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12 북한군 여자 의용군 출신 김복희의 죽음

제 3대대장 조한섭 소령이 전사하고 제1대대 부관 권소위가 수류탄으로 자결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이대용은 마음을 추스릴 사이도 없이 지칠줄 모르고 달려드는 중공군을 상대해야 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중공군들은 약 1500 정도의 거리에서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제5중대의 뒤를 따라 고개를 내려가고 있었는데 제5중대의 첨병소대가 들판에서 다른 중공군 부대와 충돌했다. 제5중대는 이 적을 뚫으려고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던 이대용은 제 5중대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았다. 5중대를 증원하려 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병사와 부족한 실탕으로 무리한 싸움을 해보아야 희생자만 더 날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대용의 1중대 후미를 따라오던 제2대대와 제3대대의 패잔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대용은 제5중대장에게 연락병을 보내 적과 이탈할 것을 권한 후에, 제1중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공군의 장거리 기관총탄을 피해가며 회목동 지역을 향했다.

한시간 정도 중공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제2중대를 만났다. 제2중대장 박중위는 22살의 청년장교로 육사 8기생이었으며 육사 7기였던 이대용보다 한 기 아래였다. 제2중대도 중곤군의 타격을 받아 피해가 심각했다. 압록강에 진출했을 때는 모두 200여명 정도였으나 지금은 97명에 불과했다.

이대용의 중대에는 여전히 북한의 여자 의용군으로 있다가 포로가 되어 이쪽으로 동화되어 버린 이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복희, 이윤실, 박필숙, 최숙자 등등이 칼빈총을 들러메고 각 소대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 중에 평양출신의 이윤실을 허벅다리에 가벼운 총상을 입고 붕대를 감고 있었다.

오후 늦게 임영순 소위가 지휘하는 사단 수색대 10여명을 만나서 합류를 했다.

제2중대를 앞세우고 제1중대가 뒤에 서서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극성령 쪽으로 향해 가면서 좀 지나가다가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60살 먹은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국군 제19연대의 1개 대대가 오늘 아침에 적에게 포위당했다고 걱정하면서 극성령 쪽으로 철수해갔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내 극성령 부근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극성령 위에는 중공군 수천명이 진을 치고 있으며, 오늘 아침 19연대 1대대가 그들과 교전끝에 패배하여 분산되고 말았다고 알려주었다.

상황을 살펴보니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나갈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주민들도 위험해서 가지 않는다는 절벽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중공군이 뒤에서 따라 붙었으나 워낙 산세가 험해서인지 따라오다가 포기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약32시간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강행군을 계속한 후 정수동에 도착해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압록강을 떠난지 닷새재 되는 날 이었다.

식사가 끝나는대로 태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평까지는 70리길이 남았다. 죽을 힘을 다해 태평 10리를 남겨놓고 시골 동네에 들어갔다. 주민들에게 태평에 국방군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틀전에 뙤놈들이 들어왔다고 했다. 결국 태평으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구장을 향해 행군을 했다. 중간에 중공군과 간헐적으로 전투를 했으나 병력은 무사했다. 사지를 가누기도 힘들 만큼 피로한 상태에서 하루에 150리 길을 행군했다.

가면 갈수록 동서남북 할 것없이 중공군 천지였다. 이대용은 도저히 빠져 나갈 방도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행군을 했다. 적의 추격을 계속 받으면서 전투를 했다.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제2중대는 30여명의 병력을 상실하고 사단 수색대 10여명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적의 습격으로 이대용도 제2소대장을 잃었다.

중공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제2소대와 같이 주력을 엄호하던 사단 수색대 임소위가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때 김복희가 임소위를 끌고와 지혈을 했으나 곧 바로 숨지자, 제2소대와 함께 싸우다가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출혈과다로 전사했다는 것이다. 숨을 거부면서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를 한번 보고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울고 있었다고 한다. 김복희는 북한군 여자 의용군으로 포로가 되어서 국군과 함께 전투하다 사망했던 것이다. 이전투에서 북한 괴뢰군으로 있다가 포로가 되어 싸우다가 제1중대에 동화되어 버린 귀순병이 더 용감하게 전투를 하다가 3명이 전사했고, 중대의 식사운반과 포탄운반을 하며 종군하던 민간인들도 총을 들고 싸우다가 2명이 전사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포위망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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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유업 이제는 주주들에게까지 손을 쓰고 있나;;;;

내가 이러려고 국내기업에 투자했나 자괴감이 들어;;;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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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11 기약없는 철수 길

어젯밤에는 중공군이 산에 있고 아군이 산밑에 있었으나 하루만에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이대용은 중공군의 박격포탄 소리를 들으며 길을 재촉했다. 한시간 쯤 지나서 높은 산의 분지를 발견했다. 학교 운동장 만한 분지에는 약 1500명 정도의 장병들이 흩어져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 부연대장, 대대장 같은 상급지위관은 없고 고장 중대장급 지휘관이 몇 명있었다. 중대장이 있는 부대는 재편성을 하고 있었으나 그러지 못한 부대는 말이 아니었다.

서로 어쩔 줄 모르고 우루루 몰려서 동남쪽을 향해 개미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자기 상관을 잃은 사병들이 상관이나 동료를 찾아내려고 이리저리 몰리는 인파는 마치 출렁이는 갈대와 같았다. 이대용은 그런 병력을 재편성 하려고 해보았으나 적의 추격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어서 잘 되지 않았다. 병력을 재편하려면 4-5시간은 필요해 보았다. 자칫하면 중공군에게 전멸당할 위기였다.

재편성은 포기하고 병력들에게 “동쪽으로 돌아서 남으로 남으로 걸어나가자. 그리하여 적의 추격에서 속히 이탈하자”라고 이야기 했다. 그동안 연대장이나 대대장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중공군의 포탄이 아군의 발뒤꿈치를 따라오면서 계속해서 터지고 있었다. 중공군들은 기관총으로 장거리 사격을 하면서 따라 오고 있었다. 저항을 해보았으나 헛된 짓이었다. 실탄재보급이 끊어진 상태였다. 아주 절대절명의 상황이 아니면 실탄을 사용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전력을 다해 중대를 남쪽으로 내 달리게 했다. 그러나 중공군도 그에 못지 않게
계속 따라 붙고 있었다.

바로 이때.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손수건을 꺼내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행기는 이대용의 부대 위를 빙빙 돌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실탄하고 먹을것을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와 동시에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따라 붙던 중공군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남으로 내려가는 아군의 머리위로 비행기는 빙빙돌며 지켜주고 있었다. 비행기 보호를 받아가며 걸어간지 한시간 쯤 되었을 때, 갑자기 비행기가 이상한 폭음소리를 내더니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모두 아무말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양강(兩江) 북동쪽에 있는 태암산 서북쪽의 높은 산을 오라가다가 뜻밖에도 아군부대를 만났다.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이 분산된 병력을 수습해서 남으로 가고 있었다. 제5중대와 제7중대가 주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2대대장도 연대장과 제1대대장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이대용은 김종수 중령의 지휘를 받아 제6사단 사령부가 있는 태평으로 가기로 했다. 약 30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정도 거리면 이틀 정도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밤 12시경 10분간 휴식이라는 명령에 따라 모두들 길가에서 골아 떨어졌다.

이대용도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하는 소리에 깨어 보니 벌써 12시 25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 있던 부대는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대용은 중대원을 깨워서 부지런히 걸었다. 어느 화전민 부락 입구에 도착했다. 옥수수단 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제7중대라는 대답을 했다.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이 여기에서 숙영을 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대대장 김종수 중령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용은 부락민들에게 지형과 적정을 확인해보았다. 중공군 백여명이 어제 이곳을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중대 선임하사관 김상사가 제5중대가 중공군 세명을 사살하고 5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이야기를 보고해왔다. 시간은 새벽 2시 30분이었다. 이대용은 빠르면 3시간 늦으면 5시간정도면 중공군이 공격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작로가 약 1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용은 2시간 반 정도만 쉬고 새벽 5시에는 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을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눈을 떠 보니 아침 6시 3분이었다. 동네사람들이 조밥을 지어주었다. 급하게 먹고 거절하는 밥값을 호주머니 속에 넣어주고 떠났다. 그때 시간이 6시 15분이었다. 제1중대와 5중대가 마을을 떠난지 15분이 채 되지 않아서 갑자기 뒤에서 총소리가 콩볶듯이 들려왔다.

약 2시간 쯤 지나서 고개마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약 300여명의 아군 패잔병들이 몰려왔다. 연대본부중대, 근무중대의 일부와 제3대대의 일부였다. 그들로 부터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이 전사하고 제1대대 부관 권소위가 부상당해 적에게 포로가 되기 직전 수류탄으로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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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5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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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트에서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TCOK)의 탄생이후 실제적인 과업을 수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UNTCOK는 이미 소련이 동의하지 않았고 서구국가에서도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유엔한국임시위원회를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다른 방식으로는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듯 합니다. 이미 미국은 UNTCOK를 통해 남한만이 단독선거와 정부수립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소련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차지한 북한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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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트에서 우리는 1947년 1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회의 창설이 한국문제에 대한 점증하고 있는 국제적 논란을 초래한 것을 보았다. 캐나다 수상 맥캔지 킹은 마침내 UNTCOK에 참가하는데 동의했으나, 이는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이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 수상은 그가 언급했던 UNTCOK의 비타당성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만일 소련이 UNTCOK이 지원하는 선거에 협조하지 않으면, 위원회는 유엔에 그 권한을 되돌려주어야 하며 캐나다 대표단을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유엔 회원국들은 소련이 국제사회의 조정된 압력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하여 1948년에 한국의 통일을 허용할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곧바로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그들이 소련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엔 회원국이었으며, 이는 1945년 유엔이 창설될 때 스탈린의 협상의 결과였다. 1947년 말 한국문제가 피크에 달했을때,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자치의 겉치레를 이용했다. 모스크바가 정치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UNTCOK의 과업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관리들은 위원회가 남부지방에서의 선거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응했다.

미국의 주장에 대한 UNTCOK 대표단의 견해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이 한국에 도착했던 1월에, 그들은 점령군 사령관들에게 그들이 위원회와 협조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UNTCOK는 또한 두개의 위원회를 조직했다. 하나는 그들이 처리하기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한국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장하는 책임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이전에 소련과 미국의 공동위원회가 실패했던 과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위원회가 어떤 한국지도자들과 협의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예측한대로, 하지 장군은 위원회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완전한 협조를 약속했으며, 위원회에 사무실 공간과 숙소, 수송 및 음식도 제공했다. 한편 소련 지휘관 코로트코크는 간단하게 UNTCOK의 요구를 무시했다. 이런 행동은 유엔 사무총장 트리기에 리에( Trygye Lie)의 개입을 촉발했으며, 뉴욕의 소련 대표단에게 위원회에 협조할 것을 호소했다. 소련 대표단의 대표로 나중에 외무장관이 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꼼짝하지 않았으며, 그는 리에에게 소련은 이미 UNTCOK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소련의 비타협적 태도는 한국의 정치지도자들로 하여금 UNTCOK와 협의를 하게 했으며 대중들에게 공표토록 했다. 남한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은 이승만은 단독 선거와 경비대의 창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남한에서 국제적인 감독하의 선거에 반대했으며, 이는 한국의 분단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통일은 오직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 달성될 수 있으며, 국가의 분단을 종식시키기 위한 남북 연석회의의 개최를 위한 지지의 동원을 시작했다. 김규식은 이승만과 심각하게 갈라섰으며, 전국적인 선거을 제외하고는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김규식은 UNTCOK에 자신의 요구를 직접 주장했다. 위원회에서, 그는 강력하게 만일 소련이 북한지역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면, 위원회는 이문제를 유엔중재위원회로 넘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몇몇의 위원회 위원들을 그의 주장에 설득이 되어 UNTCOK의 과업은 유엔중재위원회와 협의할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UNTCOK의 도착이후 남한에서 벌어진 심각한 폭력사태를 살펴볼 것이며, 북한을 지배하고 있던 기구들이 위원회의 존재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펴보겠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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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45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In the last post, we saw that the creation of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 in November 1947 brought to a head the simmering international disagreement over the Korea issue. Canadian Prime Minister MacKenzie King finally agreed to participate in UNTCOK, but only after President Truman argued forcefully that the very viability of the UN was at stake. King nonetheless remained so concerned about the illegitimacy of UNTCOK elections that he qualified his commitment. He stipulated that If the Soviets did not cooperate with UNTCOK-sponsored elections, the Commission must return its mandate to the United Nations or the Canadian representative would withdraw.

Other UN members held out hope that the Soviets would not defy coordinated pressure from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would therefore allow unification of Korea in 1948. Moscow soon proved them wrong, however. The Soviet republics of Ukraine and Belarus were UN members on their own, even though they were part of the Soviet Union, because of the deal Stalin negotiated when the UN was created in 1945. Now, as the Korea issue peaked in late 1947, Stalin made use of this facade of Ukrainian autonomy. To protect Moscow from the political fallout, Ukraine announced that it would not participate in the work of UNTCOK. American officials then responded by insisting to the Commission that it had the power to hold elections in the southern zone alone.

Whatever the UNTCOK representatives’ views of the American argument, when the group arrived in Korea in January, it immediately decided to send each occupation commander a request that they cooperate with the Commission. UNTCOK also organized itself into two committees. One was responsible for ensuring a free atmosphere in Korea, though how they were to accomplish such a formidable task was not specified. The second was to carry out the task the earlier Joint Soviet/American Commission had failed to complete, which was to determine which Korean leaders would consult with the Commission.

Predictably, General Hodge responded positively to the Commission’s request. He pledged full cooperation, and also provided its members with office space, housing, transportation, and food. Soviet Commander Korotkov, on the other hand, simply ignored UNTCOK’s request. This inaction prompted UN General Secretary Trygve Lie to intervene, appealing to the Soviet delegation in New York to cooperate with the Commission. The head of the Soviet delegation, future foreign minister Andrei Gromyko, was unmoved; he simply reminded Lie that the Soviet Union had already expressed its negative attitude toward UNTCOK’s activities. In response, the American permanent representative to the UN, Warren Austin, urged Lie to agree that UNTCOK would hold elections in southern Korea alone.

Soviet intransigence prompted Korean political leaders to intercede with UNTCOK and take their case to the public. Believing the South was in danger of communist takeover, Syngman Rhee demanded separate elections and the creation of a security force. Kim Kyu-sik, however, opposed internationally supervised elections in the southern zone since this would solidify the division of Korea. He insisted that unity could only be achieved by Koreans themselves and began to mobilize support for convening a North-South Conference to end the division of the country. Significantly, Kim Ku broke with Rhee Syngman and announced opposition to anything less than nationwide elections.

Kim Kyu-sik took his argument directly to UNTCOK. Speaking before the Commission, he argued forcefully that if the Soviets refused access to the northern zone, the Commission should refer the matter back to the UN Interim Committee for reconsideration. Several Commission members were persuaded by his argument and urged that UNTCOK’sr work be postponed until they could confer with the UN Interim Committee.

In the next post, we will look at the serious violence that erupted in the south in the wake of UNTCOK’s arrival and how the governing body in the North responded to the presence of the Commission.

[Sources: This post relies, in part,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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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오다) 10 예비진지에서 중공군과 교전, 철수 그리고 제3대대장과 이별

중대 예비 진지에 도작하자 마자 기관총 2정을 개천 건너편에 배치했다. 적이 돌아 오는 것을 타격하기 위해서였다. 신작로를 차단하고 왼쪽산을 확보하기 위한 중대 좌일선의 배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중공군은 피리를 불며 덤벼 들었다. 중공군은 야간에는 아주 감탄할 만큼 능숙하게 공격을 했다. 서로 던지는 수류탄이 작열하고 기관총 예광탄의 붉고 푸른 선이 서로 얽히고 있었다.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대용의 제1중대는 적의 최초 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제1중대 후방에는 적이 벌써 쳐들어 와서 투닥거리고 있었다. 연대 주력이 재편성을 하지도 못한 채 두드려 맞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더 이상 패군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방도는 없는 듯 했다. 대대장이나 연대장의 생사도 알 수 없이 전투는 혼란했다. 지휘계통이 마비되었으니 이대용은 독단으로 판단을 해야 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2분이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가 적을 맞아 싸운지도 벌써 1시간이 넘었다. 마침 정면의 적들이 조용해졌다.

이대용은 중대를 철수시킬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야간전투에서 손실을 당하지 않고 부대를 철수시키려면 조용할 때 적으로부터 이탈해 나가는 것이 제일 좋다. 적과 치열하게 싸울때 철수하려면 막대한 손해가 나는 법이다. 이대용은 잠시 망설였다. 어디로 통과해서 어디고 가야할까 하면서 잠시 주저하고 있을때 중공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피리소리가 포탄, 기관총에 섞여서 여기저기에서 들었다. 온똥 쏼라 쏼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명인지 가늠도 하기 어려웠다. 제1중대 오른편에 배치해 놓았던 기관총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기관총 진지에는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이 작열하고 있었다. 이대용은 무의식적으로 “위생병 기관총 진지로 가보라”라고 했다. 위생병이 벌떡 일어나자 이대용은 이내 위생병의 팔을 잡아다녔다. “못간다. 그만둬라”라고 말했다.

제2소대의 김재일 일등중사가 부상병을 업고 와서 이대용에게 신작로를 지키고 있던 아군은 돌파를 당했다고 보고했다. 이대용은 서쪽 냇가에 있는 1소대를 동쪽으로 철수시키려 했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제1소대는 거의 전멸당한 상황이었다. 새벽 3시 30분경 이대용은 전투가능한 병력 185명중 약 60명을 잃은채 철수하기로 했다. 북쪽으로 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공군이 꽉차 있었다. 왼쪽의 험준한 산만 조용했다. 이대용은 왼쪽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약 20분정도 걸었을 때, 약 100미터 앞에서 중얼거리는 사람소리가 들렸다. 정찰병을 내보냈다. 약 15분후에 정찰나간 서소위가 아군이라고 보고해 왔다. 거기 가보니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이 패잔병 30여명을 데리고 있었다. 조소령은 163cm의 단신이었다. 조소령은 제1중대의 병력을 포함하여 약 160명을 데리고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대를 정지시키고 10분간 휴식을 명한후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휴식이 끝난 다음 조한섭 소령은 이대용에게 “나는 여기에서 3대대 병력을 수습해서 갈테니 이대위는 빨리 북으로 가서 연대장님이나 제1대대장 지휘하로 들어가도록 해”라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에게 같이 빨리 북쪽으로 가자고 권고했으나 조한섭 소령의 고집을 꺽을 수는 없었다. 이대용은 조한섭 소령의 명령대로 제1중대만 이끌고 북쪽으로 떠났다. 그 순간이 조한섭 소령과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도 모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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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9 중공군과 야간전투 그리고 후퇴

후방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은 이대용은 버릇처럼 손목에 차고 있던 야광 시계를 쳐다 보았다. 이대용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전 5월에 봉급을 받아서 춘천 시계방에서 산 것이었다. 비를 맞아도, 땀에 젖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정확한 시간을 가리킨다. 이대용이 음성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을때도 이 시계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병원으로 이송될때 중대 선임 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보관하고 있었다. 이상사가 낙동강변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이 시계만 남은 것을 중대 서기 정화수 2등 중사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이대용이 퇴원하여 신령에서 다시 차게 된 것이었다.

드디어 밤 12시가 되었다. 기관총 소리가 났다. 조금있다가 적의 포탄이 아군 진지에 떨어졌다. 중공군이 푸른 예광탄과 우리의 붉은 예광탄이 유성처럼 선을 그으며 무수히 엇갈렸다. 낮에는 아군이 유리했지만 밤이되자 적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아군은 내일 계속 적을 돌파하여 자동차 행군을 하기 위한 것이어서 기다랗게 뱀처럼 도로 옆에 깔려 있는지라 방어를 효과있게 할 수 없었다. 제일 앞에 있는 부대들은 실탄이 점차 부족해졌고, 숫적으로 몇 배인 적군의 공격에 방어선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졌다. 적은 전방뿐만 아니라 좌우측에서도 공격해왔다. 중공군은 야간 사격훈련이 잘 되어 있는 듯 야간 공격을 매우 효과적으로 했다.

연대의 제일 북방에 있었던 이대용은 남방에 위치한 제2,3 대대가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보면서 빨리 날이 새기마늘 기다렸다. 적은 낮에 높은 산위에서 아군의 배치상황을 파악하고 용의주도하게 작전계획을 수립한 후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오전 1시 30분이 되었으나 전방의 아군은 계속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당시 전방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새벽 2시가 되자 전방의 아군진지에서 총성이 멎고 이쪽을 향한 총소리만 들렸다. 조그 후에 제2, 3대대의 방어선이 무너진 듯 전방에서 부상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신작로를 따라 검은 인파들이 북으로 북으로 몰려들었다.

제2, 3대대 장병들은 완전히 분산되어 와르르 와르르 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주간과 달라 야간은 서로 보이지 않아 한번 분산되면 적의 추격속에서 재편성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제2,3대대는 지휘계통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제1대대의 2중대와 3중대도 제3대대의 후방 왼쪽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무너진 것 같았다. 지금 적과 맞설 수 있는 것은 1중대 밖에 없었다. 제일 후방에 있던 중대가 제일 전방이 되고 만 것이다. 기관총이 불을 토하기 시작했고 적의 포탄과 총탄이 제1중대 진지에 떨어졌다. 부상자의 비명소리 중공군의 고함소리등이 사방에서 들렸다. 이대용은 여기가 자신의 무덤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대대에서 파견된 전령 오달희 하사가 찾아왔다. 바로 밑에서 대대장이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친 것 처럼 빨리 뛰어 내려갔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이대용을 보더니 하늘을 보고 벌렁 누웠다. 그리고는 “제1중대는 여기서 별명이 있을때까지 적을 막아 내도록 해”라고 했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도 이곳을 자신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대용은 대대작전주임 김윤환 대위에게 대대장을 모시고 7,8백 미터 후퇴하여 제1대대의 제2중대와 제3중대 병력을 수습하여 재편성하라고 이야기하고 중대로 돌아왔다.

적의 소수부대는 이미 제1중대 뒤로 들어왔으나 중대는 적의 주력부대를 막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만일 이대용의 제1중대가 이곳에서 흩어진다면 뒤로 빠져나간 연대본부, 제2,3대대 그리고 제1대대의 주력이 재편성할 여유가 없어진다. 제1중대가 전멸을 당하더라도 연대주력이 멀리 이탈하여 재편성할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1중대도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적군은 제1중대의 몇십배였으며 인산인해의 3면 공격을 감행해왔다. 전투라면 이골이 난 이대용도 야간에 이렇게 동적인 전투는 해 본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지 약 20분이 되었을까 말까할 상황에 제1대대 본부와 무전연락이 두절되었다. 마침 제3소대 진지가 중공군에게 유린되었다. 이대용은 전방 20미터 전방에서 알아듣지 못할 중공군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그곳에서 소형 박격포를 발사하는 소리가 났다. 피리도 삐리릭하고 불어댔다. 박격포같은 화기를 최전방까지 가지고 나와 쏘는 방법도 있나 하는 생각에 놀랐다. 이대용은 수류탄을 중공군의 포진지를 향해 던졌다. 수류탄이 터지자 자동카빈소총으로 총알을 퍼붓고 곧바로 자리를 옮겼다. 더 이상 현지점에서 전투를 할 수 없었다.

이대용은 400미터 후방에 있는 에비지연진지로 후퇴하라는 약속된 신호탄을 공중에 발사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진지는 전술적으로 불리했으나 후방에 있는 예비지연진지는 아주 유리한 지형이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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