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4-4 활동죄수 옹바오

이대용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중의 하나가 옹바오였다. 이대용 장군은 그를 활동죄수라고 했다. 아마도 간수의 지시를 받아 굳을 일을 하는 죄수를 의미하는 것 같다.

옹바오는 좀 특이한 경력의 죄수였다. 그는 원래 북월의 병사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군에 징집되어 육군의 전사(이등병)이 되었다. 나중에 진급하여 육군 상사까지 되었다. 1972년 그의 소속부대는 북위 17도선을 넘어 월남을 침공했다. 전투중 그는 포로가 되었다.

옹바오는 포로생활을 하면서 남부월남의 사정을 알게되자 남월에 남기로 결심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포로교환이 이루어졌을때 북월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남월에 남았다. 그로부터 약 2년후 1975년 4월 30일 남월이 패망하자, 당국에 체포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그는 형무소에서 식사운반 및 분배, 채소밭 가꾸기, 기타잡역을 하면서 간수들을 도왔다. 이대용은 수감되어 약 1년 반동안 옹바오가 퍼주는 밥과 국을 먹었다. 하루 두끼만 제공하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활동죄수들에게 밥과 국을 조금이라도 더 달라고 애원하곤 했다. 이대용은 굶어 죽을 지경이되었어도 그런 구걸행각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1년정도 지나가자 옹바오는 이대용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한달에 한두번씩 취사장에서 손바닥만한 누룽지를 얻어 몇개씩 슬그머니 이대용의 밥그릇에 얹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 이대용이 곰팡이가 쓴 누룽지를 물로 씻어내고 있는 것을 본 다른 활동죄수가 간수에 고자질을 해서 그 다음부터는 누룽지도 얻어먹지 못했다.

1977년 3월 11일 이대용은 일광욕을 하러 나갔다. 마침 옆에 있던 옹바오는 자신이 키우던 토마토 네개를 따서 주었다. 옹바오는 집이 가난해 차입을 받지 못해 형무소 토마토 밭을 가꾸어주는 댓가로 가끔 몇개씩 얻어 먹는다고 했다. 이대용은 토마토 네개를 감방안에 숨겨 놓고 약처럼 먹었다. 이후에도 두어번 정도 옹바오는 간수가 자리를 비우면 토마토를 몰래 전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 1978년 1월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대용에게 일광욕을 시켜주는 시간도 한시간 정도로 늘었다. 이대용은 길가에 야생 비름이 몇포기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몰래 뜯었다. 마침 옹바오가 그 광경을 보았다. 이미 이때는 옹바오는 이대용이 있던 곳과 다른 감방에 있었다. 이대용이 야생비름을 따는 것을 본 옹바오는 몰래 채소밭에서 자라고 있는 좋은 비름과 씀바귀 비슷한 채소를 주었다. 그러면서 간수의 허락을 받았으니 감방에서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그것은 옹바오가 이대용에게 베풀어준 마지막 호의였다.

그날부터 2년 11개월동안 이대용은 옹바오를 만나지 못했다. 옹바오도 석방되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미로에서 생명의 불꽃이 꺼질막 말락하고 있던 그 어두운 시절 옹바오는 그렇게 이대용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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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war history) Post #51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by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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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soon as the UN took over the Korea issue in January 1948, the US began to draw up plans for withdrawing its occupation forces from the peninsula. The urgency was driven by the American public’s demand that soldiers be returned home from World War II theaters, as well as by Congress’ unwillingness to continue funding the huge military it had created to fight the war. At the same time, however, World War II left the United States with new responsibilities that it could not easily ignore. Because of these, the subcommittee on the Far East of the State-Army-Navy-Air Force Coordinating Committee reported to SANACC in January 1948 that the US could not withdraw its forces from Korea before elections were held because this would jeopardize law and order and cause the UN to doubt America’s good faith.

In other words, since Washington had insisted that the UN intervene to ensure fair elections in southern Korea, the US had to ensure that the new state created there could protect itself from the Soviet-backed North, which refused to participate in the elections. Therefore, the subcommittee recommended that the US create a strong constabulary army in southern Korea and carry out a plan for developing its economy.

Even though they agreed on the above recommendations, the State Department and the War Department argued heatedly over Korea policy. The Chief for Far Eastern Affairs at State, W. Walton Butterworth, emphasized that the US had a moral commitment to Korea and had to avoid any suggestion that it was trying to “scuttle and run.” The State Department worried about setting a firm date for withdrawal of military forces because it believed the US should remain flexible in order to guarantee South Korean security.

On the other hand, the Undersecretary of the Army, William H. Draper, emphasized that the US could not occupy South Korea forever. In February 1948 the Joint Chiefs of Staff concluded that the US could not block a Soviet attack on Europe, its first area of responsibility, unless Congress approved another $9 billion. President Truman refused the request on the grounds that the US could not resist Soviet expansion everywhere and still maintain its economic strength. Consequently, because of the limitations on the defense budget, the US would have to withdraw from areas not vital to American national security. Since the Joint Chiefs reported that the troops in Korea were badly needed elsewhere, the president authorized preparations to withdraw them before the end of 1948.

On March 25 President Truman received NSC-8, a policy statement on Korea by the recently created National Security Council. NSC-8 noted that the American zone in Korea was economically weak and threatened by a Soviet-sponsored rival in the North. If the US abandoned South Korea to Communist domination this would intensify the Soviet threat to Japan and China. Therefore, NSC-8 recommended that the US provide $185 million in economic aid to South Korea for fiscal 1949. Also, since the South was clearly threatened by internal subversion but not, the Americans thought, by invasion, the US would create a small constabulary army capable of self-defense “against any but an overt act of aggression by north Korea or other forces.” NSC-8 anticipated that occupation forces would be withdrawn by the end of 1948 and warned that the US should “not become so irrevocably involved in the Korean situation that any action taken by any faction in Korea or by any other power in Korea could be considered a casus belli for the US.”

President Truman approved NSC-8 on April 2, hoping these actions would provide a middle path for carrying out American obligations in Korea. The US would avoid international condemnation by keeping its troops in Korea through the early months of the new government, creating a constabulary army, and supporting the new state economically. At the same time, since it believed the Soviet Union would use infiltration and subversion against South Korea rather than armed invasion, and the US had more pressing commitments elsewhere, Washington would not guarantee Korea’s security against open military aggression.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the implementation of this policy, looking at the economic challenges in the South and the creation of its constabulary army.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nd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of Kansas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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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4-3 치화형무소의 친절한 간수, 구 중위

정치범 사형수들을 수감하고 있는 치화형무소는 매우 힘들었다. 수없이 많은 수형자들이 정신질환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음지에서 수형자들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대용은 20대 초반의 여자 수감자가 목매달아 자살하고 곧이어 남자 수감자가 벽에 박힌 큰 못에 머리를 찍어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대용은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활동죄수 옹바오에게 담당간수 구 중위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활동죄수란 죄수중에서 간수들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구중위는 통역관을 데리고 이대용에게 왔다. 이대용은 자신이 외교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94일간 옥고를 치르면서 많은 병이 생겼으니 의약품과 식품등 일용품의 차용을 받아야 겠다고 이야기 하고 그동안 자신을 위해 활동해주었던 프랑스 총영사관에 편지를 쓰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구중위는 이대용이 편지를 쓰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이대용은 프랑스 총영사관에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종합비타민, 귀병약, 편도선염약, 감기약, 세면도구, 볼펜, 노트, 땅콩, 치즈, 버터, 생선포, 육포, 설탕, 간장 등을 차입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대용은 편지를 구중위에게 주었다. 이대용이 구중위에게 부탁한 것은 다른 간수들과 달리 구중위가 수감자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대용은 편지를 전하면서 구중위에게 일광욕도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수감된 이후 한번도 일광욕을 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구중위는 1796년 7월 27일 월남군 육군소장이던 하이탑 장군과 함께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실로 298일만에 보는 햇볕이었다.

이대용의 몰골을 처참했다. 비타민 결핍으로 피하세포가 파괴되어 허벅지와 팔에 수도 없이 많은 흰구덩이 모양의 반점들이 가득했다. 살이 너무빠져 장딴지와 팔의 정맥들도 보기 흉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구 중위는 이대용의 망가진 몸을 유심히 보았다.

1976년 9월 24일 오후 3시경 차입품을 담은 황색 나일론 포대를 받았다. 이대용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입품이었다. 재월 한국교민회장 이순흥이 보낸 물건이었다. 이대용은 하이탑 장군과 함께 오이김치, 배추김치, 돼지고기, 소시지, 쇠고기, 장조림, 설탕, 오렌지, 바나나 등을 실컷먹었다. 칫솔과 치약으로 이도 닦았다. 오랫만에 양치를 하니 하늘로 날아 갈 것 같았다. 구 중위가 프랑스 총영사관에 보내준 편지가 답을 한 것이었다.

1976년 12월 20일 오전 8시경 구중위가 감방복도에서 체조와 달리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5분간 운동을 하게 해주고 10분간 목욕을 하게 해주었다. 그날 오후 2시경에는 감방 철문을 약 30분 열어 놓고 공기를 순환시켜 주었다. 이는 사형수들이 갇혀 있는 A동 수감자들에게는 특혜중의 특혜였다. 날이가면서 운동시간도 30분정도로 늘어났다. 이는 1977년 1월 8일까지 20일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에는 한달에 두세번 불규칙적으로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1977년 3월 16일부터 구중위가 또다시 매일 아침 30분씩 운동과 목욕을 시켜주었다. 이대용은 고마운 마음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파카 만년필 75를 구중위의 책상에 올려 놓았다. 구 중위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지만 만년필을 사양했다. 이대용이 담배 한갑을 구중위의 책상에 넣어 놓았다. 구중위는 담배 한갑을 다시 돌려 주었다. 이대용은 자신의 마음의 표시라고 하면서 다시 책상 서랍에 넣어 놓았다. 구중위는 그제서야 고맙다며 담배를 받았다.

그 후 반달이 지났다. 구중위가 AH동으로 보직을 옮겼다. 떠나기 직전 1977년 5월 11일 아침 구중위는 감방 쪽문을 열고 담배한갑을 전해 주었다. 그는 이대용과 헤어지면서 그 전에 받았던 담배를 돌려 준 것이었다.

구중위의 한달 봉급은 85동, 공정환률 약 47달러, 시장환률 5달러 70센트였다. 이런 박봉때문에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극심했다. 그러나 구중위는 청직한 길을 깨긋하게 걷고 있었다. 그는 곧 상위로 진급했다. 1978년 가을에 정년퇴직하고 북부 베트남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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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4-2 치화형무소에서, 어느 소녀 수감자의 노래

이대용이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지 2년이 다 되어갈 때 였다. 수감자들도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자살자도 부지기수였고 정신병자도 속출했다. 이대용은 A동, B동을 거쳐 다시 D동으로 이감되었다. D동에서 약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여자 정치범 100여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 수감자들 중에는 정신병 환자들이 여러명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은 특히 증세가 심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발작을 일으켰다. 고성을 지르고 울고 신발로 감방철문을 두드리며 악을 썼다.

새벽에 발작을 하면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새벽에 발작을 할때면 어떤 여수감자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가 들리면 이상하게도 발작을 일으킨 사람도 조용해졌다. 이대용은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무당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야 발작이 쉽게 멈출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월남노래였다. 뜻은 알 수 없지만 애수를 띠고 있었다. 소쩍새가 피를 토하듯 울면서 구슬을 굴리든 듯 한 아름답고 슬픈 노래였다. 노래는 5분정도 계속되었다. 이대용은 그 노래소리를 들으면 마치 교교한 달밤에 퉁소의 명인이 부는 퉁소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대용이 그 노래의 주인공을 알게 된 것은 1977년 8월 13일이었다. 일광욕을 나왔다가 전 월남군 호반키엣 대령이 알려주었다. 17살 정도되는 맑고 산뜻한 소녀 수감자라고 알려주었다. 그 소녀는 무슨 사연으로 꽃같은 아름다운 나이에 살아서 나가기 어려운 치화형무소에 갇혔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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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4-1 치화형무소에서의 생활, 첫 일광욕

정치범 수용소인 치화형무소는 매우 엄격했다. 식사는 하루에 두번 아침 저녁뿐이었다. 점심을 굶겼다. 월남 밥공기 하나반 정도의 묵은 쌀밥과 늙은 호박 소금국 또는 배추 소금국 반공기가 전부었다. 돼지 고깃국은 한달에 한번 나왔고 밤톨만한 돼지고기 두점이 들어있었다. 이런 식사량으로는 도저히 이대용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평소 78kg 정도였던 체중이 46kg 정도로 줄어들었다. 제일 힘든 일은 일광욕이 금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투옥 6개월을 맞는 1976년 4월초부터는 햇빛이 너무 간절했다. 각기병이 생기고 오른쪽 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자주 현기증이 났다. 앉았다 일어설때면 눈앞이 컴컴해지고 별들이 명멸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마의 피부가 자꾸 머리쪽으로 잡아당겨지는 것 같은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 혈관속으로 작은 개미가 기어다니는 듯한 증상이 하루에도 여러번 생겨났다. 종라리에는 시퍼렇게 굵은 정맥들이 툭툭 튀어나와 보기에도 흉할 정도였다. 극심한 변비는 사람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이대용이 처음 일광용을 했던 날은 1976년 7월 27일이었다. 투옥된지 297일이 지나서였다. 일광욕 허용시간은 15분이었다. 그로부터 보름후인 1976년 8월 11일에 또 일광욕이 있었다. 8월 25일에도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9월에는 한번도 시켜주지 않더니 10월에는 1일과 11일에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10월 13일 아침에 간수가 이대용의 바지에 종이쪽지를 전해주고 사라졌다. 이순흥 교민회장의 편지였다. 이순흥 교민회장은 이규수 참사관 이하 다섯명의 외교관들이 1976년 5 월초에 귀국했다고 알려주었다. 그 이후 이대용은 본국과 연락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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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3-2 4월 29일 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

국사편찬위원회가 평가한 내용중 1975년 4월 29일밤 미국 대사관에서 최종 철수를 앞둔 시점에서도 공관원의 개별행동을 금지함으로써 공관원이 잔류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내용과 관련하여 이대용이 기술한 내용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원래 미국대사관과 협조한 제3집결소에서 교민들이 철수하기로 했으나 김영관 당시 주월대사가 미국 대사관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미국대사관에서 헬기를 타고 철수를 했다. 제3집결소에서 철수하기로 한 대사관 직원들이 모두 미국대사관으로 향하는 사이에 한국대사관 직원을 태우기로 한 헬기는 떠나 버렸다. 한국대사관 직원들은 그냥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 김영관 대사가 제3집결소에서 기다렸다면 대사관 직원들도 모두 철수할 수 있었다.

4월 29일 오전 9시 30분경 이대용은 대사곤 직원 10명을 인솔해서 미국대사관 본관마당에 도착했다. 본관마당에 14명의 대사관 직원이 있었다, 합쳐서 모두 25명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한국인들도 점점 늘어났다.

10시 30분경 인원을 점검해보니 한국인은 168명이고 한국인의 월남부인 그리고 월남부인들의 친정식구 등 40명이 한국인 집단에 속해 있었다.

4월 29일 오후 2시에 대사관 별관지역에 있는 인원들에 대한 수송작전이 시작되었다.

밤 8시 30분이 되었어도 우방국 국민 차례는 오지 않았다. 이대용은 미 대사관 베넷 공사를 찾아갔다. 베넷 공사는 이대용 혼자 대사관 본관 옥상에 있는 헬기를 타고 미제 7함대로 가라고 권유했다. 이대용은 베넷 공사의 권유를 거절했다. 사이공에 남아 있는 한국인 공무원중 최선임자로서 부하들과 민간인들을 아무말 없이 두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미국의 마틴대사를 보고 잠시 인사를 했다. 레만공사와 이야기를 했다. 한국인에게 철수 우선권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9시 40분경 이대용은 한국인들이 모여있는 미 대사관 별관 잔디밭으로 갔다. 거기서 신상범 서기관, 이달화 소령, 안병찬 한국일보기자, 이순흥 회장등 몇명이 모였다. 현지 미국 통제관의 도움을 받아 헬기를 타는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달화 소령과 이순흥 교민회장이 막후 교섭을 해서 미국 통제관을 데리고 왔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우선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얻어낸 현장 통제관의 호의도 한국인들의 무질서로 날아가 버렸다. 헬기를 타기 위해 개찰구 8미터 지점에 도달했을때 월남분인들과 한국인 남편들이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받아 한국인 60명도 뛰어나왔다, 그 앞에 있던 필리핀인들까지 뛰어 나오면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통제를 할 수 없었다. 미 해병대는 개찰구를 봉쇄해버리고 수송을 중단해버렸다.

이대용은 국방무관 정영순 대령을 불러 이달화 공군소령, 이문학 해군 중령과 해군 수병 2명등 현역장병들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미해병대와 협조하여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군인은 군인끼리 통하는 법이다.

이후 이대용은 별관식당에 들어가 태평양지구 미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을 받아 쓰도록 했다. 이대용이 영어로 구수하고 한국 외국어 대학을 나온 교민회장 이순흥이 받아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문 1 긴급
수신 : 미 태평양지구 총사령관 1975년 4월 29일 2220시
발신 : 주월 한국 대사관 공사 이대용
4월 29일 2220시 현재 주월한국대사관 외교관 11명을 포함한 약 160명의 한국인이 사이공 미국대사관 내 별관에 잔류하고 있음. 긴급구출바람

전문 2 긴급
수신 :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 1975년 4월 29일 2220시
발신 : 주월 한국대사관 공사 이대용
4월 29일 2220시 현재 주월 한국대사관 외교관 11명을 포함한 약 160명의 한국인이 사이공 미국대사관 내 별관에 잔류하고 있으며 사태는 위급함. 미국측과 협조하여 구출바람.

이장면을 한국일보 안병찬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 전문작성을 마치고 이대용은 수신자를 대통령 각하에서 미제7함대에 가있는 한국 고위외교관 이름으로 수정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고위외교관은 주월대사 김영관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전달되더라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대용은 이순흥 회장에게 속히 철수중인 한국장교를 찾아 미군통신망을 이용해서 전문을 긴급발송하라고 이야기 했다, 약 5분후 그들이 돌아왔다. 두통모두 이상없이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이대용과 한국인들은 그대로 미대사관 별관에 남아 있었다. 헬기는 한번에 120명씩 태우고 떠났다. 한국인 앞에 900명 정도가 있었다. 30분마다 한번씩 들어왔다. 4월 30일 4시 15분경 한국인 집단 바로 앞쪽과 한국인 일부를 태운 헬기가 떠났다. 그 다음 헬기가 오면 한국인들이 모두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들이 최류탄을 던지고 대사관본관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사관 직원들을 29일 밤에 붙들고 있는 바람에 대사관 직원들이 개별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대사관 직원들이 개별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이미 이대용은 그 전에 미국의 베넷공사의 권유에 따라 철수를 했을 것이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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