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4. 압록강에 도착하다.

1950년 10월 24일 제7연대 제1대대는 희천에서 서쪽으로 전진하여 극성령을 넘고 회목동을 지나, 풍장, 고장을 거처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 국경 경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날 오후 2시경, 제7연대 제1중대는 희천을 지나 제1대대의 선두에서 진군했다. 극성령을 넘기 전에 패잔부대와 2번의 전투가 있었으나 금방 격파했다. 회목동을 지나 점심을 지어먹기 위해 2시간의 휴식명령이 떨어졌다.

이대용은 북한군 여자 의용군 포로 2명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김복희와 박필숙이 왔다. 둘다 소제 쌍안경을 메고 있었다. 김복희는 164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눈이 이글이글하고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쾌활하게 생겼고 나이는 20살 정도 였다

이대용은 “집이 북청이라지 ? 왜 공산주의가 좋은가 ? 좋으면 한번 이야기해봐”라고 했다. 김복희는 “아무것도 몰라요”하고 무서운 듯이 머리를 숙였다. 나는 부드럽게 자유세계의 좋은 점, 우리 민족이 해야할 일 등을 이야기하면서 의견을 물어보았으나 김복희는 끝끝내 속을 열지 않았다.

한편 서울 풍문여중에 재학중이던 박필숙은 속시원하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았다. 이대용은 자신도 처음에는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에는 언론의 자유가 다르다고 이야기를 했다. 1945년 12월 황해도 금천군 모 국민학교에 있던 유 교장이 청진에 갔을 때, 소련군이 쌀을 배에 실어가는 것을 보고 그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내무서원의 귀에 들어가 해주 형무소에 갇혔고 그 이후 그에 대한 행방이 묘연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북한군은 남한을 점령하자, 관공서 공무원들의 자수를 장려하여 명부를 작성하였다. 명단이 완성되자 1950년 8월 이 명부를 이용하여 집단처형을 감행했다는 것도 이야기 해주었다.

북한에서 살았던 김복희는 말을 잘못했다가는 자신이 총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박필숙은 자신의 형부 때문에 여자 의용군에 들어왔다고 했다. 이대용은 자신의 동생뻘인 풍문여중생 유정선의 이름을 댔더니 자기와 동기생이라고 반가와했다. 이대용은 그들을 다시 돌려 보냈다.

1950년 10월 26일 아침 대대장으로 부터 명령을 수령했다. 대대장 김용배소령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오늘 첨병중대는 제3중대가 한다. 그 다음이 대대본부와 중화기 중대 그리고 연대에서 배속된 57미리 대전차포 분대, 그 다음이 제1중대, 그리고 후위 첨병분대는 제2중대, 행군은 어제밤에 따라온 군용트럭(대부분 노획한 소련제 군용트럭)으로 하는 차량행군이다.

둘째, 국경분쟁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 만주땅을 향해서는 소총 한발이라고 쏘지 말것.

셋째, 민간인을 보호해야 하며, 특수한 군 고용인을 제외하고는 민간인을 국경전으로부터 약 20리 남방으로 후송할 것.

넷째, 국영경비는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착한 중대가 하며 대대 주력은 압록강에 진격했다가 남방 제6키로미터 지점인 초산으로 철수 집결할 것. 이상이었다.

아침에 박태숙과 정정훈이 가져다 주는 주먹밥을 먹고나서 중대원 전원을 5대의 소련제 트럭에 탑승시키고 대대장에게 출발준비 완료 보고를 했다. 초산 남방 6킬로미터 지역에서 적이 기관총을 쏘면서 대응했다. 김명익 대위가 지휘하던 제2중대가 차에서 내려 북한군 쪽으로 공격했다. 약 한시간 반정도의 교전이후에 적은 후퇴하고 말았다.

그 이후 제1중대가 첨병중대가 되어 대대의 제일 앞에 나섰다. 제1중대가 초산에 들어갔으나, 집은 모두 텅텅비었고 강아지 한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초산읍을 빠져나가 압록강으로 전진했을 때, 북한군의 경미한 저지사격이 있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곧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자동차 도로를 따라 가니 거대한 막이 확 열리는 듯한 장엄하고 신비하게 보이는 대호수가 화면처럼 떠 올랐다. 산과 산 사이를 감색의 물로 가득 채운 장강의 모습이 나타났다.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 드디어 압록강에 도착했다.


이대용 장군의 한국전쟁 참전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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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 계속북진하여 김일성과 무초대사의 차를 노획하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첨병중대가 되어 계속 전진했다. 묘향산 기슭에 도착하여 청천강을 가로 지르는 여울을 만났다. 청청강을 건너는 여울에는 승용차 22대를 포함한 차양 100여대가 버려져 있었다. 미제 및 소련제 고급 승용차도 있었고 소련제 가스트럭과 미제 지엠시 군용차등 가지 각색의 승용차가 서 있었다.

청천강을 반쯤 지나가다가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고 물속에 서 있었다. 파괴된 차들을 피해서 지나가려던 차들이 수심때문에 발동이 꺼지게 되자 꼼짝 달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쫓기던 북한군들이 차들을 모두버리고 두주한 것이었다. 중대 선임하사관 김상사에게 제일 좋은 차를 타고 북상을 할테니 골라서 따라 오라고 지시하고 강물에 빠져 길을 막고 있던 차량들을 밀어내고 다시 북진을 계속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때 노획한 차들중에는 김일성의 차도 있었고 주한미대사 무쵸의 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뒤따라 오던 제6사단의 지휘관들이 이 노획 자동차들을 하나씩 둘씩 가지고 갔다. 김일성의 차도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졌다.

진격하는 북한군 탱크 1대를 포함하여 자동차 백여대 기타 군수물자들을 어마어마하게 확보했다. 포로는 너무 많아서 장교들과 하사관들만 후송하고 나머지 명사들은 무장만 해제하고 큰길을 따라 고향으로 가라고 석방했다. 노획한 적의 권총은 모두 배낭에 넣었으나 소총은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소총의 공이를 빼서 땅에 파묻던가 덤불에 버렸다. 공이가 없는 소총은 땅에 파묻던가 덤불속에 버렸다.

그날 늦게 숙명여대생 1명을 포함한 북한군 여자 의용군 40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김지용 상사가 보고해왔다. 김상사의 보고에 의하면 이번에 잡은 북한군 여자 의용군들은 적십자 병원 간호학생들과는 달리 불순분자라고 했다. 이들은 국군에게 쫓기어 달아나는 북한군을 보면서 “저런 바보들이 어디 있어, 이쪽을 보고 마주 총을 쏘면 될텐데 왜 저렇게 도망을칠까”라고 하며 패주하는 북한군을 책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풍문여중 3학년인 박필숙과 북청출신의 김복희가 가장 불순하다고 했다. 이대용은 15살 20살 짜리가 무엇을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반항적인 의용군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연대 정보과로 후송조치시켰다. 이대용은 기회를 봐서 직접 설득해보리라 생각을 했다.

10월 23일 새벽 5시 20분 주먹밥 한덩어리에 고추장과 단무지그리고 어제 노획한 소련제 초콜릿이 배급되었다. 밤톨모양의 초콜릿안에는 꿀이 들어가 있었다. 6시 30분에 진격을 시작했다. 회천 남방고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을 했다. 적은 모두 후퇴했다. 여기저기서 부상병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대용은 부상당한 북한군 병사들을 빨리 후송하라고 했다. 넓적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북한군 병사를 보았다. 카라멜을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그는 고마워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황해도 신제라고 했다. 부모님이 계시냐고 물어보니 “예”하면서 눔물을 흘렸다. 이대용은 “울지마라, 상처입은곳이 치료되고 나면 곧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위로했다.

여기에지에 총에 맞고 대포에 맞아 피를 토하고 죽은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어떤 북한 병사들은 얼마나 괴롭게 죽어갔는지 쥐어 뜯은 갈대들을 한손에 쥐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귀신도 잡아 죽일 것 같이 용맹스러웠던 김금동 중사도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슬프게 서 있었다.

대대에서 희천시내로 내려와 휴식을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솔길을 따라 희천 시내로 묵묵히 내려왔다. 중대 선임하사관 김지용 상사의 지시로 박태숙과 정정훈이 밥과 된장국을 해 놓았다. 오늘부터 박태숙과 정정훈이 이대용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이대용은 어색하긴 했지만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했다.

마침 김상사가 어제 청천강에서 노획한 승용차를 타보라고 가지고 왔다. 쿠션이 좋은 고급 승용차였다. 희천을 두바퀴 돌고 나니 대대장이 연대장을 통해 사단장에게 선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대용은 이차를 사단으로 보냈다. 나중에 김종오 장군은 이차를 무초대사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대용이 노획했던 차는 무초대사의 차였던 것이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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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국경선에 밤이 오다) 2 연대로 간호사들을 후송하고, 학살당한 미군을 발견하다.

연대 정보과 보좌관 김중위와 제1대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 이대용을 찾아 왔다. 그들은 연대 정보주임의 지시라고 하면서 적십자 병원 간호사들을 연대본부로 후송하라고 했다. 아침 순천 우체국앞에서 일본군에 복무한 바 있는 어떤 대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간호사들의 신상이 걱정되었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지시에 불응하였다.

김중위에게 순천 우체국 앞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면서 간호사들에 대한 처리 문제는 이대용 자신의 생각대로 할테니, 연대본부에서 심문할 필요가 있으면 제1중대에 직접와서 하라고 했다. 김중위는 이해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이대용을 찾아왔다. 그는 연대 정보주임의 생각도 이대용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한 두명의 쓸모없는 놈들이 있지만 시간이 가면 다 제거될 것이라고 했다. 연대 정보주임이 간호사들의 육체적 순결성은 보호해 준다는 약속을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 이대용은 연대 정보주임의 청렴결백과 강직함을 평소부터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고집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들을 모두 연대로 후송하기로 하고, 심문이 끝나면 다시 제1중대로 복귀해서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간호사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했다.

출발전에 인원을 세어보니 2명의 간호학생이 부족했다. 제일 키가 작았던 박태숙과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정정훈이었다. 확인해보니 중대 선임하사관의 지시에 따라 밥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중위는 10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두명은 그냥 두고 간호사들을 차에 태우고 갔다.

다음날 새벽밥을 먹고 트럭을 타고 개천 방면으로 전진했다. 개천에서 3대대를 추월하여 전진하다가 경전차 5대를 가지고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미군 수색대를 만났다. 이들을 초월하여 계속 전진했다. 적과 전투를 벌였다. 진군해 나갈 수록 북한군 패잔병은 그 수효가 계속 늘었다. 이들을 지나쳐서 계속 진군했다. 북한군에게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트럭위에 흙가마니를 놓고 그 위해 박격포를 세우고 계속 사격하면서 진출했다. 원리에 이르니 북한군이 방어를 시도했으나 한시간정도의 교전끝에 다시 북쪽으로 쫓기어갔다.

원리를 지나 자작 부근에 도달하니 군수품을 가득 실은 화차가 여기저기 철로위에 서 있었다. 소련제인 듯한 북한군 작업복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모두 한벌씩 갈아입고 스탈린 동무의 선물이라며 좋아했다.

박태숙과 정정훈도 옷을 깨끗하게 갈아 입었다. 연대본부와 점점 멀어지니 간호사들 12명이 모두 모이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걱정을 했더니, 박태숙과 정정훈은 압록강까지 갔다가 서울로 돌아가겠다며 제1중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작 북방 2km 정도 되는 곳에 도달했다. 적의 저항이 있어 전투를 하다가 제3소대의 김하사가 철로변 터널속에 가득차 있는 미군 시체를 발견했다. 피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학살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다고 보고해왔다. 이대용은 대대장에게 바로 보고하고 현장의 시체검증을 위해 대대군의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대대 구호반을 데리고 직접 현장으로 왔다. 상황을 확인한 즉, 1950년 10월 22일 오전 10시경 북한 군들이 북으로 끌고가던 미군포로 300여명을 이터널 속에 가두고 한쪽은 기차와 보급품으로 완전히 틀어막고, 다른 한쪽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모두 학살했다는 것이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을 주민들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그 중에 숨이 끊어지지 않은 미군 3명이 있어서 응급조치를 하고 후송했다.

이대용은 대대장이 현장에 도착하자 북한군을 추격하여 구장으로 들어갔다. 적은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구장을 지나는 길가에서 주민들이 납치당한 안재홍씨 일행이 이틀전에 도보로 걸어서 이곳을 지나갔으며, 빨리 추격하면 그들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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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에 밤이오다) 1 평안북도 순천에서 적십자 병원 간호사들을 포로로 잡다.

이번부터 이대용 장군의 전장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를 정리합니다

1950년 10월 20일 새벽, 평안남도 순천 북방지역의 어느 야산지역에서 제2소대장 김덕출 소위가 일단의 여성들을 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방공속에 있는 여성들을 잡았는데 확인해 보니 서울 적십자 병원의 간호원 및 간호학생이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이들을 자신이 있는 중대 지휘소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하고 직접 심문했다. 이들은 모두 감색 브라우스에 감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며 적십자 마크가 박힌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대용은 이들을 포로로 간주하고 우선 간략한 심문을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보리알 같은 이들이 블라우스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다들가려운지 긁어 대고 있었다. 간략하게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1950년 6월 28일 서대문구에 있는 적십자 병원의 간호사로 국군 부상병 치료를 하고 있다가 북한군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적십자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날부로 북한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서울시내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뉴스가 들려왔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유엔군은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울에서는 북한군의 비인도적인 학살행위가 자행되었다. 서울 시내 큰 건물의 지하실이나 교회에서는 몽둥이, 칼 총 등에 맞아 지식인들이 줄지어 살해 되었다. 북한군들은 시내의 주요 건물에 불을 지른다음 적십자 병원 간호원들을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태워 의정부 방면으로 실어가려고 했다

간호사들은 이 행렬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 중 이병철이라는 이름의 19살 먹은 간호사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곧바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심문결과 상당수 간호사들의 오빠들이 국방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포로가 아니라 납치된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 시간부로 포로취급을 해제했다. 바로 서울로 보내려고 했으나 평양과 순천이 도로는 아직 북한군 수중에 있었고 통행이 불가능했다. 며칠있으면 평양과 순천의 도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이대용이 이들을 데리고 있기로 했다. 흰밥과 고추장 한숟가락씩을 주어서 식사를 시켜주였다.

10월 22일이 되었다. 이대용은 대대장에게 명령을 받기 위해 갔다. 가는 길에 그녀들을 본 대위 한 명이 “많이 잡았구나. 몇 마리 양보하지”하고 이야기 했다. 과거 일본군에 복무한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여성을 보면 위안부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으나 그냥 침묵하고 대대장에게 갔다. 적십자 병원 간호사들을 발견한 이야기를 하고 서울로 보내겠다고 보고했다. 대대장도 동의했다.

갑자기 3소대 장기봉 하사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남자 한명을 포로라고 데리고 왔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왕년의 인기가수 고복수 였다. 북한군에게 잡혀 따라 다니다가 돼지우리에서 체포된 것이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있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북한군에게 부역한 것을 걱정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대용은 자신의 배낭에서 깨끗한 양말을 꺼내서 신도록 하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가지고 있는 캬라멜을 주어서 먹게했다. 부인인 황금심을 빨리 찾아서 건강을 되찾으라고 이야기하고 대대로 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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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과 기록

이대용 장군이 쓴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 중에 마지막으로 쓴 것이 ‘국경선에 밤이 오다’라는 책이다. 전두환의 장인인 이규동이 권유를 해서 쓰게된 책이다. 내용을 보니 이규동의 출간사가 보이지 않는다. 원래는 이규동이 출간사를 써주겠다고 했었는데 정착 출판될 때인 1984년에는 장영자 이철희 사건으로 이규동이 대외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먼저 저자의 말을 읽으면서 인상깊은 대목이 있어서 요약을 했다
그의 기록에 관한 생각들이다. 그는 평생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겼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록들중 대부분이 사라졌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고한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갖지 못한 자의 고뇌와 서러운 사연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때의 일기를 이데올로기 방항시기의 눈물겨운 일기라고 했다. 그러나 그 기록은 1947년 6월 29일 북한에서 반동분자로 몰려 공산당에게 체포될때 압수당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내려와 한국전쟁 발발이전까지도 계속 일기를 썼다. 그러나 1950년 6월 26일 피난길을 떠나는 하숙집 여학생이 춘천시 죽림동 집뜰에 파묻었는데 그 이후 폭격으로 그 일대가 폐허가 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중에는 일선 중대장 그리고 대대장으로 적군과 전투하면서 틈틈히 진중일기를 썼다. 그리고 1951년 초 중공군으로 부터 학습수첩이라는 일기책을 노획한이후거기에대가도 진중일기를 계속썼다.
그런 진중일기를 정리하여 국방부에 1951년 4월에 보내서 압록강에서 대동강까지라는 제목으로 국방부 발행의 전공기에 실렸다.

1952년초에는 금성 남방 553 고지의 대대장 호에서 얼어붙은 만년필의 잉크를 녹여가면서 ‘압록강 푸른 물’이라는 책을 썼고 1952년 10월 5일 140페이지의 단행본 책자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그 책은 이진섭 각색 오사랑 연출로 1962년 11월과 12월에 36회에 걸쳐 ‘푸른 별은 살아 있다’라는 제목으로 제2방송에서 연속극으로 방송되었다.

그 이후에 한국전쟁 전체를 정리한 ‘통곡하는 승리자’라는 책을 1964년 11월 20일 발간팼다. 이책은 1968년 10월 25일 일본어로 변역되어 조운신문사에서 ‘38도선’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이대용은 그 이후 월남에서도 일기를 썼고 월맹에 체포당하기 전에 프랑스 지인에게 맡겨 두었으나, 그 프랑스 지인이 후환이 두려워 모두 소각하고 말았다.

월맹의 치화 형무소에 있을때에도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 이후 귀국해서도 계속 일기를 썼으나 하던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상당수의 일기책을 압수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기책은 전쟁기념관에 기증했다.

앞으로는 국경선에 밤이 오다라는 책의 내용을 정리하여 앞에 있던 녹취록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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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후기) 사람에 대한 평가

이대용 장군 녹취록을 정리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이대용 장군에 대한 평가다. 이대용 장군을 잘 알던 사람들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주로 관찰자로서 그를 평가하던 사람이다. 제3자적 관점에서 그의 삶을 보던 사람들은 그를 위인의 반열에 드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그와 같이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평가가 엇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그가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과연 고집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고집이 세지 않은 사람은 충신 열사가 될 수 없다. 자기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고집이 세지 않을 수 있을까 ? 그런 경우 고집은 소신이 아닐까 ? 그들은 소신을 고집이라고 폄하하는 것이리라.

5년동안 월맹의 사형수 형무소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사람을 우리는 고집이라는 말 한마디로 가볍게 평가하고 만다. 자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을 고집이라는 말한마디고 폄하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가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는 그런 저급한 문화가 판치고 있는 것 같다.

이대용 장군 같이 소신이 분명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분명한 소신을 가진 사람을 고집세다는 한마디로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둥글둥글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둥글 둥글한 돌을 가지고는 벽을 쌓을 수 없고 담을 만들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집을 짓기 위해서는 돌이 모가나야 한다. 둥글 둥글한 돌은 보기에는 좋을 지 모르나 아무 짝에도 쓸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둥근돌이 좋은 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직장생활을 수십년 해왔지만 그런 둥근 돌들은 조직에 손해만 끼쳤던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난 돌이 필요하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모난돌이 우대를 받았으면 한다.

그래야 사람이 제대로 가치를 평가 받을 수 있다. 그래야 우리사회에 미래가 있다.


퍼블리토 유저 왈 : 「다운보팅 없이도 우리는 잘 해낼수 있습니다. 여러분 」 에 대한 갠적인 느낌

동의하는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는데 여러분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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