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45. 녹취록을 마치며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는 화재보험공사 이사장 직을 맡았다. 그리고 강연도 다녔다. 전국 각지를 돌면서 그동안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5.18 이후의 광주에도 들렀고 목포와 순천까지 들렀다. 5.18이후의 광주는 누구도 가려 하지 않았지만 이대용은 자진하다시피해서 강연을 했다. 광주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을 다 알고 있었기에 강연을 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강연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있었다. 그래서 목포와 순천까지 가서 강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의 장인이었던 이규동의 권유로 사이공 억류기를 쓰게 되었다. 이대용은 군생활 중에 이규동과 인연이 많았다. 이대용이 육사에서 생도대 부대장을 할때 이규동은 육사 참모장을 했다. 그리고 이대용이 12사단 정보참모를 할 때 이규동이 사단 참모장을 했다.

수원에 강연을 하러 갔는데 이규동이 환영을 해 주었다. 사람들이 이규동 장군을 위하여 하면서 건배를 했다. 이상했는데 이규동이 전두환의 장인이라고 했다. 이규동이 이대용에게 사이공 억류기를 책으로 남기는게 어떠냐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이 책을 쓰면 자신이 출간사를 쓰겠다고 했다. 강연한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했다. 군에서 1만부 정도 사줬고 여기저기서 5만권이 더 나갔다. 인세를 받아서 모두 불우이웃들에게 기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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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을 마지막으로 이대용장군이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의 현대 한국 구술사 연구사업단과 진행했던 구술 녹취록에 대한 정리를 모두 마쳤다.

녹취록에는 이대용 장군의 삶중 많은 부분이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 이중 간첩 이수근에 관한 사건이나 육군대학의 커닝사건과 같은 부분이 없었다. 앞으로 이대용 장군의 녹취록을 기반으로 그에 관한 기록을 추가해 나가도록 하겠다.

우연한 기회에 이대용 장군의 삶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한 평생 올곧게 살려고 노력했다.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지켰고 정치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5.16때 박정희의 비서실장으로 갈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그리고 월남에 무관으로 그리고 공사로 근무하면서 단 한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이대용 장군의 삶을 알아가면서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쉽게 잊혀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나하는 것보다 그사람이 얼마나 높은 직책을 가졌는가 의해 평가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대용 장군은 한마디로 시대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메이지 시대 지사와 같은 풍모를 가지고 있다. 메이지 시대의 지사들보다 몇단계 더 위에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통상 젊을때 아무리 올바르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그 향기를 잃게 된다. 삶이라는 물건이 인간을 그냥 그대로 위대하게 놓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용은 그런 삶을 관통하면서 한번도 비굴하지 않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녹취록을 보면서 군데군데 그런 서운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요즘 주변에 훌륭한 사람을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훌륭한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은 없어서가 아니라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대용 장군은 일본이 메이지 지사라고 자랑하던 그 어떤 사람들 보다 더 훌륭했다는 생각이 든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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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44.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오다.

영빈관에서 스웨덴 외무장관 리프랜드와 그의 비서실장 닐슨, 그리고 아이젠버그의 동경지부장 그월크맨이 이대용을 찾아왔다. 월맹의 외무부에서도 과장급 1명이 동행했다. 그월크맨이 편지를 하나 주었다. 편지에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말고 직접 이대용 공사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내용이 영어로 씌여져 있었다. 내용인 즉은 이대용 공사를 구출하러 스웨덴 외무장관 리프랜드와 그의 비서실장 닐슨 그리고 아이젠버그의 동경지부장 그월크맨이 가니 그들을 믿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고생이 많으셨다고 그리고 지조를 지킨데에 대해 감격한다는 이야기였다. 누가 보냈는지 이름은 씌여지지 않았으나 이대용이 익히 아는 필체였다. 이대용이 자신을 북한으로 보내는 줄 알고 비행기를 타지 않을까봐 걱정이되어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대용과 같이 잡혀있던 2명의 외교관도 같이 석방되었다. 비행기에 올라타자 치화형무소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리를 형무소 간수들로 부터 들었다. 이대용은 그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나라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화형무소에서 같이 수감되어 있던 캄보디아의 공군참모차장이던 킴소판 대령이 생각났다. 킴소판의 장인은 캄보디아의 수상이었는데 일가족 모두 치화형무소로 붙들려왔다. 그의 장인은 감옥에서 죽었다. 킴소판은 이대용에게 그래도 나라가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이야기 하곤했다. 자신은 자신의 식구들이 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이대용에게 한국 정부가 구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에이젠버그의 비행기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잇몸에 고름이 나고 상해서 음식을 먹기가 어려웠다. 누워서 잠을 잤다. 에이젠버그가 쓰는 침대를 내주었다. 7시간 정도 비행을 하고 나서 한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했더니 이대용의 부인이 보내준 옷이있어서 갈아 입었다. 차를 타고 화곡동을 지나는데 아이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길을 가고 있었다. 이대용은 동행한 직원에게 “무슨 학예회가 있는 모양이지?”라고 했다. 그랬더니 직원이 웃으면서 “공사님, 우리가 경제개발해서 이제 평소에 저렇게 입고 다닙니다”하고 이야기 했다. 이화여대 뒤의 터널을 지났다. 주변에 여기저기 건물이 많이 생긴 것을 보았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도착했다. 거기서 대통령 입원실에 이대용을 넣어주었다.

병원에서 식구들을 만났다. 공항에서 바로 보면 쇼크를 받을까봐 병원에서 안정하게 한다음에 가족을 만나게 해주었다. 아이들은 너무 커져 있어서 길가에서 보면 못알아 볼 것 같았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59kg이었다. 치화형무소에서 1년동안 가장 많이 체중이 빠져 있었고 돌아올 때는 그래도 상당히 몸무게가 65kg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59kg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면 가장 많이 빠졌을때는 40kg 중반졍도 되었던 것 같다. 월남에서 쓰던 허리띠는 전쟁기념관에 기증을 했다.

약 반년 정도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가장 치료가 늦었던 부분은 손톱이었다. 손톱이 누렇게 되어 모두 빠져 있었다. 처음 형무소에서 햇볕을 보지 못하면서 손톱이 하얗게 변하더니 나중에 누렇게 변해서 살갖 벚겨지듯이 모두 빠지고 말았다. 1년 2개월 정도가 되어서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

1980년 4월에 돌아온 한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병원에서 내려다본 시가지는 연일 데모였다. 월남이 생각나기도 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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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43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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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한국에서의 단독선거를 통해 미군을 철수하고 했던 과정이 전행되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미국무장관 마샬의 기본적인 구상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틀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이면에는 미국이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에서 가급적 빨리 발을 빼려고 했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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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트에서 우리는 1947년 1월 7일 미국무장관 마샬이 트루먼 대통령의 각료들에게 미국이 한국으로 부터 철수하는 것은 지역의 부대가 소련의 팽장을 저지할 수 없으며 한반도가 “결정적인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38번째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9월에 한국에 파견된 바 있는 알버트 웨드마이어는 3일이후 서울의 하지장군과 도쿄의 맥아더 장군에게 철군은 유엔의 결정과 상관없이 1948년 가을 한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안으로 철군이 검토되고 있다고 알렸다. 이 제안을 평가하기 위해, 웨드마이어는 하지 장군에게 동시철군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거부할 경우, 이런 방안을 취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러시아의 문서가 확인한 것에 따르면, 하지는 당시 소련의 의도에 대해 매우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육군의 작전기획 책임자인 웨드마이어에게, 소련은 한반도에서 유엔과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이며 재통일도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남한에서 별도 단독 정부의 수립을 감독하고, 대규모 경비대를 창설하고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지원에 대한 하지의 평가는 현실적이었던 반면,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감독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그는 만일 지난 9월에 만들어진 5개년 부흥계획이 시행되고 미국 대사관의 잘 준비된 직원들에 이해 감독된다면, 북한주민의 민족감정이 고조하여 소련에게 두지역의 합병을 허락하라고 요구하는 충분한 압력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서울에 있던 하지의 개인 고문관은 미국무부에, 이승만은 자유로운 선거가 되면 패배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경찰과 우익 청년 단체들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서울의 좀 더 온건한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인들에게 간청하여 이승만이 힘으로 유권자들을 협박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나, 미국의 군정정부는 자신들이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고 수감된것이 극좌파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매우 좋은 시기라고 주장하면서 워싱턴에 지체없이 단독 선거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유엔에서의 상황을 매우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11월 4일 유엔의 정치 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이후 소련과 미국군의 동시철수를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승인했다. 유엔총회는 11월 14일 이 결의안을 압도적인 다수로 통과시켰다. 유엔의 한국에 관한 임시 위원회(UNTCOK)의 구성은 미국을 기쁘게 했으며, 9명중 6명의 멤버들은 미국과 가까운, 캐나다, 오스트렐리아, 국민당 중국, 프랑스, 엘살바도르와 필리핀이었다. 마샬은 이런 배치를 반겼으며 하지 장군에게 선거를 준비하고 UNTCOK와 접촉하여 날자를 정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유엔 회원국들은 남한에서 폭력과 정치적 불안의 한가운데에서 개최되는 선거에 합법성을 주는 것이 대해 걱정했다. 오스트렐리아의 외무장관 H.V. Evatt는 마샬 장관과의 회담에서 한국문제는 소련과 미국에 의해 공동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 문제는 일본평화조약의 부분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과 미국이 이문제에 대한 합의가 샐패한다면, 국무장관은 오로지 국제적인 행동만이 이런 교착상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Evatt에게 미국은 한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으나, 그의 이런 약속이 오스트리의 외교관을 복잡한 한국문제에 개입하도록 하는데 실패했다.

다음의 포스트에서 우리는 이승만이 점증하는 압력을 가하여 선거를 신속하게 치르도록 만들었던 미국의 제안에 대해 유엔에서 지속적인 저항이 있었다는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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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43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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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st post, we saw that on 7 November 1947 Secretary of State George Marshall recommended to President Truman’s cabinet that the US “extricate” itself from Korea since local forces could not resist Soviet expansion and the peninsula was not of “decisive strategic importance.”

Three days later Albert Wedemeyer, whose September mission to Korea we discussed in Post #38, informed General Hodge in Seoul and General MacArthur in Tokyo that the Department of the Army was considering a proposal to disengage from Korea in the autumn of 1948 regardless of what the United Nations decided. To evaluate the proposal, he asked Hodge to assess whether this was a reasonable step to take if Moscow rejected the US proposal to withdraw forces simultaneously. Hodge had by this time gained a good understanding of Soviet intentions, as Russian documents have confirmed. He therefore replied to Wedemeyer, who was now director of planning and operations for the Army, that the Soviet Union would never cooperate with the United Nations on Korea or permit reunification. Therefore, the US should supervise the formation of a separate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create a large constabulary army, and provide economic aid.

While Hodge’s assessment of Soviet aids was realistic, he was overly optimistic about what American economic aid and political supervision could accomplish. He predicted that if the five-year program of rehabilitation formulated the previous September were implemented and overseen by a well-staffed American embassy, “national feeling among the north Koreans may be aroused and sufficient pressure brought to bear upon the Soviets to compel them to permit…an amalgamation of the two areas.”

In fact, as Hodge’s own advisors in Seoul reported to the State Department, Syngman Rhee feared that he might lose elections that were free and therefore intended to use the police and rightist youth groups to guarantee that he would win. More moderate political leaders in Seoul pleaded with the Americans to prevent Rhee’s forces from intimidating voters, but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believed it had little ability to do that. Nonetheless, Hodge urged Washington to authorize separate elections without delay, arguing that this was a good time because the arrest and imprisonment of many communists had weakened the far left.

Meanwhile, events at the United Nations progressed quickly. On November 4 the UN political committee approved the American proposal calling for mutual withdrawal of Soviet and American forces after the creation of a provisional government. The General Assembly then passed this resolution on November 14 by a wide margin. The composition of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 pleased the Americans, as six of the nine members had close ties to the US: Canada, Australia, (still Nationalist) China, France, El Salvador, and the Philippines. Marshall was pleased with this arrangement and instructed Hodge to prepare for elections and contact UNTCOK to set a specific date.

In reality, however, many UN members worried about putting giving legitimacy to elections held in the midst of the violence and political instability in the South. Australia’s minister for external affairs, H.V. Evatt, insisted in talks with Marshall that the Korean question must be resolved jointly by the Soviet Union and the US. If that were impossible, the issue should be settled as part of a Japanese peace treaty. Given the failure of Soviet-American negotiations on the issue, the Secretary of State insisted that only international action could resolve the stalemate. He assured Evatt that the US would not abandon Korea, but this pledge failed to persuade the Australian diplomat that it was in his country’s interest to become involved in the complicated Korean issue.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continued resistance in the United Nations to the American proposal for elections along with the increased efforts by Syngman Rhee to force the US to hold elections quickly.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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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43. 마침내 석방되다.

이대용이 치화형무소에 갖혀 있을때 한국 정부는 이대용을 석방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다. 이대용은 나중에 그런 외교교섭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담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월맹 이렇게 3자가 참석했다. 장소는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렸다. 1978년 7월 24일부터 뉴델리 협상이 시작되었다. 월맹으로서도 외교관을 무작정 붙잡고 있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는 유엔을 통해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인도대사 윤하정이 한국측 대표로 참가했으나 얼마있다가 이범석 대사가 인도대사로 부임하면서 협상 대표가 되었다. 북한은 이대용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한국에 있는 간첩을 교환하자고 했다. 외교관 1명에 간첩 200-300명 정도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외교관을 간첩과 교환하는 식으로 석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으나 북한은 남미의 도시게릴라를 인질과 교환해서 석방하는 경우를 들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억지주장을 들어 북한이 석방을 요구하는 명단을 달라고 했다. 북한이 제공한 명단은 엉터리였다. 잡혀있지 않은 명단도 있었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한마디로 북한은 대충 명단을 주고 시간을 벌고 이대용을 북한으로 망명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월맹정부에게 이대용을 보내 주면 비료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이대용은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 북, 월맹 3자간 협상이 벌어진 2개월 이후에 대남공작을 담당하는 북한의 3호청사에서 궁상현, 박영수 그리고 김완수가 이대용을 설득하기 위해 사이공으로 들어온 것이다.

뉴델리 협상은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할때까지 계속되었다. 10.26 사태가 벌어지자 이대용을 귀국시키기 위해 작업해오던 중앙정보부가 모두 붕괴되었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고 당시 이일을 추진하고 있던 이종찬이 전두환에게 이대용 사건을 보고했다. 전두환은 이대용 문제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박동진 외무부 장관에게 이대용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쯤 이대용은 자신이 빨리 석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이순흥 교민회장을 통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냈다. 박동진 외무부 장관이 최규하 대통령 대신 답신을 보냈다. 내용인 즉,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지만 정부는 이대용을 석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지조를 지킨 것에 대해서 찬사를 모내면서 조만간 석방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우리 정부는 아이젠버그(Saul Eisenberg)를 이용했다. 아이젠버그는 유태인으로 박정희 대통령 당시 미국과 상대할때 로비스트로 이용하던 사람이었다. 아이젠버그는 우리 정부를 위한 로비를 하면서 너무 많은 폭리를 취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별로 좋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당시 아이젠버그는 월맹과도 선을 대고 있었다. 그는 하노이가 전후복구하는데 미국이 원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월맹에 접근했던 것이다.

아이젠버그는 하노이와 협의를 통해서 이대용을 석방하는 것으로 확답을 받았다. 이대용을 데리고 오는 비행기는 아이젠버그의 개인 비행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이대용을 데리고 오는 대표단이었다. 아이젠버그는 개인이었기 때문에 대표단이 될수 없었다. 마침 동경에서 스웨덴 외무차관 리프랜드와 비서실장 닐슨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리프랜드 외무차관은 이대용을 데리러가는 대표단장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즉각 수용했다. 그와 함께 아이젠버그의 동경지사장과 하노이지사장을 겸하고 있던 그월크맨이라는 사람이 같이 아이젠버그의 개인 비행가를 타고 사이공으로 날아가기로 했다.

석방되기 하루전 이대용은 치화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이대용을 심문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중위 한명이 석방명령을 낭독했다. 석방된 이대용은 영빈관으로 모셔졌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일개 회사원의 변태(=변형)과정을 보며

………관심있는 분야에서 유튜브 채널 한번 열어보고 조금씩 업로드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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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42. 도옥마이의 활약으로 소통 루트를 확보하다.

치화형무소에 잡혀가서 1년동안은 아무런 차입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1년 후부터 차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공작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대용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은 파리의 한국대사관으로 보내졌다. 당시 윤석현 대사가 프랑스 외무부와 협조하여 이 돈을 사이공의 프랑스 총영사에게 보내도록 했다. 그리고 프랑스 총영사는 사이공 교민회장이던 이순흥에게 보냈다. 사이공 교민회 이순흥은 계속 사이공에 머물러 있었다. 이 돈으로 공작을 하여 이대용에게 차입을 넣을 수 있도록 하는데는 도 응옥 마이(도옥매)라는 29살 먹은 여성이었다. 도응옥마이는 월남을 떠나기 위해 교민회장 이순홍과 계약결혼을 했다.

도곡마이(Do Ngoc Mai)는 이순흥이 프랑스 총영사관에서 받은 돈으로 우선 치화형무소 간수들을 구워 삶았다. 우연히 만나는 식으로해서 100달러씩을 그냥 주었다. 당시 간수들의 봉급이 6달러였으니 2년치 가까운 봉급을 한꺼번에 준 것이었다. 그래서 4명정도를 구워삶았다.

우선 간수를 확보하자 도곡마이는 자신의 5촌 아저씨를 찾아갔다. 도곡마이의 아저씨는 공산당원으로 이남사람이지만 어렸을때 부터 이북에 가서 활동을 했다. 그는 월맹이 사이공을 점령하자 감찰위원장이 되어 사이공으로 내려왔다. 도곡마이는 그 아저씨를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을 접대했다. 도곡마이의 당숙부는 매우 첨령하고 결백했던 사람이라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빼빼 말랐다고 한다. 약 1년 정도를 그렇게 접대를 했다. 1년 정도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도 주고 하다가 나중에 2000달러를 주었다.

그랬더니 도곡마이의 5촌 아저씨는 “그래 내가 받으마”하더니 돈을 받았다. 공산당을 몇십년을 했는데 자신의 재산은 아무것도 없다고 푸념을 했다. 집은 관사라서 자신의 것은 아니고 지니고 있는 것은 옷한벌에 양복한벌, 그리고 구두한켤레가 전제산이었다. 먹는 것은 매일 가족 한사람당 계란 두알 나오는 것 ,그리고 쌀 조금, 고기 가끔 나오는 것이 전부 다 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배가 고프고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날 도와주니 고맙다”라고 했다.

도곡마이는 상황을 봐가며 아저씨에게 자신의 남편의 형뻘 되는 사람이 형무소에 있는데 좀 편의를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암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 끄덕 했다.

1976년 10월 13일 아침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던 이대용은 어떤 간수가 자신을 향해 걸어 오는 것을 보았다. 이대용이 물을 길을 때 문을 열어 놓는데 그때 간수가 접근해 온 것이다. 그러더니 이대용의 호주머니에 뭔가를 쓱 집어 넣고 가버렸다. 이대용은 순간 이는 이북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자물쇠가 첩첩으로 쳐진 사형수 감방에 누가 이렇게 들어 올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순흥은 잘 알지만 그의 필적은 알지 못했다. 내용인 즉 점심 식사 끝난 다음에 편지의 여백에 회신을 서 달라고 한 것이다. 이대용은 종이는 없었지만 볼펜은 지니고 있었다.그래서 간수들이나 누가 보아도 별 문제 없을 정도로 편지를 썼다. 내 정신은 그대로 있고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버티기 어렵다. 무엇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썼다. 만일 북한의 공작이 아니면 답장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중에 답장이 왔다. 그래서 이것이 진짜 이순흥이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렵게 확보한 루트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을 했다. 간수들도 미행을 당하거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심을 했다. 그래서 이대용이 편지를 보내면 1달 이상이 지나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30,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일개 회사원의 변태(=변형)과정을 보며

………관심있는 분야에서 유튜브 채널 한번 열어보고 조금씩 업로드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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