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War History) Post #47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by Prof. Kathryn Weathersby

We have seen that the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 were deeply concerned about what would happen if they held elections for a new government in the South while the Soviets refused access to their zone. As soon as the Commission arrived in Korea in January,1948 the members understood that if they fulfilled their assigned task of supervising an election, they would solidify the division of the country, which would set the stage for a civil war. This is why they soon decided to send the issue back to the UN Interim Committee for further deliberation.

In New York, as the Interim Committee considered the Korean issue in February, it faced a difficult choice. Elections in the southern zone would clearly harden the division of the country, though many members pointed out that such elections would at least allow 2/3 of the population to create a democracy. The more optimistic members even hoped that the creation of such a government in the South might spark demands among the population in the North for free elections there. On the other hand, if they refused to create a separate government in the South, this would most likely increase the violence and chaos there, which would create ideal conditions for a Soviet takeover of the entire peninsula.

While the Interim Committee deliberated, the United States tried to persuade the governments of each UNTCOK member to agree to separate elections. London initially resisted this pressure from Washington. The British questioned whether, given all the many places over which the allies still had to gain cooperation from Moscow, it was worth antagonizing the Soviets over what they regarded as a secondary issue. We can note that this was the same logic Stalin used when he agreed to the last-minute American proposal in August 1945 to create two occupation zones in Korea; he hoped that concession on this issue would encourage the Americans to concede on his top priority, which was occupation control of Japan. In the end, however, the UK agreed to form a separate government as a solution of last resort.

The newly independent country of India also resisted approving any action that would lead to permanent division of Korea. It was particularly sensitive to the issue since the previous year its independence had been accompanied by a traumatic and violent division into two post-colonial states: India and Pakistan. The US addressed Indian concerns by assuring New Delhi, quite improbably, that once a government had been created in Seoul that represented 2/3 of the population, Moscow would have no choice but to recognize its legitimacy.

What decided the issue was, once again, an event in a far-away country. Czechoslovakia had been occupied by the Soviet Army at the end of the war, but unlike Poland, it had created a coalition government that included both communist and non-communist parties. This political success was widely seen as an indication that it was still possible to cooperate with the Soviet Union despite the deepening Cold War. It was therefore a severe shock when in February 1948 a coup in Prague replaced the coalition government with one completely controlled by communists. This unexpected development appeared to be proof that Moscow would not be bound by popular opinion or international pressure.

Fearing further Soviet aggression, on February 26 the Interim Committee approved the American proposal to hold elections for representatives to a national assembly in the areas of Korea accessible to UNTCOK. Canada and Australia voted against the resolution, while eleven other countries abstained. UNTCOK was now empowered to create a separate government in the southern zone of Korea, an action that it hoped would prevent Soviet domination of the entire peninsula.

In the next post, we will turn to events on the peninsula, examining how Korean political leaders responded to the reality of imminent elections.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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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7 뜻밖의 편지, 박태숙으로 부터

소수의 중공군이 이대용의 제1중대 앞에 와서 전투를 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이곳의 화기 배치를 알아내기 위한 수색전이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어느날이었다. 중대 보급계 박 중사가 뜻밖의 케이크 상자를 가지고 고지로 올라왔다. 제7연대 제1대대 부식 구매 보급차가 서울시 한 모퉁이에 서 있는데 어느 아가씨가 달려와서 자신이 적십자 병원의 박태숙이라고 하면서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가지고 편지와 함께 이대용에게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대용은 박중사의 이야기를 듣고 편지봉투를 열었다.

‘중대장 아버지께.
그동안 전투하시기에 얼마나 고생이 되십니까 ?
저는 적십자 병원에 돌아와 친구 강아지(강애자의 별명)와 거북이(한윤복의 별명)들과 잘 지내고 있으며 압록강에서 포위당한 이야기를 며칠을 두고 삼을 새워가며 들려주었더니 간호부장인 미스 홍도 재미있어하고 소아과 과장이신 장 박사님도 또 김태윤 선생님도 모두 흥미있게 들으셨습니다.

중대장 아버니 이야기를 했더니 여기 여러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원들이 꼭한번 보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 병원은 곧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갑니다. 피난 떠나는 날이 바로 내일입니다.
오늘 요행히도 제1대대 부식 구매차를 만났습니다.
중대장 아버지 소식을 물었더니 동두천에서 20리 북방에 있는 한탄강 바로 남쪽 산위에 계신다기에 이 편지를 올립니다.

정정훈이는 자기 고향인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으로 갔는데 오늘까지 무소식입니다.
보내는 케이크는 약소합니다마는 태숙이가 성의껏 보내 올리니 맛있게 잡수세요
홍하사님이나 그외 여러 중대원님께 안부 전해 주세요.
대대 작전관 김윤환 대위님도 그대로 대대에 계시겠지요.
김대위님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그럼 몸조심 하시며 적을 몰아내 주세요
오늘은 이만 합니다.
안녕 !

12월 23일 태숙 올림’

이대용은 함박눈을 털면서 참호 안으로 들어갔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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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6 가까스로 호랑이 입에서 벗어나다.

앞에 길잡이를 세워 놓아서 조금은 안심하고 행군을 했다. 이대용은 걸으면서도 꾸벅 꾸벅 졸았다. 그러면서 플래쉬로 지도를 보고 나침반으로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확인하기도 했다. 밤에는 어두워 지형지물이 잘 보이지 않아 지도를 보고 방향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1시간을 걷고 휴식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삼거리를 통과한 다음에 휴시하라는 대대장 명령으로 휴식없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0시 40분이었다. 시간으로 보아 행군 종대의 선두가 삼거리를 통과할 무렵이었다. 이대용은 지도와 주변 지형지물을 대조해가면서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이대용의 부대가 삼거리에서 전곡으로 빠지는 길이 아니라 적군이 가득 배치되어 있는 연천으로 가는 큰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연천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결단이 난다고 수없이 많은 주의를 들었다. 그런데 이대용의 중대는 이미 적의 진지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대용은 행군을 중단시키고 대대장에게 이 사실을 즉각 보고했다. 이대용의 300 미터 후방정도에서 따라오던 김용배 중령은 지도와 나침반으로 부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즉각 삼거리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삼거리는 600미터 정도 뒤에 있었다.

중대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민간인 둘을 찾았으나 그들은 이미 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사복을 입은 적의 정찰대원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제1대대를 연천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멸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중대원들은 이대용이 행군 정지명령을 내리자 마라 그대로 길가에 쓰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통신병 이 중사가 ‘누가 길가에 총을 버리고 가는거야’라고 하면서 총을 집어 들었다. 확인해 보니 아군의 것이 아니라 적군이 호를 파고 그위에 거치해 놓고 실탄까지 장전해 놓은 체코식 경기관총이었다.

행군정지 명령을 내렸을때 몇명의 병사가 밭 한가운데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이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그리고 탄약수 들이었던 것이다. 이들도 한참 잠자고 있다가 눈을 떠보니 국군이 무수하게 온 것을 보고 놀라서 기관총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다. 이대용은 그들이 용변을 보러 사람들 안보이는 곳으로 간 줄로 알았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적의 기관총을 둘러메고 부지런히 후퇴하여 삼거리로 되돌아갔다. 적 방향으로 경계병 1개 분대를 배치하고 대대가 완전히 통과할때 까지 경계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한 후, 전곡으로 빠른 걸음으로 행군했다. 얼마후 적의 기관총이 있던 곳으로부터 소총과 기관총 소리가 났으나, 그때는 아군 부대가 모두 빠져나간 후 였다.

1950년 12월 15일 패전 천리길을 걸어온 제7연대 제1대대는 비참한 몰골로 38선을 넘어 한탄강 남쪽에 도착했다. 훈련이 미흡했던 신병들은 모두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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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캠핑 & 피크닉페어 방문기(2)

오늘은 어제에 이어 2019 캠핑 & 피크닉페어 다녀온 후기를 작성하려고 합니다. 어제는 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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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5 고향을 떠나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다.

송정리 부대 집결지에 도착하니 대대장 김용배 중령이 대대 주력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곧바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내용인 즉, 인민군 패잔병들이 시변리 토산일대에서 세력을 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신상철 준장이 지휘하는 제7사단이 토산에서 고전을 하고 있으니, 제7연대 제1대대는 오늘 저녁 자동차가 송정리에 도착하는 대로 승차하고 미당리를 거쳐 수룡산록을 횡단하여, 경기도 삭령과 구화 중간에 있는 판교동에 이동하여 토산 방면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는다는 것이다.

밤 9시반경, 송정리에 있는 인민학교 교정에서 승차한 제7연대 1대대는 판교동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새벽 동이 틀무렵 목적지에 도착했다. 쉴틈없이 바로 방어배치에 들어갔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방어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상황은 신속하게 바뀌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삭령 남방 도원리에서 임진강을 건너게 되었다. 배는 있었으나 얼음에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모두들 옷을 벗고 허리까지 차는 임진강을 건넜다. 강물에 들어서자 아랫도리를 얼음칼로 자르는 것 같았다. 강은 넓었지만 빨리 건널 수도 없었다. 병사중에는 강물 한복판에 넘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일어서니 군복상의와 머리카락이 동태처럼 빳빳하게 얼어 붙었다.

임진강을 건넜으나 때마침 흐린날씨에 불어오는 서북풍으로 벌벌 떨면서 군복을 다시 주워입고 삭령-연천간 도로를 차단하고 적을 기다렸다. 밤 9시쯤 되니 또 다시 작전명령이 변경되었다. 제1대대는 오늘밤 10시 30분을 기하여 이동을 개시하여 전곡 남방의 한탄강으로 이동하여 미군의 방어진지를 인수하게 되었으니, 제1중대는 병력을 인솔하여 즉시 대대 지휘소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부대를 이끌고 약 1킬로미터 후방에 있는 대대 지휘소로 달려갔다. 대대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명령을 하달했다.
중공군은 전전선에 걸쳐 계속 전진중이며, 패잔병으로 있던 북한 괴리군들은 토산, 철원, 평강, 김화, 연천 지구에서 강대한 세력을 펴고 있다. 아군은 토산에서 패배했고, 연천에서 토벌작전을 하고 있던 아군은 겨우 전곡과 삼거리 부근만 확보하고 있을 뿐이고, 연천은 완전히 적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1대대는 삼거리(일명 매전리)를 경유하여 임진강 동쪽의 큰 도로를 따라 전곡을 거쳐 한탄강 남방으로 이동하여 미군과 교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조심할 것은 삼거리에서 절대로 연천으로 들어가지 말고 임진강 바로 동쪽에 있는 전곡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천에는 강력한 적 1개 연대가 있는데 잘못하면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가 전위의 첨병중대로 선두에 서고 그 다음에 대대 본부 및 제4중대 그 뒤는 제3중대, 후미는 제2중대였다. 명령을 받은 중대장들은 즉각 행군을 준비했다. 제1중대는 제1소대가 제일앞에 서고 그 다음에는 이대용이 본대를 이끌고 따라갔다.

행군을 하고 가던 도중에 30세 정도 되는 민간인 남자 2명을 만나 길안내원으로 삼아 제1소대의 선두에 서게 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 길안내원이 적군의 첩자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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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4 철수중 고향 마을을 들르다.

중공군과 별다른 접촉없이 상원을 떠나 황해도 서흥군 율면 송원리를 향해 철수행군중이었다. 1950년 12월 7일이었다. 눈이 휘날리다가 멈추었으나 바람은 차가웠다. 달구자가 다닐 수 있는 길 위에는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이 가득차 있었다. 농민, 노동자 공무원 등등 거의 모든 계층의 주민들이 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군 장교들만 보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할머니가 피난 보따리를 등에 지고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련한 모습도 보였다. 눈물을 흘리며 더 못걸어가겠다고 우는 대 여섯살 먹은 애를 한손으로 끌고 등에는 아이를 없고 머리위에는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피곤한 걸음을 걷은 중년의 부인들도 있었다.

이대용이 걸어가고 있던 오른쪽 잔디밭에는 얼굴이 퉁퉁부은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부인이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섯아이와 여섯살즘 된 남자 아이를 데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쳐야 했다.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12월 11일 경이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대는 배치하여 적과 전투를 벌이다가 다시 철수하고, 철수하다가 다시 배치하고 그리고 또 후퇴를 거듭하였다. 마침 시변리에서 아침겸 점심 식사를 10시경 먹고 금천 방면으로 행군중에 있었다. 시변리를 지나 한석봉의 출생지인 덕안리를 지나면 서위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으면 이대용의 고향인 금천군 우봉면 우봉리 고우봉동이 나온다.

이대용의 고향인 고우봉동은 통일신라때 우봉현의 읍이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백제의 북단 군사기지였으나 고구려에게 점령당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조 효종 2년에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 까지 장장 천여년동안 지역의 중심지였다. 이 마을 남쪽에는 대둔산 줄기가 흘러 지맥을 형성하면서 동서로 가려놓여 있었고, 북쪽에는 국사보이 서 있고, 동쪽에는 수룡산과 대둔산에 연결되는 여러개의 지맥들이 솟아 있었다.

서위고개에 서서 소년시절 친구들과 뛰어 다니며 놀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회상에 잠겨 있었다. 서위고개에서 내려다 보니 삼산리, 송정리, 원명리, 우봉리 등등 모두 옛날 그대로였다. 대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송정리에서 행군을 중지하고 차후 명령을 대기하하는 것이었다.

송정리는 면사무소가 있었고 우봉인민학교가 있었다. 이대용은 중대원들에게 우봉인민학교에서 휴식하라고 명령하고 송정리 주막동 언덕 고개를 넘어 집이 있던 고우봉동의 관청마을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친척을 만났다. 그는 이대용을 아버님 산소에 데리고 갔다. 산기슭에 잔디를 갓 입힌 둥근 무덤이 있었다. 절을 하고 아버님 뵈러 큰 아들이 왔다고 고했다. 고개를 숙인 이대용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집에 도착갔더니 동생이 이대용을 맞이했다. 동네사람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모두 36세대에 불과한 마을이었다. 마을 친척 어르신들도 여러분들이 돌아가섰다. 어머니 없는 아이들이라고 우리 형제를 불쌍히 여겨 보살펴 주시던 큰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약 2시간 정도 고향집에 머물렀다. 동네 청년들이 이대용을 따라 남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이웃마을의 청년들도 합류했다. 모두 10여명 이었다. 그들은 이시무, 이철남, 이장식, 민원기, 민형기, 이탁용, 이필남, 이계순, 이응남, 이주원 등이었다. 이들 청년들과 함께 그들의 가족 8명도 추가로 합류했다. 이대용은 이들과 함께 다시 부대가 있는 우봉인민학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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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이 국경선에 밤이 오다) 23 신병들의 훈련 상황을 확인하다.

눈을 뜨니 새벽 5시 반이다. 밥을 먹자 마자 남쪽으로 향했다. 상원에 도착한 때는 새벽 세시가 지나서였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상원 북방에 배치되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가 맡은 임무는 성천에서 강릉을 거쳐 승호리를 통해 소릿길을 타고 남쪽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중공군 보병을 막아 내는 것이었다.

하루 100리길을 연 3일에 걸쳐 걸었더니 신병들은 거의 기진맥진했다. 신병들의 발은 물집투성이고 발뒷꿈치는 다 까져서 절룰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위생병은 무덤옆 잔디밭에서 머뮤로크롬으로 신병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농촌 출신의 신병들은 머큐로크롬보다 성냥불로 물집을 터트리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신병들의 훈련 상황을 확인했다. 어떤 신병들은 M1 소총을 분해해 놓고 결합을 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M1 소초의 유효사거리도 제대로 몰랐다. M1 소총의 가늠자 조정법을 아는 신병들은 거의 없었다. 산밑에 있는 바위에다 사격을 시켰더니 M1 소총에 실탄도 장전하지 못하고서는 “분대장님 이 소총은 고장인가 봅니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격을 시켰더니 전혀 엉뚱한 곳으로 실탄이 날아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대용이 좀 괜찮다고 생각한 경우는 10명중 2명에 불과했다.

이대용은 이런 병사들을 데리고 대륙을 질주하던 중공군과 전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앞으로 24시간에서 48시간 사이에 중공군이 상원으로 올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 가능한 모든 시간을 내어서 소대별로 M1 소총 가늠자 조종법고 사격자세, 격발요령을 연습시켰다. 그리고 한 사람당 8발씩 실탄사격을 시켰다.

밤이 되었다. 이대용은 초가집 사랑방에 모포를 덮고 누워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중공군이 사기는 왕성했지만 장비와 화력은 보잘 것 없었다. 일본군이 버리고간 38식, 99식 소총, 그리고 국부군에게서 빼앗은 미제 소총, 기관단총등 형편없었다. 지원 포병이라고 해야 일본군이 쓰던 75미리 산포와 국부군에게서 뺏은 약간의 105미리 곡사포, 60미리와 81미리 박격포, 82 미리 박격포 정도였다. 그나마 수도 많지 않았다. 1개분대에 소총을 가진자들은 불과 6,7명에 불고하고 나머지는 수류탄만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매우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했다. 훈련이 잘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 제4야전군은 과거의 팔로군으로 병사들은 적어도 3년, 5년 혹은 10년 정도 전장을 떠돈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에 비해 이대용이 보충받은 병사들은 겨우 2주에서 한두달 정도 훈련받은 정도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1:1로 싸워도 상대가 안되는데 중공군은 항상 몇갑절의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싸우지 않아도 그 결과가 뻔 한 이치였다. 이대용은 전전반측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별다른 비결을 찾아 낼 수도 없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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