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봄이 오다) 32 김용배 중령과의 이별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지났다. 그간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었다. 전쟁은 중부전선에서 점차 고착되고 있었다. 1951년 6월 22일 제7연대 부연대장 김용배 중령의 송별회가 열렸다. 화천 구만리 발전소 북방 약 10 킬로미터 지점인 우장동이었다. 천막안에 초라하게 야전 술상이 준비되었다. 서울에서 보급차편으로 사온 소주병이 여기저기 놓아지고, 구운 오징어와 사과조각 그리고 레이션에서 나온 튀긴 다시마와 자반생선이 쭈그러진 야전식기에 담겨져 있었다. 술잔은 반합뚜껑이었다.

이대용은 평생 김용배 중령을 가장 존경했다. 사관학교 생도때 김용배 중령과 인연을 맺어 중대장으로 그의 밑에서 복무를 했다.

이대용은 1951년 1월 22일 경기도 용인군 백암리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셨던 때를 떠 올렸다. 김용배 중령은 1950년 10월 10일 부인이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불과 얼마전에 들었고, 이름을 송조(松朝)로 지으라고 전갈을 보냈다고 했다. 소나무 같이 지조있고 아침처럼 신선하게 살아가라는 뜻과, 조(朝)자가 시월십일(十月十日)을 모아쓴 글자라 그렇게 지었다고 이야기 했다.

취기가 꽤 돌자, 그는 일제때 지원병으로 나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단지 군인이 되고 싶어 지원병이 되었는데 크게 실수했다고 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그는 어렸을때 부모가 강제로 정해준 조강치처를, 어른이 된 후 이혼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처녀에게 새장가를 다시 들었다. 송조는 두번째 부인의 소생이었다.

이대용은 그 두가지만 제외하면 훌륭한 인간의 전형이고, 군계일학의 뛰어난 군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다.

1950년 6월 22일 정오를 지나 김용배 중령이 들어오면서 송별연회가 시작되었다. 일제히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김용배는 5연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키는 1미터 67 정도였다. 체중은 약 72킬로그람 정도되었다. 검은 눈은 항상 광채를 발했으며, 어떤 때는 부처님 처럼 인자해보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태산을 삼킬 것 같은 호걸의 기개를 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를 할 때는 이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살인마의 살기도 능가할 정도로 무서운 눈빛의 보유자였다.

그는 어질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군인으로 거의 모든 것을 다 갖춘 가장 이상적인 지휘관이었고 인재였다, 침착함은 태산과 같았고, 조용함은 수풀속 같았다. 일단 유사시 행동은 바람같이 빨랐고, 적을 무찌를 때는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맹렬했다.

그는 모든 부하로 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고 상관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이 거의 대부분 소령이었는데, 김용배 중령은 벌써 연대장 보직을 받고 대령으로 승진했던 것이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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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1 용문산 전투와 반격

일진일퇴의 격동하는 전선의 세월을 빨리 흘러갔다. 그간 이대용의 제1대대는 제7연대의 일부로 여주, 문막, 원주, 횡성, 홍천, 춘천, 가평을 지나 중공군을 몰면서 사창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밀려 가평, 청평을 거처 용문산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951년 5월 1일. 기울어가는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미 극동공군 전부가 출격중이란 소문이 전선에 퍼졌다. 제공군을 장악한 유엔군 공군의 폭격으로 중공군 병참선은 대타격을 받았고 보급품도 매우 부족했다. 이와 반대로 한국군은 남아돌아갈 만큼 풍부한 실탄 보급을 받았으며, 북한에서 후퇴할 때 보충된 신병들도 지난 6개월의 전투를 통해 싸움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1951년 5월 11일 중공군의 제4야전군 정예부대의 선두가 북한강에 도달했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상황이 불리하여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일선에서 칼빈소총을 들고 병사들과 같이 싸울 비장한 각오를 하고 해발 1200미터의 용문산 정상에 올라가 있었다.

드디어 1951년 5월 17일 용문산에서 제6사단 제2연대 전원은 ‘결사’라고 쓴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중공군 정예부대와 결전에 들어갔다. 36시간 동안 쉴세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숫적으로 월등하게 우세한 중공군운 제2연대를 완전하게 포위했다. 제2연대가 5월 21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제2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고 있었다.

5월 22일 제6사단은 반격에 들어갔다. 중공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하게 마비되어 버렸고 전투력은 급속하게 떨어졌다. 밥을 짓던 인부들도 빈주먹으로 중공군을 수십명씩 붙잡아 오고, 핀셋과 약병을 들고 다니던 위생병들도 중공군 낙오병을 수십명씩 데리고 왔다. 춘천에서는 60이 넘은 노인들까지 몽둥이들 들고 중공군 패잔병과 낙오병들을 몇명씩 잡아왔다.

“할아버지, 참 용감시기군요”라고 하면 “지난 겨울이 이놈의 떼놈들이 우리 돼지를 잡아 먹었다오. 내 이놈들을 죽이려다 데리고 왔소”하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용문산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전선을 돌파당한 중공 제4야전군은 전선 정리를 위해 한국의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한 유엔군 및 한국군은 총공격을 가해 적을 격멸시키면서, 동해안 간성으로부터 양국 북방, 김화, 철원, 연천, 문산선으로 진격하였다.
이대용의 제1대대가 속해 있던 제7연대는 춘천, 화천, 구만리 발전소를 거쳐 풍산리 절골을 거쳐 백암산 밑에까지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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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오다) 30 제2중대장 박대위의 부상과 후송

제2중대장 박대위는 후방의 실태를 이야기 하면서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말을 들은 이대용은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가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고위층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자식들을 빼돌리는 짓을 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만 대면 다들 알만한 야당의 소위 무슨 무슨 박사라고 하는 인사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버렸던 것이다.

이대용은 박대위가 흥분하자 어떻게 달래볼 심산으로 연락병 홍하사에게 취사장에서 밥찌꺼기로 담근 컬컬한 막걸리를 한반합 가져오게 했다.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박대위였지만 그날은 술을 한잔 하더니 이대용에게 후방의 정치인들이 후안무취하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박대위은 자신의 중대원 중에 17살 먹은 학도병을 위시해서 38살 먹은 농촌 출신 일등병도 있다며, 당시의 국회의원과 고관대작들이 공민의 기본자격조차 구비하지 못하고서 자신들이 지도자라고 한다고 분개했다.

이대용은 그래도 대충 달래보려고 했으나 조용하게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대 부관 김소위도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현지임관을 한 무뚝뚝하기에 그지없었던 보급관도 6.25 전쟁 초반기에 춘천전투에서 중대원을 사지에 두고 혼자만 후방으로 도망쳤던 중대장을 예로 들면서 분노했다.

장교들의 분노에 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제2중대 부관 백소위가 적이 출현했다고 보고를 해온 것이다. 20시 현재 양지리 남쪽 고개 밑에서 중공군으로 추측되는 집단 30명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적의 후속부대는 관측되는지를 물었으나 아직 관측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제2중대장 박대위는 곧바로 철모를 쓰고 부대로 출발했다. 이대용은 자신의 짚차를 백암리 경찰지서 정문앞에 대기시키고 대대 참모들과 함께 지서 정문까지 배웅을 나갔다. 영하 21도의 차가운 추위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제2중대장 박대위는 중대로 돌아갔다.

이대용은 중공군 1개 소대규모를 수색정찰대로 판단하고 후속 부대가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전선 일대에서 밤새 사격전이 벌어졌다. 중공군들이 이천 부근에 있던 호주군 6명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중공군은 철수했다가 다시 오고 하면서 계속 집적거리고 있었다.

대한 추위로 서북풍이 몸을 에이는 듯한 어느날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의 명으로 미제1기병사단 제8연대장이 지휘하는 1개대대와 탱크 20대가 백암리를 지나 양지리 이천 일대를 위력수색했다.

이날 양지리 남방에서 미군을 엄호하고 있던 제2중대장 박대위가 날아오는 적 기관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대용은 미제8연대장과 같이 서있다가 보고를 받고 급하게 전방으로 달려갔다. 박대위를 실은 앰블런스와 마주쳤다. 이대용은 박대위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적의 기관총 두서너 발이 박대위의 왼쪽 팔에 명중되어 뼈는 산산조각 으스러지고 간신히 피부만 조금 달려 있었다. 피를 많이 흘려 박대위의 얼굴이 창백했다. 운전병에게 가장 신속하게 병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이대용은 앰블런스가 사라진 죽산리 쪽 길을 바라보며 한동안 묵묵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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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7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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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유엔중재위원회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논의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구데타로,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로 기울어지는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역사도 많은 일들이 서로 연관되고 중복되면서 예상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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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 UNTCOK)는, 소련이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남한에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위한 선거를 실시할 경우 무슨일이 발생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우려했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1948년 1월 이 위원회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위원들은 만일 선거를 감독하라는 부여된 임무를 실시하면, 나라의 분단을 강화하고 내전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그들이 신속하게 이 문제를 유엔 중재위원회에 보내 더 숙고하도록 결정한 이유였다.

뉴욕에서 2월 중재위원회가 한국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그들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많은 위원들이 이러한 선거는 최소한 인구의 2/3이 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의 선거는 명백하게 국가의 분단을 강화할 수 있었다. 좀 낙관적인 위원들은 남한에서의 이런 정부의 수립이 북한지역의 주민들에게 자유로운 선거 요구를 촉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만일 그들이 남한에서의 별도 정부 수립을 거부하면, 이는 폭력과 혼돈을 증가시킬 수있으며 이는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조성할 것이었다.
중재위원회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미국은 각각의 유엔한국임시위원회 위원들에게 별도 선거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 런던은 처음에는 워싱턴의 압력을 거부했다. 영국은, 아직 많은 지역에서 모스크바와 협조를 해야 한다면, 그들이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소련이 적대감을 느끼게 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우리는 이것이 1945년 한국을 양국이 점령하자는 마지막 순간의 미국 제안에 동의하면서 스탈린이 이문제에 대한 양보가 미국이 자신의 우선순서인 일본의 점령통제에 양보할 것을 기대했던 것과 동일한 논리를 사용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독립한 국가인 인도는 또한 한국의 영구분단을 초래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을 용인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로 그 전해 부터, 인도의 독립이 트라우마적이고 폭력적인 두 개의 국가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서울에 인구의 2/3을 대표하는 정부가 수립되기만 하면 모스크바도 이들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득하고자 했다.

이문제를 결정한 것은, 다시 한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 말기에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폴란드와 달리, 공산주의자 와 비공산주의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공동 정부를 수립했다. 이런 정치적 성공은 냉전이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협조가 아직 가능할 수도 있다는 지표로 널리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1948년 2월 프라하의 쿠데타가 공동 정부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완전하게 통제되는 정부로 대체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사건의 전개는 모스크바가 여론이나 국제적 압력을 고려치 않는다 증거로 나타났다.

추가적인 소련의 공세를 우려하면서, 2월 26일 중재위원회는 UNTCOK가 접근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승인했다. 캐나다와 오스트렐리아는 결의안에 반대했으며, 다른 11개국은 기권했다. UNTCOK는 남한지역에서 단독 정부 수립 권한을 받았으며, 이로써 소련이 전체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음 포스트에서, 우리는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임박한 선거에 대응했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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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29 광혜원에서 대대장 대리로 보직을 받다.

이대용은 철수명령에 따라 경기도 이천을 거처 백암리를 지나 충청북도 광혜원으로 향했다. 보따리를 걸머진 피난민과 총들 둘러멘 군인들 그리고 달구지와 군용트럭으로 길은 아수라장이었다. 달구지를 끌고가던 황소가 빙판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지자 그 소를 잡아 싸구려로 파는 사람도 있었다. 축음기와 레코드를 짊어지고가던 음악가는 힘에 겨워 싸구려로라도 팔아보려고 했으나 피난민들은 본체 만체였다. 공짜로 주어도 가져갈 수 없었다.

피난민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겨울옷과 먹을 것이었다. 그 이외 나머지는 모두 있으나 마나였다. 축음기와 레코드를 싸구려로라도 팔아보려고 했던 음악가는 모두 내던지고 쌀자루만 걸머진 채 무표정하게 남으로 걸어 내려갔다. 북한에서 천리길을 걸어온 어린아이를 업은 부녀자들과 노인들은 추위에 지치고 피로가 겹쳐 점차 낙오되었다. 그러다가 길가의 빈집 마루에 쓰러지곤 했다.

1951년 1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에서 이대용은 제7연대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그리고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부연대장이 되었다. 제1대대는 대대장이 없었으므로 이대용은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했다.

중공군은 1월 5일 한강을 건너 그 일부가 광주로 내려오고 있었다.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의 작전개념에 따라 유엔구 및 한국군은 주저항선을 장호원, 죽산, 안성을 연결하는 선에 설치하여 주력부대를 배치해 놓고, 그 앞에 멀리 엄호부대를 내보내 중공군의 전진을 지연, 와해, 조기 경보케 했다.

이 작전개념에 따라 김량장 서쪽에는 터키 1개 대대가, 김량장과 양지리 사이에는 이대용이 지휘하는 제7연대 제1대대가, 그리고 그 우측 이천에는 호주군 1개 대대가 배치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광주에서 내려온 중공군은 양지리에 들어왔으며, 수원-여주 철도를 사이에 두고 이대용의 제1대대와 경미한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약 8시간에 걸쳐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으나 승패는 나지 않았고 밤이되자, 양측은 모두 약 2킬로미터 정도씩 후방으로 물러나 야간 경계태세로 들어갔다. 이를 시점으로 피아의 수색정찰전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며칠이 지났다.

중공군의 남진이 일단 저지되자, 이대용은 박 대위가 지휘하는 제2중대를 양지리 남방 일대에 배치하고, 서 소위가 지휘하는 제1중대는 이천에서 백암리 쪽으로 오는 길목인 동산리에 배치했다. 안 소위가 지휘하는 제3중대는 대대 예비로 백암리에 집결시킨 다음, 대대본부를 백암리 경찰지서에 설치하여 중공군의 남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당시 정보에 따르면, 중공군 병참선은 유엔군의 공중 폭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고, 부대내에는 장티푸스가 만연하였다고 한다.

어느날 저녁에 제2중대장 박 대위가 대대본부로 이대용을 찾아 왔다.
그는 이대용을 만나자 마자,

“대대장님, ‘빽’이란 이야기를 들으신적 있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대용은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고 되물었다.

박대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얼마전에 보충 받은 신병들이 대부분 서울 출신이며 똑똑한 아이들이 많은데 후방에서 요즘 빽이란 말이 창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빽이란 것이 후방 국민들의 공기를 흐리고 있다고 했다.

제일선에 나온 사병들을 빽이 없어 도매금으로 묶여 나왔으나 국회의원이나 장차관의 자식들은 아예 군대도 나오지 않았고 후방에서 편안히 쉬든가 그렇지 않으면 미국 유학을 가든가, 또 그렇지 않으면 군대에 들어오더라도 후방에 있는 헌병대나 부관부 또는 병참부 같은데서 안일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박대위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울분을 토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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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 밤이 오다) 28 1.4 후퇴 그리고 경기도 광주로

내려다 보이는 전곡마을에서는 중공군과 아군 수색대간 싸움도 중단되고 조용했다. 이윽고 1950년을 보내는 마지막 섣달 그믐날이었다. 날이 저무니 영하 15도의 냉기가 일선고지를 얼어 붙게 했다. 장병들은 내일 아침 정월 초하룻날 특별부식으로 북어조림과 단무지가 배급된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 하고 있었다. 매일 고추장만으로 식사를 해왔었다.

저녁 6시 반경이었다. 전곡 북방 산기슭에서 불이 번쩍 번쩍 하더니 포성이 들렸다. 아군 진지로 포탄이 쏟아져 날아 왔다. 중공군들은 야포 사격에 이어 박격포와 기관총을 사격하더니 보병의 대부대가 남으로 밀려 내려왔다. 한탄강 나룻가에 배치된 제7연대 제1대대의 박격포, 후방에 있는 사단 야포가 적을 향하여 응사했다. 산이 울리고 호가 흔들렸다.

아군의 치열한 포사격과 기관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적은 계속 전진해 왔다. 1951년 정월 초하루 새벽 2시경 잘 훈련된 중공군의 야간 공격앞에 한국군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것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미군의 엄호하에 의정부 남방으로 철수한 제7연대는 서울 북방 창동에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빙판이 된 신작로 위에 보따리를 짊어진 피난민이 홍수처럼 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한유엔군사령관겸 미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차량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고 후임으로 부임한 신임 주한유엔군사령관 및 미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의정부 노상에서 끝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수십만의 피난민을 보며 “20세기의 비극”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이를 역사의 증거로 남기기 위해 손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창동에서 재편성을 하고 적을 기다기로 있던 제7연대 제1대대는 1951년 정월 초사흘 상부의 명에 의해 서울을 지나 한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군 광주면 경안리로 철수하였다. 광주주민들은 피난짐을 꾸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대용이 읍내로 들어가자 주민들이 모여들어 “장교님 유엔군이 어디까지 후퇴합니까?”, “우리들은 어느 선까지 피난가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경찰서와 대한부인회 그리고 면직원들이 군인들의 숙소를 주선해주었다. 이대용은 어떤 집의 사랑방을 배정받았다.

미군부대가 서울 부근에서 중공군을 지연시키고 있었으므로 광주는 하루정도 안전한 위치였다. 이대용은 연락병 홍하사의 배낭속에서 진중 일기책을 꺼내 최근 상황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때 갑자기 어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4살 정도되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이대용을 찾아 왔다. 약 28살 정도 될까 하는 나이였다. 이 여인은 자신을 대한부인회 광주군 부회장이라고 소개하면서 내일 아침 새벽에 피난을 떠나는데 어디까지 가면 되겠는가하고물어왔다. 이대용은 자신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 해주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이 여인의 이름이 임송월이며, 일찍이 서울 진명여고를 나와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어떤 문학청년과 결혼을 해 지금 데리고 온 여아를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학청년이었던 남편은 명이 짧아 3년전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면서 유일한 낙이 남편이 남겨놓은 원고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대용이 쓰고 있는 진중일기를 한번 보기를 청했다.

이대용으로 부터 일기장을 받아 든 여인은 ‘신령 화산의 사투’ 편과 ‘검불랑을 넘으며’ 그리고 ‘압록강에서 대동강까지’를 읽었다. 40분 여 이대용의 진중일기를 읽던 임송월은 “장교님, 군인들이 참 고생하시는 군요. 이것을 꼭 책으로 출판하세요”라고 하면서 당부했다.

임송월은 한시간 이후 다시 이대용을 다시 찾아왔다. 자신은 친정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데 친정 아버지가 이대용이 이야기를 듣더니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대용은 피곤했으나 임송월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커다란 기와집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친정 부모들은 엿과 깨강정을 수북이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고 또 어디까지 피난을 가야 하는지 물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이대용은 밤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길가에는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집이란 집은 모두 피난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미처 들어갈 곳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길가에서 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밤을 새워가면 눈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인 이대용은 동이 틀 무렵 다시 일어났다.

중대는 다시 철수명령을 받았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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