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9. 이대용 장군의 어린 시절 - 어머니와 이별

사람의 일생을 알아볼때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그가 어릴때 어떻게 자랐는가 하는 것이다. 어릴때 어떤 가정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가하는 것은 사람의 일생 내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대용이 태어난 곳은 아름답지만 가난한 동네였다. 마을의 땅 대부분은 개성사람들 것이었고 금천군 고우봉동 사람들은 농사의 절반을 소작으로 내야했다.

이대용의 할아버지는 조선조 말년에 말단 공무원인 풍헌(지금의 면장)을 하고 하고 있었다. 한때는 내노라하는 양반집안이었으나 점점 가세가 기울여 이대용의 아버지 대에 와서는 먹고사는 것 조차도 녹록하지 않았다. 이대용의 어머니 또한 원래 양반집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몰락한 농부의 딸이었다. 이대용의 어머니는 한글로 쓴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공부만 했다. 얼굴이 희고 아름다웠으며 현명해서 동네 아낙네들이 근심거리가 생기면 찾아아서 의논을 하곤 했다.

이대용이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는 두명의 자식을 앞세웠다. 큰형이 6살, 작은형이 4살때 홍역을 앓았고 며칠 간격으로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대용은 어머니가 간혹 혼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먼저 보낸 자식들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던 이대용의 어머니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 이대용이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동네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몇개 정도 있었으며, 보통학교에 가려면 이웃동네인 백마면으로 가야했다.

이대용이 만 6살에 백마보통학교에 진학한 것이 그마을에서 처음이었다. 어린 나이에 5km가 넘는 길을 혼자서 통학을 했다. 당시는 10살정도가 되어야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이대용은 가장 나이가 어렸다. 힘겨운 통학길이었다. 어머니는 하교때마다 1km 정도 마중을 나와 걸음에 지친 이대용을 업고 집으로 갔다. 이대용은 어머니 등에 업혀 스스르 잠이 들곤했다. 집에와서 어머니가 이대용을 내려놓을 때 단잠을 깨곤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해산을 하고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병환을 얻었다. 병세는 점차 악화되었고 늦가을이 되자 어머니는 이대용을 더 이상 업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예전처럼 이대용을 마중나와 손을 잡고 집으로 같이 갔다. 간혹 몸이 좋지 않으시면 지팡이를 짚고 마중을 나오기도 했다. 이대용은 따뜻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같이 집에 오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어머니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2학년 겨울방학때인 음력 11월 26일 아침 어머니는 어젯밤에는 소화가 잘되었다고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아 조반을 드셨다. 그러나 점심나절부터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어린 이대용은 그날 오후에도 동네 아이들고 뛰놀고 있었다. 이대용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누님이 나를 데리러 왔다. 어머니가 나를 찾고 계신다고 했다. 200미터 정도되는 집으로 뛰어가보니 어머니는 안방 아랫목에 반듯이 누워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계셨다.

어머니가 손짓으로 나를 머리맡으로 부르셨다. 나는 어머니 왼쪽 어깨에 바짝 다가 앉았다. 어머니는 어린, 그러나 맏아들인 내 고사리 손을 잡으셨다.

“ 공부 잘해서, 곧고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가쁜 숨결 속에서도 말은 그런대로 알아 들을 수 있게 이어졌다.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이것이 나와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였으며, 그 다음부터 약 한시간 반동안 어머니는 한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누워 계시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나는 어린 두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번갈아 닦으면서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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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9 김용배 장군의 삶과 죽음. 그리고 첫번째 부인.

이대용 장군이 존경해 마지 않던 김용배 대대장은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불과 열흘만에 강원도 양구 군량리 전투에서 전사해다. 그때가 7월 2일이었다.

1951년 1월 22일 제7연대 부연대장으로 승진한 김용배와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한 이대용이 사적인 대화를 했던 것을 기록해 놓았다.

김용배 부연대장은 지난 1950년 10월 10일, 부인이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으며, 이름을 송조(松朝)로 지으라고 연락해 보냈다고 한다. 소나무같이 지조있고 아침같이 신선하게 살아가라는 뜻에다가, 조자가 10월 10일을 모아 쓴 글자라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김용배는 그때까지 살면서 두번을 후회한 적이 있는데 첫번째는 일제 때 지원병으로 나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것이라고 한다. 어린마음에 주위의 권고도 있었고 군인이 되고 싶어서 지원병이 되었는데 큰 실수였다고 한다. 또하나는 어릴때 부모가 강제로 정해준 밭에서 일잘하고 집에서 무병이나 명주 잘 짜며 궁둥이가 커서 아이를 잘 낳은 그리고 순정을 가진 시골 처녀와 혼인을 한 것이었다. 어른이 되자 마음에 들지 않는 그 조강지처를 버리고, 마음이 끌리는 처녀에게 새장가를 들었다고 한다. 송조는 두번째 부인의 소생이었다.

김용배 장군이 전사하고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현충일 이대용 장군이 김용배 장군의 묘역을 찾았다고 한다.

내가 그 묘소에 도착해 보니, 거친 풍파를 겪으며 패인 주름살에서 과거의 고된 삶을 읽을 수 있는 시골 할머니 한분이 북어와 무침, 과일 등 조촐한 제사 음식을 묘소앞에 차려 놓은 중이었다.

나는 어디서 오신 할머니냐고 물었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왔다는 할머니의 대답이었다. 고 김용배 장군과의 관계를 물었더니 바로 부인이라고 했다. 그러면 송조 어머님이시냐고 물었더니, 송조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을 뜨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고 김용배 장군이 생전에 나에게 버렸다고 이야기한 조강지처가 확실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송조를 좀 만나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송조도 죽었습니다”하였다.

세월따라 가다가 가버리는 것이 인생이라고 고 김용배 장군이 생전에 말씀하시더니, 송조도 송조 어머니도 모두 아주 가버렸구나. 인생이란 이렇게 무상한 것이며, 반세기의 세월이 긴것인가, 그 사람의 생애가 짧은 것인가 나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고 김용배 장군과의 관계를 길게 설명하였다. 할머니는 조용히 듣고만 있을 분,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묵념을 올리고 할머니와 헤어졌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신식 새여자에게로 마음 돌린 남자, 버림받았지만 그 옛날 순정을 다 바쳐 따르던 남자의 고혼을 달래느라 천리길 마다 않고 묘소를 찾아온 여자, 모두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이글을 읽으면서 조만간 김용배 장군의 묘소를 찾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삶이란 잔인하다. 죽은자는 산자에게 모든 멍에를 남겨놓고 간다. 산자는 죽은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일본산 수입식품에 대해서 WTO가 일본을 패소시킴을 보며(부제 : 뭔가 낌세가…)

이 현상에 대한 저의 생각에 대해 여러분들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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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8 논공행상에 대해

이대용 장군은 군의 논공행상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잘한사람 못한사람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고 정작 공이 있는 사람도 제대로 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은 자신이 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면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초산을 점령하고 중공군이 개입하여 철수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건제를 유지했던 공을 인정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무척 서운하게 생각했다.

10월 31일에 새로 부임한 일선 전투경험에 없는 27세의 청년 사단장은 제7연대의 낙동강에서부터 북진하여 압록강 초산 진격작전, 그리고 초산에서 개천-맹산 선까지의 철수작전 일등공신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전혀하지 않았다. 다만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장 지휘하에 포위망을 뚫고 나온 유일한 중대인 제7연대 제1중대에대해서는 사단 사령부에 불러들여 군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신고식을 갖고 환영식을 해주었다. 그러나 훈장수여같은 것은 이때에도 없었다.

또 제7연대 장병들은 자기 목숨이 언제 날라갈 지 모르는 전투에 연일 시달리며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장 따위는 꿈속에서조차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직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래서 연대장 임부택 대령,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제1중대장을 위시한 유공장병들은 훈장 하나 없는 무관이 용사로 남게 되었다.

두뇌가 우수한 청년장군인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전투경험을 쌓으면서 크게 성장했다. 그분은 1951년 10월 하순 어느날, 장도영 사단장 취임 1주년 기념 및 압록강 진격 1주년 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으며, 초산에 진격했던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에 대한 훈장을 뒤늦게나마 수여했다.

초산진격 당시 제3중대장 김명익 대위 등 유공장병에게 미국 은성무공훈장, 또는 우리나라 을지, 충무 훈장들을 수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큰 실수가 있었다. 압록강변에 진격하여 신도장에 배치되어 있다가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도 제7연대에서 유일하게 끝끝내 중대를 지휘하여 완전무장하고 포위망을 뚫고 나온 제1중대장이 수훈자 명단에서 누락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제1중대장은 그때 그 작전의 유공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당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제1중대장은 1951년 7월 15일, 제2사단으로부터 대대장 요원으로 스카우트 되어 제6사단을 떠났으며, 장도영 장군이 초산지구 전투유공자에게 훈장을 뒤늦게 수여하는 1951년 10월 말 경에는 제6사단장 부하가 아닌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금성 남방고지에 있었다. 그 바람에 장도영 제6사단장는 자기부하가 아닌지라 깜박하고 빼버닐 것이다. 당시 우리 국군의 행정력 수준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김용배 대령이 전사하자 즉시 준장으로 진급되었고, 제7연대 제1대대장으로서의 혁혁한 전공을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임부택 대령도 태극무공훈장을 2개나 추후에 받게 됨으로써 제7연대 전쟁영웅 두명은 모두 그 전공이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사실 이대용 장군은 6.25 전쟁당시의 공적을 보건데 태극무공훈장을 받아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무공훈장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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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7 비겁한 자는 가라. 서종철 전 육군참모총장의 경우

이대용 장군은 생전에 전쟁에서 비겁하게 굴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모든 영광을 다 누리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은 분노했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해도 이대용 장군은 절대로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비겁하게 살았던 사람에 대해서는 항상 나중에 재평가를 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두었다.

이대용 장군은 김용배 대대장에 대한 존경의 글을 정리한 다음에 연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해를 해서 전장에서 이탈한 서종철 대장을 반드시 언급했다. 아마도 자신의 생전에는 그렇게 비겁한 자들이 제대로 비판을 받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인 불미스러운 일이 6.25 초기에 서부전선에서 생겨났다.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들의 회고록으로 1988년 발간된 ‘노병들의 증언’ 가운데 안태갑 장군(6.25 초기 제8연대 중대장)이 증언하고, 또 그 증언을 더욱 구체화한 후일담이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수도지구 방위임무를 맡고 있던 제 X 연대장(여기서 X 연대란 8 연대를 말한다.) S 중령(서종철 이다)은 전투가 치열해지자 몸의 급소가 아닌 부분을 쏴서 자해를 했다.

나중에 군의관에 의하면 둔부의 살이 많은 부문을 쏘았다고 한다.

그런다음 마치 적탄에 부상당한 양 속임수를 써서 후방병원으로 후송되어 교묘하게 싸움터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연대장의 비굴한 행위가 전해지자 연대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혼란이 일어나 분산되어 연대의 기능를 상실했다. 연대 총병력은 겨우 1개 대대를 편성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 들었다. 상부명령에 의해 대대장 정승화 소령은 이 병력을 이끌고 제18연대로 가서 제3대대로 편입되었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공비토벌 작전에서 용맹을 떨친 제8연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해산되었다.

문제의 서종철 중령은 제3공화국 시절, 육군대장으로까지 진급하여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고 안태갑 장군은 증언하고 있다. 매우 잘못된 인사관리였다.

서종철은 제3공화국때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여 참모총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국방부 장관까지 지냈다. 장관을 마친이후에는 한국야구협회총재를 지냈다. 일제말기 일본군소위 였던 서종철은 아마도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승진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서종철이 자해해서 탈영한 것을 몰랐을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육군총장으로 기용한 것은 군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잘한 것과 못한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으면 아무도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고 한국전쟁 당시 지휘관들의 행동과 공적을 하나씩 모두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껍데기를 가릴수 있다.

서종철의 아들인 서승환은 박근혜 정부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이런 나라가 나라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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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6 김용배 대대장의 용기, 담력

김용배는 순간적인 판단력과 담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대용은 김용배의 순간적인 재치와 담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50년 10월 5일 이른 새벽, 제7연대 제1대대는 춘천을 출발하여 38선 북쪽에 있는 말고개로 가서 제2연대 1개대대를 초월하여 화천을 목표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말고개에는 이미 제2연대 병력이 진출해 있으며, 그곳까지는 북한 공산군이 단 한명도 없다는 통보를 제2연대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마음 놓고 말고개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제2연대 1개대대는 말고개를 점령하고 있지 않았다. 육사 5기생인 석 소령은 지도를 잘못 판독하여 말고개에서 서남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엉뚱한 고지를 점령하고, 거기가 말고개인줄 알고 상부에 보고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대대장 일행은 말고개 남방 약 4 킬로 지점까지 태평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 어둠이 점차 걷혀 날은 훤하게 밝하오고 있었다…. 일행들은 “앗”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날려 그 곳을 피하는 돌발행동을 취했다. 북한 공산군 기관총이 3-4 미터 앞에서 총구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관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는 것까지 보였다. 북한 공산군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그리고 탄약수들이 그 기관총호 속에서 상체일부를 노출시킨 채 우리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M2 카빈 소총을 어깨에 맨채 북한군 기관총구를 피해 몸을 날렸다. 이때 “손들엇!”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나는 그때서야 어깨에 멘 카빈 소총을 내리면서 북한 공산군 기관총구 쪽을 돌아봤다. 김용배 대대장은 적의 기관총구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우선 손들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기선을 제압한 다음, 겁에 질린 북한 군인들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날 때 허리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김용배 대대장의 손이 허리의 권총을 뽑으려 함과 동시에 “손들엇!” 했던 것이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이것을 엄격히 순서대로 따지자면 이렇다. 대대장의 “손들엇!”소리, 이 소리에 겁이 질려 북한 군인들이 일어서면서 두손을 번쩍 들었고, 그 다음에야 대대장이 허리에서 권총을 빼서 북한군인들 쪽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 대담한 용감성과 지혜로운 순발력. 나는 “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저히 저분을 따라갈 수는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용은 육사 7기생이고 김용배는 육사 5기생이다. 당시에는 육사를 1년마다 한번씩 뽑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대용과 김용배의 나이차는 별로 나지 않았다. 이대용은 1925년 생이었고 김용배는 1921년 생으로 4살차이였다. 4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대용은 김용배를 진정으로 존경했다. 젊었을때 이대용은 매우 성깔있고 까다로웠다고 한다. 누구를 쉽게 칭찬하거나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대용이지만 김용배를 존경한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빠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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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5 김용배 대대장의 인격과 아량, 제2중대장 오윤석의 경우

이대용 장군은 자신의 대대장이던 김용배에 대한 기억을 많이 남겨 놓았다. 김용배 대대장은 나중에 전사해서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대대급 전투지휘관으로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그의 전투지휘 능력과 함께 이대용은 김용배의 인격을 높이 평가했다.

이대용의 책 중에서 김용배의 인격에 관한 글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그분의 용감성과 침착성, 그리고 뛰어난 지혜와 성실성은 싸움터에서도 늘 돋보였다. 그로 인해 사단장 김종오 준장, 연대장 임부택 대령으로부터 무한한 신임을 받았으며,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1950년 7월 9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때 그분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 대부분은 계급이 대위였다. 김용배 대대장은 맑은 물, 흙탕물을 모두 포용하는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대대장 밑에 있는 장병들은, 용장 밑에 약졸없다는 말과 같이 모두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겁많은 제2중대장 오대위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오 대위는 전술적 지식도 있고 평상시에는 중대원 교육훈련을 잘시키는 등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제7연대에서 가장 유능한 중대장으로 손꼽혔고, 연대장과 대대장의 두터운 신임까지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과 전투를 하게되자 그는 항상 꽁무니를 빼며 후퇴를 일삼았다.

김용배 중령은 오대위의 담력을 길러주고 전투에 쓸 수 있는 지휘관으로 키워보려고 애를 쎃다. 그런 노력이 꽤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타고난 천성을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했다.

1950년 8월 30일, 전투가 치열해지자 오대위는 바위에서 넘어져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연락병에게 남기고 무단이탈, 후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래도 자신을 따뜻하게 인도해준 김중령을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이었다. 다른 못된 장교들처럼 마산이나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가서 여러가지 병을 가진 환자로 위장해 입원하거나, 멀쩡한 맹장수술을 받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요령을 피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최전방 일선에서 약 12 킬로미터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에 나타나 대죄하며 근신하였다.

제1대대 장교들 대부분은 오대위를 불러 총살이라고 시키는 것이 군기확립상 좋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김 중령은 그를 잘 타이르고 용서하여 일선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 작전보좌관으로 일하게 해주었다. 오대위는 상황도도 잘 그리고 작전명령도 잘 작성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제2중대장 오대위의 이름은 오윤석이다. 그는 신령의 화산전투 당시 현지이탈을 했다. 그로 인해 제1대대 전체의 전투가 어려웠다. 당시 이정도의 상황이면 대부분 지휘관들이 즉결처분을 했다. 그러나 김용배는 사람들 크게 포용하는 아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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