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신령(화산)전투) 5 신령(화산)전투에 대한 주변조사

####신령전투를 살펴보면, 초기전사에는 화산지역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화산전투의 의미에 관한 평가가 조금씩 나온 듯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평가에 따르면 초기 8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결정적인 역할을 7연대 1대대가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적 8사단의 입장에서 대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화산을 장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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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전사서적을 보아서는 당시의 신령전투를 제대로 이해기 어렵다. 많은 내용이 한꺼번에 여기저기 씌여져 있어서 전체이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존의 전사서에 나오는 내용을 케이스 별로 하나씩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1984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신령 영천전투’라는 서적을 살펴보았다.

이대용 장군은 화산전투를 기술하면서 19연대의 작전실패로 화산지역까지 적 제8사단에게 뚫렸다고 언급한 바 았다. ‘신령영천전투’에서는 다름과 같이 이런 상황을 기술해 놓았다.

대구 점령을 목표로 북괴군의 주공이 투입된 다부동 일대의 전투가 일단락된 8월 26일, 뜻밖에도 북괴군 제8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의성-의흥-신령 접근로를 따라 진격하여 제19연대 방어정면을 돌파한 후, 화산-조림산 선까지 진출하였으므로 신령이 위태롭게 되었다.( p.72)

‘신령 영천전투(1984)’에 이대용 장군이 참가한 화산 전투는 130쪽 부터 기술된 9 화산 탈환작전에 기술되어 있다. 당시 제7연대 1대대는 사단의 예비로 편성되어 있었다. 제1대대를 사단의 예비로 편성한 것은 사단의 지시인 듯 한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제19연대의 방어정면이 돌파하여 화산일대로 진출한 적은 북한군 제83연대 일부 병령이었다. 조림산이 피탈되면서 신령지구는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이제 제6사단과 제2군단 그리고 육군본부까지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상황이라고 파악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은 전반적으로 소강상태였고 신령지역만 위기상황이었다. 당시 미 제8군은 전투지대 재조정을 고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령북방지역의 돌발사태는 미제8군단의 계획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었다.

‘신령영천 전투’는 당시 작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만의 하나라고 제6사단 주 저항선이 무너질 경우, 대구를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은 오직 팔공산 밖에 없으며, 동사단이 산으로 후퇴하게 된다면 영천 서쪽 일대가 노출되어 대구와 경주가 적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성을 감안하여 제2군단과 육군본부는 8월 28일 제1사단 제15연대 제2대대, 8월 29일에는 제15연대 주력과 신편부대인 제7사단 8연대 제1대대를 각각 제6사단에 배속하고, 미제8군은 항공지원 우선권을 제6사단 방어 정면에 부여했다.

‘신령영천전투’는 제6사단이 8월 29일 화산탈환작전을 전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대용 장군의 기술에 의하면 이미 8월 27일 자신의 중대를 이끌고 화산으로 출발했다고 밝히고 있다. ‘신령영천전투’보다 이대용 장군의 기술이 신빙성 있다고 생각한다. 이대용 장군은 8월 26일 대대로 복귀했고 그다음날 27일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대용 장군은 전투에서 매일 일기형식으로 기록을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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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화산)전투) 4. 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평가 그리고 신령전투의 범위와 의미

전사는 전쟁이 끝난이후에 스스로 작성한다. 그래서 전사기록을 보고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신령전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령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에 속한다. 그런데 그 기록이 분명하지가 않다. 군에서 발간한 전사책을 보면 어떻게 싸웠다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이 아닌지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전투를 치른 지휘관이 직접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 전사책을 읽어서 도대체 어떻게 전투가 진행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필자 생각에는 전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요구하는 바를 다 반영하다 보니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기록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기록을 보다보면 그런 혼란함속에서도 서로 부합하는 이야기구조를 찾아 낼 수 있는 법이다.

신령전투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대용장군은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 조림산에서 제19연대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해 전선이 뚫렸고 그래서 화산까지 북한군 8사단이 진출했고 이를 막기 위해 7연대 1대대가 화산으로 공격했다고 기술했다.

이대용 장군은 8월 27일 제7연대 1대대가 화산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9월 4일 화산에서 전투가 끝났으며 , 9월 7일 진지를 교대하고 후방으로 나왔으며 9월 16일 부터 반격작전을 시작했다고 이야기 했다.

신령전투전적비의 기록은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의 전투를 신령전투라고 기록하고 있다.

1950년 8월 30일 적 제8사단은 기갑사단 지원 밑에 우리 제6사단은 방어선인 조림산과 화산일대에 침투하여 당시 나흘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적은 다시 병력의 보충과 전차 40대의 증원을 받았다. 9월 6일 우리 제6사단의 전면을 공격해왔고 적 제1사단은 동촌 비행장을 분쇄할 목적으로 강력한 침공을 거듭하여 왔으나 아군은 용전혈투 끝에 이를 격퇴했다. 대구 점령을 목적으로 강군하던 적 제1사단은 우리 제6사단의 필사적인 방어전과 국군과 연합군의 활약으로 9월 15일 완전격퇴하였다. 이 용용무쌍한 혈투사를 길이 후세에

빛내고자 이 작은 돌을 세우노라

이 기록을 보면 당시 제6사단이 신령전투라고 칭한 것은 북한군 제8사단이 조림산과 화산일대에 대한 공격과
북한군 제1사단의 동촌비행장 방향으로의 공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전적비는 1958년 10월 28일 세워졌다.

그러나 그 이후 신령전투의 범위는 더 확대되었다. 우선 1982년 발간된 청성전사는 신령전투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번째가 신령부근 전투(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이고 두번째가 신령,조림 반격전(50년 9월 15일부터 9월 22일까지)로 정리했다. 즉 전적비에서 언급한 신령전투는 첫번째 단계인 8월 30일부터 9월 15일 까지인 것이다.

한동안 신령대첩이라고 까지 불리던 작전의 의미가 이렇게 희석된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확인해보아야 한다.
전투가 끝나면 통상 용감하게 싸운 사람들은 말이 별로 없고 별로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후의 논공행상에 더 열심인 경우가 많다. 그런 평가중에서도 당시 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이 언급한 내용은 관심을 끌만하다.
청성전사(1982) 361쪽에서 김종오 장군은 신령부근 전투에서 잘 싸운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신령지구 전투에서는 적전차 8대를 파괴한 변규영 소위와 대대장 김종기 중령(7연대 1대대)과 김용배 중령(제19연대 1대대장), 그리고 2연대 대대장 이운산 소령이 특히 전투를 잘하였다.

라고 증언을 했다. 그러나 청성전사는 김용배 중령의 소속을 잘못 기록했다. 제19연대 1대대장이 아니라 제7연대 1대대장이었다. 그리고 대대장 김종기 중령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청성전사에 당시 제19연대 1대대장은 허용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차를 파괴했다는 변규영 소위도 제19연대 1대대 소속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신령전투중 화산지역에 적 제8사단의 주공이 지향되었다고 기록했다.

반면에 위천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저항선이 와해되자, 558고지∼637고지∼화산을 연하는 선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이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9월초 인접 제15사단의 영천 점령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점령한 후 영천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화산 일대에 주공을 두고 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포격을 집중해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유엔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가 진지 정면의 적에 맹폭을 가함으로써, 적의 총공격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제6사단은 즉시 방어진지 전방으로 반격해 전과확대에 돌입하였다. 적 제8사단은 이후 공세작전을 중단한 채 현 전선만을 유지하고 야간에 중대규모 수준의 소규모 전투만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대용 장군이 수행한 화산전투는 신령전투에서 적 제8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결정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전사책에서 김용배 중령과 이대용 대위가 수행한 화산전투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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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3-6 화산의 전투의 종료

초가을이지만 작업복에 스며든 소낙비는 오싹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대용은 찹찹한 심경이었다. 만일 적이 9월 2일가 같은 규모의 공격을 해 온다면 제1중대의 남은 병력으로는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교라고는 이대용 한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이대용은 적이 공격해 오면 그날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가 계곡에 부딪쳐 슬프게 들려왔다.

처량하고 외로운 밤이이었다. 통신병 이순재 중사가 내미는 무전기를 내밀었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무전이었다.

“아, 압록강 대장, 압록강 대장, 기한이 얼마나 심하고 , 기한이 얼마나 심하오. 여기는 백두산 대장, 백두산 대장, 기한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나를 용서하오, 부족한 나를 용서하오.”

생사의 기로에 서서 죽음쪽에 기울어지고 있는 부하의 모습을 후방에서 보고 있기가 너무나 가여워하는 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목소리였다.

이대용은 비바람과 함께 김용배의 목소리를 들으며 흐느끼며 울었다. 시간이 흐르니 내리던 소낙비도 멎고 적군의 역습도 없는 가운데 날이 새었다. 적군과 아군의 시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고, 소련식 아까보총, 따발총, 그리고 아군의 M1 소총, 칼빈소총 등이 풀밭이나 산병호 옆에 많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를 정리할 인원도 기력도 없었다. 언제 북쪽에서 역습해 올지도 모를 북한군에게 주의를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경황도 없었다.

이날 오후 4시경, 화염방사기 하나와 화염방사기 사수와 부사수가 이대용의 중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신병들도 보충되었다. 탈진상태에서 의지력 하나로 버티고 있던 제1중대는 인원도 회복되고 신무기도 갖게 되어 사기가 올랐다.

적군이 다시 공격해오면 당대의 신무기 화염방사기로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화산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틀이 지나도 북한군은 화산에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장거리 사격을 가끔씩 날려올 뿐이었다.

9월 7일 오후 3시경, 제7연대 2대대가 화산으로 나와 제1중대 방어진지를 인수하고, 제1중대는 화산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 방향으로 약 3킬로미터 이동하여 배치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현지 임관제도가 생겨 2등 상사 이상의 하사관이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일선 소대장으로 발령되었다. 제1중대에는 서근석 소위, 김덕출 소위, 이순영 소위가 부임하여 소대장이 되었다. 제1중대는 새로운 진지에서 중대를 재편성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적 진지에 수색조를 내보내는 정도의 가벼운 활동을 하면서 9일간을 보냈다.

9월 16일 인각사 동쪽 약 3킬로미터 지점에서 큰 도로를 횡단하여 제1대대의 일부로 반격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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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3-5 화산에서의 마지막 격전(국경선에 밤이 오다 에서)

9월 3일 밤, 아군 제6사단의 포병지원 사격은 주로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화산의 동쪽 부분과 제1중대 앞의 북쪽 능선을 강타하고 있었다. 아군의 105미리 야포진지는 화산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얼마 쏘다가는 달아오른 포신을 냉각시키기 위해 한동안 쉬곤했다. 북한군의 야포와 박격포는 실탄이 동났는지, 이날 밤은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9월 4일 날이 샜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제1중대에게 화산 동쪽 부분을 확보하고 있는 적군을 공격하여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9시경 제1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아군의 포탄세례를 많이 받은 북한군은 약간의 저항을 하다가 진지를 포기하고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진지를 돌아서 제1중대가 비워두고 나온 서쪽 진지로 들어갔다. 결국 또한번의 진지교환이 일어났다. 화산은 넓었고, 피아간 병력이 부족해서 생긴 현상이었다.

지리멸렬한 제2중대로부터 기대할 것은 없었다. 제1중대 병사들은 최종석 소위가 지휘하는 제3중대가 화산에 증원해주기를 바랐으나 이또한 바람일 뿐이었다. 제3중대는 화산 동남남 약 5킬로미터 지점에서 신령으로 직행하는 적군의 주요 접근로를 차단하고, 적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산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화산 꼭대기의 북한군도 완전히 지쳐버렀고 제1중대도 북한군처럼 지쳐버렸다. 피차 증원군없이는 더 싸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제1중대에게 또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최후로 적의 심장을 찔러 적군의 맥박을 멈추게 하라는 것이었다.

9월 4일 오후 5시경 제1중대는 중대장 이하 전원이 적진을 향해 달음박질도 돌입했다. 화산에 또 한밤이 왔다. 적군은 대부분 괴멸되었다. 살아남은 극소수는 화산을 떠났다.

약 1주일간의 화산전투에서 제1중대는 최종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도진환 소위는 전사했고, 소대장을 대리하던 3명의 하사관들도 전사 또는 부상을 입어 후송됐다. 병사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쓰러졌다. 전투가 끝나고 남아 있던 제1중대 병력은 1개소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리는 가랑비는 저녁때부터 소낙비로 변하여 한밤중까지 내리 퍼부었다.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고 저녁도 굶었다. 제1중대는 얼마 남지 않은 소수의 병력으로 외로이 화산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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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3-4 화산에서의 사투 (국경선에 밤이 오다 에서)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전날 화산에서 달아나 흩어진 제2중대 병사들을 계곡과 대대 지휘소 부근 숲속에서 찾아내 재편성했다. 그리고 제2중대 선임하사관 김칠만 상사 인도하에 다시 화산으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제1중대장 이대용에게 제2중대까지 통합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제2중대 병사들이 다시 자신들의 진지에 들어가고 그곳을 임시로 점령하고 있던 제1중대 제1소대와 제2소대가 제1중대의 원진지로 돌아왔다.

화산에서 포로가된 북한군 병사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 1개분대의 인원구성은 분대장과 부분대장, 그리고 2,3명 정도의 병사만이 북한 정규군이고 나머지 4-5명은 주로 서울출신 의용군이며, 이 중에는 선린상업고등학ㄱ 교사와 고려대학교 학생들도 많이 끼여 있었다.

9월 2일 오후 2시경 북쪽에서 북한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 북한군의 공격은 그 전날보다 더 강력했다. 오후 3시경 별로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않은 제2중대는 다시 무너져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김칠만 상사가 몇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이대용이 있는 곳으로 와서 면목없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이대용도 사기가 땅에 떨어진 제2중대 병사들을 어쩔 수는 없었다.

김칠만 상사는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싸울 마음을 잃어버린 병사들을 제대로 통솔하기는 어려웠다.

제1중대가 떠나버리고 나서 화산에서는 사투에 사투가 거듭되는 처절한 근접전이 벌어졌다. 깊은 계곡을 하나 사이에 두고 약 3킬로미터 정도 남방에 있는 대대 지휘소에서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김용배 중령은 무전기를 농해 중대장이나 대대장이 죽을 곳은 바로 여기라고 강조했다. 이곳을 뺏긴다면 부산도 뺏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지막 무전기를 내려놓을때 ‘수고하오’라고 하는 따스한 인정이 깃든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전투는 치열했다. 진지 일부를 뺏겼다 다시 탈환하고, 탈환한 뒤 다시 뺏기는 일진일토의 혼전이 9월 3일 오전까지 계속되다가 오후에 접어 들면서 약 4시간은 이렇다 할 전투없이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화산의 동쪽 부분을, 그리고 북한군은 화산의 서쪽 부분을 확보하고 있었다. 즉 그 전날의 제2중대 진지에는 이대용의 제1중대가 있고, 그 전날의 제1중대 진지에는 북한군이 있었던 것이다.

오후 4시경 화산의 정적을 깨뜨리며 북한군이 서쪽으로부터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화산에서 제1중대를 완전하게 쫓아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북한군이 숫적으로 우세하고 공격이 치열해서 결딜수 없게 되자 제1중대는 진지에서 뛰쳐나와 남쪽으로 돌아서 적의 후방을 공격했다. 진지교대가 이루어진 것 처럼 되었던 것이다.

혼전과 혼전, 격전의 난투 속에서 진지가 바뀌고 또 바뀌니 식사를 운반해 오던 한국 청년단원이 북한군쪽으로 잘못가서 사살당하기도 하고 붙들리기도 했다. 끼니를 이어주던 주먹밥 한덩어리와 고추장 한숟갈의 보급도 끊어졌다.

실탄보급도 두절되었으나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그들의 실탄 만으로도 전투를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병력보충을 하기 위해 후방의 대대행정반과 중대행정반에는 수백명의 신병이 보충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장터인 화산에는 혼전이 벌어지고 있어서 신병들을 보충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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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전투) 3-3 화산전투에서 제2중대장의 탈영(‘국경선에 밤이오다’에서)

화산은 해발 828의 높은 산이지만 정상부는 들판처럼 평평하고 넓었다. 작은 고원지대처럼 생겨서 1개 중대로 정밀방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날이 저물어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밤늦게 제1중대 진지 왼쪽 일부가 적군에게 점령당했으나 날이 새자 역습으로 이를 탈환했다.

화산에서 남쪽 계곡을 건너 대대 예비대로 있던 제2중대가, 9월 1일 10시경 화산으로 전진 제1중대 우측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제2중대는 사고가 나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중대였다. 중대장이 이틀전에 탈영하여 후방으로 도주한 뒤 행방을 감춰버린 것이다.

국경선에 밤이오다에서 이대용 장군은 당시 2중대장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제2중대장은 평상시에는 중대원 교육을 잘 시키고 마음도 착하고 모든 일을 열심히 하여 6.25 전쟁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춘천에 있는 제7연대에서 가장 유능한 중대장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당연히 연대장과 대대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과 전투를 하게되자 평시와 달랐다.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꽁무니를 빼고 후퇴를 일삼았다. 덕과 용기 그리고 지략을 겸비한 김용배 대대장은 제2중대장에게 용기를 심어 주어 전투에 쓸 수 있는 지휘관으로 만들어 보려고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중대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 8월 30일 밤에 아주 탈영을 하고 만 것이다.

중대장이 탈영을 한 중대이니 제2중대는 사기가 말이아니었다. 그런 중대를 중요 방어 정면에 배치한다는 것은 절술적으로 옳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3중대는 화산까지 올라가는 전투에서 선두를 담당하느라 피해를 많이 입어 전투에 투입할 수 없었다.

중대장이 없으니 제2중대 선임하사관 김칠만 상사가 중대장 대리가 되어 제1중대 우측에 나란히 배치되어 점심식사를 막하자마자 북쪽에서 북한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제2중대 병사들은 진지를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오후 6시경 화산의 제2중대 진지에는 단한명의 병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북한군이 제2중대 진지를 점령한 채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밤에도 콩 볶듯이 투닥거렸으나, 상황은 초저녁과 같았다. 9월 2일 오전 8시경, 제1중대 제1소대와 제2소대가 제2중대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 약 3시간의 교전끝에 제2중대 진지를 재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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