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6 서서히 포위망이 좁혀 오다

월남에 억류되어 있던 외교관들의 처우는 남월과 북월의 유엔가입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8월 29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 회의에서 남월과 북월의 유엔가입에 대한 표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월남 공산당은 유화적인 제스츄어를 취했다. 8월 24일 자유월남 패망후 처음으로 한국인 출국비자가 발급되어 김병용이 방콕으로 떠났고 이어서 민간인 2명이 추가로 출국했다.

그러나 8월 29일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남월혁명 임시정부는 즉각 미국, 호주, 뉴우질랜드, 태국, 필리핀, 대만, 한국이 7개국 참전국민들의 출국을 전면 중단시켰다. 남월과 북월의 유엔가입문제는 9월 29일 다시 표결토록 연기되었다. 9월 11일 포드 미국대통령은 남월혁명임시정부가 유엔가입을 위해 외국인들을 인질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비난했다. 이 비난이 있은 후 남월혁명임시정부는 미국인을 위시한 참전국 외국인들의 출국정지를 해제했다. 그러나 유독 한국인들에 대한 출국정지는 해제되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북한이 남월에게 한국인들의 출국을 정지하도록 요구했다고 했다.

안닝노이찡은 한국인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다. 8월 중순에는 민간인 허춘이 시내 처가집에 갔다가 체포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투옥된지 한달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대용은 허춘에게 체포된 이유와 형무소에서의 생활, 심문내용등을 물어 보았으나 횡설수설해서 무슨말인지를 알 수 없었다. 심문은 해군예비역 하사관이던 임대인이 담당했다. 한번은 허춘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 공사에게 너무 큰죄를 져서 죄송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죄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신상범 서기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허춘은 겁에 질려 있었으며 무엇인가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았으나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하루는 허춘이 김경준 영사가 사는 아파트로 가서 배완용을 찾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신상범 서기관이 그에게 배완용이 없다고 하자 급하게 자리를 피해버렸다. 배완용은 이미 북한과 접촉되어 있다고 추정되던 인물이었다. 허춘이 배완용과 연락을 주고 받을 정도라면 이대용의 신상이 이미 북한 공작원에게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용은 조심에 조심을 기했다. 신상범 서기관과 임대인 부부는 이대용을 보호했다. 우선 이대용을 찾아 오는 사람들 중에서 꼭 이대용이 만나야 하는 사람이 아니면 만나지 않도록 했다. 하루는 이 모라는 자가 이대용을 찾아 왔다. 이 모는 전과자였다. 홍콩에서 위조지폐인 미국 달러를 들여와 암거래를 하다가 티우 정권때 체포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사이공 함락 위기가 다가오자 한국대사관은 서영사를 치화형무소로 보내 이 모등 한국인 죄수를 가석방 절차를 밟아 석방시켰다.

사이공이 함락되자 이모는 시내 변두리에 머물면서 역시 전과자인 다른 한국인 한명과 함께 중국인과 짜고 가짜 스위스 여권을 만들어 스위스 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안닝노이찡에서 한국인들을 조사하던 광대뼈는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들에게 출국사증을 발급했다. 이들 전과자들은 안닝노이찡과 자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남월의 이민국 직원들이 이 모 일당들을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허춘이나 이 모등은 모두 이대용의 주변 상황을 안닝노이찡에게 고자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8월 말경 이 모와 그 일당은 사이공 탄산눝 국제공항을 통해 비엔티안으로 떠났다. 9월 초부터 이대용에 대한 감시가 눈에 띠게 강화되었다.


커피와 콜라의 콜라보 ‘커피 코카콜라’라는게 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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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5 동족을 팔아먹은 사람들

1975년 5월 12일 남부월남혁명임시정부 외무부는 사이공 주재 각국 외교관들에게 혁명임시정부 외무부에 등록신고를 하라고 공고했다. 이어서 5월 25일에는 한국외교관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며칠후 남월 혁명임시정부 외무부 앞 게시판에 불란서 인, 미국인, 일본인, 인도인, 기타 출국자들의 명단이 나붙었는데 거기에는 한국외교관 8명 전원과 김상우 목사, 이상관 이 들어있었다. 출국일자와 난산눝 국제공항 도착시간도 명시되어 있었다. 항공로는 탄산퉅 공항 출발, 라오스 비엔티안을 경유하여 태국방콕으로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모두들 기뻐했다. 일본 히도미 대사는 한국 외교관 8명을 초청해서 송별만찬회를 열어 주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이변이 생겼다. 비엔티엔에 있던 한국대사관이 폐쇄되어 라오스 입국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출국자 명단에서 서병호 영사와 안희완 영사가 빠졌다는 것이다.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면 안녕국과 북한 공작원들이 합동 공작을 벌리고 있는데, 한국인 몇 명이 이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대용은 한국인 165명중 150명을 완전하게 통제하고 있었으나 10여명은 그의 통제밖에 있었다. 그들 10여명은 월남 처갓집, 병원등에 있었고 대사관저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당시 홍콩을 경유하던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영삼 당수가 남부 월남혁명임시정부 주석에게 전문을 보내 사이공 잔류 한국외교관 및 민간인들을 속히 본국으로 귀국시켜 달라고 요청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국제적십자사가 적극 개입하여 6월 18일로 한국외교관 출국날자가 정해졌다. 이미 체포된 서영사와 안영사를 제외한 외교관 6명과 김상우 목사 그리고 이상관이었다. 김상우 목사는 외교관이 아니었지만 외교관이라고 등록을 했는데 받아 들여졌으며, 이상관은 주미 대사관 무관부에 근무한적이 있어 월남 외교부에 외교관으로 등록했는데 받아 들여졌다.

6월 18일 탄산눝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안녕국 간부가 한국 외교관은 출국할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행정적인 문제로 출국을 보유한다며 시내 숙소에 가서 대기하라고 했다. 이대용은 가장 의지하던 프랑스인 보네와 그의 한국인 부인 유선환의 집이 있는 뚜도 가 146번지로 갔다. 그 부부는 사이공 함락후 위험을 무릅쓰고 정성스럽게 한국인들을 도왔다.

보네 부부는 사이공 함락후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인들을 도왔다. 보네 부부가 한국인들을 도와준 것은 잊어버려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 정부가 보네 부부를 위한 포상을 했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만일 정부차원의 포상이 없었다면 지금이라고 찾아서 포상을 해야 할 것이다.

이대용이 형무소에 잡혀가기 전까지 이대용은 매일 한번 이상 보네부부를 만나 한국인 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네 부부는 이대용이 한국정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내는 비밀전문을 받아 몰래 불란서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보냈다.

6월 19일 아침에 연락이 왔다. 18일 밤에 안닝노이찡이라고 불리는 안녕국 경찰이 서영사와 안영사 그리고 김종옥이라는 민간인을 체포해 갔으며, 한국의 장군 한명을 찾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한달동안 이대용은 안닝노이찡에 가서 심문을 받았으나 풀려났으며, 안닝노이찡으로부터 감시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7월 20일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현지에서 하사관으로 제대한 천오모가 이대용을 찾아왔다. (천오모가 실명인지 아닌지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통역을 했던 예비역 소령 배완용이 자신의 의동생에게 불란서 대사관에서 근무한다고 하는 불란서와 월남 혼혈의 30대 남자를 소개했는데 그가 북한에 대한 찬양 선전을 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은 실명을 쓰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배완용이라는 예비역 소령의 이름도 실명이 아니다. 나라를 팔아 먹었다고 해서 이완용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천오모로 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자 이대용은 30대의 남자라는 사람이 북한과 협조하고 있는 공작원이며, 배완용도 이미 북한과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대용은 천오모에게 배완용의 동태를 잘 감시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이대용은 보네를 불러 불란서 대사관에 불란서와 월남 혼혈의 30대 남자가 근무하고 있는지 물었다. 보네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했다. 배완용이 데리고 간 사람은 월남의 공작원이었다.

그동안 이대용 주변에 대한 조사는 하나씩 하나씩 이루지고 있었다. 이대용이 비서로 데리고 있던 월남 여성들이 차례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대용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한국 민간인들도 추가로 체포되기 시작했다. 7월에는 지 원이 치화형무소에, 지태영을 레반투엘구치소에 최기선과 3명의 민간인들이 칸토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청와대 청원] 버닝썬 특검, 청문회 청원

경찰이 버닝썬과 경찰 간의 유착을 무혐의 종결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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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52.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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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트에서 본바와 같이, 1948년 4월 2일 트루먼 대통령이 남한에 새로 수립된 정부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승인했다. 새로운 정부가 소련이 지원하는 북한으로부터 명백하게 위협을 받고 있기 대문에 NSC-8은 미국이 남한을 강화시키기 위해 경제지원과 경비대 창설을 계획했다. 일본의 통치와 전후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은 한반도의 절반 남쪽을 심각한 경제적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남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었다.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자, 미국 정부는 신속하게 NSC-8을 수행했다. 몇주안에, 미국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을 여행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는 지원 프로그램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사업가들과 정치지도자들과 협의했으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수후 한동안, 새로 독립한 한국정부는 최소한 지금의 수준을 유지하고 필요한 부흥과 정부의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과 조언, 음식과 원자재의 지원을 요구할 것이었다”

군은 남한의 신속한 경제발전 전망에 대해 낙관적이라고 보고했다. 군의 보고는 미국의 지원은 “잠정적인 기간동안 제공되어야 하며” 이는 새로운 한국이 교역을 통해 곧 자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미국과 유엔의 굳건한 지원은 한국민과 그들의 이웃에게 향후 극동의 교역에 참여를 증진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NSC-8의 두번째 조항을 수행하기 위해, 육군성은 남한의 보안군을 5만명으로 확대시키고, 미국 고문관팀을 구성하고 미국 점령군이 철수하기 전에 필요한 모든 군사장비를 넘겨주는데 동의했다. 목표는 국내외의 예상되는 안보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히 강한 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경비대는 “계엄령을 시행하고, 군사 또는 게릴라 부대와 전투하며, 또한 북한으로 부터 소규모 침입을 물리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적 전망에 대한 미국의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1948년 초의 상황은 심각했다. 산업 생산은 전시의 80%선을 밑돌았다. 북한은 석탄의 선적을 중지했으며, 남한으로 하여금 석탄을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도록 했고 그 가격은 1947년과 1948년 사이 거의 두배 정도가 되었다. 가장 큰 우려는 1947년 가뭄으로 농업생산이 1945년 수확의 절반수준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도시 주민들의 소요를 제공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농민들에게 곡물수확의 쿼터를 정해 팔도록 강요했다. 이는 지방과 정부간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으며, 이미 휘발하고 있는 정치적 충돌들을 격화시켰다.

더우기, 모든 종류의 상품부족과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암시장을 번성하게 만들었다.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이런 상황은 전복을 시도하는 모든 조직에게 유리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특별히 유리했는데, 일본의 그들 동지들이 귀중품의 지속적인 공급과 함께 남한에 공산주의자 단체들을 제공함으로써 그 단초를 확대시키고자했기 때문이었다. 남한은 또한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통치를 피해 지속적인 유입된 사람들로 인해 높은 실업률을 겪고 있었다.

다음 포스트는 어떻게 북한의 정권이 남한의 경제적 곤란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켜갔는지를 알아 볼 것이다. 또한 남한이 점증하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보유했던 자산들을 불하하려고 했던 시도들을 살펴볼 것이다.

[참고자료]
이번 포스팅은 다음 자료를 참고했다.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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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warhistory) Post #52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As we saw in the last post, on 2 April 1948 President Truman approved a new policy regarding the soon-to-be-created government in South Korea. Since the new state would be clearly threatened by its Soviet-backed rival in the north, National Security Council No. 8 (NSC-8) committed the US to strengthen South Korea through economic aid and the creation of a constabulary army. Japanese rule and the postwar dismemberment of the Japanese empire had left the southern half of Korea in serious economic distress, and until that was remedied there was little hope that it would be able to defend itself.

Given the urgency of the situation, the US government moved quickly to carry out NSC-8. Within weeks, American economic specialists traveled to Korea to collect the necessary information to draw up an assistance program. They consulted with businessmen and political leaders and concluded that despite their difficult circumstances, Koreans in the south were eager to control their own affairs. Nonetheless, “for a time after withdrawal…the new independent Korean Government will require continuing American aid, advice, food and raw materials in order to maintain at least the present ration level and to achieve necessary rehabilitation and governmental effectiveness.”

The Army’s report was optimistic about the prospects for rapid economic development in South Korea. It argued that US assistance “should be provided for an interim period” because the new Korean state would soon become self-sufficient through trade. The report forecast that “firm support by the United States and the United Nations…will inestimably help to develop participation in future Far Eastern trade on a basis valuable to the Korean people and to their neighbors.”

To carry out the second directive of NSC-8, the Department of the Army agreed to expand South Korea’s security forces to fifty thousand troops, to form an American advisory team, and to transfer all necessary military equipment before US occupation forces withdraw. The goal was to create a constabulary army strong enough to meet anticipated security challenges from within or without. It must therefore be able to “impose martial law, to combat military or guerilla forces…, or to repel minor invasions from the north.”

Regardless of American optimism about South Korea’s economic prospects, however, in early 1948, the situation was critical. Industrial productivity was 80% below wartime levels. The north had stopped shipments of coal, forcing the south to import it from Japan and the US at prices that nearly doubled between 1947 and 1948. The greatest immediate concern was the shortfall in agricultural production after a drought in 1947 reduced the harvest to half of pre-1945 levels. To provide for the needs of city dwellers, the interim government forced farmers to sell it a quota of their grain yields. This caused serious friction between rural areas and the government, which intensified the already volatile political conflicts.

Moreover, the scarcity of goods of all kinds and the government’s efforts to control rampant inflation produced a thriving black market. As usually happens, this situation benefitted all subversive organizations. The Communists especially benefitted, however, because their comrades in Japan were eager to further the cause by providing communist groups in South Korea with a steady supply of valuable commodities. The south also suffered from high unemployment, exacerbated by the steady influx of people fleeing communist rule in the north.

The next post will examine how authorities in the north took advantage of the economic distress in the south to advance their position politically. It will also look at how the south attempted to solve its pressing economic problems by working out a way to dispose of Japanese-owned property.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nd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새로운 ENS?

ENS(Ethereum name service)가 새롭게 단장했어요. (#까먹고 있던 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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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4 외교관들을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그들이 거부하다.

이대용의 사이공 억류와 관련해서는 이미 녹취록에서 일부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는 녹취록에서 다루지않았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나가겠다.

미국 헬기를 타고 철수하지 못하자 이대용이 프랑스와 일본 대사관을 전전하면서 철수하지 못한 외교관들과 한국교민들을 데리고 김영관 대사 관저에 와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이대용은 북베트남 군이 수백만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주거지로 돌아가서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5월 1일 밤 12시부터 5월 5일 밤 12시까지 대로상에서 일체의 검문 검색을 하지 않는다는 월남 공산군 사령부의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이대용은 이기회를 통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교민들 중에서 월남 선박회사와 관계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교민들이 자고 있던 대사관저 2층에 올라가보니 한쪽 구석에서 두사람이 잠도 자지 않고 무엇인가 소근거리고 있었다. 이대용이 그들에게 무엇을 하던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사람은 배를 몰 수 있는 조타수였고 한사람은 돈많은 월남 금은방 주인마담과 동거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첫인상을 보니 아주 요령이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름을 들어보니 교민사회의 요주의 인물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런 요령있는 사람들의 비상한 재주가 더 유용한 법이었다. 이대용은 이들을 구슬렀다. 만일 외교관들과 교민들을 탈출시키는데 공을 세우면 귀국후 훈장을 수여하고, 해외에 나가 건설사업이나 용역사업을 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적극 지원토록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탈출방법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과연 그들은 이미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5월 2일 오전 8시에 민간 트럭을 타고 사이공을 출발하여 붕따우에 도착해서 어선을 빌리거나 사서 붕따우 롱하이 해변가를 떠나 남지나해 공해상에서 미 제7함대또는 한국 해군 LST에 구조되는 것을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로 태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미 트럭을 구해 놓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기 어려우니 이대용만 데리고 가겠다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자신혼자 갈 것 같으면 이미 미사관에서 헬기를 타고 떠났을 것이라고 하면서 외교관 5명을 데리고 가라고 요구했다.

이대용은 제1차로 먼저 5명의 외교관을 보내고 제2차로 다시 남은 외교관 4명과 교민회장 이어서 제3, 4차로 제대장병 및 잔여 교민들을 철수시키는 방안을 고려했다. 우선 5명의 외교관 철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외교관 9명과 교민대표 1명을 포함한 10명이 비밀회의를 했다. 이대용, 이참사관, 김창근 서기관, 서영사, 안희완 영사, 김경준 영사, 신상범 서기관, 김교양 통신사, 교민대표 이렇게 10명이었다.

이대용은 탈출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의외로 외교관들은 이대용의 탈출계획에 부정적이었다. 트럭을 준비한 2명의 민간인은 우범자로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외교관도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이야기하며 이대용의 계획에 반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교민회장이 이대용에게 “이 공사님, 정그러시다면 이 공사님 혼자 떠나십시요” 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사람들을 장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지휘관에게 전권을 주는 것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정하지 못하면 최악의 상황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대용은 탈출에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대용은 어두운 마음으로 회의를 끝내고 응접실을 나서려고 하는 찰나, 김창근 서기관이 자신은 탈출하겠다고 자원했다. 이대용은 마음을 잘먹었다고 칭찬을 했다. 이층에 올라가 두명의 민간인을 만나 김창근 서기관만 데리고 가라고 이야기 했다. 그들은 이대용과 같이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실망했다.

김창근 서기관은 동료 외교관들에게 아무말도 하지않고 비밀리에 트럭을 타고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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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3 이대용 두번 자결을 결심하다.

이대용은 두번 자결할 각오를 했다. 첫번째는 한국전쟁당시 압록강 초산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포위가 되었을때다. 그때 그는 중공군에 붙잡히는 상황이 되면 권총으로 자결을 하려고 생각했다. 쫓겨가는 와중에도 마지막에 자결을 할 수 있도록 권총에 항상 총알을 남겨 놓았다. 그저 생각이나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같이 철수하던 중대원과 서울 적십자 간호학생 박태숙과 정정훈에게도 자신은 자결할 생각이라고 이야기 했다. 마지막에 발바닥 피부가 모두 벗겨져 나가 더 이상 걷기도 어려울 때였다. 철수하는 와중에 국군의 장교들이 포로가되자 죽창으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도 했거니와, 해방이후 북한에서 인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인민재판을 받아 죽을뻔 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용이 자결을 할 생각임을 밝히자 박태숙과 정정훈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면 자신들을 먼저 죽여달라고 부탁하면서 서로 울었다고 한다.

두번째 자결을 생각한 것은 월남에서 철수하다가 잘못되어 잔류했을 때였다. 이대용은 마지막 순간에 여러번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으나, 부하 외교관들과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여러번 마지막 탈출할 수 있는 상황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나 남긴 기록을 보면 그 마지막 순간에 주저주저하면서 마음을 다시 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항상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잡아간다.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 헬기가 떠나가고 이대용은 남은 교민들과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곳 저곳을 전전했다. 먼저 북베트남과 외교관계가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대용은 교민들을 김영관 대사관저에 대기시켜놓고, 다시 이규수 참사관, 김창근 서기관, 신상범 서기관을 대기하고 프랑스 영사관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이대용은 일본 대사관저로 갔다. 대사관저에서 일본의 국방무관 구로다 일등육좌를 만나 향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이야기 하다가 새벽녁에 일본 대사관에 갔다. 이대용은 이규수 참사관을 대동하고 히도미 대사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도미 대사는 일본과 북베트남과는 외교관계가 없어 도움을 주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다. 이대용은 어쩔 수 없이 지금의 긴급상황을 일본 대사관에서 전문으로 한국정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후 이대용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겠다는 심정으로 월남 해군본부로 갔다. 이대용은 월남 해군사령관 충 땅 깡 중장과 친한 사이였다. 월남 군함을 이용해서 외교관들과 교민들을 전원 철수 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월남 해군본부 정문 초소에서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총탄세례를 받는 상황에 이르자, 포기하고 다시 프랑스 인 보네를 만나 프랑스의 그랄 병원으로 외교관들과 교민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프랑스인 보네의 부인은 한국인 유선화로 지미식당을 운용하고 있었다.

1975년 5월 1일 아침 8시 30분경 일본 대사관의 와타나베 참사관이 김동조 외무장관이 이대용에게 보낸 전문을 가지고 그랄 병원으로 찾아왔다. 전문내용인 즉, 정부는 각종 외교계통을 통해 사이공 잔류 외교관과 교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북한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일본 좌익의 거물급 작가 마쓰모토 세이쵸의 사위였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미 북한의 고위급 정보요원들이 사이공까지 들어와 있으며, 베트남 공산정권과 협조하에 한국 외교관 8명을 모두 평양으로 끌고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말을 들으니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와타나베 참사관에게 북한으로 끌려가는 상황이 되면 북한 정보요원을 사살하고 자신도 자결하겠다고 이야기 했다. 50평생 후회없이 살았고 죽음이란 언젠가 가야할 피할 수 없는 것이니 깨끗하게 가고 싶었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이대용의 손을 잡으며 자결 만을 하지 말라고 울었다. 옆에 있던 이규수 참사관도 울고 있었다.

이대용은 이후 북베트남에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면서도 여러번 자결할 생각을 했다. 사람이 죽을 생각을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대용이 이대용 같은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죽고 사는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만년에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목숨을 정리하겠다는 생각은 변치않았다.

군인에게는 사생관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신이 살고 죽을 자리와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점에서 이대용은 진정한 군인정신의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를 연상하게 한다. 무엇이 이대용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스스로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살아오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고 다음어 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타고난 성정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어떤 삶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다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점에서 이대용은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문제적 인간이다.


한국에 상륙한 블루보틀 기존에 자리매김한 스벅을 긴장시킬지 아니면…

갠적으로는 좀 더 지켜보야지 않을까 싶은데 1표인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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