대통령은 티샷을 했다. 동반자였던 정재호와 김진만이 티샷을 할때 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이대용에게 다가 왔다. “이 장군, 왜 보직을 안받았지 ?”라고 물었다. 원래 6관구 사령관은 전역하기 전에 잠시 대기하는 직책이었으니 이대용이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이대용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단장을 하고 싶다던지 그것도 안되면 공사를 마쳤으니 대사라도 하고 싶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그냥 그렇게 하는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이대용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이 20초 쯤 지났다. 보다 못한 6관구 사령관 방경원 장군이 “각하, 제가 이장군을 부사령관으로 데리고 있습니다”하고 참견을 했다. 박대통령은 아무말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장군, 나 먼저 가”라고 하고 동반자들과 함께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주가 흘렀다. 유재흥 국방부장관이 불러서 갔다. 유재흥은 이대용에게 소장으로 진급시켜 예편한 다음 부대사를 시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월남 티우 대통령과 친분이 깊으니 월남 부대사를 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남전이 끝나면서 부대사 직위는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부대사 대신에 선임공사로 가서 경제를 담당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월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이 월남에게 8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으니 한국기업들이 입찰을 할 수 있도록 이대용에게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경제기획원 소속으로 공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소장 진급시켜서 예편하기로 했는데 소장으로 진급을 시키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준장 계급장을 달고 경제기획원 공사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월남에 도착해서 군에서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외교 행랑으로 전역을 시켜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관이 이대용의 편지를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고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베트남에서 억류당할 때도 현역 준장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월맹군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나중에 이희성 장군이 참모총장이 되어서 이대용을 전역 조치했다. 결국 이대용은 정년이 지나서 까지도 계속 군적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73년 1월 27일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나서 이대용은 다시 월남 대사관의 경제공사가 되어 세번째로 근무하게 되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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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1, 월남 대사관 공사를 마치고 귀국, 그리고 또 찬밥 대우

월남에서 중앙정보부 공사를 마치고 다시 귀국했다. 그때가 1972년도였다. 이대용은 사단장으로 나가서 자신의 야전 지휘능력을 펼쳐 보고 싶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보직을 받지 못했다. 월남에서 현대와 한진문제를 해결해주고 여러가지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상부에서 인정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답답했다. 왜 그런지 나중에 그 내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이 이대용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CIC에 있던 김복동이 자신을 음해한 것을 이대용이 그런 줄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귀국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육군참모총장 노재현이 불러서 가보니 사단장 자리는 없고 6관구 부사령관으로 가 있으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가 72년 9월 14일이었다. 사단장 자기라 나면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사단장 자리가 비어도 다른 사람을 계속 내 보냈다. 이대용은 노재현이 자신을 사단장으로 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73년 초 두번째 금요일 사령관 방경원 장군이 불러서 술을 한잔 했다. 군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으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번 사람이 있는데 방경원 장군이 그를 도와준 모양이었다. 그사람이 술을 대접했다. 속이 상할대로 상한 이대용은 그날 저녁 술을 진탕 퍼마셨다. 썩고 부패한 사람들은 다 출세를 하고 원칙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홀대를 받고 배척을 받는 풍토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했지만 그날 저녁 과음을 한 이대용은 정신을 잃다 시피하여 지프차에 실려 집으로 갈 정도였다. 토요일 아침에 간신히 출근하여 링게르를 맞고 있다가 퇴근을 해서 다시 누었다.

자다가 꿈을 꾸었다. 대여도라고 하는 중국집에서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해서 들어가보니 용 그림이 그려진 아주 좋은 관이 있었고 상주들이 주변에 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검은 넥타이를 매고 거기에 있었다. 박대통령은 이대용을 보고 “이 장군, 걱정하지마 내 도와주지”하고 말을 했다. 그러고 잠을 깼다. 꿈이 너무 선명해서 옆에 누워 있는 아내를 깨웠다. 이대용이 꿈이야기를 하자. 이대용의 부인도 박정희 대툥령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대용의 부인은 한번도 박정희 대툥령의 얼굴을 본적 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이 장군의 부인이냐”고 물었고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때 잠에서 깼다는 것이다. 그때가 일요일 새벽 3시경이었다. 둘이서 같은 시간에 비슷한 꿈을 꾼것이 하도 신기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새벽 4시경이었다.

사령관 방경원 장군이 오늘 남서울에서 골프를 하기로 했는데 한사람이 오지 못하게 되어서 그러니 6시까지 남서울 골프장으로 오라고 이야기 했다. 술을 마시고 몇끼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라 골프를 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방경원 장군이 술먹은 것은 골프치고 운동을 하면 다 깬다고 하면서 나오라고 강권을 했다. 어쩔 수 없이 골프장으로 나갔다. 그날따라 눈이 많이 왔다. 티샷 지역과 그린만 눈을 치우고 나머지는 그대로 눈이 있었다. 골프공이 눈속에 들어가면 찾을 수가 없었다. 골프공을 많이 잃어 버렸다.

갑자기 골프장 주변에 무전기를 든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주변의 능선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다. 이대용은 간첩이 침투했나 ? 하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뒷편에 박대통령과 정재호 그리고 김진만이 한조가 되고 박종규와 차지철 그리고 다른 한명이 한 조가 되어 따라 오고 있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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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0. 한진의 조중훈을 도와주다.

현대사건을 해결하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한진문제가 발생했다. 한진의 조중훈이 40만 달러를 월남으로 반입하려고 몸에 지니고 오다가 월남에 발각된 것이었다. 당시 월남에서는 외환을 가지고 오면 모두 신고를 해야 했다. 그런데 조중훈이 몰래 가지고 들어가려다가 공항에서 적발되어 모두 압수조치된 것이었다.

어느날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전속부관이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조중훈은 주월사령관 채명신에게 이야기를 하면 해결될 줄 알고 채명신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채명신은 월남 국방장관에게 부탁했으니 국방장관 이야기는 월남의 사법기관에 먹혀 들지 않았다. 월남은 프랑스 시스템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각 부서간의 업무를 서로 참견하지 않았다. 조중훈이나 채명신도 그런 내용을 몰라서 국방부에 부탁을 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채명신은 이대용을 불러서 어떻게 해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중훈은 그날 경찰서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조속하게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대용은 더 이상 그런일에 말려들지 않고 싶었다. 어쨓든 알았다고 답하고 대사관에 돌아가 주월 한국대사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대사는 ‘이 공사 다 나라를 위한 일이나 해결해 봐’라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월남 대통령 궁으로 찾아갔다. 티우는 한진의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진의 조중훈 회장이 월남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한국군들에게 상금도 주고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돈을 가져오다가 월남의 법을 잘 몰라서 신고를 한해서 걸렸다고 이야기 했다. 만일 상금을 주려고 가지고 온 돈 40만 달러 빼앗기고 또 벌금으로 3배를 물고 나면 한진이 곤란해진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박대통령도 곤란해지고 자신도 박대통령에게 얼굴이 서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들은 티우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불러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티우는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과 월남의 친선을 위해서 기소하지말고 압수한 돈 40만불도 다 돌려주라고 했다.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한진의 조중훈 회장과 동생 조중건이 찾아왔다.

이대용의 방에다 무거운 샘소나이트 가방 2개를 내려 놓았다. 조중훈은 “이 공사님 은혜가 백골난망입니다.” 라고 하면서 월남에 있던 자동차도 700만불 정도 되었는데 그것도 모두 압수 당할 뻔 했다고 하면서 샘소나이트 가방에 들어 있는 돈을 쓰라고 주었다. 미화 30만불에 월남돈으로 약 10만불 정도였다. 모두 40만불이었다. 당시 한강맨션 아파트다 1만불 정도였으니 약 40채 정도를 살 수 있는 돈 이었다.

이대용은 갑자기 부화가 끌어 올랐다. “야 조중훈이 네가 나에게 아편을 먹이려고 하느냐”라고 큰소리를 쳤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그런 짓 안하는 사람 5명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 앞으로 그런 짓을 하면 티우에게 이야기해서 당신들 모두 쫓아 내 버리겠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조중훈은 “이것은 개인으로 쓰시라고 하는 게 아니라 공금으로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공금으로 쓸돈은 대통령에게 받지 내가 왜 당신에게 받아야 해 하고 역정을 냈다. 사무실에서 소리가 시끄러워지자 대사관의 이문우 참사관이 문을 잠구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번 다른 기업에서도 돈을 가지고 왔으나 모두 돌려 보냈다. 수없이 사선을 넘었던 이대용은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살아와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돈에 좌지우지 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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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9. 다시 월남으로, 망할 뻔한 현대를 살리다.

중앙정보부로 들어가자마자 기조실장 강창성이 선배님 오셨습니까 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강창성은 이대용이 부연대장할 때 대대장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이대용을 부른 것은 간첩사건이 아니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외무부로 파견되어 있는 최석신 공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사람이 문제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와서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해임시키고 이대용을 보내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이대용은 손사래를 치면서 안한다고 했다. 군인으로 전투지휘관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월남에서 무관을 한 것은 돈이 없고 배가고파서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자신의 주특기가 1542 전투지휘관이니 지휘관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CIA이고 CIC고 모두 싫다고 했다. 본인이 싫으면 싫은 거니 각하에게 이야기 하라고 했다.

그러자 강창성은 각하께서 선배님이 티우대통령과 친하다고 그 사람이 가야한다고 해서 직접 말씀 했다고 말했다. 당시 월남에서 현대가 곤경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사람은 이대용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외무부로 소속을 바꾸면 전역을 해야 해서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외무부로 파견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면 군으로 다시 가기로 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이대용은 현역준장 신분으로 중앙정보부 공사가 되어 월남으로 갔다. 그때가 1968년이었다. 이대용은 월남에 부임하자 마자 티우 대통령 관저를 무상 출입할 수 있었다. 티우 대통령의 경호실장이 티우의 6촌 처남이었다. 원래는 티우가 대령때 전속부관이었으나 대통령이 되면서 경호실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난 반 티엣(Nhan Van Tiet)이었다. 이대용은 대통령 궁 뒷문으로 들어가서 야! 띠엣! 하고 소리지르면서 들어가면 티엣이 예 써 ! 하고 경례를 하고 나왔다. 그럼 너희 매형 만나러 왔다. 그러면 통과시켰다. 무상 출입이었다.

월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현대가 막대한 벌금을 내고 철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던 것이다. 당시 정주영을 위시한 현대 직원들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군용기로 모두 빼돌렸던 것이다. 유죄로 선고받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익의 3배를 벌금으로 내야하는 상황이었다. 현대가 월남에 부어 놓은 돈도 상당했다. 만일 현대가 월남에서 그냥 철수한다면 그냥 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용은 티우를 만났다. 티우의 반응은 차가웠다. 현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몇번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지금 전세계는 미국의 닉슨, 월남의 티우, 대만의 장개석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가 반공의 전선에 서 있다. 그래서 이런 국가들 끼리는 서로 이해를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만일 현대가 번 것 몇배를 물어주고 하면 박정희 대통령도 다음 선거에서 매우 어려워진다. 이런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대통령을 누가 찍어 주겠느냐고 했다. 월남에게 한국도 매우 중요한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자 티우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어떠한 방법이 있냐고 이대용에게 물어왔다. 이대용은 현대가 망해서 간 것으로 하고 지금 현대가 하고 있는 사업을 다른 회사가 사간 것으로 하자고 했다. 당시 현대의 자산은 모두 몰수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몰수 되어 있는 현대의 자산도 모두 다 풀어줄 수 있다고 했다.

티우는 법무부 장관을 불러서 한참을 논의하더니 다시 이대용에게 와서 설명을 했다. 현대가 이름을 바꾸어서 다시 사업을 하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고 설명했다. 현대는 본사 앞의 문방구 점이름으로 다시 회사를 하나 만들어서 다시 사업을 계속했다. 현대는 철수를 하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정주영은 내내 월남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월남 세무서와 경찰서에서는 몰수 딱지를 떼면서 회사가 바뀌었다는데 왜 사람들은 그대로 있지 ? 라고 의심스러워했다. 현대직원들은 새로운 회사에서 자신들을 그대로 고용했다고 얼버 무렸다.

나중에 이대용이 일시 귀국했을 때 정주영은 이대용의 호텔에 찾아와 아무말 없이 말그대로 거액의 수표를 던지고 도망가렸다. 이대용은 그 수표를 그대로 중앙정보부로 보내 버렸다. 아마도 정주영은 이대용이 그 수표를 그대로 꿀꺽할 것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월남에서 풀려나 귀국해서 정주영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정주영은 이대용을 모른 척 했다. 아마도 정주영은 이대용을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대용은 씁쓸했다. 그는 돈보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더 가치있게 생각하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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