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41. 북한의 망명요구를 거절하다.

그 이후로 북한의 요원들은 모두 6-7번 정도 이대용을 심문하러 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대용을 심문하러 온 사람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박영수 궁상현이었다. 박영수는 나중에 남북회담에서 서울 불바다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었다. 이대용이 나중에 귀국했을때 북한에서 귀순한 황일호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황일호가 당시 이야기를 해 준것이다.

북한은 이대용을 망명을 시켜서 북한으로 데리고 가려했다. 그러나 외교관을 그냥 막무가내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베트남은 자의에 의한 망명서를 받아 오면 이대용을 북한으로 데리고 가도록 허락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은 이대용에게 자의에 의한 망명서에 사인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북한은 이대용을 상대로 계속 설득 작업을 했다. 어느날인가는 갑갑한데 시나 한 수 읽어 볼까 하더니 뭔가를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어. 그동안 잘 있었니 ?” 그러더니 갑자기 “탁용이도 잘 있고?”라고 했다. 탁용이는 이대용의 동생이었는데 이남에 나와 있었다. 누님의 편지였다. 그러더니 “당신이 원하면 누님의 편지를 주겠소”라고 했다. 이대용은 단호하게 “필요없다”고 거절했다. 보나 안보나 뻔 한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님은 불러주는대로 편지를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약 1주일정도 심문이 진행되었으나 이대용은 끝까지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이대용에게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망명서를 써서 도장을 찍어가지고 신문에 발표하면 그걸로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양가서 냉면같이 먹자고 회유했다. 평양가면 당신 환영할 좋은 색시들 모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북한에서는 이대용을 망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고 있었다. 이대용의 누님도 좋은 곳으로 보내 놓고 인터뷰 준비하느라고 부산을 떨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 내부의 상황은 귀국후 만났던 황일호로부터 들었다. 중앙정보부에서 황일호를 만났는데 그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황일호는 북한의 3호청사 차장급 고위인사였는데 망명을 했다.

북한의 이대용 망명유도 계획은 당시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정세로 인해 무산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했는데 북한이 캄보디아를 지지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한국정부에서도 이대용을 구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렸다. 박대통령은 모든 외교채널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이대용과 같이 붙들려온 한국 외교관 2명은 자술서를 써서 사형수동에서 일반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잡혀있던 교민 170명은 3개월 후부터 모두 귀국하기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월맹에 자술서를 쓰고 북한에 충성맹세를 하고 풀려났다. 그들은 각자 모두 북한으로 부터 지령을 받아 행동하겠다는 서약까지 했다. 극한상황에서 죽기를 면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하면 처벌할 수 없다는 법에 따라 그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북한에 맹세를 한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진짜로 간첩행위를 한 사람들도 극소수지만 있었다. 동포를 배신했던 김영택도 그렇게 풀려났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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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40. 북한 정치보위부의 심문

배신자 김영택은 무사히 귀국했다. 당시 같이 귀국했던 교민들이 김영택을 고발했다.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았으나 얼마 있지 않아 풀려났다. 김영택은 광주출신이었는데 지역 국회의원에게 부탁해서 풀려났다고 한다.

한편, 이대용은 치화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루 두끼를 주는데 아주 작은 밥공기하나에 배추를 조금 넣은 소금국이 전부였다. 너무 영양이 부족해지자 피하조직이 파괴되어 마치 구더기처럼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런 현상을 비타민 PP 부족이라고 했다. 평상시 80 Kg 정도였는데 46 kg 정도까지 체중이 줄었다. 너무 마르니 온몸에 핏줄이 다 나왔다. 너무 힘들어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살이란 의지박약한 자들이 하는 짓이고 자신은 끝까지 싸우겠다고 각오를 다듬었다.

월맹 정치보위부는 이대용에게 진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이대용은 외교관에게 이런 심문을 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하면서 버텼다. 광대뼈가 튀어 나온 웬바린은 책상을 치면서 총살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이대용은 외교관을 너희들이 무슨 권리로 총살시키느냐고 대들었다. 자신은 총살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니 총살을 시키려면 유엔이 재판소를 만들어 총살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석방을 요구했다. 당신들의 외무장관이 서명한 비엔나 협정에 외교관을 이렇게 심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은 모두 자술서를 작성했다. 자술서를 작성하면 밖에서 식료품을 차입할 수 있도록 했다. 끝까지 자술서를 쓰지 않은 사람은 이대용 한사람 밖에 없었다. 잡혀온 미국인들도 모두 자술서를 썼다. 자술서를 쓰고 나면 북한의 대사관 직원들이 찾아와서 전향서를 다시 받았다.

이대용이 끝까지 자술서 쓰기를 거부하자 1년 정도되어서 외부에서 차입을 허용해 주었다. 이대용이 그대로 죽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했다. 사형수 동에서 2년 1개월을 지내다가 나중에 일반동으로 넘어왔다. 잡혀간 외교관들은 신체적인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민간인들은 매를 맞기도 하고 고문을 당했다.

이대용이 체포된지 약 3년 정도가 지난 78년 9월 25일 북한의 정치보위부원들이 찾아왔다. 그날이 이대용의 결혼 기념일이었다. 갑자기 옷을 챙겨 입히더니 차를 태워 외무부로 데려갔다. 차관인지 국장인지 하는 사람이 이대용에게 그동안 외교관에게 대우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대용은 석방이 되는가 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다시 이대용을 차에 태워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 데리고 갔다. 이대용은 월맹이 인도네시아 대사관을 몰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갔더니 한국사람과 똑 같이 생긴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대용은 이북에서 온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들은 빙빙돌아가는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고 이대용에게는 녹슬은 접이식 철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한동안 아무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들 2명은 이대용을 쏘아 보았다. 이대용도 째려 보았다. 갑자기 “북반부에서 왔수다”라고 했다. 이대용은 “어느나라 국방부에서 왔소?”하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관대하게 용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월맹 정치보위부가 하던 상투적인 이야기였다.

이대용은 자신이 외교관이므로 북한으로 부터 심문받을 이유가 없으며 북한도 자신을 심문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앞으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그중에서 북한에 직접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대용에게 “이 새끼”라고 했다. 그러자 이대용은 “이새끼 ?”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판사판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책상옆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같은 민족끼리 왜 그러냐면서 말렸다. 이대용은 “그래 같은 민족끼리 불법으로 월맹에 체포되어 3년이나 넘게 고생하고 있는데 월맹에 나를 석방시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지금 와서 무슨소리냐”고 따졌다. 그러자 다시 너절너절한 소리를 한참을 했다. 이대용은 귀를 막고서 아무말하지 않고 있었다.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경비병을 불러서 오늘 심문은 이것으로 끝내겠다고 했다. 이대용은 다시는 나를 만날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가족들과 늘 항상 건강하시오. 하하”하고 웃으며 나왔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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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9. 결국 월맹에 체포되다.

6월 18일 소환장이 왔다. 22일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프랑스 대사관에가서 이문제를 논의했다. 같이 있던 스위스 대사관 직원들도 자신들이 다 보고 있으니 일단은 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만일 안가면 잡아갈 것이고 그러면 더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22일 출두를 했더니 즈엉징특이라는 조사관이 주로 이대용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물어 보았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일을 했느냐 하는 이야기였다. 이대용은 농림부 장관과 보사부 장관과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1헥타르에 3만톤의 쌀 생산량을 12만톤으로 증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로했다. 그리고 석규자원 개발과 의료지원을 위해 농업사절단과 의료사절단을 초청하는 사업을 했다고 했다.

즈엉징특은 월남의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들이 얼마나 쌀을 수출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생산을 잘 할수 있느냐 하는 등의 이야기를 물었다. 이대용은 월남의 토지자원이 충분하지만 제대로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을 하고 남쪽에서만 1년에 천만톤 정도는 수출할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 나중에 즈엉징특은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그래서 자신들이 남북통일을 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결국은 대사관에 돌아가서 무기가진 사람들 조사해서 무기를 반납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월남에서 군대로 와서 자신들과 싸운 사람들도 언제 월남에 파병되어 전투했는지만 조사해달라고 했다. 제대로 알려주면 그냥 두겠지만 그렇지 않고 숨기면 잡아 넣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걱정과 달리 별 큰일이 없이 풀려났다. 그런데 점점 사람들이 체포당하기 시작했다. 한금선이란 민간인도 체포를 당했다. 한국인들 체포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것이 김영택이었다. 그리고 허춘 이라는 사람이 그 앞잡이 노릇을 했다. 교민중에 해군 하사관 출신이었던 김대인이라는 사람이 허춘에게 월맹 정치보위부에서 무엇을 물어 보더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허춘은 엉엉 울면서 이대용 공사님께 미안하다고만 이야기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대용은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체포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이공에 정착해 있던 교포들도 체포가 되어 심문을 받았다. 유남성과 강서신이었다. 이대용이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심문을 받고 나와서 이대용에게 자꾸 이것 저것 이대용에 관련된 것을 물어 보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월맹 정치보위부는 이대용이 군출신으로 군에서 준장까지 올라간 장군 출신이라는 것을 포함하여 속속들이 조사를 하는 것 같았다.

이대용은 자신의 체포가 목전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대사관 신상범 서기관에게 유언을 했다. 이대용은 신상범에게 자신이 체포당할 것이며 그러더라도 자신은 끝까지 지조를 지키겠다고 이야기 했다. 절대로 굴복을 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저항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만일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면 자결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팔목의 동맥을 물어 뜯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만일 혁대가 있으면 목을 메달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대용은 자신의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박대통령에게 말씀을 드려서 대학나올 때까지 좀 돌보아 달라고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자신은 별로 돈을 모아 둔 것이 없으니 박대통령께서 그것을 좀 도와 주시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달해 달라고 했다.

운명이 날이 다가왔다. 75년 10월 3일 즈엉징특과 광대뼈가 툭튀어나온 웬반린 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이대용을 찾아와서 체포영장을 집행했다. 성명 이대용, 직업이교관, 월남혁명사업을 방해했기 때문에 체포함. 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대용의 여권과 돈 그리고 구두까지 모두 빼앗았다. 슬리퍼와 팬티 3장을 주었다. 이들이 이대용을 데리고 간것은 치화형무소였다. 그들은 이대용을 사형수 방에 집어 넣었다. 치화형무소는 A동과 D동이 있었는데 사형집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갖히는 곳이 D동이었다. A동은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감방에 6명이 있었는데 이대용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당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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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8. 사이공 잔류와 배신자 김영택

미국도 자국민들을 모두 철수시키지 못했다. 대사관이 너무 빨리 철수하는 바람에 다른 집결지에 있던 미국인들은 철수를 하지 못하고 남겨져 버렸다. 그들은 월맹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 많이 사살 당했다. 유엔에서 개입을 했다. 당시 북베트남은 유엔가입 신청을 하고 있었다. 유엔사무총장은 북베트남군이 사람을 죽이면 유엔가입을 시키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5월 2일 12시에 방송이 나왔다. 지금부터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방송이었다.

한편 월맹군은 불란서 대사관으로 피신한 한국인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종용을 했다. 외교관도 아닌 사람들이 왜 거기 들어가 있는가라고 하면서, 프랑스 대사관이 한국인들을 밖으로 내 보내지 않으면 치외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최후 통첩을 했던 것이다. 5월 1일 오후 늦게 프랑스 대사관 밖으로 나왔다. 이미 그때에는 월맹군들이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4월 30일 12시에 월맹군이 사이공으로 진입했으니 바로 하루 정도 절대절명의 시간에 프랑스 대사관에 피신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월맹군들은 12시경부터 오후 4시 정도까지 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나온 사람들은 바로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보호를 해주었다. 프랑스 국기를 한국대사관에 걸어놓고 프랑스 대사관 경비원이 보호를 해주었다. 보넬이라는 사람이었다.

사이공을 점령하자 월맹군들은 피난민들이 집을 돌아갈 수 있도록 검문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5월 2일이었다. 이대용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탈출을 할 계획을 수립했다. 트럭을 타고 붕따우까지 가서 배를 타고 탈출을 하는 것이었다. 월남에서 살림을 사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트럭을 준비해 놓았다. 대사관에 사람들이 모여서 토의를 했다. 반대가 많았다. 이대용은 잘못하면 모두 죽을 수 있으니 탈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경험에 비추어볼때 군인들은 승리했다는 기분에 모두 긴장이 풀어져 있어서 절대로 검문을 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이규수 참사관에게 먼저 가라고 했더니 싫다고 이야기했다. 마침 2등서기관으로 해군대위 출신인 김창근이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대용은 자신이 입으려고 준비했던 검은 옷을 김창근에게 주고 탈출시켰다. 김창근은 탈출에 성공했다. 이대용은 교민들이 안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이공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5월 12일 월맹군은 사이공의 외교관들에게 등록을 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인도네시아, 라오스 대사관 직원들이 모두 등록을 했다. 성명, 가족 그리고 월남에 들어온 날자등을 등록하면 자국으로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한국 외교관들은 6월 18일 비행기를 타고 귀국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막상 6월 18일이 되자 안영사와 서경무관은 출국을 하지 못한다는 연락이 왔다. 스위스 국제적십자사 사이공 지점장과 직원 2명의 에스코트를 받아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 찰나, 월맹 측에서 한국사람들은 출국을 보류한다고 이야기 했다. 행정적인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봐도 답해주지 않았다. 이대용은 대사관에 돌아오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저녁에는 대사관 밖의 안가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월맹의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대사관을 습격해서 안영사와 서경무관을 체포했다. 그와 함께 김종옥이라는 사람도 같이 체포해갔다.

프랑스 대사관 치외법권지역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일본 대사관 와타나베 참사관이 찾아와서 북한 사람들이 남한 외교관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월맹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라고 하다가 나중에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안영사와 서경무관이 잡혀간 것은 그들이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비밀이 새나간 것은 한국인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용은 자신이 사이공 억류를 기록한 책에서 그 배신자의 이름을 배완용이라고 가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 이름은 김영택이었다. 통역관 소령 출신이었고 사업을 하러 와있었는데 절대절명의 순간에 월맹에 외교관들을 밀고해서 체포하게 한 것이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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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7. 사이공에서 철수를 하다.

4월이 다가오면서 서서히 월남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국 대사관도 4월초에 직원들 가족들을 모두 귀국시켰다. 이대용은 3월말부터 대사관 철수를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이대용은 육군대학에서 철수 교관을 한적이 있었다. 4월 초까지 가족을 모두 철수시키기로 했다. 우선 대사관 직원 가족들을 먼저 여객기를 이용해서 방콕으로 철수시키기로 했다. 교민들은 각자 일반 항공기로 철수를 하도록 하고 못나간 사람들은 LST를 가지고 와서 실어 나른다. 그리고 마지막 까지 남은 대사관 직원은 미국 대사관과 협조하여 미국 비행기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미 캄보디아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철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교민들의 숫자는 모두 1134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을 수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교민들의 재산 정리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4월 26일에 LST가 와서 그것을 타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되어 있었는데 부동산을 가진 사람들 약 260명이 남아 있었다. 부동산을 팔아서 돈을 가져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대용은 미국 대사관과 협조를 했다.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비행기가 내릴 수 있는 약 8개의 집결지에서 철수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 남은 사람은 이상훈 참사관과 미국 대사관 담당 서기관 그리고 이대용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우리 교민 중에서 안수명이라는 사람이 오더니 한국 대사관 쓰레기 소각장에 2급비밀과 3급 비밀들의 문서들이 불에 타지 않고 비를 맞고 그대로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대용은 무관보좌관 이달환 소령과 같이 대사관에 가서 문서를 모두 다시 소각했다. 문서를 모두 소각하고 다시 미국 비행기가 오기로 한 집결지 3에 갔다. 거기에서 대사관 직원들과 한국인들이 모두 모여서 미국의 헬기를 타고 철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결지 3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사실인 즉은 당시 한국대사가 집결지 3가 아닌 미국 대사관으로 대사관 직원들을 데리고 가버린 것이었다. 한국민들을 그냥 버려두고 자기만 가버린 것이다. 해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한 사람이었지만 자국민들을 지키려는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 챙긴 것이다.

원래 키신저는 월맹과 비밀약속을 했다. 미국 대사관이 완전하게 철수하기 전까지 사이공에 진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월맹은 약속을 지켜서 사이공 외곽에서 진입을 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월맹군이 진입했다는 루머가 퍼지면서 미국 대사도 허위보고를 사실인줄 알고 비행기를 타고 떠나 버렸던 것이다. 이를 시발로 해서 월맹군은 사이공으로 진입했다. 당시 미국 대사관 베넷 공사는 이대용에게 비행기를 주선해주면서 빨리 떠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이대용은 남아 있는 한국인들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이대용은 남아 있는 한국인들을 데리고 프랑스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프랑스 대사관은 치외법권지역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프랑스 대사관에만 들어가면 살 수 있었다. 사이공에 진입한 월맹군들은 미국인들을 보이는 족족 모두 사살했다. 월맹군들은 한국을 더 미워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보이기만 하면 모두 사살당할 상황이었다. 프랑스 대사관은 한국인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교섭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막무가내로 바로 프랑스 대사관으로 진입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아무도 월맹군에게 사살 당하지 않았다. 프랑스 대사관으로 진입한 한국인들은 모두 170여명 정도였다. 나중에 이들은 조금씩 모두 귀국을 할 수 있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어떻게 스팀파워를 쓰면 좋을까요? 개인적생각 정리

스팀파워를 어떻게 쓰면 좋을지에 대한 개인적을 정리했습니다. 먼져 셀프보팅하면 욕을 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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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2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트루만.jpg

이번 포스트에는 해방이후 한국의 상황에 대한 마샬 국무장관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정리하고 있다. 마샬 장관은 한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도 아니며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 박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지역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로 인해 미국의 위신 손상을 최소화하고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미군이 철수하는데 있어서 큰 작용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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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0월 한국에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유엔의 미국대표 워렌 오스틴(Warren R. Austin)은 17일 48년 3월 31가지 유엔이 보장하는 선거를 해야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다. 그는 9월 18일 미국무부의 초안이 담고 있는 조건을 포함했고, 이에 대해 우리는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바 있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나면 미국은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제시했다.

이 결의안의 논리적인 결과로, 미국은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 토의의 정회를 제안했다. 스티코프장군은 미국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합의의 이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소련대표단이 공동위원회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 대표단은 10월 23일 서울을 떠났고 공동위윈회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모스크바는 이제 한국에서 자신의 안보 완충을 보호할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했다. 해결책은 10월 29일 유엔에 미소양국이 한국으로부터 군대를 동시에 철수시킨다는 제안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이 제안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만일 유엔이 한국에서의 선거를 감독하기위해 간다면, 이는 더 이상 외국 점령군대가 더 이상 필요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러시아의 문서고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소련은 ㅁ상호 철수를 원하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군대가 철수하면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역에 대한 통제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미국을 군사적으로 개입시키는 위험없이, 소련이 한반도에서 보다 믿을 수 있는 완충지역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이승만, 김구 그리고 김성수 주변의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의 전략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걱정이된 그들은 미국에게 남한의 별도 선거를 허용할 것과 군대의 철수를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열었다. 미국은 새로운 기구인 유엔을 강화하기 위해 유엔을 통해 일할 것을 약속했기때문에, 하지 장군은 유엔이 이문제에 대한 결정에 도달하기전까지 미국은 그들의 요구에 답변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지는 소련군이 철수하면 소련에 의해 보급을 받고 훈련된 북한의 공산주의 군대가 남한을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므로 그는 워싱턴에게 소련군 철수의 함의를 재평가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또한 추가적으로 민간 고문관들이 한국에 파견할 것과 대규모 경비대의 창설을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비극적으로, 워싱턴은 그의 요구를 거부했으며, 이는 만일 유엔 대표들이 한국에 주재하게되면 군대의 침공위험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1월 7일 각료회담에서 국무장관 마샬은 이러한 행동이 실패할 것이라는 추론을 완전하게 설명했다. 마샬은 소련은 전쟁을 원치않으며 대신 그들의 영향력을 불안한 지역으로 확대시킬 것이며 이는 간접적인 공세와 폭동을 이용할 것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한국이 그러한 지역의 하나라고 할 때, 국무장관은 한국의 번영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 나라에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진정한 희망이 더 이상 없다”라고 보고했다.

마샬은 “다가오는 시대에 한국의 정치적 삶은 정치적으로 미성숙되고, 조급함과 폭력에 의해 지배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우세한 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의 군대가 우리를 도와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선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 영토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지역이 아니며, 우리의 주 임무는 지나친 권위의 손상없이 빠져나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미국의 생각이 1947년 11월 이후 어떻게 계속 바뀌어 갔는지 알아보겠다. 시리아의 미군 철수와 관련한 최근의 토의에서 이와 비슷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확인해 볼 것을 권고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한국을 분단으로 이끈 비극적 사건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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