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3-1 월남 철수작전 당시 우리 해군 LST의 운용에 관해

이대용은 월남 경제공사로 있으면서 월남 패망당시 교민철수 작전을 지휘했다. 이대용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일정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가 잘못한 것을 가급적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덮어주고 가려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한 사람 나쁜 일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똑바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2010년에 출판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에서는 철수 당시 우리 해군의 LST 운영과 관련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당시 우리 해군 LST는 교민 철수를 위해 할당되었다. 기본 방침상 우리 교민들만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과 긴밀하게 협력해오던 월남군들이 문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 월남군 태권도 교관인 빈 소위는 만일 그대로 남아 있으면 월맹군에게 처형당하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고딘디엠 대통령은 태권도 교관 파견을 요구했다. 한국군은 1962년 12월 남태희 육군 소령을 단장으로 하는 태권도 교관 4명을 사이공에 파견하여 남월군 체육학교에서 1년간 태권도 교육을 시켰다. 그 중에서 빈은 남태히 소령과 김승규 대위가 가장 신임한 수제자였다. 하사관이었던 빈은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서 소위로 현지 임관되었다.

4월 24일 빈 소위가 이대용을 찾아와서 4월 26일 사이공 항구를 떠나는 해군 LST에 자신과 처자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붙들리면 처형되는 것이 뻔하니 살려달라고 했다.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은 본국정부로부터 재월 한국인 철수계획에 대한 승인만 받았고, 외국인 해외탈출은 고려한 바도 없었고 본국정부의 지시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용은 빈소위를 방에 대기시켜놓고 어느 고위층(이대용은 어느 고위층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대용이 당시 주월대사관의 서열 2위였던 것을 고려해 보면 그 고위층이란 당시의 주월대사임을 알 수 있다)을 찾아가 논의했으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본국정부에 승인 여부를 문의할 단계까지도 가지 못하고 빈소위를 돌려보내야 했다.

4월 25일에는 사이공에서 사귄 친구들과 돈많은 중국인들이 찾아와서 우리 해군 LST를 타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그들의 애절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남월에 잔류중인 550명의 한국민간인들은 4월 26일 사이공 부두에서 우리 해군 LST에 승선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4월 26일 오전 9시경 이대용은 우리 해군 LST 두척이 정박중인 부두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보다도 월남어나 중국어 필리핀어를 하는 사람이 세배나 많았다. 이날 우리 해군 LST에 승선하여 부산항으로 철수한 사람은 한국인 314명 한국인의 월남부인가 자녀 및 월남부인의 부모친척 형제등 659명, 한국인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순수 월남인 342명, 중국인과 필리핀인 20명 등 모두 1천 334명이었다.

정작 타야할 550명의 한국민간인 중에서 314명만 승선했다. 이대용은 당시 철수본부장이었는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해군 LST 는 한국 대사관이 발급한 승선표를 일일이 받고 외국인들을 태웠다고 대답했다. 재월 한국교민회를 관장하고 있는 이규수 총영사 겸 참사관에게 경위를 물으니 그는 한숨을 지으며 어제 초저녁부터 오늘 아침에 이르는 동안 한 고위층 인사와 교회 지도자 몇몇 사람에 의해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고위층 인사란 당시 주월 한국대사는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김영관이었다

이대용은 울분이 치솟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당시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국사편찬연구소는 2009년 관련자들을 인터뷰하고 구술자료를 남겼다. 내용은 아직 열람할 수 없으나 당시 외교관 잔류와 관련하여 이대용의 책임이 있다는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셋째, 한국 외교관이 사이공에 잔류하게 된 경위에 관한 의문점이 일부 해소되었다. 주월남 한국대사관은 월남이 생존할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 평가는 재월남 한국교민과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관원의 잔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평가는 이대용 공사의 판단으로 밝혀졌다. 이대용 공사는 재월남 한국교민철수본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철수작전의 수행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1975년 4월 29일 밤 미국대사관에서 최종 철수를 앞둔 시점에서도 공관원의 개별행동을 금지함으로써 공관원이 잔류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매우 단편적이다, 당시 철수가 임박해서 외교관들이 철수할 상황에서는 누구도 월남이 생존할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대용이 월남이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월맹군이 처음 공세를 했을 때였다. 그리고 교민과 대사관 직원들 철수계획은 이대용이 세웠다. 이대용은 육군대학에서 철수 교관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수작전의 수행에 직접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관의 책임자로서 위기상황에서 공관원들이 각자 알아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위험한 위기상황일수록 조직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국사편찬위원회의 평가는 옳지 않다.
더구나 2009년 당시 구술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대용은 구술대상이 아니었다. 철수작전의 가장 핵심인물이었던 이대용의 구술도 없이 위와 같이 평가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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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2-3 박태숙과의 인연. 미국에서

이대용은 마중 나온 박태숙을 보고

“태숙아, 오랜 만이다. 넌 늙지도 않고 그대로구나”

하고 이야기 했다.

박태숙은 웃으면서

“하하, 많이 늙었는데”라고 대답했다.

이봉덕 회장은

“형님 잘 오셨어요. 우리집에서 푹 쉬시면서 골치 아픈일 잊으세요”라고 이야기 했다.

사실 박태숙 부부는 이대용이 원하면 1년이고 2년이고 마다않고 대접할 사람이었다.

박태숙이 운전하는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고 로스엔젤레스 교외 고급 주택가에 있는 집으로 갔다.
이날 저녁 7시 30분에는 천주교 성당에 가서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하면서 명상에 잠겼다.

저녁 식사후 이봉덕 회장은 이대용을 위로했다.

“형님, 너무 상심마세요. 살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세월이 흐르고 나면, 훗날 그때 내 왜가 그렇게 절망하고 걱정했는가하면서 웃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실망하지 마세요. 형님처럼 정의감 강하시고, 대한미국에서 제일 청렴결백하시고, 불우한 사람들 잘 보살펴 주시는 분을 왜 주님이 버리시겠습니까 ?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이대용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나도 인생을 도전의 과정이라고 믿네. 실패없이 탄탄대로를 걸어 성공을 거듭하는 것 보다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칠전팔기로 재기하는 것이 더 영광된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런데 도전은 젊음이 있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네. 강철같은 불굴의 의지가 있어도 고희를 넘으니 신체의 건강이 정신력을 따라주지 않더군. 앞으로 얼마나 더 살려는지 모르겠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사업에 손을 씻고 욕심없는 길을 걸으며 천수를 누리다가 초개같은 삶을 마감하려고 하네”

이대용은 박태숙 부부의 집에서 편안하게 보냈다. 이들 부부는 이대용이 좋아하는 동남아산 과일 도리언을 떨어지지지 않게 사놓하다. 거의 매일같이 로스엔젤레스 시내의 리틀 사이공 식당에가서 이대용이 좋아하는 베트남 국수 ‘훠’를 대접했다. 같이 골프를 치고 산책도 하면서 이대용을 위로해 주었다.

사리(私利)가 먼저고 사랑은 뒤라는 햄릿의 독백과 같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박태숙 이봉덕 부부는 보은의 정신으로 일편단심 이대용을 보살펴 주었다.

어느날 이대용은 박태숙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태숙아, 너는 달없는 찬바람 부는 광야에 버려져 있는 외로운 사람을 구원해 주는 천사같구나”

박태숙은

“아이 참, 별 말씀 다하시네”하고 웃었다.

그렇게 생긋 웃는 모습이 반세기전 압록강변 초가집에서 저녁 설거지 후에, 이야기 꽃을 피우며 백옥같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그 착한 모습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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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2-2 박태숙과의 인연, 사업실패

박태숙은 사업을 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엔젤레스에 정착했다. 박태숙 부부는 서울에 올 때면 항상 이대용 부부를 찾았다. 그리고 이대용 부부도 미국에 가면 박태숙 부부를 찾았다. 마치 친동기간 처럼 지냈다.

이대용은 월남에서 돌아와 1989년까지 공직에 근무하다고 퇴임했다. 그 이후 중소기업을 경영했다. 이대용이 퇴임하고 나서 중소기업을 하게 된 이유는 그가 데리고 있던 비서때문이었다. 이대용은 비서를 자신의 딸처럼 생각했다. 아들만 넷을 두었던 이대용은 자신의 비서를 딸처럼 생각했다. 결혼식 주례도 서 주었다. 비서의 남편이 중소기업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자신의 전재산을 투자했다. 이대용의 부인은 극력 만류했다. 그러나 이대용이 고집을 부려 사업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럭 저럭 잘 되는 듯했으나 중소기업의 한계를 넘기 어려웠다. 수출액이 연간 600만불에 도달하기도 했으나 고질적인 운영자금 부족으로 도산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95년 2월 21일 회사를 모두 넘겨주었다. 사채는 이대용이 집과 승용차등을 팔아서 모두 갚았다. 사채를 모두 청산하고 조그마한 전세집을 얻었다.

그런 과정에서 월맹의 치화형무소에서 앓았던 두통이 재발했다. 이대용의 아내는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훨훨털라며 이대용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이대용의 부인이 신세를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대용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아내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위로했다. 집까지 날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기는 했으나 셋째와 넷째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니, 자신의 실패가 그들에게 교훈은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했다. 인생이란 결국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뒷일은 이대용 부인이 정리하기로 했다.

이대용 장군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이야기는 한국연구재단에서 실시한 인터뷰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그 인터뷰에서 이대용은 자신의 빛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정리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혼자 미국 로스엔젤레스 공항에 도착한 이대용은 박태숙과 남편 이봉덕 회장의 마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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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2-1 적십자 간호사 박태숙과의 재회

이대용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자 마자 박태숙과 정정훈을 서울로 보냈다. 그 이후 우연히 박태숙이 서울에 부식을 사러 나온 제1대대 부식차를 보고 이대용에게 케이크와 편지를 보냈다. 그 이후 이대용은 중공군과 전투를 하느라고 서울 적십자 병원 간호원과 간호학생들과 연락이 단절되어 버렸다. 그 이후 이대용이 서울 적십자 병원을 찾게 된 것은 1년반이나 지나서 였다.

이대용이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전속된 1952년 초 여름 어느날 3박 4일의 특별휴가 명령을 받았다. 이대용은 밤 10시가 지나 서울 적십자 병원에 도착했다. 정문에서 신분을 밝혔더니 수위가 깜짝 놀랐다. 이대용이 박태숙과 정정훈을 보호하여 서울까지 데리고 나온 철수과정의 이야기를 수위까지도 알고 있었다. 수위는 이대용을 수직의사에게 안내했다. 숙직의사는 박태숙이 편지에서 이야기했던 김태웅이었다. 김태웅은 이대용을 간호원 숙소로 데리고 갔다. 당시만 해도 간호원 숙소는 금남의 지역이었다. 신분을 불문하고 밤에는 남자가 얼씬을 해도 안되는 곳이었다.

수위가 이대용이 찾아왔다고 큰소리로 알렸다. 잠자리에 들었던 간호원과 간호학생들은 잠옷바람에 맨발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 이대용을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녀들은 이대용을 친아버지 대하듯이 기쁘게 맞이했다. 자정이 넘어 시내에 가서 자고 오겠다고 했더니 그녀들은 안된다면 병원안에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의사 선생님들도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병원에서 휴가기간이었던 3일내내 지냈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이대용은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약 1년후, 3년 1개월동안 계속되던 한국전쟁이 끝났다. 이대용은 전쟁이 끝난 다음해에 결혼을 했다. 서울 적십자병원측은 이대용을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이대용의 식구가 입원하면 적십자 병원 의사나 간호원의 직계가족으로 취급하여 병원비도 크게 할인해 주었다. 박태숙이 이대용 가족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대용의 아내는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도 아프면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대용이 베트남 무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왕래가 끊어졌다. 14년 6개월 동안 해외에 있다보니 서울적십자 병원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모두 병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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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1 기구한 운명의 연인

이대용 장군이 평안도 순천으로 진격하면서 서울적십자사 소속이었던 간호사를 포로로 잡았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12명의 간호사들을 잡았을때 그녀들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온몸에 쌀알같은 이가 기어다니고 역겨운 냄세가 코를 찔렀다고 한다. 간호사들은 서울에서 인민군들에게 납치되어 후퇴하면서 본의 아니게 인민군 간호병사가 되었다.

이대용은 그녀들을 붙잡아 심문을 하면서 깜짝 놀랐다. 그녀들 중에서 선임 간호사가 이대용이 소속되어 있던 제1대대 작전관 조현묵 소령의 약혼녀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간호사들의 오빠들도 국군장교인 경우가 있었다. 이대용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즉각 그녀들을 포로신분에서 민간인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대대장 김용배 중령에게 즉각 보고했다.

김용배 대대장은 자신의 작전관 조현묵 소령에게 약혼녀가 이대용 중대에 있음을 알려주고 즉각 데리고 가라고 했다. 조현묵 소령이 곧바로 짚차를 타고 왔다. 두사람은 만나자 말자 엉엉 울면서 눈물을 흘렸다. 조현묵 소령은 자신의 약혼녀를 이런 전쟁터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두사람은 서로 울면서 손을잡고 조현묵이 있는 대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조현묵 소령은 전사를 하고 만다. 그리고 조현묵 소령의 약혼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서로 사랑하여 장래를 약속했지만 전쟁은 젊은 연인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기구한 운명의 두사람은 죽을 고비를 넘겨 서로 다시 만났으나 죽음이 이들을 갈라 놓았다. 두사람이 같이 숨졌는지 아니면 그 간호사는 살아 남았는지 알 수는 없다. 이대용이 자신이 데리고 있던 간호사들을 서울로 보내려고 했으나 후방의 길이 완전하게 확보되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조현묵 소령의 약혼녀도 살아 남았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은 듯 하다.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다. 이런 사정이 어찌 조현묵 소령의 경우뿐이었을까 ?

내가 문재가 있으면 소설로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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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0. 이대용 장군의 어린 시절 - 이제리 사다오 선생님

이대용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백마보통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제리 사다오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성장하는 과정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 중에도 뇌리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되려면 서로 조건이 잘 맞아야 한다. 영향을 받는 사람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중요한 영향은 꼭 사람이 아닌 경우도 많다. 어떤 경우는 책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대용의 경우에는 사람과 책이었다. 이제리 사다오와 앙리 모로아의 책이었다.

백마보통학교 6학년 담임 이제리 사다오는 일본 규수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조선으로 파견된 교사는 통상 2년간 근무했다. 이제리 사다오는 1년은 백마보통학교에서 또 다른 1년은 다른 곳으로 가서 교편을 잡았다. 이대용이 처음 본 이제리 사다오는 규슈현에서 교사 제복으로 정한 것을 입고 있었다. 앞단추가 보이지 않는 검은 색 양복으로 일본제독의 제복과 많이 닮아 있었다. 키는 좀 큰 편이었고 체중도 좀 많이 나가는 편인 듯 했다. 부처님 처럼 인자로왔고 검은눈이 시원했다.

이제리 사다오 선쟁은 참으로 보기드문 참다운 스승이었다. 일본인의 우월 의식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학교교육은 스파르타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리 사다오 선생은 단 한번도 큰소리를 내어 학생들을 야단치지 않았다. 구타같은 것은 아예 있을 수 조차 없었다. 항상 인격적으로 아동을 대했다.

이대용이 이제리 사다오 선생으로 부터 받은 가장 감명 깊은 가르침은 영국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제리 사다오 선생은 세계지도를 펴놓고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어디냐고 물었다. 모두들 영국이라고 대답했다. 전세계 대륙의 상당부분이 영국땅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제리 사다오는 원래 영국 본토는 한반도 크기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리고 영국이 지금처럼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책임을 지는 선장의 희생정신’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이제리 사다오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국 본토는 석탄이 풍부하지만 기타 지하자원은 보잘 것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은 해외에서 원자재를 배로 실어다가 본국에서 여러가지 물건을 만들고, 이 제품을 다시 배에 싣고 나가서 비싸게 팔아 부를 쌓았다. 값진 물품을 싣고 바다위를 오가는 영국배를 보물선이라 부르며, 스페인 해적선들이 자주 습격했다. 영국 배들은 이에 대응하여 무장을 강화했다. 영국배들이 해전에서 적의 포탄을 맞고 침몰하게 될 경우, 선장은 부하 선원들을 구면보트에 태워서 바다위에 띄워 생명을 보전케하고 자신은 영국 국기가 휘날리는 마스트에 몸을 묶고 배와 함께 바다속으로 들어가 희생되었다. 패전의 책임, 침몰의 책임을 지고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책임에 대한 희생의 가치는 상관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심을 길러주었다. 또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조선 기술과 신무기 개발을 촉진시켰으며, 신천지에 대한 탐험심을 자극해 주었다. 이리하여 영국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다.

이제리 사다오 선생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마도 식미지가 된 조선의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선의 지도층들이 희생정신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졸탁이란 말도 있다. 아무리 좋은 말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실을 맺지 못한다.

어린 이대용은 이때 이제리 사다오 선생이 한 말을 평생 가슴에 지니고 살았다.


일본산 수입식품에 대해서 WTO가 일본을 패소시킴을 보며(부제 : 뭔가 낌세가…)

이 현상에 대한 저의 생각에 대해 여러분들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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