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8 마지막 편, 이진수 국회의원 아들 전사

1952년 7월 9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2년이 넘었고, 김용배 대령이 전사한지도 벌써 만 1년하고 7일이 지났다. 그간 이대용은 대대장에게 부여하는 임시계급인 중령으로 진급했다. 판문점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휴전회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선에서는 조그만 고지를 빼앗고 빼앗기고, 포로를 잡아 오고 잡혀가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제3대대는 금성에서 김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으로 이동하여 중공군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대용의 제3대대 좌측으로는 미제 7사단 제32연대가 김화북방 604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미 제7사단이 604 고지를 방어하기 전에는 한국군 제9사단이 그곳에 있었다. 한국군 제9사단이 주둔하고 있을 때, 당시 국회의원 이진수 의원의 친아들이 이 604 고지에서 전사했다. 이 진수 의원은 당시 권력을 가진 여당의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아들을 일선 소대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아들을 잃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대용은 만 2년동안 장장 6천리 전선을 질주하며 싸우는 동안, 정부의 장관이나 국회의원 아들 중에서 일선 중대나 소대에 나와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청년이라곤 이진수 의원의 아들 이 소위 한사람 뿐이었다.

이시영 부통령도 자신의 손자를 전선에 내보내 중공군과 싸우게 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아무도 모르게 손자 이소위를 제2사단에 보낸 것이다. 김화전선에 배치된 이 소위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

6.25 전쟁에 앞서 1948년 10월 이청천 국회의원의 외아들 이 정계 소위가 공비토벌 작전 당시 최전방 소대장으로 나가 공비와 전투중 전사했다.

이대용 장군의 한국전쟁 전투기록 ‘국경선에 밤이 오다’는 저격능선에서 대대장 시절로 끝이 난다. 이후 미국 보병학교로 교육을 받으러 떠난다.
이대용 장군은 자신이 경험한 전투중 낙동강 전선의 신령전투를 가장 치열하다고 했다. 국경선에 밤이오다에서 일부가 묘사되어 있고 직접 작성한 기록이 있다. 다음에는 이를 중심으로 신령전투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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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봄이 오다) 37 싸우는 자와 비겁한 자

1952년 1월 1일이 되었다. 이대용은 금성 남방 553 고지에서 새해를 맞이 했다. 묵은해가 가고 1952년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중대장들과 참모들을 모아 놓고 신년의 축배를 올렸다. 고지주변의 풍경을 보면서 18개월동안 피비린내나고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경질적으로 피폐해진 자신의 모습과 대자연의 위대함을 비교하면서 부끄러워졌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제12 중대장 신덕균 대위가 후방의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소위 정치지도자니, 거물급이니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와 저 태산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뒤돌아 보고, 일선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장면을 한 번이라도 보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중대장들과 참모들이 나서서 한 마디씩 했다. 문제는 여당이고 야당이고 모두 정치인들이 썩었다는 것이다. 유력하다는 정치인들이 이런 저런 빽을 동원해 자기 자식들은 군대에 입대시키지 않고 외국유학을 보내고 있으니 어찌 정신상태가 썩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는 이야기들이었다.

1월 10일이었다. 소규모 전투와 포격이 계속되던 이대용의 대대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신익희 국회의장과 국회의원들이 일선을 방문하여 국정감사겸 위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연대급 이상 부대에서는 귀빈을 맞이하여 잘 보이려고 분주했다. 그러나 이대용과 대대원들은 그러는 것을 보고 웃으며 귀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해외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을 보내신 애국자이시니, 그분을 만나 일선 장병들이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털어 놓으면, 그분이 후방에 돌아가 부정부패를 제거하는데 앞장 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대장병 모두 이들이 방문을 기뻐했던 것이다.

높은 분들이 일선에 온다고 하면 베니어 판에 뺑끼칠이나 하고 상황판을 요란스럽게 만들고 소위 VIP 고지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곳에 있는 병사들에게는 작업복도 깨끗한 것으로 입히고 내복도 새것으로 주었다. 그리고 장비들도 새것으로 채워 이 부대의 연대장이나 사단장이 부하복지를 위해 지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런 부대들을 ‘쑈’ 사단, ‘쑈’ 연대 라고 했다.

일선에소 오랫동안 소대장, 중대장을 하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전우들이 시체로 차갑게 굳어가는 것을 수없이 보아온 야전 지휘관들은 ‘쑈’를 가장 경멸했다. 뺑끼나 요란스러운 베니어 상황판으로 적을 막아 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성실한 지휘관의 지휘아래 굳게 뭉친 장병들의 건전한 정신과 전투기술 뿐이었다.

이대용은 신익희 국회의장이 오면 이런 ‘쑈’를 없애 달라고 하고 싶었다. 상급부대에서는 국정 감사단에게 전공을 나타내기 위해 중공군을 생포해 오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이대용의 대대도 금강산으로 가는 관광철도를 넘어 거의 매일같이 중공군 진지에 수색대를 보냈다.

그런데 중공군도 똑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규모 공방전은 없었으나 전선은 언제나 투덕거리며 소란스러웠고 인원소모만 늘어나고 있었다.

국회의장 일행이 사단에 방문하는 날이 가까워오자 점점 더 소란스러워졌다. 국회의장 일행이 사단 지휘소에 도착했다. 사단지휘소는 금성 553고지로부터 약 20킬로미터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이대용과 대대원들은 이제나 저네나 언제오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국회의장 일행은 대대 지휘소인 553 고지 후방 6키로미터 후방 월봉리에 포진하고 있던 105미리 야포진지에 와서 포병들이 장전해 놓은 105 미리 야포 방아쇠줄을 당겨 보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장병들은 모두 실망했다.

국회의장 일행이 포탄 한발을 쏘아 보고 웃으며 떠난 바로 그날, 금성 남쪽 424 고지를 지키고 있던 미 제40사단 경계진지에 중공군이 치열한 공격을 가해왔다. 밤새 격전을 치뤘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이대용의 제32연대 제3대대는 553 고지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전날의 격전지 424 고지를 포함한 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전선은 교착상태를 유지하며 중대 또는 소대 정도 규모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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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이 국경선에 밤이 오다) 36 헌병들의 횡포에 치를 떨다.

1951년 12월 7일이었다. 날이 흐리고 싸늘하더니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대용은 연대 CP에 가서 대대장 회의에 참가하고 금성 남방에 있는 대대 관측소인 553 고지로 돌아왔다. 이대용은 몸이 불편하여 군의관으로 부터 진찰을 받고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깊은 참호속에 산짐승 처럼 들어가 누워있었다. 38-9도를 오르 내리던 열은 주사덕분인지 정상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밤은 깊어 11시가 되었을 때다.

‘대대장님 계십니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속으로 들어온 사람은 대대 보급관 박문환 중위였다. 산아래 대대 취사장에 있던 박중위가 눈길을 헤치고 산꼭대기까지 올라 온 것이다. 이대용은 무슨 일인지 물었다.

박중위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보급관을 그만두고 소총 소대장을 다시 해봤으면 하고 여쭈러 왔습니다”하고 말했다.
이대용은 그 이유를 물었다. 박중위는 그저 소총 소대장을 하고 싶어서라고 할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이유를 이야기 했다.

박 중위는 이등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공비토벌 작전에 오랫동안 종군하면서 계급이 올라 상사가 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 현지 임관제도가 생기면서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을 지냈고 그후 보급관에 보직되었다.

그런데 요즘 1주일에 두세번씩 서울에 나가 연대에서 사주는 장병들 반찬을 받아가지고 들어올 때, 길가의 헌병 검문소에서 부식차를 세워, 속도를 위반했다느니, 차가 낡아서 위험하다느니, 운전병의 복장이 나쁘다느니 하는 온갖 트집을 다 잡아 시비를 걸며 차량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헌병들을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를 불러 일으켜 그 다음부터는 박중위가 타고 오는 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꼭 붙들어 놓고 성가시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헌병장교를 찾아갔으나, 그 헌병장교라는 작자들은 헌병 사병들보다 더 단수가 높은 악질이이서 상대가 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헌병 검문소를 지나는 모든 부식 구매차들은 현금을 2만원 내지 3만원 정도 헌병 검문소에 바치고 통과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그래야 헌병들이 아무 말없이 통과시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강 다리를 지키고 있던 헌병들은 민간인들에게 뇌물을 받아야만 말없이 통과시켜 서울로 들어가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서울시장에서 헌병들에 의해 압수되는 군수품은 다시 악질 암거래 상인들에게 넘어가 다시 암거래 상인들이 이것을 시장에 내다 판다는 것이었다.

박중위는 이런 꼴 저런 꼴 안보고 총소리 들리고 목숨이 날아가도 깨끗한 일선에서 적과 싸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너구리 굴같이 흙냄세와 땀냄세가 베어나는 호속에서 한숨을 지었다. 새로 임관해 오는 신임장교, 새로 보충되어 오는 학도병,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일선으로 배치된 장병들, 이들로 부터 귀가 아플 정도로 후방의 부패상을 들어왔던 것이다.

육군본부에서 국장을 지내는 어느 장군은 자기 친동생, 사촌을 합하여 모두 5명을 군에 입대 시켰으나, 맏형인 장군의 빽으로 모두 병참장교, 군수장교 등으로 모두 후방에 근무하며 아무도 일선의 전투부대에 나와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전선에서는 병사들의 생명이 초개처럼 날아가는데, 후방의 장교들은 부정으로 축재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대구나 부산에서는 중령이나 대령의 부인들이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활개치며 싸돌아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다. 이대용은 컴컴한 호 속에서 한숨을 쉴 뿐이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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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5 중공군 격파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

(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5 중공군 격파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

이대용의 제3대대는 중공군을 신속하게 격파하면서 24시간 후에는 금성 서방 백양리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대용은 경계병을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를 연하여 배치했다. 중공군의 제26군, 제27군, 제67군, 제68군, 제69군은 전투력을 거의 상실해 이미 한국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투입되어 전투력이 가장 약화되었을 때가 바로 이때였다. 이대용은 한국군이 중공군을 완전하게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용문산 패전이후, 다시 금성 남방에서의 패전으로 포로가 된 중공군들은 누구나가 한국군이 무서워 혼났다고 진술했다.

전투력은 움직인다. 패자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은 실탄이나 병력을 주는 것 보다 더 위험하다. 방어선이 무너져서 패주하는 적을 무자비하게 추격하여 완전히 무찔러야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유엔군 고위층은 유엔군 및 한국군의 계속적인 공격을 중시시키고 판문점에서 적군 대표들과 휴전회담을 개최하고 있었다. 이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견해가 현저하게 난 것은 유엔측이 현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자고 주장하는데 반해 공산측은 38선을 휴전선으로 하자고 고집한 것이었다. 양 측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유엔측은 무력 압력을 가하기 위해 다시 북진 작전을 수립했다.

1951년 11월 초순, 계획은 완성되었으며, 제1단계의 공격으로 미 제24사단은 금성을 거쳐 금강산 관광철도의 종착역 부근인 창도리로 진격하고, 이대용의 제32연대 3대대는 백양리-사기동-663 고지- 장자산으로 진출하여 오성산(1062고지) 북방 약 13 Km 지점에서 서쪽에 있는 철의 삼각지대의 정점인 평강을 감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공격준비를 위해 박격포, 실탄, 소총 및 기관총 실탄, 건빵 등이 고지에 운반되었으며, 내일 아침 해상 박명 초(여명)을 기해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공격만하면 한국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며칠전 상대한 중공군의 실력이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국군들은 간단하게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상부로 부터 이번 북진공격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공산측이 현 전선 휴전을 수락할 뜻을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또 20 여일이 지나니 다시 공격개시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공산측이 생각이 달라졌다며 38선 휴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격개시 불과 7시간 전에 다시 공격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공산측이 다시 마음을 바꿔 현전선에서의 휴전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전선에는 눈이 내리고 중공군은 완전하게 재편성을 실시했다. 그리고 견고한 방어진지를 중공군의 주 저항선에 구축했다. 떨어졌던 사기가 앙양되어 그들의 전투력은 완전하게 회복되고 말았다. 한국군이 중공군을 완전 섬멸할 수 있는 전재일우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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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4 고착된 전선에서

전선은 고착되었다. 소규모 전투위주로 전쟁이 계속되었다. 어느듯 여름도 가고 가을도 저물었다. 어느 듯 단풍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951년 10월 23일 차가운 늦가을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지 어느 듯 1년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남북 피난민의 대이동이 있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어떤 이들은 3백만명이 넘는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5백만명이 넘는다고 했다.

이대용도 그간 보직이 바뀌었다. 7월 15일 제2사단 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해 김화 동남에 있는 파조봉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하다가 사단 정보참모 대리로 자리를 옮겼다. 정보참모 대리로 1개월 반 정도 근무하다가 10월 20일 다시 제32연대로 돌아가 제3대대장이 되었다. 한계급 진급을 해서 소령이 되었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선과 달리 후방은 아수라장이었다. 부모잃은 전쟁고아들이 거지가 되던가 불량배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생활수단을 잃는 전쟁미망인들과 유부녀들 중 일부는 어린 자식들의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밤거리를 헤메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악질 관리들은 여전히 양민의 고혈을 빨고 있었으며 사회악 조성의 첨병과 같은 짓을 했다.

전선에서는 점차 힘의 균형이 변하하고 있었다. 중공군과 한국군의 상대적 전투력이 변화하고 있었다. 1년전에 무적을 자랑하던 중공군의 전투력은 1년후인 지금에 와서는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제공권을 완전하게 장악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보급물자와 인원수송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으며, 중공군의 사기도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반면, 전투경험이 부족하고 기초 훈련도 미비했던 한국군은 1년동안 중공군과 전투를 하면서 전술을 배웠고 병사들의 전투기술도 놀랄만큼 발전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제9군단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 제2사단과 미제 24사단은 10월 22일 금성, 수리봉 일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한국군 정면이 적은 용이하게 격파되었으나, 미 제24사단은 공격하던 월봉산은 지형이 공자에게 불리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0월 24일 이대용의 제32연대 3대대가 미군 지역을 넘어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대용의 제3대대가 이실골을 지나 월봉산 밑에 다다르자 미군은 부상병과 전사자들을 후송하고 있었다. 아직 인생의 반도 채 살지 못한 20대의 금발 청년들이 옷이 피투성이가 된채 숨을 거두고 누워 있었다. 이대용은 지나가면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했다.

이대용의 제3대대는 신속하게 중공군을 격파하여 24시간 후에는 금성 서방 백양리 부근에 진출하여 경계병을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에 연하여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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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33 김용배 대령의 전사

환송행사였으나 흥겨워하는 장교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색할 정도로 천막안은 조용해서 엄숙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제2대대 부대대장 김대위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연대본부 중대장도 무슨 노래를 불렀다. 이대용은 야전에서 새로 배운 ‘무지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를 불렀다. 연대 인사장교는 용진가를 불렀고, 작전주임은 양양가를 그리고 군수주임은 신고산 타령을 불렀다.

손뼉을 치고 소란해지면서 다들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용배 중령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잔에 남은 술을 쭉 마시고 일어서서 북진가를 불렀다. 노래를 마치고 부대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몇마디를 했다. 누가 어떤 짓을 하던 우리는 묵묵하게 맡은 임무를 완수하자는 이야기였다. 말을 마친 김용배는 천막을 나섰다.

두열로 양쪽에 줄지어 있는 장교들과 악수를 나눈 김용배 중령은 대기하고 있던 짚차에 올라탔다. 장교들의 경례에 답례를 하자 짚차는 사단 사령부 쪽을 향해 갔다. 고생을 같이했던 부하들과 석별의 정을 금할 수 없다는 뜻이었을까 ? 질주하는 차에 앉아 있던 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았다. 김용배 중령을 실은 짚차가 커브를 돌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김용배 중령과 마지막 작별이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연대장으로 취임한지 불과 열흘후 양구 방면의 전투에서 그는 적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7사단 제5연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하던 도중 전사한 것이다. 군의관들이 달려가 갖은 응급처지를 다해보았으나 김용배 대령은 선혈을 낭자하게 흘리고 영영 소생하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

이 비보를 접한 제7연대에서는 김용배 대령과 생전에 가장 가깝게 지내던 부하였으며, 제2사단 32연대 대대장 요원으로 확정된 이대용을 양구로 보내 조의를 표하게 했다. 이대용이 달려간 때는 7월 3일이었고, 이미 김용배 대령의 유해는 입관되어 있었다.

김용배 대령이 유해위의 천막벽에는 검은 헝겊을 두른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 전선을 달리며 고락을 함께 하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져 오열이 쏟아졌다.

이대용은 조문을 마치고 나왔다. 해는 서산에 기울어져 있었고 전선에는 포성이 은은히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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