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3-2 국경선에 밤이 오다(야간 기습 그리고 화산공방전의 서막)

이대용 장군이 신령에서 겪은 전투는 신령전투라기 보다는 화산 전투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신령전투는 6사단 19연대와 제2연대 그리고 제7연대까지 모두 포함된 보다 광범위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전투는 대부분 대대급 이하의 소규모 전투로 이루어진 것 같다. 지형이 워낙 험한 곳이어서 연대급 이상 부대가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틀간 전투 끝에 화산 남쪽 고지의 적군을 북쪽으로 쫗아 내버렸다. (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화산앞의 산을 넘어 화산으로 진입했다. 이때 제 3중대가 선두를 섰다. 제3중대는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당했다. 너무 많은 피해를 당해서 정작 화산에 올라가서는 정면의 적을 공격하지 못하고 우측 지역에서 측방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내용은 국경선에 밤이 오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화산에 올라가서는 제1중대가 앞으로 나섰다.)

약 1킬로미터 정도 전진하는데 성공했으나 널찍한 화산의 정상을 점령하려면 계곡을 또 하나 건너 산을 다시 올라가야 했다. 하루정도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공격을 재개했다. 화산을 방어하고 있는 적군은 아군보다 수적으로 많았고 지형도 적의 방어에 유리했다.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싸웠으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군이 점차 불리한 상태에서 날이 저물어 주간 전투가 끝났다. 양측 모두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고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정면대결로는 불리했다. 변칙적인 기습공격이 아니면 적군을 격파하고 화산을 점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김용배 중령은 야간 공격을 결심했다.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다가 적군의 총탄과 수류탄 세례를 받으며 전진을 하지 못하고 고전중이던 제1중대와 제2중대를 대대 지휘소가 있는 곳으로 철수시킨 김용배 중령은 제2중대를 대대 지휘소 부근에 예비대로 남아 있으라고 명하고, 제1중대는 야음을 이용해서 동쪽으로 돌아 화산의 적군을 측방에서 기습공격하라고 명했다.

제3중대는 화산 능선에서 동남남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고지에서 적군과 교전중에 있었다. 제1중대 장병들은 저녁식사로 나누어주는 주먹밥 한 덩어리와 고추장 한 수저를 받아 먹은후,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여 동쪽으로 돌아 아주 은밀하게 전진했다. 불과 3킬로미터의 거리를 침투해 들어가는데 무려 6시간이나 걸렸다.

오전 3시경 제1중대눈 적진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주간에 우세했던 적군은 제1중대의 우회 야간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 병사들은 졸고 있었다. 제1중대는 일제사격을 가하며 화산 제일 높은 곳으로 돌격했다. 허를 찔린 적군은 혼란이 일어나 전사자를 남긴채 산밑으로 도주해 버렸다.

그러나 이날 오전 11시경이 되자 적군은 다시 역습을 가해왔다. 화산꼭대기에서 치열한 공방전의 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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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 48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는 유엔임시한국위원회가 남한에서의 선거를 실시하게 되는 마지막 과정과 소련이 북한에 정부를 수리하는 과정을 정리했다. 이와함께 북한이 남한이 단독선거를 차단하기 위해 남북연석회의를 제의하는 과정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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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부터 1948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대격변으로 부터 나타났을때, 그들은 곧바로 독립을 해야하는 영토에서 정부를 조직해야하는 임무에 봉착했다. 이러한 세 지역에서,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해결방책으로 고려했던 분단을 수행해야 했다. 인도, 팔레스타인 그리고 한국은 비극적으로 분단되었으며, 지속적인 충돌과 비통한 고통을 초래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북한이 모두 핵무기를 확보했기 때문에, 남한은 미국의 핵무기에 의해 보호를 받아 왔으며, 이런 지역적 충돌은 지구적 참화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과 소련이 임시로 나뉘어진 38도선에서 서로를 마주 대면했을때, 점령국들은 이렇게 확대된 악영향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 1948년 봄, 미국 대표부는 유엔이 감독하는 선거를 준비했을 때, 온건하고 좌파적인 정당들이 선거를 보이코트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만일 서울의 새로운 정부가 완전하게 우파라고하면, 국제사회는 이를 정통성이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선거는 한반도에서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실패할 것이고, 대신에 소련이 남한을 장악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줄 수도 있었다.
유엔 임시한국위원회(UNTCOK)의 회원들은 선거에 대한 보이코트를 우려했으며, 동시에 우파 단체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결과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걱정했다. 이런 우려에 대한 열띤 토의 이후에, 그들은 비록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가 반대했지만, 시리아 대표가 제시한 중재안에 합의했다. UNTCOK는 5월 9일 남한에서의 선거를 감시할 수 있었으나, 단지 선택의 자유에 대한 충분한 여건이 있을 경우에 한했다. 이런 결정은 새로운 정부가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면, 유엔은 이를 지키기 위한 도덕적 의무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2년후에 북한이 군사적으로 나라를 통일하려고 했을 때 유엔의 개입을 위한 근거가 되었다.

UNTCOK의 결정 이전에도, 미국의 군정정부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남한의 한국인에게 민주적 과정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라디오 방송, 수업시간, 팜플렛, 전단, 확성기 그리고 기차의 광고를 이용했다. 이런 갬페인은 성공적이었으며, 4월 14일까지 가독능력이 있는 유권자의 90%가 넘는 사람들이 등록을 했다.

북한에 있는 소련대표부는 자연히 이런 미국의 노력에 경고를 받았으며, 이는 서울의 비 공산주의 정부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하게 수립되면 남한에 대한 통제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북한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통치기구를 합법적인 정부로 현실화시키고자 했다. 3월 17일 소련의 코로트코프 사령관은 하지 장군에게 자신은 더 이상 미국과 북한 인민의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임을 통보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제 미국은 김일성과 그의 관리들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코로트코프는 평양정부는 미국이 요금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점령한 지역에 전기공급을 차단한다는 김일성의 편지를 미군정청에 전달했다.

일주일 이후 북한의 초기 정부는 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취했다. 4월 14일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의 철수를 보장하는 문제를 토의하자고, 김구와 김규식을 포함한 13명의 남한 지도자들을 초대했다. 김규식은 이 회담 뒤에 의도를 의심스러워했기 때문에, 북한 지도부에 자신은 연석회의가 독재, 산업국유화를 옹호하지 않으며, 자유선거를 논의한다는 조건하에 참가하겠다고 통보했다. 북한 지도자들이 이런 조건에 동의하고, 김규식과 김구는 평양으로 갔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일주일간의 남북연석회의와 그 결과를 알아보겠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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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3-1 국경선에 밤이오다(다시 전선으로)

이대용은 1950년 7월 5일 오후 6시경 장호원에서 음성방면으로 내려오는 북괴군을 막기위해 무극리로 쪽으로 가는 고개에서 적과 교전중에 부상당했다. 7월 5일 밤 늦게 청주 도립병원으로 후송된 이대용은 그곳에서 기차에 실려 7월 7일 부산에 있는 제5 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몇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속도가 빨랐다.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았던 이대용는 부상에서 회복된 장교들은 다시 편성하는 후방부대로 보낸다는 말을 듣고 전방으로 떠났다. 8월 24일 병원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선으로 향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교들에게 후방부대가 싫어서 일선에 있는 자신의 중대로 복귀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전선으로 향했다.

이대용이 제7연대 제1대대의 후방지휘소에 도착한 것이 1950년 8월 26일 이었다. 이날 저녁 신령에 있던 제6사단 지휘소에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이는 전투력이 제일 약했던 제19연대를 돌파한 북한군 일부가 화산까지 내려와 그곳에서 발사한 것이었다.

상황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화산에 투입하여 적의 진출을 차단하라고 했다. 바로 그럴 때 이대용이 대대로 돌아간 것이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이대용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동안 수염을 깍지 못해서 덥수룩했다. 수면부족으로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대용은 제1중대장으로 복귀했다. 이대용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50알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대용이 데리고 있던 소대장이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육사 8기생으로 제1소대장이었던 한도선 중위는 이대용이 후송된 이후 제1중대장이 되었으나 문경새재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 뒤를 이어 역시 육사 8기생으로 제2소대장이던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사고형식으로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다음에는 육사 9기생으로 제3소대장이던 손종구 소위가 중대를 지휘했으나 낙동강 전투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후송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제1중대에는 장교가 한명도 남아 있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제1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를 지휘했으나 그 또한 낙동강 지구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 이후 원주농업학교 출신으로 육사 10기생인 도진환 소위가 중대장으로 부임해왔다. 이대용이 중대장으로 다시 돌아오자 도진환 소위는 중대선임장교겸 제1소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도진환 소위 또한 며칠후 화산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제2중대 장교들의 소모가 이정도였으니 병사들의 경우도 말할 수 없었다. 6.25 개전초기에 이대용이 지휘했던 제1중대 고참병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보충된 학도병들과 농촌 출신 신병들은 처음보는 중대장이지만 계급이 대위라서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8월 27일 제1대대는 화산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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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48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From 1945-1948, as the victorious powers emerged from the cataclysm of the second world war, they faced the task of organizing governments in territories that were now or soon would be independent. In three of these areas, the great powers carried out what they considered to be the solution of last resort – partition. India, Palestine, and Korea remain tragically divided, bringing lasting conflict and grievous harm. Moreover, since Israel, India, Pakistan, and North Korea all acquired nuclear weapons, and South Korea has been protected by US nuclear weapons, these regional conflicts carry the risk of global conflagration.

In Korea, the danger of such broader ramifications was always in the minds of the occupying powers, as the US and the USSR directly faced each other across the supposedly temporary divide at the 38th parallel. Thus, in the spring of 1948, as US authorities prepared for UN-supervised elections, they were afraid that moderate and leftist parties would boycott the election. If the new government in Seoul were exclusively rightis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might regard it as illegitimate. In that case, the elections would fail to bring stability to the peninsula and would instead open the door to Soviet takeover of the South.

The international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 also worried about a possible boycott of the elections, as well as about the likelihood that rightist groups would use violence to force an outcome in their favor. After heated debate over these concerns, they agreed to a compromise proposed by the Syrian representative, though Canada and Australia dissented. UNTCOK would supervise elections in southern Korea on May 9, but only if there was an atmosphere conducive to freedom of choice. This decision meant that once a new government was created through this process, the United Nations would have a moral obligation to defend it. This laid the foundation for UN intervention two years later when North Korea attempted to unify the country through a military offensive.

Even before this decision by UNTCOK, the US military government began a remarkably energetic effort to encourage Koreans living in the South to participate in the democratic process. They used radio broadcasts, classroom lessons, pamphlets, handbills, loudspeakers, and exhibits traveling by train. This campaign was successful; by April 14 more than 90% of eligible voters had registered.

The Soviet authorities in the North were naturally alarmed by these American efforts, since the establishment of a non-communist government in Seoul with broad popular support would make it much more difficult to gain control of the South. Therefore, they tried to present the governing bodies they had already been created in the North as a legitimate government. On March 17 Soviet Commander Korotkov informed General Hodge that he would no longer act as mediator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population of the North. In other words, the Americans would now have to deal directly with Kim Il Sung and his officials. To solidify this new position, Korotkov transmitted a letter from Kim Il Sung informing the AMG that the government in Pyongyang would stop the flow of electricity to the American zone because the US had not paid its bills.

A week later the proto-government in the North took more direct action. It called for a North-South Conference to be held in Pyongyang on April 14 to discuss holding nationwide elections and securing the withdrawal of foreign forces and invited thirteen leaders from the South to attend, including Kim Ku and Kim Kyu-sik. Since he was understandably suspicious of the intentions behind this meeting, Kim Kyu-sik informed the northern leadership that he would participate only under the condition that the conference did not advocate dictatorship, nationalization of industries, or less than free elections. After the northern leaders agreed to these conditions, Kim Kyu-sik and Kim Ku traveled to Pyongyang.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the weeklong North-South Conference and its aftermath.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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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2. 신령전투에 대한 평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래 어떤 전투를 살펴보려면 전후좌후의 과정을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자료를 뒤져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다만 신령전투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있어 이를 먼저 소개하고 이대용 장군의 참전기를 살펴보려 한다.

신령전투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술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 신령전투를 수행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술이 없다는 것이다.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신령전투는 크게 두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단계가 북한군 8사단이 화산지역으로 공격한 것을 방어한 전투이며, 두번째는 북한군 1사단이 9월 6일부터 공격한 것을 방어한 전투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발간된 전사는 신령전투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군 8사단의 공격을 방어한 1단계만을 기술하거나 어떤 경우는 영천전투까지 일부 포함해서 기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가 방어작전을 수행했는지도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신령전투를 제1단계 위주로 작성했는데 그것도 이대용 장군이 제7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 수행했던 상황을 위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녕전투는 영천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영천 북방의 신녕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영천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방어 전투이다.

북한군 제2군단은 그들의 주공이 지향된 다부동∼효령 일대에서 돌파계획이 좌절되자, 의흥∼신녕 축선에 투입된 적 제8사단에 전차부대를 증원하였다. 이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하양하양을 목표로 대대적인 돌파 및 침투작전을 전개하며 8월말에는 조림산조림산∼화산화산 선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적은 연일 계속되는 국군 및 유엔군의 지상 작전과 공중폭격으로 상당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사기마저 극도로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위천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저항선이 와해되자, 558고지∼637고지∼화산을 연하는 선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이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9월초 인접 제15사단의 영천 점령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점령한 후 영천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화산 일대에 주공을 두고 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포격을 집중해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유엔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가 진지 정면의 적에 맹폭을 가함으로써, 적의 총공격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제6사단은 즉시 방어진지 전방으로 반격해 전과확대에 돌입하였다. 적 제8사단은 이후 공세작전을 중단한 채 현 전선만을 유지하고 야간에 중대규모 수준의 소규모 전투만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군 제6사단은 예하의 3개 연대와 배속된 2개 연대를 통합하여 동서간 32㎞에 이르는 산악정면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이 제6사단의 좌측에 투입됨에 따라 제1사단은 가산∼신원간 13㎞의 정면을, 제6사단은 운산동운산동∼화산화산간 15㎞ 방어정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투지경선의 변경과 조정으로 인해 제8사단 제10연대는 제6사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원대복귀하기로 결정하였고, 제5연대와 기갑연대 또한 제7사단으로 원대 복귀한 후 육군본부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거쳐 영천을 우회 공격하려던 기도가 좌절되었고, 이는 영천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에 나섰던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 지역에서 고립된 채 각개격파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에 국군 제6사단은 대구 외곽선인 신녕지구의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키는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상기 기술을 보면 화산지역의 전투가 낙동강 지역 전투 전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보유하고 있는 자료가 제한된 관계로 우선 ‘국경선에 밤이 오다’편에 기술된 내용을 정리해 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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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1. 신령전투 전승기념비

이대용 장군은 자신이 신령전투를 자신이 경험한 전투중 가장 치열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전쟁 당시 소대 중대급 전투중에서 치열한 전투가 많았지만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공식적인 기록은 유감스럽게도 다들 유리하게 각색이 되어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신령전투가 의미 있는 것은 이대용 장군이 전투이후에 기록에 남겼기 때문이다. 이대용 장군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진행한 녹취사업에도 신령전투를 증언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국경선에 밤이 오다’에도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와 함께 별도로 전사기록을 별도로 군사지도로 남겼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6사단에서도 신령전투에 관한 전투상보를 남겼으나 상세한 내용을 알기가 어려웠다.

신령전투는 낙동강 전투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곳 중의 하나다. 지금도 영천에 가면 신령전투 승전비가 세워져 있으나 정작 그에 관한 기록은 별로 없는 것이 아쉽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신령전투 전승 기념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전승비는 성환산 정상부분에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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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대용 장군이 경험한 신령전투는 조림산과 화산방면에 침투한 적과 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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