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2 이대용장군 기념 사업회를 결성하기로 했습니다.

최근에 좋은 소식을 들었다. 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를 영화화 한다는 것이다. 이미 투자자도 결정이 되었고 한창 시나리오 작업중이라고 한다. 주연배우도 중량감있는 사람으로 섭외중이라고 한다. 누구라면 다 알만한 사람이다. 우리시대 최고의 배우중 한 사람이다. 아직까지 완전하게 결정되지 않아서 말을 하지 못하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올해말 사이공에서 크랭크 인을 한다고 한다. 월남에서는 건기에 촬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11월이 되어야 한단다. 올해말을 놓치면 내년 말에 찍게된다고 한다. 찍고나도 한참 시간이 걸려서 편집작업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도 그 영화가 나오는 시기는 한참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함께 이대용 장군을 존경하던 몇몇이 모여서 이대용 장군 추모사업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냥 6-7명 정도가 모여서 의미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우선 보훈처에서 관창하는 이달의 전쟁영웅 선정을 위한 신청을 하기로 했다. 이번 5월중에 신청을 받는다고 하니 신속하게 서류를 정리해서 신청하고자 한다. 이와함께 국방부 전쟁기념관에서 관리하는 이달의 호국영웅 선정을 위한 작업도 할 예정이다. 사실 이대용 장군은 생전에 이미 국방부 전쟁기념관에 자신의 전시부스를 가지고 있었다. 돌아가시고 나면 바로 호국영웅으로 선정하기로 사전 약속을 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흐지부지 되고 있다. 아마도 심일소령의 공적이 사실이 아니라고 양심선언을 하고나서 이런 저런 제동이 걸린 것 같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국내 대학의 연구소와 공동으로 신청을 하기로 했다.

이대용 장군 추모사업회라고 해서 대단히 특별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훌륭한 분이 그냥 잊혀지지 않도록 우리가 힘이 닫는대로 무언가 해보려고 할 뿐이다. 애시당초 대단한 욕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그분이 살았던 훌륭한 삶이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하려는 것이다. 예전에는 국가나 군대가 그런 일을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이고 시민사회가 이렇게 성장했으니 우리 시민들이 각자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모임은 몇몇이 모여 이대용 장군 추모사업회를 추진하기로 뜻만 모았다. 조만간 유족들의 뜻도 모으고 관심있는 분들도 조금 더 규합해서 결성식을 하기로 했다. 아마도 7월은 지나야 할 듯 하다.

작을 출발이지만 큰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SCT] 개인 지갑 해킹 당한 경험

스판 오픈을 기념하여 좀 오래된 안 좋은 기억 개인지갑 해킹 당한 사건 다시 들춰냅니다.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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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1 들어가며

꽤 오랫동안 이대용 장군의 기록을 읽고 정리했다. 이번부터는 이대용 장군이 출판한 책 중 마지막으로 사이공 억류기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대용 장군은 다른 사람과 달리 많은 기록을 남겼다. 더우기 특별한 것은 그의 기록이 매우 솔직하다는 것이다. 침소봉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잘못한 것을 많이 숨겨주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의 잘못은 적극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사이공 철수과정에서 주월대사였던 김영관의 잘못에 대해서도 지적을 하지 않았다. 당시 김영관 대사가 먼저 철수를 하는 바람에 많은 혼선이 생겨 베트남 교민중 상당수가 철수를 위한 헬기를 타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대용의 억류기나 다른 기록을 보면 그 과정이 분명하지 않다. 이대용 장군의 일기를 살펴보면 그가 사이공 억류기를 정리하면서 김영관 대사의 잘못을 적시 하지 않으니 이야기를 정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적기도 했다.

김영관 대사는 해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처음으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던 인물이다. 그는 단신 철수이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질책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 김영관은 백선엽이 운영하던 선인재단의 상임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한다. 백선엽이 김영관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선엽은 문제가 있거나 비위가 있었던 사람들을 옆에 두면서 관리한 듯 하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용인술에 있어서 유사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사이공 억류기 정리를 마치면 다음부터는 이대용 장군의 일기장을 정리해 나갈 예정이다. 이대용 장군은 방대한 양의 일기장을 남겼다. 전쟁기간중에 수첩에 기록한 내용을 모아 전사기록을 발간했다. 사이공 공사로 있는 동안에도 매일 일기를 적었다. 억류당하기 직전 자신을 도와주던 프랑스인에게 일기장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이대용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발각될 경우 자신도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점을 우려해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월남에서 석방된 이후에도 계속 일기를 적었다. 그러나 퇴직이후 사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사업장에 있던 일기장도 압류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중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이대용 장군 생전에 일기장을 보여주기로 했다. 자신이 사망하기전까지는 개봉하지 말라는 조건이었다.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원본은 전쟁기념관에 기증을 하고 사본은 국내 대학의 연구소에 보관해 놓았다.

사이공 억류기는 324쪽의 방대한 기록이다. 이전에 정리했던 부분은 생략하고 새로운 내용만 추슬려서 정리하고자 한다. 자료를 읽어보고 정리하면 할수록 어떻게 이런 분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든다. 진정한 영웅인 잊혀지고 가짜 영웅만 판치는 사회가 되었다.


멋진 사진을 보느라니 감성이…

푸른 하늘을 보며 길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맑음이 있겠지요.이 메마른 땅을 밟고 가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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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51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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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트에서는 1948년에 논의된 미군의 철수문제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미국무부는 미군의 철수에 주저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미국 전쟁성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 포스트는 결국 미군의 철수는 미국내 여론과 예산,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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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UN이 한국문제를 떠안자 마자,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미국의 여론과, 또한 의회가 전쟁을 하기 위해 만들었던 대규모 군대에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긴박했다. 그러나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에 새로운 책임을 부과했으며, 그것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국부무-육군-해군-공군 협조위원회의 극동 하부위원회는 1948년 1월 미국은 선거가 열리기 전에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을 것임을 보고하고 그 이유는 철군이 법과 질서를 위험에 빠뜨리고 유엔으로 하여금 미국의 선의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워싱턴은 미국의 개입이 남한에서의 공정한 선거를 보장한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 미국은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선거에 참가하기를 거부한 북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부위워회는 미국이 남한에 강력한 경비대를 창설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획을 수행할 것을 건의했다.

비록 미국무부와 전쟁성이 상기한 건의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에 대한 정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렸다. 국무부 극동부서장 왈튼 버터워스는 미국은 한국에 대한 도덕적 약속을 가지고 있으며 “허둥지둥 도망”하는 것 같은 제안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무부는 군대 철수 날짜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으며, 이는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유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육군부장관 윌리엄 드라퍼는 미국은 한국을 영원히 점령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948년 2월 합동참모본부는 의회가 90억달러를 추가로 승인하지 않으면, 미국이 책임진 첫번째 지역인 유럽에서의 소련 공격을 차단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트루만 대통령은 미국은 모든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없으며 경제력도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러한 요구를 거부했다. 결론적으로 국방예산의 제한으로 인해, 미국은 미국의 국가안보에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서의 철수를 해야했다. 합동참모부가 한국에서 군대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대통령은 1948년 말전에 철수를 준비할 것을 승인했다.

3월 25일 트루먼 대통령은 새로이 창설된 국가안보위원회( NCS)가 작성한 한국에 관한 정책문서 NSC-8을 받았다. NSC-8은 한국에서 미국의 지역은 경제적으로 약하며 북한에 있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는 경쟁자들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만일 미국이 남한을 공산주의자의 지배로 넘긴다면 이는 소련의 위협이 일본과 중국으로 확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NSC-8은 미국이 1949회계년도에 1억 8천 5백만 달러를 남한에 경제지원을 제공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남한은, 미국의 생각에 따르면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전복으로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이나 다른 군대의 명백한 침략에 대응”할 수 있도록 자위능력이 있는 소규모 경비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NSC-8은 점령부대는 1948년 말까지 철수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미국은 “한국에서의 어떤 파당이나 한국의 어떤 다른 세력에 의해 취해진 행동이 미국에게 선전포고로 여겨질 수 있는 한국의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2일 NSC-8을 승인했으며, 이러한 조치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간의 길이 되기를 희망했다. 미국은 새로운 정부의 초기 몇달동안 경비대를 창설하고 새로운 국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한국에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고자 했다. 동시에, 미국은 소련이 남한에 대한 군사적 침공보다 침투나 전복과 같은 방법을 ㅎ사용할 것이라고 믿었고 미국은 도처에서 공약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워싱턴은 명백한 군사적 침략에 대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었다.

다음 포스트에서, 우리는 이런 정책의 시행을 살펴보고 남한에서의 경제적 도전과 경비대의 창설에 대해 알아보겠다.

[참고자료]

이번 포스트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로 했다.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of Kansas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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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사선을 넘다) 15-2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이대용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대용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과 여러번 인연을 맺었다.
처음 육군사관학교 7기로 입학했을 때 면접시험관이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검은 옷을 입은 이대용에게 검은샤츠냐 ? 라고 이야기 했다. 검은 샤츠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검은샤츠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당시 자신이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는 것을 강변하였다. 박정희는 그 당시부터 구데타를 같이할 사람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박정희 연구를 보면 그가 구데타를 생각한 기간이 매우 우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대용은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사관학교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해보려 했을 것이다.

두번째 인연은 육군대학에 교관으로 있을때 였다. 당시 박정희가 학생으로 육군대학에 입학해 있었고 이대용은 교관이었다. 이대용의 계급이 낮았으나 미국 보병학교에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에 전술교관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육군대학의 교관들은 받는 봉급으로 도저히 살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험문제를 학생들에게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와중에도 이대용은 한번도 시험문제를 팔지 않았다. 집에서 시험문제를 낼 때면 부인이 그 내용을 보지 못하도록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시험문제를 보여주지 않았다. 혹시 부인이 잘못생각해서 시험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돈을 받을까 걱정해서였다.

이대용 장군의 자제에 따르면 지금도 이대용 장군의 부인은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서운해 한다고 한다. 이대용 장군의 부인은 연세가 많으셔서 치매에 걸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 일을 물어보면 이대용 장군 서운하게 한 것만 이야기하다고 한다. 그중에 당신까지 의심해서 이불을 두르고 앉아 시험문제를 내는 것을 특히 자주 이야기할 정도라고 한다. 육군대학에서 박정희와의 인연은 특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대용이 정직하고 능력있으며 지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이대용은 육군대학 학생들 중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다. 그결과 학생들 중에서 장군을 포함한 몇명이 군복을 벗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대용이 이후 군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에 된 된 것은 육대 컨닝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세번째 인연은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관으로 있을때 이대용이 중령으로 작전참모를 할때였다. 군에서 지휘관과 작전참모는 평생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지휘관으로서는 웬만큼 믿을 수 있지 않으면 작전참모로 기용하지 않는다. 이대용은 제6관구 작전참모를 하면서 수도서울의 철수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수립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제2군단 작전참모로 오라는 제의가 왔다. 군단 작전참모는 대령들이 하기 때문에 이대용이 거기로 가면 곧바로 대령진급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대용을 보내지 않았다. 수도서울 철수계획을 다 마무리하라고 했던 것이다. 제2군단도 더 이상 오래 기다릴 수 없어 다른 사람을 작전참모로 기용했다. 이대용은 박정희가 보내주지 않아서 대령진급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당시에 박정희가 이대용을 왜 보내지 않았을까 ? 아무리 밑에 사람을 가깝게 여기더라도 진급이 걸려있으면 서슴치 않고 보내준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본이다. 그 당시 이대용은 박정희의 작전참모를 하면서도 박정희 집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 얼굴도 몰랐다. 대부분의 참모들과 부인들은 박정희 집에 뻔질나게 드나 들었다. 아마도 박정희는 그 때 이대용의 사람 됨됨이를 잘 보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박정희는 이미 그 당시에는 혁명을 위한 준비를 착착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래서 강직하고 청렴하면서 능수능란한 이대용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네번째 인연은 5.16이 성공한 다음, 이대용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으로 추천을 받았던 때였다. 이대용은 군의 정치개입에 직접 참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서실장 자리를 고사했다. 자신은 야전에 남아 있겠다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 장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종필을 위시한 육사 8기생들이 자신을 추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라는 사람이 혁명의 상황에서 비서실장을 밑에서 추대해주는 대로 기용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박정희는 그동안 이대용을 관찰해 보았고 그래서 그를 기용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용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이대용의 그런 선택을 좋게 보았을리는 만무하다. 그 이후 이대용의 군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겨우 연대장으로 나갔으나 그 이후의 군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이대용의 강직한 성격을 군이 수용하기 어려웠다.

다섯번째 인연은 이대용이 베트남 무관을 마치고 우여곡절 끝에 준장으로 진급을 하고 나서였다. 장군으로 진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용은 제대로 된 보직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 동안 박정희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우연히 골프장에서 박정희를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이대용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박정희는 이대용을 베트남 부대사로 보냈다. 당시에 부대사 제도가 없어져서 경제공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후 월남에서 억류생활을 하게 되었고 박정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대용을 구출해오라는 지시를 한다. 박정희가 이대용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이대용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남과 북이 체제경쟁을 치열하게 하고 있을때였기 때문에 이대용이 북한으로 넘어가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대용을 북한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했다고 할 것이다.

이대용이 석방되어서 돌아왔을 때는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명을 달리하고 나서이다. 생전에 이대용은 박정희에 대해 여러번 언급했다. 특히 자신이 갇혀 있을때 끝까지 석방시키기위해 노력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대용은 박정희가 중령때 자신의 제2군단 작전참모로의 영전을 막은 것에 대해서는 서운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는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사람은 잘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이대용 처럼 소신이 분명하고 강직하고 원칙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그리 가까이 두지 않았다. 특히 군대에서는 유능하고 강직한 사람들은 절대로 가까이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발탁해서 중요한 자리에 기용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같았다.


대명-소노펠리체 한식 전문 식당 ‘더 로딘’

리조트 내 위치한 더 로딘이라고 하는 한식 전문 식당입니다. 휴가 나오신 분들 꽤 많군요.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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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5-1 김재규와의 인연

이대용은 육군대학교에 근무하고 있을때 김재규를 알게 되었다. 김재규는 대령때 육군대학의 학생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송요찬 중장에 의해 무능한 장교로 찍혀 있었다. 김재규 대령이 전방 사단에서 부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제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에게 사단현황을 브리핑한 적이 있었다. 사단장이 부재중이어서 부사단장인 김재규 대령이 브리핑했다. 송요찬 장군이 이것 저것 질문을 했으나 김재규는 제대로 답변을 하지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이것을 본 송요찬 장군의 불효령이 떨어졌다.

“너 같이 무능한 자는 필요없으니, 24시간 내에 짐을 싸서 내 관할 지역밖으로 나가라”

눈앞이 막막해진 김재규는 육군대학총장인 이종찬 중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한국전쟁중 김재규 중령은 이종찬 장군이 사단장일 때 작전참모였다. 이종찬 장군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송요찬 장군과 달랐다. 이종찬 장군은 우선 돈에 깨끗해야 하며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을 수 있는 사생관이 분명해야 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국가관, 사생관 없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부정행위를 하고 요령을 피우는 자는 장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이종찬 장군의 기준으로 볼때 김재규 대령은 군에서 쫓아낼 대상이 아니었다. 얼마후 김재규 대령을 장군자리인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보직시키고, 결국 준장으로 진급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종찬 장군의 생각과 달리 김재규 대령의 장군 진급에 대한 뒷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거론 되었다. 장군 진급자 명단을 받아 보던 최석 장군은 깜짝놀라면서 “세상에 살다보니 별꼴을 다보네. 김재규가 장군이 돼?”라고 하면서 뒷짐을 지고 집무실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이대용은 가끔 부총장실에가서 김재규대령에게 보고를 하는 기회가 있었다. 김재규 대령은 부하들의 합리적인 건의를 잘받아주고,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해주는 차분하고 인자한 상관이었다. 그러나 군사지식은 매우 미흡했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인자하지만 드물게 한번씩 “꽥”하면서 돌발적으로 화를 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김재규를 중용했다. 군단장까지 시키고 나중에 중앙정보부장까지 시켰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용병의 천재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가 군인들 중에서 발탁한 사람들을 보면 매우 용병의 천재라는 말을 하기 어렵다. 그는 우수한 인재는 절대로 발탁하지 않았다. 특히 군인들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사람을 발탁해서 군을 발전시키고자 하지 않았던 것 같은 정황이 많다. 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중용해서 자신에게 충성하게 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재규였던 것이다.


[대명-소노펠리체] 요즘은 힐링이 필요할 때

테라하우스 앞 골프장에서 골프 치는 사람들. 치고 싶지만 골프의 골자도 모르는 촌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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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4-5 지화형무소의 남대위

1977년 5월 19일 이대용은 A동 감옥을 떠나 D동으로 옮겼다. 그 이후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1977년 6월 26일에는 D동 2층 1소 감방으로 이감되었다.

D동은 사형집행 예정수인들이 많이 있었다. 사형 집행을 앞둔 남월 반공 게릴라들인 와하우교군 위관급 장교들이 이곳 D동에 이감되어 있다가 사형되었다. 여기서 이대용은 D동 2층 담당 남대위와 만나게 되었다. 남대위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였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권총의 명사수여서 호치민의 경호원이었으나 호치민이 죽은 후에는 여기저기로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은 치화형무소 간수가 되었다.

1977년 6월 24일 새벽부터 이대용은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6월 26일에는 물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은 6월 30일까지 이어졌다. 이대용은 거적대기 위해 누워 온몸이 쑤셔대는 가운데 펄펄 끓는 체온을 이를 악물로 견뎌냈다.

남대위는 이대용의 상태가 걱정되어 퇴근도 하지 않고 형무소에서 대기하면서 이대용을 보살폈다. 6월 28일에는 여의사와 간호원을 데리고 와서 진찰하게 하고 약도 지어주었다. 7월 4일이 되어서야 열이 떨어졌고 일어나서 죽을 먹을 수 있었다. 러닝 셔츠와 팬티를 갈아 입으려고 벗었더니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이대용도 모르는 사이에 둔부 양쪽과 허리뒷편에 손바닥만한 상처가 나 있었다. 피부껍질은 모두 없어지고 시뻘건 살덩어리 위해 피가 엉켜있었다. 이대용은 왜 그런지 몰랐으나 그것은 욕창이었던 것 같다. 움직이지 못하면 피부가 괴사해서 생긴다.

이후 남대위는 이대용에게 취사장에서 끓인 물 한동이씩을 가져다 주게했다. 그런 특혜는 이대용이 D동을 떠날때까지 4개월간 계속되었다. 일광욕시간도 15분에서 30분으로 늘려 주었다. 그러나 남대위도 1977년 11월 2일 만난지 4개월 만에 떠났다. 떠나기전 그는 통역관을 데리고 와서 이대용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남대위는 이대용을 부대사라고 하면서 자신이 AH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얼마 있으면 석방되어 귀국하게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대용은 감방에서 옥사할 수도 있었다. 그때 남대위가 도와주었다.

이대용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구중위 옹바오 남대위를 고맙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대용이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바이낸스 해킹사건에 대한 갠적인 생각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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