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50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트는 제헌의회 선거의 진행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선거를 하게 되었고 90이상의 유권자가 투표를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의 단독정부를 수립을 모든 수단을 다해 방해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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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남한 정치를 한마디로 묘사하라고 요구받는다면, 남한정치 관측자들은 “양극화”라고 할 것이다. 정치적 성향은 좌우로 날카롭게 나뉘어졌으며, 양자간의 투쟁은 남과 북의 충돌을 양극단으로 몰고갔다. 1948년 한반도에서 단독정부의 수립을 살펴보자면, 우리는 정치적 양극화의 이런 패턴이 1948년 5월 선거에 의해 더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포스트에서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김구와 김규식이 4월 후반부에 평양회의에서 돌아오자 마자,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5월 10일 계획된 제헌의회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그들의 강화하였다. 그들은 폭력과 암살이 위협 그리고 시위가 UNTCOK가 선거를 감독하는 계획을 포기하고, 그리하여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수립을 유엔이 인정하는 도장을 제거하고자 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혼돈이 최소한 많은 투표자를로 하여금 투표소에 가지 못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

대신에 반대도 발생했다. 좌파에 대한 극단적 행동은 우파에 대한 극단적 행동을 촉발했다.(내용을 보건데 우파에 대한 극단적 행동은 좌파에 대한 극단적 행동을 촉발했다가 맞을 듯). 경찰은 좌파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고, 하지 장군은 새로 만들어진 경비대에 비상을 걸었으며, 남한의 과두정부는 사실상 젊은 갱으로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사회보호연합(?서북청년단)을 만들었다. 표면적으로 이 단체의 목표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었으나, 종종 그렇듯이, 이런 그룹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보복하려는 폭력 의존적인 사람들에게 방법을 제공했다. 4월 1달 동안 폭력으로 최소한 200여명이 희생되었으며 여기에는 8명의 선거관리와 2명의 후보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제주의 4.3사태에서 살해된 수천명은 포함되지 않았다. 선거 한주전에는 32명이 경찰을 포함하여 300여명이 살해되었다.

우파세력이 강력했으며, 제헌의회 후보자들 천명중에 3/4가 이승만이나 김성수와 연합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승만 자신도 국가선거위원회가 이승만에 반대해 출마하고자 했던 다니엘 최를 거부한 다음 출마를 반대하지 않았다. 모든 이런 비정상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4월 28일 5명의 UNTCOK는 남한에 “상당한 정보의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이유로 선거를 계속하기로 투표했다. 호주, 캐나다 그리고 시리아 대표들은 그런 선언문을 만드는 것에 반대했고 대신 투표에 기권했다.

결국, 공산중의자들의 사보타지를 막는 노력은 성공적이었다. UNTCOK 옵저버들은 협박, 뇌물과 기만 그리고 45명의 죽음을 기록한 내용을 보고했으나, 김구와 김규식의 보이코트에도 불구하고, 90%이상의 유권자들이 등록했다. 200석에서 55명은 신속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국가연합이 차지했고, 85석은 무소속이 차지했다.

점령국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미국은 안도했다. 국무장관 마샬은 남한 국민들에게 축하를 했으며, “90%의 유권자가 참가했다는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소수들이 무법적으로 선거를 사보타지하려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국민들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반대로 소련은 새로운 정부에 대한 사보타지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북한에 새로운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정통성을 경쟁하기 시작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하자 마자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계획을 하게될만큼 미국이 직면한 복잡한 상황을 알아보겠다.

[참고자료]
이 포스트는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에 의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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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50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by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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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observers of South Korean politics were asked to describe it in one word, they would likely say “polarized.” Political allegiances are divided sharply into left and right, and the struggle between the two interacts with the South/North conflict to push both sides toward extremes. As we look at the creation of separate states on the peninsula in 1948, we can see that this pattern of political polarization was solidified by the elections of May 1948.

As soon as Kim Ku and Kim Kyu-sik returned from the Pyongyang conference in late April, which we discussed in the last post, Communists in the south intensified their efforts to block the elections for a Constitutional Assembly that were scheduled for May 10. They hoped that violence and threats of assassinations and riots would persuade UNTCOK to abandon its plans to supervise the elections, and thus remove the United Nations’ stamp of approval from the creation of a separate government in the South. If that didn’t work, the chaos might at least persuade many voters to stay away from the polling sites.

Instead, the opposite happened. Extreme action on the left prompted extreme action on the right. Police intensified their repression of leftists, General Hodge placed the newly formed constabulary army on alert, and the South Korean Interim Government created Community Protective Associations that were in reality gangs of young men armed with clubs and axes. On the surface, the goal of these Community Protective Associations was to combat the threat of communism, but, as so often happens, such groups provided a means for violence-prone men to retaliate against whomever they disliked. For the month of April, there were at least 200 victims of violence, including eight election officials and two candidates, not counting the thousands killed on Jeju Island on April 3. The week before the elections more than 300 people were killed, including 32 policemen.

Given the strength of rightist forces, it is not surprising that three-fourths of the nearly one thousand candidates for the Constitutional Assembly were allied with either Syngman Rhee or Kim Seong-su. Rhee himself ran unopposed after the National Election Committee rejected the application of Daniel Choi, who wanted to run against Rhee. Despite all these irregularities, on April 28 five members of UNTCOK voted to go ahead with the elections on the grounds that there was a “reasonable degree of free expression” in southern Korea. The representatives from Australia, Canada, and Syria refused to make such a statement and instead abstained from the vote.

In the end, the efforts to prevent communist sabotage were successful. UNTCOK observers reported instances of intimidation, bribery, and fraud, and 45 deaths were recorded, but despite the boycott called by Kim Ku and Kim Kyu-sik, more than 90% of registered voters cast ballots. Fifty-five of the two hundred seats were won by the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Rapid Realization of Korean Independence, while eighty-five were held by independents.

How did the occupying powers react? The United States was relieved. Secretary of State George Marshall congratulated the people of southern Korea, declaring that “the fact that some 90% of registered voters cast their ballots, despite the lawless efforts of a Communist-dominated minority to prevent or sabotage the election, is a clear revelation that the Korean people are determined to form their own government by democratic means.” The Soviet Union, on the other hand, began preparations to sabotage the new government, as well as to contest its legitimacy by establishing a rival state in the North.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the complexities the US faced as it worked out plans to withdraw its forces from Korea in the wake of the creation of a new government.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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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이 두 사전을 넘다) 4 춘천전투 당시 포병의 활약에 대한 기록

한국전쟁당시 춘천으로 들어온 북한군 제2군단은 첫날부터 대량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런 피해로 인해 북한군은 춘천을 통해 서울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제16포병대대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러나 포병들의 활약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제6사단장이 잘해서라든지 제7연대장이 적시적절한 판단때문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춘천지역에서 보병전투는 제1대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38선에 있던 제7연대 2대대와 3대대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맡고 후퇴했다. 그리고 소양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제1대대만 6월 26일 파쇄공격을 해서 적의 진출을 잠시 저지시켰을 뿐이다. 그러면 적의 진출저지하고 대량피해를 당하게 한 것은 포병밖에 없다. 그러나 포병들의 활약은 거의 무시되다시피했다. 이대용 장군은 포병의 활약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일개 보병 중대장에 불과한 이대용 장군이 당시의 포병상황을 모두 파악했을리는 없다. 그러나 6월 25일 38선이 무너진 절대절명의 순간에 포병들이 적의 주력을 향해 직접 교전에 들어간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춘천싱내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일요일 외출 및 외박을 나간 사병들을 긴급소집하는 비상을 걸어, 이들을 영내에 불러들여 출동준비를 하고 탄약을 분배했다. 그런 다음 군용트럭에 승차하여 우두산 북방에 있는 능선일대에 미리 구축해 놓은 제1대대 방어진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이때 5번 도로 축선의 북한 공산당 제2사단 대부대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있는 아군 부대는 놀랍게도 보병부대가 아닌 포병부대였다.

김 성 소령이 지휘하는 제16포병대대는 우두동 일대에 포진하여 아직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방어진지에 진입하기 전에 역골, 아리산, 한계울, 삼거리에 진출한 적군 대부대에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앞에서 포병부대를 보호해주는 보병부대가 거의 없는 상태인데도 개의치 않고, 적군 포병 대부대와 1대 1로 대결하면서 용감무쌍하게 결사적으로 항전하고 있는 제16포병대대의 당당한 모습, 그것은 군용트럭을 타고 그 곁을 지나가는 국군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사기 진작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제16 포병대대의 맹활약으로 5번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적군 제2사단의 전진 속도가 거북이걸음으로 느리게 바뀌었다. 이날의 포병의 용전분투는 너무도 훌륭했다.

당시 포병부대는 서북청년단 출신들이 많았다.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자신들의 가족이 처형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전투에서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제16대대가 보병도 무너진 상황에서 끝까지 포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춘천전투 당시 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의 행적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6월 25일 오전일찍 김성 소령이 전방으로 갔다가 그 이후 춘천에서 철수할때까지 김성소령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이 춘천봉의산에 왔을 때도 김성 대대장은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제16포병대대의 전공이 무시된 것도 대대장 김성 소령의 행적과 연관이 있는 듯 하다. 대대장이 탈영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잘했다고 전공을 자랑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제16포병대대는 대대의 지휘기능이 붕괴된 상황에서 각각 알아서 싸운 것이다. 제16포병대대는 그 이후에도 전투를 잘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포탄을 모두 지니고 후퇴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탄을 옮겨야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군수장교 김운한 중위였다. 포병대대장은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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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3 죽은자는 말이 없다. 훈장과 공적

이대용 장군은 한국전쟁당시 전투를 하다가 전사한 동료나 부하들이 변변한 훈장하나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을 평생 가슴아파 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방에서 전투를 하던 사람들은 훈장이 있는지도 몰랐다. 전방에서 전투하던 사람보다 후방에 있던 사람들이 무공훈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은 공고연한 사실이었다. 이대용 장군도 전쟁이 끝난이후 자신의 부하들에게 훈장이라도 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아쉬움을 다름과 같이 남겼다. 6월 25일 출동했던 소대장 네명이 전쟁기간중 모두 전사했다.

인원점검을 시키니 외출 외박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병과 휴가간 사병들이 합계 약 40명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대장 4명은 모두 와 있었다. 그 후의 일이지만 이들은 한국전쟁에서 모두 전사했다. 제1중대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문경 옥녀봉 전투에서 전사하고,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는 금성전투에서 전사했다.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와 제4소대장 대리 이한직 상사는 낙동강 교두보 전투에서 전사했다. 나는 음성전투에서 적탄에 중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육군병원에서 다행히도 살아 남았다. 내위의 상관인 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대위는 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양구전투에서 전사했다. 2명의 직속상관과 4명의 직속부하는 전원전사하고, 나 홀로 외로이 살아 남아서 그 기록을 여기에 남기게 된다

그리고 나라위해 그렇게 용감히 싸우다가 적탄을 맞고 산화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한 장병 중에서 6.25 한국전쟁 초기에 전사한 한도선 중위와 손종구 소위, 이한직 상사 그리고 7월에 제1중대에 부임하여 용전분투하다가 신령화산전투에서 전사한 내부하 소대장 도진환 소위등은 용전분투와 희생에 걸맞은 훈장조차 받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에 태극, 을지, 충무, 화랑 등의 무공훈장 제도가 생긴 것은 1950년 10월 28일로 한국전쟁 발발 4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 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장병들은 받으래야 받을 훈장 자체가 없었다. 또 일선 장병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일념일뿐, 훈장 같은 것은 꿈속에서 조차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국가라면, 나라위해 용전분투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한 지고지순의 애국용사들에게 알맞는 훈장을 추서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60녕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국방부 상훈 담당부서에서는 이들 애국장병들에 대한 훈장추서를 하지 않은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10년전 6.25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이 하여 이들 몇명의 나의 옛소대장등에 대한 포상누락 사실과 공적사실을 자세히 적어서 그들에 대한 훈장수여 상신을 육군본부 상훈당국과 국방부 측에 정식으로 한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당시 김대중 정권은 괴변을 부리며 이를 묵살했다. 묵살 이유는 6.25 한국전쟁 유공자에 대한 포상은 그때 충분히 했으며, 휴전후인 1953년 7월부터 1년간 포상 누락자의 훈장 추가 포상을 실시하여 누락자들에게도 훈장을 추서한 일이 있었고, 또 50년전의 일을 이제와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면서 거절한 것이었다. 나는 1953년 7월부터 1년간 포상누락자들에 대한 훈장 추서기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금시 초문이었고, 또 50년 전의 일을 이제와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변명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 전투 유공자에 대한 훈장 수여는 그 공적 사실 여부가 관건이지 훈장수여 시기가 늦고 빨ㄴ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 6월에 보훈 선진국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때 이탈리아 시실리 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행정실수로 훈장을 못받고 있던 11명의 미국 사병에 대한 전공사실이 58년만에 새로이 입증되자 이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001년 3월 13일에는 51년 전 미 육군제24보병사단 말단 소총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경주북방지구 전투에서 적탄 24발을 맞은 로버트 필립(76세)의 용감한 전공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자, 미국 정부는 은성무공훈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이대용 장군은 생전에 훈장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받지 못하고 받지 않아야 할 사람이 훈장을 받았다고 여러번 아쉬움을 표했다.


일본산 수입식품에 대해서 WTO가 일본을 패소시킴을 보며(부제 : 뭔가 낌세가…)

이 현상에 대한 저의 생각에 대해 여러분들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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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2. 앙드레 모로아와 이대용 장군의 기록

이대용은 원래 교사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북한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월남하여 육사 7기로 입학하여 군문에 들어섰다. 인간은 모두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간다. 이대용이란 인간을 특징짓는 여러가지 중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이 남긴 기록을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그가 앙드레 모로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앙드레 모로아의 제2차세계대전 기록을 읽고 있었다. 이대용 장군이 남겨 놓은 앙드레 모르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프랑스 문필가 앙드레 모로아는 영국의 정치가이며 문필가인 윈스턴 처칠경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약 1년전에 만났다. 그 때 처칠은 모로아에게 “모로아 군.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실기를 쓰게. 좋은 실기는 나라의 멸망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교훈을 국민들에게 감명있게 전해줄 수 있는 위대한 기록물이 될 수 있는 것일세” 하는 조언을 주었다. 모르아는 이 조언을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길게 도취된 채 독일 히틀러의 위협을 경시하고, 그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하는 프랑스 정치인들의 이전투구 분열상을 실기를 써서 경고하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그 이후 모로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육군대위 신분으로 참전했으며, 프랑스 패방의 사연을 담은 실기인 ‘프랑스 전선’, ‘프랑스는 패했다’ 두권을 저술했다.

이대용은 모로아가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로 가는 망명길에 탈고한 ‘프랑스는 패했다’의 마지막 부분에 감명을 받았다. 이대용은 여러 책자에서 이부분을 기록하고 있었다.

티없이 맑고 귀여운 얼굴로 웃어대면서 이리뛰고 저리 뛰면서 놀고 있는 그 어린애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모로아는 눈물을 적셨다. 그리고 탈고한 원고지를 다시 꺼내서 눈물을 닦으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추가로 적어 놓았다

너여, 조국에 충성하라

이대용은 이부분을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마치 구한말이후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해방이 되었으나 국토가 분단되어 세계 최빈국으로 허덕이던 당시의 상황을 프랑스의 모로아가 대신 기록해주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가 전쟁터에서 생명을 건 전투를 하면서도 항상 기록을 했던 것은 바로 앙드레 모로아의 영향이 아니었나 한다. 그 이후에도 그는 평생동안 일기를 썼고 기록을 남겼다. 아마 이대용식의 실기가 아니었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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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 들어가며

우연히 이대용 장군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난 것이 이대용 장군의 연세 90이 넘었을 때였다. 춘천전투에서 적 자주포 2대를 육탄으로 파괴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발표한 다음이었다. 그 전에는 막연히 월남전의 마지막 공사로 당시 월남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남아있다가 월맹의 포로가 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후 이대용 장군을 몇번 만났다. 당시 풍이 조금 있어서 말하는 것도 어려워하셨다. 전쟁당시 다리에 입은 총상 때문에 걷는 것도 힘들어 했다. 사람은 그냥 봐선 알 수 없다. 만나면서 점점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위인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90에도 의지는 강철같았다. 옳고 그른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옳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철저한 분이었다.

그분을 만난지 1년 정도 지나서 돌아가셨다. 그냥 그분을 보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도 존경받을 분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몰라서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다행히 이대용 장군을 알수 있는 자료는 많았다. 이대용 장군은 평생 일기를 썼다. 전쟁통에도 휴식시간이면 전투기록을 수첩에 남겼다. 월남에 붙잡혀 있을때도 종이 쪼가리를 모아서 기록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전투기록을 모아서 책을 냈다. 월남에서 석방되어서도 기록을 남겼다. 2010년에도 책을 냈다. 그동안 낸 책을 다시 정리해서 낸 책이었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이대용 장군에 대한 녹취사업을 한 적이 있어서 그 내용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전투기록도 정리한 적이 있었다.

이번부터는 2010년에 출간한 6.25와 베트남 전 두 사선을 넘다를 정리하려 한다. 이미 정리한 내용은 생략하고 새로운 내용만 추가할 것이다.

책장을 여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덕을 쌓으며 지성을 다하여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한때에 적막하다.
권력세도에 집착하고
이에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하다.
인생을 달관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물건 이외의 물건을 보고
자기가 죽은 후의 몸을 생각한다.
사람다운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
한때의 적막을 느낄지언정
만고에 처량을 취할지 말지어다.

이대용 장군은 정말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일본산 수입식품에 대해서 WTO가 일본을 패소시킴을 보며(부제 : 뭔가 낌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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