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신령 화산전투) 8-1 이대용 장군의 전투기록중 잠전 지휘관


이대용 장군은 생전에 화산전투에 대한 기록을 여기저기에 남겨 놓았다. 최근에 이대용 장군이 작성했던 8장 분량의 전투기록과 12장의 작전상황 투명도 그리고 2장의 참고기록을 남겨 놓았다. 지난 겨울에 이 기록을 바탕으로 현장을 답사했다. 전투지역을 찾는 도중에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주민을 만나 지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부터는 그 내용들을 하나씩 정리하도록 하겠다. 


먼저 이대용 장군은 화산전투를 두단계로 정리했다. 

공격전투기간 : 1950. 8. 27 - 1950. 9.4

방어 및 소강상태기간 : 1950. 9.5 - 1950. 9.16이다. 


공격전투기간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는 1950. 8. 27 - 28간 제3중대의 용암산과 화산 점령


두번째는 1950. 8.30 - 31 제1중대의 야간 공격


세번째는 1950. 9.2 - 4 제1중대의 화산지역 북방 무명고지 전투이다 


이대용 장군은 본인이 참가한 전투만 상세하게 기록을 남겼고 제3중대의 작전에 대해서는 간단하지만 인상적인 평만을 남겼다. 


“화산지구전투는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였음. 최초 2일간(1950. 8. 27 및 1950 8. 28) 제 3 중대가 보여준 그 뛰어난 공격 정신은 세계전사상 어느나라 강병들도 그 이상은 못될 것임”


유감스럽게도 제3중대의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중대장인 최종석 중위도 자신이 치른 전투에 대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전사연구가 중에서 최종석 중위 생전에 찾아가 전투경과에 대해 물어 보았으나 그냥 별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석 중위는 전쟁은 잘 했으나 그 이후 삶은 매우 곤궁했다. 평생 가난에 찌들려 살았다고 한다. 생전에도 별로 말이 없었다고 한다. 


공격 전투간(1950. 8.27 - 9.4) 지휘관은 

제 6사단장 김종오 준장

제7연대9장 임부택 대령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 제1소대장 도진환 소위, 제2,3,4 소대장은 결원(하사관이 대행)


제2중대장 오윤석 대위


오윤석 대위는 8월 30일까지 중대장으로 중대에 있다가 그 이후에 탈영하고 말았다. 이대용 장군은 그 이전의 기록에서는 오윤석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나 전투기록에서는 지휘관 이름을 적어 놓았다. 


1950년 8월 30일 이후에는 제2중대 선임하사관인 김 칠성 상사가 대행, 장교 없음. 이라고 기술해 놓았다. 


제3중대장 최종석 중위, 제2,3,4 소대장 결원(하사관이 대행)


제7연대 제4중대장(대리)


신임 소위였으나 성명미상

제4중대는 중화기 중대로 81미리 박격포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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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화산)전투) 7 화산전투의 의미, ‘신령 영천전투(1984)’에서

어떤 전장이든지 결정적인 지역과 지점이 있다. 국방부가 작성한 전사책자에는 그런 국면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화산전투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내용을 ‘신령 영천전투(1984)’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산 전투는 신녕 방어작전의 일대전환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며, 화산지역을 장악함으로써 6사단이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제15연대와 제7연대 제1대대가 9월 1일에 화산 일대 중요지형을 탈환하고 이 지역에 진출했던 적을 격멸하였으므로 제6사단은 신녕 방어작전의 일대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적 제2군단 작전통제하게 대구와 경주를 목표로 공격하게된 적 제4공격집단은, 주공인 북괴군 제8사단을 전차 21대로 증강하여 의령-갑령-신녕-하양 축선에, 조공인 제15사단에 전차 5대를 배속하여 죽장-영천 축선에 각각 투입하여, 그들로서는 마지막이 될 대대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공세에서 북괴군 제2군단은, 지난 8월 공세 당시 주공을 투입했던 다부동-대구 축선에는 강력한 화력을 보유한 미제1기병 사단이 배치된 반면, 국군 제6사단 정면에서는 그 예하 제8사단이 8월말에 이미 신녕 공격을 위한 중요지형인 조림산-화산을 확보한 까닭에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가는 상황을 종합 분석한 결과, 의흥-신녕 축선을 돌파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근거로서는 당시 최악의 상태로 빠져든 북괴군의 수송 및 보급실태와 적 제2군단에 배속된 제17기갑여단의 전차 총 보유수 40대중 절반이 넘는 21대를 신녕 정면에 집중 투입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연유로 적의 대대적인 공세가 개시될 전날에 신녕 방어 성패의 관건이 되는 전술적 요충지인 화산을 탈환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를 계기로 제6사단은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므로 상황에 즉응하면서 전투력을 운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pp.142-143)

신령 영천전투에 기술된 화산전투의 의미

1 신령방어작전의 일대전환기

2 제6사단이 전장의 주도권 장악

3 상황에 따라 전투력을 운용할 수 있는 융통성


데이빗 SMT 토큰 상장 MOU 체결 - 스팀헌트, 이스팀, 유토피안, 액티핏, 펀디션, 테이스팀, 트립스팀, 디클릭, 엔토파즈, 케이팝스팀 공동 추진

안녕하세요, 오늘은 스팀헌트가 증인 활동을 시작한 이후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에 관한 소식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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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화산)전투) 6-2. ‘신령 영천전투(1984)’, 과 이대용 장군의 기록의 내용 차이

이대용 장군은 신령전투에서 야간 공격을 하게 된 것은 김용배 대대장의 결심때문이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당시 3중대는 화산까지 올라가는 통로를 개척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어서 화산으로 올라간 이후에는 제대로 공격작전에 투입되지 못했다고 한다. 김용배 대대장은 3중대를 화산 지역의 오른쪽에 있는 고지에 보내서 대대의 측방을 보호하도록 했다. 김용배 대대장은 항상 측방에서 적으로부터 기습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이대용 장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정면대결로는 불리했다. 변칙적인 기습공격이 아니면 적군을 격파하고 화산을 점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김용배 중령은 야간 공격을 결심했다.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다가 적군의 총탄과 수류탄 세례를 받으며 전진을 하지 못하고 고전중이던 제1중대와 제2중대를 대대 지휘소가 있는 곳으로 철수시킨 김용배 중령은 제2중대를 대대 지휘소 부근에 예비대로 남아 있으라고 명하고, 제1중대는 야음을 이용해서 동쪽으로 돌아 화산의 적군을 측방에서 기습공격하라고 명했다.

제3중대는 화산 능선에서 동남남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고지에서 적군과 교전중에 있었다. 제1중대 장병들은 저녁식사로 나누어주는 주먹밥 한 덩어리와 고추장 한 수저를 받아 먹은후,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여 동쪽으로 돌아 아주 은밀하게 전진했다. 불과 3킬로미터의 거리를 침투해 들어가는데 무려 6시간이나 걸렸다.

‘신령 영천전투(1984)’에서는 야간 공격을 하게 된 것을 이대용 장군의 건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17:00 쯤, 대대장은 중대장과 참모들을 모아 놓고 목표 탈취 방책을 모색하기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틀 전 제5육군 병원에서 자진 원대 복귀한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지형과 적정을 고려하여 야간 공격을 건의하였다. 대대장은 그 방안이 자신의 복안과 일치되고 있는 점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다음과 같이 야간 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p.132)

한편 ‘신령 영천전투(1984)’는 제2중대는 대대 지휘소에 예비대로 남겨 놓고 제3중대를 화산 오른쪽에서 측방을 보호토록 했다고 한 이대용 장군의 기록과 달리 화산 공격에 2중대와 3중대가 같이 야간 공격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 1대대의 야간 공격 계획

제1중대 : 공격 선봉중대로서 31일 일몰직전에 행동을 개시하여 목표 서쪽으로 우회한 후 다음날(9월 1일) 03:00 정각에 돌격을 개시한다.

제2중대 및 제3중대 : 18:00 부터 목표 정면에 대한 양공을 실시하면서 대치한 적의 관심을 끌어 들인 뒤 21:00에 공격 개시선을 통과하여 목표 정면 8부 능선으로 진출하며, 제1중대가 돌격을 개시하면 일제히 공격한다.

한편, 제1중대가 단독으로 야간 공격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대용 장군의 기록과 ‘신령 영천전투(1984)’의 기록이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신령 영천전투(1984)’는 제1중대가 우회해서 적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포로를 잡았고 그래서 야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이대용 대위가 애초 정해진 시간 보다 일찍 돌격을 명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대용 장군의 기록에는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말도 없고 적에게 들킬 상황도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냥 계속 야간 공격을 계속해서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오전 3시경 적진 속에 들어갈 수 있었고 북한군이 경계를 소홀히하고 있어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오전 3시경 제1중대는 적진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주간에 우세했던 적군은 제1중대의 우회 야간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 병사들은 졸고 있었다. 제1중대는 일제사격을 가하며 화산 제일 높은 곳으로 돌격했다. 허를 찔린 적군은 혼란이 일어나 전사자를 남긴채 산밑으로 도주해 버렸다.

사소한 부분같지만 이런 부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한국군이 작성한 당시 한국전쟁사의 상당부분이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전사를 마치 소설처럼 구성해 놓아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특히 한국전쟁사를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작성하게 되면서 사실과 허구가 많이 섞인 듯한 느낌을 지을 수 없다.

한편 화산지역에서 전투한 부대들에 대해서도 ‘신령 영천전투(1984)’의 내용은 이대용의 기술과 차이가 있다.
이대용은 화산지역에는 제7연대 제1대대만 작전을 수행했다고 기술했다. 화산 오른쪽에는 개활지였고 그 개활지 오른쪽에 제3중대를 보내 측방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산지역에는 다른 부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령 영천전투(1984)’에는 제7연대 제1대대 우측방에 제15연대 제1대대와 제3대대 그리고 제8연대 제1대대까지 화산지역으로 진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날 14:00 제7연대 제1대대 우측방에서는 사단에 배속된 제15연대의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주봉 동쪽 봉우리-637 고지를 연결하는 지역을 확보하였으며, 제8연대 제1대대는 인접 제8사단과 부대배치 간격에 형성된 공간지대를 경계하기 위하여 646 고지 북쪽 무명고지 일대로 진출 중에 있었다.

한편, 제7연대 제2대대도 화산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다음날(2일) 제7연대 제2대대가 화산 주봉 북서쪽 1.7 km 지점의 725 고지를 탈환하자, 제1대대와 제2대대는 상호지원할 수 있는 방어진지를 편성했다(p.134)

그러나 이대용의 기술에 의하면 제2대대는 화산의 전투가 모두 끝난뒤 이대용이 있던 화산지역에 와서 진지를 인수받았다고 한다.

‘신령 영천전투(1984)’는 화산전투에 관한 기록에 제15연대와 제8연대 제1대대의 증원에 관해 약 4쪽에 걸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 화산의 주봉과 이어진 남쪽지역의 고지에대한 전투 기술이다.

그런데 이대용 장군은 나중에 현지를 답사하면서 자신이 싸웠던 지역이 화산이 아니라 화산을 지나서 북쪽에 있는 고지군들이었다고 증언을 했다. 당시에는 그냥 화산이라고 해서 화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직접 다시 현지를 가서 보니 자신이 전투를 했던 주 전투장은 화산 성벽과 성문이 있는 횡격실의 고지군이었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과 같이 전투를 했던 생존자의 증언도 동일했다.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 발간된 화산전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소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심스럽게 전사기록이 이상하게 기록된 이유는 아마도 전공과 관련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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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49.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에서는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가 소련의 치밀한 계획하에 개최되었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소련은 북한만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완충지역으로 삼기는 어렵다고 보고 한반도 전체를 통제하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기구에 의해 완전하게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이 자유선거를 수용할 것이며 전기를 차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남한에서의 유엔이 실시하는 선거에 반대하기로 했다는 것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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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48년 유엔이 시행하는 선거를 감독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한 국가의 대표들이 이런 선거가 한국의 분단을 강화시킬 것이며, 그 이유는 소련이 선거를 북한지역에서 실시할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던 것을 살펴보았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의 몇몇 위원들은 그런 이유로 선거의 실시를 반대했으나, 대부분은 그런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결론을 도달했다. 이승만은, 남한이 혼란에 빠져 있으면 소련이 이를 차지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이런 관점에 동의했고 미국이 남한에서 단독정부의 수립을 위해 속도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의 다른 정치지도자들은 단독정부를 그리 받아 들이고자 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 들여 1949년 4월 19일 평양을 방문하여 어떻게 전체 한국을 대표하는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참가했다.

김일성은 왜 이런 회의를 개최했는가 ? 우리는 1948년 김일성이 이런 회의를 시작할 만한 권한을 가지지 못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 문서고 기록들은 후기 스탈린 시대의 정치문화를 지키면서, 소련의 대표기구들이 심지어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대한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소련의 대표기구들은 김일성의 연설, 가두행진의 배치, 북한의 항구에 있는 크레인의 사용과 관련하여 중국과 협조하는 것 등까지를 승인했다. 이런 상황이 1948년 가을 일반 북조선인민공화국이 창설되자 조금 달라졌으나, 그 이시간 이전까지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모스크바의 의도를 확인해야하는 것이다.

공동선언문은 또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했으며, 남한에서 단독정부의 어떠한 일방적인 수립도 거부했다. 소련이 이미 충분한 숫자의 충성스런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식별했기 때문에, 그들은 안전하게 통치를 한국인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한국에 대한 소련의 목표가 한반도를 동쪽에서 소련에 대한 미래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안보 완충지역을 만들고자 하는 것임을 보아 왔다. 1948년까지 그들은 한반도의 북부절반은 그런 조건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남한에 한국인구의 2/3가 살고있기 때문에 북한이 적대 세력에 의해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 한반도를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일 때까지 소련의 안보는 불안정하게 남아 있었다. 남한에서의 혼란과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미국의 군정에 대한 혐오로 인해, 소련의 대표기구들은 미국의 군대가 철수하면 김일성의 통치기구를 전체 한반도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만일 유엔이 지원하는 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고 정부가 수립되면 남한지역을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이런 남북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이런 선거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주일간의 회의 마지막에 무엇보다 먼저 점령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소련은 이미 북한에 군대의 창설을 시작하고 있었으며, 이 군대는 중국 공산당 군대와 같이 싸웠던 수만명의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귀환하면서 강화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전하게 자신의 군대를 철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의 뒤에 숨어 있는 의도와 북한지도자들의 소련에 대한 충성에 실망했다. 그들은 김일성에게 남한에서 온 방문객들을 환영하기 위해 열린 4월 25일 가두행진에서 한국인들이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를 행진시키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그들은 또한 “스탈린 원수와 소련 만세”라고 한국인들이 외치는 것에 대해서노 불만을 표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자유선거를 받아 들일 것이며 전기를 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반대로 두명의 남한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유엔이 시행하는 선거를 보이코트하는 것에 동의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5월 10일 선거가 다가오자 남한에서 격렬해진 폭력에 대해 살펴보고 선거의 결과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이 포스트는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을 참고했다. 서교수는 미국립 문서보관소의 1950년 10월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을때 확보한 문서의 콜렉션에서 발견된 연석회의의 기록을 바탕으로 기록을 정리했다. 이 문서는 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로 이송되었으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열람가능하다.


비트코인 관련 만우절 하니 ‘팔도 비빔밥’탄생 과정이 떠올랐는데…

올해의 4월 1일이 주는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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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49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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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have seen that the representatives of outside powers who came to Korea in early 1948 to supervise UN-sponsored elections understood that such elections would solidify the division of the country because the Soviets would not allow them to be held in the northern zone. Several of the UNTCOK members opposed holding elections on those grounds, but most concluded that while this outcome was undesirable, it would be even worse to fail to create a government in the southern zone. Syngman Rhee agreed with that point of view and urged the US to speed up creation of a separate state in the South, fearing a Soviet takeover if the southern zone remained chaotic.

Other political leaders in Seoul were less willing to accept separate elections. Desperate for an alternative, Kim Ku and Kim Kyu-sik accepted Kim Il Sung’s invitation to travel to Pyongyang on April 19 for a conference on how to create a unified government for all of Korea.

Why did Kim Il Sung call this conference? We have to note that in April 1948 Kim Il Sung did not have the authority to initiate such a meeting. Russian archival records reveal that, in keeping with the political culture of the late Stalin period, Soviet authorities made all decisions on Korean issues of even minor importance. Thus, Soviet authorities had to approve Kim Il Sung’s speeches, arrangements for parades, communications with Chinese about use of a crane in a Korean port, etc. This situation changed somewhat in the fall of 1948 once the DPRK was created, but for events before that time we have to examine Moscow’s reasoning.

We have seen that the goal of the Soviet Union with regard to Korea was to transform the peninsula into a security buffer against a future attack on the USSR from the East. By 1948 they were confident that the northern half of the peninsula would provide that service, but since two-thirds of the Korean population lived in the South, the North might be overrun by hostile forces. Consequently, Soviet security remained precarious until they could bring the entire peninsula into their camp. Given the chaos in the South and the widespread resentment of American military rule, Soviet authorities believed that once US troops withdrew, they would be able to extend Kim Il Sung’s authority over the entire peninsula.

If UN-sponsored elections were held in the South and a government created there, it would be more difficult to seize control of the southern zone. Therefore, the Soviets decided to call this North-South conference in order to block such elections. The joint communique released at the end of the weeklong meeting called first of all for withdrawal of occupation forces. The Soviets had already begun creating a capable military force for the North, which was being strengthened by the return of tens of thousands of Korean Communists who had fought with the Chinese Communist army. They were therefore confident that they could safely withdraw their forces.

The Joint Communique also called for the establishment of a single government for Korea by Koreans, and rejection of any unilateral establishment of a separate government in the South. Since the Soviets had already identified a sufficient number of loyal Korean Communists, they believed they could safely turn governing over to Koreans.

Kim Ku and Kim Kyu-sik were disappointed when they realized the intention behind the conference and the degree of loyalty to the Soviet Union displayed by northern leaders. They complained to Kim Il Sung about the huge portraits of Stalin that Korean people carried in a parade held on April 25 in honor of the visitors from the South. They also voiced their displeasure over shouts from Koreans of “Long Live Marshal Stalin and the Soviet Union.” Perhaps for that reason, Kim Il Sung assured Kim Ku and Kim Kyu-sik before they returned to Seoul that he would accept free elections and would not cut off the electric power. In return, the two southern leaders agreed to boycott the UN-sponsored elections in Seoul.

In the next post, we will look at the violence that intensified in the South as the May 10 elections approached and will examine the outcome of the elections.

[Sources: This post relies on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Professor Suh’s account is based on records of the conference found in the US National Archives, in the collection of documents captured in Pyongyang in October 1950, when UN forces occupied the city. These documents were shipped to the National Archives in Washington, DC and are accessible to anyone who wishes to use them.]


[kr-title] 강원 산불에 대해 애도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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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신령(화산)전투) 6-1. ‘신령 영천전투(1984)’에 기록된 제7연대 제1대대의 화산공격

‘신령 영천전투’에서는 화산지역의 전술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신녕에서 북쪽으로 5km 지점, 매봉(DG 8706)-방가산 산줄기 남단에서, 갑령-당지동 접재골(DQ 857955) 간 8 km에 달하는 횡격실을 이룬 화산(주봉 : 828)은 우리나라 지형 특징의 하나인 북저남고 현상이 두드러진 고지로서 신령 일대를 방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지형이며, 6.25 이전에는 조림산, 팔공산, 보현산과 더불어 무장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여 온 험준한 산악지대이다.(p. 131)

(“북저남고”라는 기술은 북고남저의 오기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제7연대 1대대가 신령에 도착한 시간을 8월 29일 오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제1대대가 도착했을 때 이따금씩 적의 박격포탄이 사단 전술지휘소 부근에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대용은 자신이 야전병원에서 부대로 복귀한 것이 8월 26일이며 이때 이미 사단지휘소에 박격포탄이 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27일날 바로 화산으로 출발했으며 화산으로 진출하기 위해 약 이틀이 걸렸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신령 영천전투(1984)’는 8월 30일 용암산을 탈취했다고 하고 있다. 생전에 이대용 장군은 제3중대가 선두에서 용암산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으며 그 와중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틀동안 제3중대를 선두에 내세운 것은 김용배 대대장의 판단인 듯 하다. 아마도 화산에 올라 본격적인 전투를 하기 위해서 다른 중대의 전투력을 보존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김용배 대대장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전투를 할 것인가하는 분명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령 영천전투(1984)’와 이대용 장군의 기록은 화산점령과 관련한 부분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이대용 장군은 화산까지는 제3중대가 선두를 섰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 이후 화산의 북쪽 고지를 공격할 때 제1중대가 앞으로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중대는 화산지역의 오른쪽 5km 지역으로 보내 대대의 측방을 보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산의 828 고지에 올라서서 북쪽에 있는 고지를 향해 진출하는 과정에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신령 영천전투(1984)’는 828 고지를 올라가기 위한 7부능선에서 저지를 당해 총격전을 되풀이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이대용 장군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고 작성한 전투기록을 추가로 교차확인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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