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2 평양에 들어온 헌병이 아녀자를 겁탈한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다.

1950년 12월 3일 미제1기병사단에게 두들겨 맞은 중공군은 가창, 신창방면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중공군 대부대가 측방으로돌아 성천을 무혈점령하고 평양을 측방에서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유엔군 총사령부는 마침내 가창, 신창 방면의 부대를 평양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날 저녁 제1중대는 제7연대의 일부로 도보행군으로 평양으로 향했다. 많은 차량들과 군인들이 철수하느라고 길은 대혼잡을 이루었다. 중대는 강행군으로 12월 4일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평양시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고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중공군의 선두가 평양 이미 평양교외에 진출했다는 이야기가 들렸으며 제1중대는 5일 새벽 대동강을 건너 상원으로 철수하여 방어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대용은 숙소로 할당받은 어떤 민가의 사랑방에서 쉬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집에 노인들과 남자들만 있고 젊은 처녀와 색시들은 모두 어디론가 피해버리고 없었다. 자정이 되었다. 안방에서 늙은 노인이 쿨룩쿨룩 기침을 했다.

이대용은 오늘 초저녁 황해도 집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홍하사로 부터 들었던 소식때문에 전전 반측했다. 이대용은 보름전에 중대의 전령인 홍하사를 통해 황해도 고향의 아버님께 편지와 그동안 받았던 봉급을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홍하사는 이대용에게 지난 음력 7월 그믐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큰 아버지의 편지를 보여준 것이다. 목놓아 울고 싶었으나 부하들 앞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안방 노인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얼마 있다가 옆방에서 자는 홍하사를 깨워 그 노인을 사랑방으로 모시고 오라고 이야기 했다.

나이를 물어보니 예순 셋이라고 했다. 이대용은 화랑담배를 노인에게 드렸다. 노인을 그것을 까서 담뱃대에 담아 피웠다. 캐러멜을 꺼나 노인에게 권했더니 옆으로 밀어 놓으며 손자들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새벽 2시가 되었다.

노인은 이렇게 좋은 군인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이야기 했다. 그게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니 한숨을 쉬면서 그간 겪었던 이야기를 한다. 국방군이 평양에 들어왔을 때 다들 반가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후에 헌병들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중 헌병장교 한명이 옆집에 들었는데 어느날 저력 색시들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세명이나 결단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마을의 처녀와 색시들이 초저녁에 전부 피난갔다는 것이다. 그말을 들은 이대용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마도 일본군의 특무헌병 하사관이나 졸병으로 있던 작자들이 일본군 헌병들이 하던 짓을 그대로 배워서 했던 것인 듯 했다. 이대용은 노인에게도 그런 놈들은 일본군 특무헌병출신일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남아 계급이 올라가면 그런 놈들을 모조리 처단하여 씨를 말릴 것이라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 3시가 되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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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1 미 제1기병사단과 중공군의 일전

당시에는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승전의 공은 자신에게 돌리고, 패전의 책임은 부하들에게 추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한 지휘관은 패전후, 부하지휘관을 만나면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때리고 권총을 꺼내 휘두르고 즉결처분하기까지도 했다. 이대용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의 은혜에 감사하며 피흘려 보답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대용은 연대장이 권하는 건빵을 먹으면서 성(城)의 견고함은 화목만 못하고, 용장은 지장에 불급하며, 지장은 덕장을 따를 수 없다는 옛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니 미 제1기병사단은 가창일대에 배치되었다. 탱크 20여대가 널찍한 가창 계곡에 배치되어 있었다. 미 제1기병사단이 배치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1중대는 가창 서북방에 배치되었다. 중대원들은 어젯밤의 전투에서 상당수가 행방불명되었다가 하나씩 둘씩 돌아오고 있었다. 아직도 20여명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중에는 새로 부임한 신임 소대장 노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가 바위산 중턱에 올라가니 오른쪽 넓은 가창 계곡에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중공군이 미 제1기병사단을 공격한 것이다. 중공군은 제4야전군 예하 부대였다. 이대용은 산으로 올라가다가 발밑의 공방전을 바라보았다. 중공군의 초록빛 예광탄이 널찍한 계곡을 꽉메우며 방직 공장의 실처럼 얽혀 날아 들었다. 중공군의 초록빛 예광탄이 발사지점에서 점차 전방으로 이동하는 것은 중공군의 진격정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 제1 기병사단도 점점 치열하게 사격했다. 미 포병이 조명탄을 발사하니 주변이 대낮같이 밝았다가 다시 암흑으로 변했다. 탱크는 소이 연막탄을 쏴댔다. 마치 구름같은 국화꽃이 활짝 피었다가 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우세하던 중공군은 소낙비 처럼 쏟아지는 미군의 기관총과 번갯불같은 조명탄, 야포탄과 탱크포탄에 맞아 으스러지고 있었다. 전방에 나왔던 중공군의 기관총과 소총들도 모두 분쇄된 듯 소식이 없었다.

중공군의 예비대가 다시 투입되었다. 제2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푸른 예광탄이 다시 불통을 튀기며 길게 꼬리를 달고 미군기지를 향해 날아갔다. 중공군의 야포탄도 미군기지에 무수하게 떨어졌다. 중공군의 초록빛 예광탄과 미군의 붉은 예광탄이 수백 수천의 유선을 그리며 서로 교차했다. 가지 각색의 포탄이 떨어졌다. 이런 격전은 처음 보았다. 옆에 있는 소대장에게 이런 구경은 아무리 돈을 줘도 못해라고 하면서 죽기전에 잘 봐둬라고 했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였지만 신임소대장은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공군이 제3파가 증강되었다. 저녁 9시경 마침내 중공군이 미군의 주 전투진지에 돌입했다. 중공군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미군의 방어진지를 유린하고 있었다. 산위에서 미군을 응원했으나 원체 거리가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공군의 대병력이 미제1기병사단의 주전투진지 깊숙이 진입했다. 미 제1사단은 패배직전이었다. 60미리 박격포로 중공군 후방을 타격했으나 얼마후에는 소지한 포탄을 다 쏘아서 어쩔 방도가 없었다

미군의 주전투진지는 무너질 것 같았으나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결국 새벽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끝에 중공군은 시체를 즐비하게 깔아놓고 사라져 버렸다. 산위에 있던 이대용의 제1중대원들은 미 제1기병사단의 용전에 갈채를 보내면서 뜨거운 감사를 올렸다.

어둠이 벗어지고 날이새니 눈앞이 훤히 내다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뜨고 두어시간 후 대대장 김용배 중령이 제1중대 방어진지에 순시차 올라왔다. 어젯밤의 전투를 대대장에게 이야기 했다.

김용배 중령은 어젯밤의 백병전에서 미군 탱크 5대가 적의 수류탄에 파괴되고 미군 대대장 1명이 적에게 붙들려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대장이 붙들려갈 정도의 결전을 하면서도 끝까지 진지가 무너지지 않았으니 미군이 참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이대용에게 왜 미군이 저렇게 잘 싸우는지 아느냐? 고 물었다.

이대용은 첫째는 그 부대의 사기가 왕성해야 하고 두번째는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답했다. 그러자 김용배 중령은 전투에서 이기려면 첫째 잘 훈련된 장병, 둘째 화력, 그리고 사기앙양과 단결심의 유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했다.

이어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연대장의 호출을 받아 돌아 갔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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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0 중공군을 아군으로 오인하다.

오늘 저녁에 죽기를 각오하고 나니 어떻게 죽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값있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대장이 붙들어 놓은 신병들과 이대용을 따라온 고참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고개 밑으로 내려갔다.

다시 이길을 올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대용이 제일 선두에 섰다. 그 뒤에 중대전령, 무전병, 통신하사들이 따라왔다. 그 다음에 소대장과 소대원들이 따랐다.

선두에 선 이대용이 고개마루에서 12,3보를 내려가지 마자 주막집이 하나 보였다. 그 주막집을 지나 4,5 미터만 내려가면 자동차 신작로인 큰길과 오솔길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신작로를 따라 4, 50 미터를 내려가면 급커브길이 있고 거기에는 대대의 중화기 중대 수냉식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다.

원래는 제1중대를 돌파하고 올라오는 오솔길의 적을 사격하기 위해 종심깊게 배치해 놓은 후방의 기관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기관총이 돌연 총성을 내면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대용은 무슨 일인가 해서 그 지점의 상황을
응시했다. 큰길을 따라 올라오던 먹구름 같은 군인 행렬들의 집단이 기관총구 불과 2,3 미터 앞에서 정강이를 맞고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고 있었다. 뒤에 따라오던 군인들은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를 소총으로 쏘고 있었다.

서로 손을 내어 밀면 붙들 수도 있는 정도의 근거리에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대용은 큰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는 부대를 제3중대라고 생각했다. 분명 큰 길 바로 밑에는 제3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용은 아군 3중대와 중화기 중대인 4중대간 전투가 벌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야간에는 아군끼리 서로 모르고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답답했던 이대용은 큰 소리로 “야! 아군끼리 싸우는 거 아니냐? 서로 확인해봐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대 누군가가 수류탄 수류탄 하면서 죽어갈 것처럼 외쳤다.

마침 고개로 올라오는 1명의 군인이 이대용 앞을 지나갔다. 이대용은 그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너 3중대원이냐 ? 저기 3중대하고 4중대하고 싸우는 거지? 하고 물었다. 그는 “응 아군끼리 싸우는 거야”하고 지나갔다. 대답이 시원하지가 않았지만 그말을 듣고 아군끼리 전투라고 확신을 했다.

그는 방한 전투작업모를 쓰고 긴 군용외투를 입고 있었다. 당시 아군은 철모를 쓰고 야전잠바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그가 아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대용은 그것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했다. 전투에 잔뼈가 굵은 역전의 야전 중대장이 적군을 식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중공군 길안내 하는 북한군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이대용은 바로 기관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큰길을 따라오던 군인들의 선두는 정지되어 있었으나 그 뒤에 따라오던 군인들은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접근한 이대용은 큰소리로 “너희들 3중대냐 ? 조심해라. 아군끼리 싸운다”고 소리쳤다. 그런데 아뿔싸 들려오는 소리는 웅얼웅얼하는 중국말이었다. 그들은 중공군이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이대용은 정신없이 그길로 바로 뒤로 돌아 도망쳤다. 단숨에 50미터를 날듯이 뛰었다. 조금있다 바로 중공군의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죽는건가 ?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집같은 송장이 되었어야 할 이대용은 아무런 부상도 없이 무사했다.

곧바로 중공군들이 따라왔다. 고개마루터기를 점령한 중공군은 가창방면을 향해 줄줄이 걸어나가고 있었다. 중공군의 야간행렬은 3시간 가까이 계속되었고 제일 후미에는 마차들이 가고 있었다. 중공군이 다 지나가고 동이트자 이대용은 홀로 산을 타서 적의 포위망을 탈출하기로 생각했다. 칼빈 소총은 자동스프링이 빠져 달아나고 탄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허리에 차고 있었던 소련제 떼떼 권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1시간 동안 산을 넘어 적진을 지나서 다시 미제1기병사단 제8연대의 제3대대를 만났다. 거기서 다시 이대용은 제7연대를 찾아갔다. 제7연대 본부는 가창 부근 개울가 덤불옆에 있었다. 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건빵 봉지를 개울바닥에 내려놓고 식사대용으로 먹고 있었다. 임부택 대령은 이대용을 보자 다정하게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제1중대장 수고했어, 제1중대는 우리 7연대의 가장 정예중대지. 이번에 패한 것은 중대장 잘못이 아니라 내가 지원을 잘못한 탓이야. . . “라고 임부택 대령이 이대용을 다독였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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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19 다시 전선에 투입되다.

맹산 북창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였다. 이대용은 북창리 북방 3킬로미터 지점에서 덕천과 북창 가도를 차단하기 위해 부대를 배치했다. 제2소대를 예비로 두어 중공군이 전선을 돌파하더라도 종심을 가지고 저항하리가 생각했다. 땅은 얼어붙어 있었고 축성장비인 삽과 곡괭이가 없어서 전투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침 북창리 치안대원들이 삽과 곡괭이를 민가에서 빌려와 작업을 도와주었다. 약 6시간 이후에 방어진지 공사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적과 싸울 수 있는 태세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부대 이동명령이 내려왔다. 제1중대는 다시 서쪽으로 약 30리 정도 이동하여 해발 300미터가 넘는 고지일대에 배치되었다. 여기서도 다시 이동명령이 내려와 1950년 11월 29일 야간행군으로 맹산 북창과 가창사이에 있는 미럭고개를 향해 걸었다.

미럭고개는 가창 동북방에 있는 전술적 요지로, 이 고개를 확보하면 덕천으로부터 맹산 북창을 거쳐 평양쪽으로 내려가는 큰 신작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중대장들을 집결시켜 고개 마루터기에서 방어명령을 하달했다. 제1중대는 오솔길을, 제3중대는 신작로를 차단하고 제2중대는 고개 능선에서 예비대로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대용은 중대원들을 이끌고 고개 중턱에서 병력을 배치했다. 부대 배치를 하면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개인 산병호와 공용화기호를 파야 하는데 야전삽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고참병 뿐으로 전체 병력의 1/5에 불과했다.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못하면 저항다운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모조리 당하는 형국이 될 뿐이었다. 대대장은 내일 아침에 미 제1기병사단과 미럭고개에서 교대하므로 하루밤만 견디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1개분대에 2개밖에 없는 삽으로 언땅을 파고 있었다. 60미리 박격포는 밭 가운데 있는 무덤 뒤의 땅이 꺼진 지역에 세워 놓았다. 삽이 없는 신병들은 전방에 적군이 나타나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숨을 곳 하나없이 신병들은 추위에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이대용은 신임 소대장들이 소대배치한 것을 살펴보고 중대 지휘소로 돌아와 막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계는 24시 5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갑자기 500미터 정도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대용은 그 소리가 적의 소총소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10여발의 기관총 소리가 들리더니 푸른 예광탄이 이대용의 왼쪽 어깨옆을 지나갔다. 중공군의 기습이었다. 이대용은 어둠속에서 기관총의 응사를 지시했다. 흙가죽만 벗겨놓은 깊이 5센티미터 정도의 산병호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밭고랑이 나을 것 같아서 그 뒤에 업드려 보았으나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 일어서 우측에 있는 무덤 쪽으로 몸을 옮기려는 찰라 적의 포탄이 주변에 떨어졌다. 이대용은 겁이 덜컥 났다.

여기서 아무런 엄폐나 차폐물이 없이 적의 소총이나 직사탄에 몸을 완전하게 노출하고 있는 것은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개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제3소대장 대리 박 상사가 중대장 이대용을 부르고 있었다. 신병들은 매에 쫓기는 참새처럼 뒤로 돌아서서 와르르 도망치고 있었다. 여기서는 저항이 불가능하니 산마루에 올라가 능선에 몸을 숨기고 머리와 총만 내놓고 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눈앞에서 수류탄이 작열했다. 신병들은 모두 달아나고 고참병 20명만 남았다.

이대용은 “능선으로 후퇴”하고 하면서 고개마루에 올라갔다. 거기에는 대대장 김용배 중령이 고슴도치 수염을 거꾸로 세우고 노기를 띄우며 이대용을 나무랐다.

“야, 이놈, 이대위, 너 여기까지 후퇴해 오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이대로 가면 우리뿐만 아니라 20리 후방에 숙영하고 있는 미제1기병사단까지 전멸이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날이샐때까지 이고개를 지켜라. 1중대에서 도망친 놈들은 잡아 놓았으니 이끌고 다시 되돌아가라”고 일갈했다.

김용배 중령은 평생 한번 다른 사람들에게 상소리 한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대용은 김용배 중령이 가장 아끼던 부하였다. 이대용은 그런 그가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오늘 밤 자기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여기가 내 무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런 변명없이 “네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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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6.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에는 한국 임시 위원회가 한국에 도착해서 곧바로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는 과정을 정리했다. 소련과 북한은 선거를 실시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고 이승만은 즉각적인 선거를 주장했다. 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시위와 사보타지가 전개되어 3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유엔한국임시위원회는 한국문제를 다시 유엔 중재 위원회로 넘기게 된다.

한국의 초기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결국 남한이나 북한모두 미국과 소련의 국가 이익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따지는 것도 무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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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곧바로 끝날 것이 확실해지자, 미국, 소련 그리고 일본은 전후의 세계에서 자신들이 유리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기를 쓰기 시작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자 마자, 스탈린은 8월 9일부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는 일본이 항복하기전에 전쟁에 참가하여 얄타회담시 약속했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곧바로 항복할 것이므로 소련보다는 미국에 점령당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미국에 간청했다. 처음에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미국은 갑작스럽게 소련의 만주와 한국에 대한 팽창을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한반도를 두개의 점령지역으로 분할하는 운명적인 조치를 제안하게 되었다. 소련은 이 제안을 받아 들었으며, 이는 그들이 전후 일본에 대해 가능한한 최대의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들에게 일본에서의 그들의 점령지역을 당연하게 수용하게 하거나 적어도 일본에 대한 연합국 통제 위원회에서 보다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1948년 1월은 한국에 있어서 유사한 순간이었다.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UNTCOK의 도착은 모든 이해 당사자들에게 한국의 미래 정부에 대한 문제가 곧바로 결정될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남한에서 예정된 선거에 반대하기 위해서 북한의 권력기관은 전체 한반도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헌법을 발표할 준비를 했다. 2월 16일 평양의 인민위원회는 몇달안에 전체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남한의 좌파 정당들은 조직적인 파업과 사보타지를 수행하여 미국이 점령한 지역에서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동조했다. 이후 몇달동안, 이러한 행동들로 인해 약 300명이 사망하고 1만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하지 장군의 좌파들의 사보타지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봉쇄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치는 UNTCOK 위원들의 우려를 초래했다. 캐나다의 조지 패터슨과 호주의 잭슨은 미국 지휘관의 전술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의 활동 정지를 요구했다. 다만 중국의 리 유완과 프랑스의 쟝-루이 폴 봉쿠(Jean-Luis Paul-Boncour)는 선거가 불완전하더라도 수행해야 하며 북한지역에 잇는 한국인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수용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수립하여야 하며 그럼으로써 남한이 소련이 지원하고 있는 북한의 장악시도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선거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위와 정치적 폭력을 조직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지 장군은 한국의 경비대를 정규군으로 확장하여 한국의 어떠한 정치적 성향들도 새로운 정부와 치안부대를 타도할 수 없도록 하길 바랐다.

하지 장군의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이후 계속되고 있던 미군의 동원해제가 확대됨에 따른 결과였다. 그의 제6보병사단은 1947년 초 1만 6천명의 장병에서 1948년 초에는 3200명으로 줄어들었다. 한국의 경찰이나 경비대의 지원없이, 제6사단은 한국의 남부는 고사하고 스스로도 보호할 수 없었다. 안보상황이 불안정해지자, 하지 장군은 만일 UNTCOK가 한국문제를 다시 유엔으로 가져간다면 상황이 매우 재앙적으로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정무고문관 조셉 야콥스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나 UNTCOK는 단독 선거는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유혈내전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2월 6일 위원회는, 한국의 미래 정부를 결정하는 당사자들에 대한 선거를 유엔이 승인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문제를 유엔 중재위원회에서 재고하도록 할 것을 결정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2월 유엔에서 한국과 한반도에서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논의를 알아 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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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46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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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ugust 1945 when it became clear that the Pacific war would soon end, the United States, the Soviet Union, and Japan began a frantic race over how to secure their interests in the postwar world. Immediately after the atomic bombing of Hiroshima on August 6, Stalin moved up the date for declaring war against Japan to August 9, desperate to join the war before Japan surrendered so that he could get the territorial gains promised him at Yalta. Japan’s political leaders signaled urgently to the US that they would soon surrender, to ensure they would be occupied by the Americans rather than the Soviets. As we discussed in some of the first posts, the US suddenly became concerned about Soviet expansion into Manchuria and Korea and therefore took the fateful step of proposing a division of Korea into two occupation zones. The Soviets accepted this proposal because they were frantically trying to gain as much control as possible over postwar Japan, hoping to persuade the Americans to grant them an occupation zone or at least a greater voice in the Allied Control Council for Japan.

January 1948 was a similar moment for Korea. As we discussed in the last post, the arrival of UNTCOK signaled to all interested parties that the question of Korea’s future government would soon be decided. Consequently, in order to counter the expected elections in the south, the authorities in the north prepared to issue a new constitution for the whole country. On February 16 the People’s Committee in Pyongyang announced that it would form a government for all of Korea within the next few months. Leftist parties in the south cooperated by organizing strikes and sabotage throughout the American zone to prevent elections from being held. Over the next four months, these actions led to nearly 300 deaths and more than 10,000 arrests.

General Hodge’s harsh reprisals against leftist saboteurs followed from his belief that it was urgent to contain the influence of Communists in the South. However, his actions alarmed many members of UNTCOK. George Patterson of Canada and S.H. Jackson of Australia began to press the rest of the Commission to investigate the American commander’s tactics. Only Liu Yu-wan of China and Jean-Louis Paul-Boncour of France were willing to accept that the elections would be imperfect and would exclude Koreans living in the northern zone.

Syngman Rhee was desperate to ensure that a separate government would be established so that the South could withstand attempted subjugation by the Soviet-backed North. He therefore threatened to organize demonstrations and political violence unless elections were held soon. General Hodge was eager to expand the Korean Constabulary into a regular army and prevent Koreans of any political leanings from subverting the new government and security forces.

Hodge’s urgency was partly the result of the extensive demobilization of US military forces that had been underway since the end of the war. His 6th Infantry Division had decreased from 16,000 officers and men in early 1947 to 3,200 in early 1948. Without the help of Korean police and Constabulary, the 6th Division could not even protect itself, much less southern Korea. Given this precarious security situation, Hodge agreed with his political advisor Joseph Jacobs that it would be disastrous if UNTCOK referred the Korean issue back to the United Nations.

UNTCOK, however, realized that separate elections would solidify the division of Korea and lead to a bloody civil war. Therefore, on February 6 the Commission decided to refer the matter back to the UN Interim Committee for reconsideration, recommending that the UN authorize the election only of consultants who would assist in determining Korea’s future government. The Indian delegate K.P.S. Menon traveled to New York to deliver UNTCOK’s report.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the debate over Korea in the UN in February and the continuing scramble for advantage on the peninsula.

[Sources: This post relies on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nd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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