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 # 54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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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미국이 군대를 철수하기전인 1948년 4월 도입한 한국에 대한 새로운 정책인 NSC-8은, 내부적인 전복이나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데 충분한 군대를 한국에 창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비극적인 분단은 자연스럽게 남한의 정치지도자들이 새로운 군대를 북쪽의 절반을 복속시키고 대한민국으로 통합하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행동이 소련과의 전쟁으로 이끌것을 우려했으며 그리하여 한국군에게 공세적인 작전을 수행할 장비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런 정책은 1950년 6월 잘 장비된 북한군의 전면적 침공으로 남한이 재앙적 결과에 직면토록 했다.

한편, 1948년 봄, 맥아더 장군과 펜타곤의 군지도자들은 한국국방경비대를 5만명으로 확대함으로써 NSC-8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국방경비대에 소총과 카빈소총, 경포병 그리고 기관총, M-2 경트럭, M-24 경전차,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량을 제공하기로 했다. 3월까지 국방경비대는 거의 완전히 편성되었으며, 4월에 하지 장군은 국방경비대를 위해 북한으로 침공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군사적 우발사태 계획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방경비대가 모습을 잡아가면서, 미육군은 계획에 따라 1948년 한국에서 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6월 초 육군장관은 6개월분의 탄약, 장비 그리고 수리부속품 선적을 승인했으며, 7월 1일 전술적 철수를 위한 군수 및 행정준비를 제시했다.

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하지 장군은 2대 미군 사단의 장비와 교관을 이용하여 국방경비대를 위한 학교를 열었다. 내무부의 새로운 선임고문관, 윌리엄 로버트 준장은 남한에서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헌병사령부를 창설하여 군기를 유지하고 반란의 싹을 자르게 했으며, 급속하게 무장해제 되고 있는 미군 제24군단의 무기와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임시 한국군사고문단(PMAG-K)를 수립하여 국방경비대의 대대급 제대까지 작전과 훈련을 위한 고문관을 제공했다. 결국 그는 미제6보병사단에서 국방경비대의 중대를 훈련시킨 경험을 지니고 있던 소총중대로부터 젊은 장교들을 모집했다. 이들은 사단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남아서 이런 훈련임무를 계속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미군부대의 철수는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한에서의 책임을 군에서 국무부에 넘기는 계획은 9월 2일에야 만들어졌다. 7월 말까지, 미군은 가족들을 모두 후송시켰다. 그러나, 국무부는 남한에서의 정치적 분위기를 우려했으며 더 이상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안았다. 7월 8일 로버트 로베트는 육군장관에게 NSC-8은 철수에 있어서 융통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미국이 유엔과 사전에 협의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8월 15일에 다시 철수가 시작되었으나, 국무부는 군이 상황에 따라서 철수를 지연, 조정 또는 연기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남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미국부가 군대의 철수를 연기시키도록 한 것을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이번 포스트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했다.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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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54.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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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we discussed in the previous post, the new policy for Korea the US adopted in April 1948, titled NSC-8, specified that before US occupation forces withdrew, they would create a military for the ROK that would be strong enough to defend the South from internal subversion or attack from the North. The problem, however, was that the tragic division of the country naturally led political leaders in the South to want to use their new military force to subdue the northern half and bring it into the Republic of Korea. The United States, however, feared that such action would lead to a wider war with the Soviet Union and therefore did not equip the ROK Army to carry out offensive operations. This policy had catastrophic consequences when the South faced a full-scale invasion by a well-armed Korean People’s Army in June 1950.

Meanwhile, in the spring of 1948, General MacArthur and the Army leadership in the Pentagon decided to fulfill NSC-8 by enlarging the Korean Constabulary to 50,000 men. The US would equip this force by transferring rifles and carbines, light artillery, machine guns, M-2 half-tracks, M-24 light tanks, and M-8 “Greyhound” armored cars. Already by March the Constabulary was nearly at full strength and in April General Hodge received orders to prepare this force for every military contingency except an invasion of North Korea.

To fulfill his orders, General Hodge created schools for the Constabulary using weapons and instructors from two American divisions. The new senior adviser to the 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 Brigadier General William L. Roberts, played a key role in shaping the new armed services for South Korea. He created a Military Police Command to maintain discipline and root out subversion, and devoted much effort to securing weapons and equipment from the rapidly demobilizing US XXIV Corps. He also established a Provisional Military Advisory Group-Korea (PMAG-K) to provide operational and training counterparts down to the Constabulary battalion level. Finally, he recruited junior officers from the rifle companies of the US 6th Infantry Division who had experience training Constabulary companies. These men were then assigned to stay in Korea to continue this training mission rather than depart with their division.

As the Constabulary force took shape, the US Army was determined to withdraw from Korea on schedule in 1948. Early in June the Secretary of the Army authorized the shipment of a six-month supply of ammunition, equipment, and replacement parts, then proposed that logistical and administrative preparations for tactical withdrawal begin on July 1.

As it turned out, withdrawal of US forces was not accomplished so quickly. The plan was for the State Department to take over responsibilities in South Korea from the Army on September 2. By the end of July, the Army had evacuated the last of the military dependents. However, the State Department was concerned about the political conditions in the South and was not ready to move further. On July 8, Robert Lovett reminded the Secretary of the Army that NSC-8 called for flexibility on withdrawal and also committed the US to coordinate with the United Nations as it proceeded. Disengagement could begin as scheduled on August 15, but the State Department insisted that the Army had to be ready to suspend, adjust, or delay the withdrawal on a moment’s notice.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the political complexities in the South that led the State Department to delay troop withdrawal.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and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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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14 옆감방의 자살시도 그리고 차입을 요구하다.

이순흥 회장의 차입은 그 이후에 없었다. 3월이 가고 4월이 가고 5월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5월 말경에는 아예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이대용은 월맹측이 자신을 극심하게 굶겨서 의지를 꺽으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5월 29일은 셋째 아들의 생일이었다. 이대용이 월남에 국방무관으로 가게 되어 교육을 받고 있는 중에 아내가 셋째를 낳았다. 백일이 되는날 가족 모두 사이공에 도착했다. 그때가 1973년 4월 6일이었다. 이대용은 그 후 세차례에 걸쳐 약 9년 5개월을 사이공에서 근무했다.

감옥 생활 6개월을 지나면서 햇볕이 너무 그리웠다. 비타민 부족으로 각기병이 생겼고, 오른쪽 귀의 청력을 상실하여 반귀머거리가 되었다. 자꾸 현기증이 났다. 앞이 캄참해지고 눈앞에 수많은 별들이 명멸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마의 피부가 자꾸 머리쪽으로 당겨지는 증상도 있었다. 혈관속으로 작은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듯한 증상도 있었다. 몸이 야위어가면서 종아리에는 시퍼런 정맥이 툭 튀어나 나왔다. 무엇보다 대변보기가 힘들었다. 먹는 것이 별로 없으니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다. 5일이상 배면을 하지 못하면 설사약을 주었다.

1976년 7월 17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옆방에서 쿵쿵 쾅쾅하면서 두터운 벽이 무겁게 진동했다. 하이탑 장군과 이대용은 무슨 소리인지 귀를 기울였다. 스무번 가까이 소리가 나더디 조용해졌다. 그 방에는 정치범이 한명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후 그 수감자를 들것으로 실어나르는 소리가 났고 감방바닥을 청소하는 것 같았다.

오후에 경비원에게 그 방 수감자가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들었다. 벽에 박혀 있는 못에다 머리를 찧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고 의식을 잃어버린 것을 형무소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얼마있지 않아 감방안에 박혀 있는 못을 모두 뽑아갔다. 더이상 벽에다 머리를 찧어서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기장을 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벽에다 헝겊을 이어 붙여서 모기장을 쳤다.

이대용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런 기회를 틈타 외부와 연락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자살소동이 있었으니 형무소 당국자들로 조금 태도를 바꿀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란서 공관을 통해 우리 정부에 생존소식이라도 전하고 소량이나마 의약품, 식품, 일용품을 차입해보기로 했다.

이대용은 7월 22일 아침 ‘구’중위라는 담당 간수에게 불란서 공관에 차입을 요청하는 편지를 쓸테니 전해달라고 요구했다. 의외로 구중위는 선선히 편지를 쓰라고 했다. 이대용은 경비원에게 종이를 얻어 간단하게 영어로 편지를 썼다.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의약품, 식품, 일용품 차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쓰고 그 밑에 필요한 품목을 적어 놓았다. 구중위는 사이공의 불란서 총영사관에 편지를 전해주면 되느냐고 묻고는 갔다.

한달이 지나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불란서 총영사관이 편지를 받았으면 바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이대용은 수감전에 당시 한국정부는 재월 한국외교관 및 민간이 지원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미화 10만달러를 불란서 정부에 기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구 중위가 편지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기대는 걸지 않기로 하고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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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13 하이탑 장군이 이대용의 감방으로 들어오다.

1976년 2월 12일 월남 와하우교 군총사령관 짠 우 바이가 안닝노이찡 직할 구치소에서 이대용의 감방으로 이송되어 왔다. 그는 자신이 수감되어 있던 구치소에 티우 정권의 초대수상 웬 반 록, 안꽝계 불교지도자 띡 찌 꽝, 월남국사파불교지도자 띡 땀 차우, 북월피난민가톨릭 지도자 호앙 뀐 신부, 티우정권을 데모로 공격했던 짠 후 탄 신부, 국민당 지도자로 부수상을 지낸 짠 반 뛰엔 등 많은 저명인사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전했다. 그들은 모두 건강이 나빠서 몇몇은 오래지 않아 옥사할 것 같다고 했다.

짠 우 바이 장군은 1926년 생이었다. 학교라고는 국민학교 1학년 26일간 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독학해서 글을 익히고 와하우교군 총사령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항불투쟁, 반 고 딘 디엠 투쟁으로 이름을 떨쳤다. 티우정권 초기에는 그를 지지했으나 티우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와하우교도 출신의 상원의원이던 상이라는 사람과 가까이 하자 앙심을 품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 수십명을 선발하여 도끼로 손가락 하나씩을 자르게 했다. 그리고 티우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티우가 비민주적이고 편파적이며 부패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국내외 신문은 이 손가락 절단시위를 크게 보도했고, 티우는 곤경에 빠졌다.

바이는 항불투쟁을 할 때와 반 고 딘 디엠 투쟁을 할 때, 여러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하이탑이었다. 그래서 월남사람들은 그를 하이탑 장군이라고 불렀다.

하이탑 장군은 옛날 중국의 초패왕 항우의 모사 범증이나 촉한의 승상 제갈공명같은 사람들 처럼 점괘로 점을 쳤다. ‘여우바이사우’라는 14개의 풀줄기로 된 점괘를 가지고 하루 1시간에서 3시간 동안 점을 쳤다. 그는 날아다니는 새들의 움직임을 보고 점을 치기도 했다.

하루는 새벽 4시반경 다들 자고 있을 때 이대용은 참새한마리가 감방에 날아 들어와 이대용의 모기장 위에 앉았다가 방안을 한바퀴 돌고 다시 하이탑 장군의 모기장에 앉았다 날아간 것을 보고 잠에서 깬 하이탑 장군과 대학생에게 이야기해주었다. 하이탑 장군은 참새가 어느쪽에서 날아와

아침 5시 하이탑 장군과 대학생이 일어나자 이대용은 그들에게 참새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이탑 장군은 새가 날아온 방향과 나간 방향 그리고 새주둥아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 등을 자세하게 묻더니 수일안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우바이사우를 하라고 했다,

하이탑 장군은 이대용이 여우바이사이를 하는 것을 보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참 좋다고 이야기 했다. 며칠내로 이대용의 아내가 국제적십자사의 도움으로 먹을 것을 잔뜩 가지고 면회하러 올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곧바로 석방될 것이라고 했다. 이대용은 웃으면서 그럴 일이 없다고 했다.

2월 28일 이순홍 회장으로 부터 세번째 특별차입이 약 10kg정도 들어왔다. 하이탑 장군은 이대용의 부인이 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좋은 특별차입이 들어왔으니 점괘의 50%는 맞은 것이라고 좋아했다. 받은 차입품은 셋이서 나누어 먹었다.

3월 24일 오후 3시경 A동 구대장에게 불려갔다. 그는 A동에서 여러명이 시설이 좋은 다른 감방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자신도 거기에 포함되었다고 했다. 저녁식사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북월 하이풍에서 선장을 하다가 자유를 찾아 남하했다. 카톨릭 신자이며 반공주의 집안이었다. 형은 군에 입대해 육군중위로 최전방에서 싸우다 집으로 돌아왔다가 붙들려 가버렸다. 대학생은 반공게릴라 활동을 하고자 뜻이 맞는 친구들과 사이공을 빠져나가려다가 버스안에서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대학생이 떠났다. 그도안 그가 이대용과 하이탑 장군의 통역관 역할을 했는데 그가 가고나니 하이탑 장군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서로 의사가 소통되었다.

여기서 와하우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치가 않다. 무슨 종교단체 같은데 군대를 보유했던 모양이다.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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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12 치화형무소의 한국인 어린이

10월 18일 수감자들에게 좋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은 후 지문을 채취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10월 20일 안닝노이찡으로 보이는 낮선 사람들이 수시로 감방 쪽문을 열고 이대용을 뚫어지게 드려다보고 돌아가곤했다.

10월 26일 이대용은 긴장을 풀기위해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북한공작원들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 이후 2개월 넘게 아무런 심문도 없었다.

12월 6일 사이공 시내 환뒹풍가 58번지에 있는 이순흥 자치회장으로부터 약 10kg 정도의 차입품이 들어왔다. 작은 치약 칫솔, 과자류, 비타민A, 마른새우, 설탕, 짜봉, 말린바나나, 땅콩, 육포, 담배, 성냥, 과일, 러닝 2, 팬티1, 소화제 등이었다.

특수격리감방에 수용된 정치범에 대한 차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허용된 것은 아마도 국제 적십자사나 프랑스 정부의 도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정부가 베트남에 수감된 외교관들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북한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비원에게 부탁해서 사탕 20개를 4층 제7호 감방에 있는 한국 어린아이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제7호 감방에는 지원이라는 한국인이 네살난 아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지원은 사이공 변두리에서 월남인 부인과 같이 살다가 사이공 함락후 체포되었다. 이대용은 지원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가 형무소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지원은 건축기술자였고 지난 7월에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1975년 11월과 12월은 60년만의 이상저온으로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12월 26일, 이대용의 부인 생일이었다. 이대용의 부인이 4월 6일 사이공을 떠날 때 하던 말을 떠 올렸다.

“당신은 너무 겁이 없어 걱정이예요. 당신 혼자만 남겨놓고 떠나니 불안해요. 모든 것을 조심해서 해야해요. 용감한 것이 전부는 아니예요. 용감한 행동도 좋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세요. 당신은 혼자 몸이 아니에요. 당신 옆에는 아내와 네명이 아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12월 31일, 이순흥 교민자치회장으로부터 다시 약 15kg의 식료품과 일용품이 차입되었다. 이대용은 경비원을 통해 사탕 20개와 땅콩엿 2개를 제7호 감방의 어린이에게 다시 보냈다.

1976년 1월 29일 오전 8시 반경, 아침 허기를 달래면서 식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7호 감방 쪽에서 정적을 깨뜨리며 어린아이의 월남 노래소리가 들렸다. 한국어린아이의 노래소리였다. 간수가 복도에 앉아 있는 시간에 중범자 감방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곧 이어서 다시 한 곡이 더 들려왔다. 지원 부자가 석방되면서 네살난 어린 아들이 남기고간 이별의 노래였다.

이대용은 이들이 떠나가고 나서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한국인은 자신혼자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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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11. 첫번째 심문에서 이기다.

10월 10일 아침 식사를 마치자 마자 간수 2명에게 끌려나갔다. 이대용을 끌고왔던 광대뼈가 앉아 있었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대용에게 왜 끌려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이대용은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광대뼈는 남조선의 박정희 집단이 맹호사단, 백마사단, 청룡여단 등을 월남에 보내 수많은 월남양민을 학살하여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 이대용에게 당신은 총살형에 해당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과거를 청산하여 진보적 민주주의편에 가담해서 인민들을 위해 일하겠다면 과거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인도적인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이대용은 자신은 유엔회원국 뿐만 아니라 비회원국까지 모두 서명해 합의한 외교관치외법권(면책특권)을 규정한 비엔나 협정의 보호를 받는 외교관이라 심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130년의 세계외교사를 통해 외교관이 외국정부관리에게 심문을 받은 일이 없고 더군다나 대사나 공사같은 높은 지위의 외교관이 그렇게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비엔나 협정에 앞서는 불문률이다라고 말했다.

광대뼈는 한국과 월남은 이제 외교관계가 없기 때문에 외교관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외교 관계가 있고없고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전쟁당사국 간에도 외교관은 제3국을 통해 안전하게 본국으로 보내준다고 말하고, 현재 미국과 월남은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으나, 월남혁명임시정부 대사인 딘바치 대사가 뉴욕에 있는데 외교관계가 없다고 해서 미국 수사기관이 딘바치 대사를 구속해서 심문할 수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광대뼈는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대용은 자신이 죽어서 한국에 돌아가지 못할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만일 살아서 귀국하게 되면 유엔에서 월남혁명임시정부가 외교관에 대한 취급을 어떻게 했는지 조사할 것이다. 이때는 자신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텐데 당신들이 유엔이 제정한 국제법을 준수하고 외교관을 정당하게 대우해주어여 할 것 아닌가 ? 당신들의 국가 이익을 위해서도 심문을 하지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최근에도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공산국이 비공산국이 되고, 비공산국이 공산국이 되기도 하는데 외교관들은 항상 안전하게 귀국시켜주는 것이 관례라고 말했다. 캄보디아에서 론놀장군이 우익쿠데타를 성공시켰을 때도 프놈펜에는 북한 대사관원, 중공대사관원들이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잔류되어 있었는데 우익 신정권은 공산외교관을 프놈펜에 있던 북한 대사관원, 중공대사관원들을 모두 본국으로 안전하게 귀국시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 주캄보디아 북한부공관장과 현재 자신이 국제법적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대용을 심문하던 광대뼈는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캄보디아는 캄보디아이고 월남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말버릇 처럼 당신은 총살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은 총살 총살하는데 할테면 해봐라 그런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가 대답하면서 총살하려면 국제규모의 재판소를 설치하여 국제재판을 한후에 총살하라고 주장했다.

광대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더니 오늘의 심문은 이것으로 마치고 다시 2차 심문을 하러 오겠다며 일어섰다.

이대용은 감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앉아서 조용히 생각을 해보았다. 죽어야 할 시기가 오면 깨끗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결의를 굳혔다.

10월 5일 새벽 2시경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럽고 피곤했다. 무릎을 꿇고 정좌를 한 후 두손을 무릎위에 얹고 눈을 감은 뒤 명상을 했다. 생자는 필멸이라, 이대용은 자신이 죽음의 검문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문이 열리면 그 안으로 무아의 경지에서 들어갈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명상을 하는 동안 마음이 깨끗하고 편해졌다. 그때부터 이대용은 마음이 불편하면 정좌를 하고 명상에 잠겨 무아의 경지에 들어갔다.


링크코인(KN) 요즘 잘 나간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링크 코인이 요즘 잘 올라서 링크 코인 소개를 좀 해볼까 키보드를 두드립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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