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31, 감방안의 인간군상, 쑨소령의 경우

1978년 3월 20일 콩나무시루같던 감방에 6명이 더 이감되어 왔다. 수감자 1인당 잠자리 폭은 55cm정도로 줄었다. 이것을 더 쪼개서 새로온 수감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했다. 궁리끝에 감방 출입구에 한사람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그 곳은 수감자들이 계속 들락날락하는 곳이라 그 곳을 사용하는 사람은 제대로 쉬기 어려운 장소였다.

불편한 자리라 이날 이감되어온 절 월남군 육군소령 쑨( Xuan)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나 쑨 소령은 반장과 조장에게 자신의 자리가 불편하다면서 항의를 계속했다. 쑨 소령은 전 문교부장관의 심복이었다. 이대용은 고 깍 띤 장관과 친하게 지냈다.

쑨 소령이 계속 불만을 표하자, 이대용은 이를 딱하게 생각해서 자신이 출입구에 가기로 했다. 약 2시간 정도가 지나자 쑨 소령은 이대용이 차지한 자리라 1미터 이상이라고 하면서 이대용의 자리를 줄이자고 떠들었다. 이대용의 자리가 줄어들면 제1조 수감자 한사람이 차지하는 자리가 약 3cm 정도 넓어질 수 있었다. 이대용과 친하게 지냈던 고 깍 띤 장관 형제가 쑨 소령을 뒤에서 조정한 것이었다.

이대용은 이자리가 그렇게 좋으면 쑨 소령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이야기했다. 쑨 소령은 30정도 조용하게 있더니 다시 예의 자신의 주장을 떠들어 댔다. 이때 캄보디아 전 공군대령 쏘판이 쑨 소령을 나무랐다. 쏘판 대령은 키도 크고 힘도 세며, 월남어도 유창했다. 그는 캄보디아 수상을 두번이나 지낸 손녹탄의 사위였다. 쏘판 대령은 화를 내면 눈에 살기가 돌았다. 조그마한 쑨 소령은 쏘판 대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꼬 깍 띤 장관 형제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이대용은 고 깍 띤 장관형제를 보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과거 10년 넘게 서로 교유하면서 선물도 주고 받고 했는데 감방에서 3cm 더 넓게 쓰자고 은혜를 원수로 값는 것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AH 감방의 간수로 웬 반 짝(Nguyen Van Trac) 중위가 왔다. 그는 월남노동당 고참당원으로 계급은 중위지만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성질이 잔인하여 모두들 싫어했다. 짝 중위는 이대용이 있던 감방을 둘러보고 차입품 보따리가 많고 무질서하다며 이를 정리하라고 했다. 이틈을 타서 쑨 소령은 짝 소령에게 차입품은 한국사람들 것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한국사람들은 4월 한달동안 차입품을 받지 못했다.

짝 중위는 이대용이 있던 감방의 반장도 교체했다. 전 난월군 공수사단장 운전병으로 있던 휭(Phong)이라는 자가 새로 반장이 되었다. 그는 간수들의 충견노릇을 했다. 그가 오고나서 감방안에서의 비밀취사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라면도 끓여먹지 못했다. 미지근한 물에 불려먹어야 했다.

이와함께 이대용이 유지하고 있던 비밀연락망도 기능이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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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횡설수설)한일 무역전쟁,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무역전쟁도 전쟁이라면, 이기고 싸워야지 싸워서 이기려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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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30, 광대뼈와의 재회

1977년 12월 23일 이순흥 회장으로 부터 50kg 정도 차입을 받았다. 그것으로 감방의 모든 사람들과 연말파티를 했다. 라면을 끓이고 삶은 계란도 한개씩 똘리고 사탕도 몇알씩 나누었다. 조그만 소리로 노래도 불렀다.

여건에 허락하면 외무부장관앞으로 그동안의 경과보고를 했고 아니에게 안부편지를 보냈다. 격리감방에서 풀려난지 벌써 2개월이 지났다. 충분하게 일광욕과 운동도 했다. 수감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곧 석방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여건이 좋아지니 하루만 자고 나도 몸무게가 늘었다. 불과 2개월만에 약 10kg 정도 체중이 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대용은 자신의 석방이 쉽지 않을 것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1978년 1월 하순, 모든 수감자들에게 구정을 전후해 가족 및 친지면회를 허가하면서, 이대용만 제외시킨 것이다. 이대용은 이순흥 회장을 면회하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서 영사와 안 영사에게 외무부장관에게 자신은 끝까지 모든 고충을 극복할 것이라는 의지를 전달하도록 이르고 자리에 드러 누웠다.

이대용은 모든 사람들에게 면회를 허용하면서 왜 유독 자신에게만 허용하지 않은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직위가 높은 사람들도 모두 면회를 했다. 외국인들도 모두 면회를 했다. 이대용이 생각했던 것은 월남공산측이 자신의 의지를 꺽으려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8년 1월 26일 한국인 4명 중국인 2명은 2층 2호감방에서 3호감방으로 이감되었다. 3호감방은 텅비어 있었다. 20평이 넘는 방에 외국인 6명만 수용되어 있으니 편했다. 이대용은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다. 공간이 넓어서 태권도 도장으로 좋았다. 그 중에서 중국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성공일보 주필이던 유일승은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권도를 아주 열심히 배웠다. 모두들 형무소의 두터운 콘크리트벽을 정권과 수도로 치면서 주먹단련을 했다. 그러나 그런 호사도 잠깐, 2월 24일 월남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태권도 연습도 할 수 없었다.

1978년 3월 6일 한국인과 중국인들은 AH동 제2호 감방으로 이감되어 환 휘 꽡 전수상 등 옛 룸메이트와 다시 합류했다.

3월 15일 간수들이 이대용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광대뼈가 부하 2명과 같이 있었다. 광대뼈는 제2차 심문을 하겠다며 공갈과 협박을 하고 사라진 후, 2년 5개월 만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대용은 얼른 그의 왼쪽 팔목을 바라보았다. 처음볼때에는 로렉스 금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싸구려 시계로 바꿔차고 있었다.

광대뼈는 이대용에게 건강을 확인하러 왔다고 이야기 했다. 이대용의 나이를 잘 알고 있으면서 나이가 60이냐고 묻기도 했다. 광대뼈는 이대용 이외에도 다른 3명의 한국인들을 만나보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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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일본의 태도변화 이유, 그리고 우리의 대응방향

일본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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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29, 감방에서 들은 월남 패방의 원인


이대용이 수감되어 있던 감방의 반장 ‘완’은 이대용이 지니고 있던 물품을 뺏기 위해 이런 저런 수작을 부렸다. 그러나 이대용은 절대로 물건을 주지 않았다.

12월 15일 이감이 있었다. 한국인 4명 모두 AH동 2층 2호 감방으로 이감되었으며, 반장 ‘완’은 옆방인 제3호 감방 반장으로 임명되어 그와 떨어졌다. 12월 18일 ‘완’은 갑자기 AH동 2층 제3호 감방 수감자 전원과 함께 E동으로 이감되었다. AH동 디엔 준위의 영향력 밖으로 나간 것이다. ‘완’은 얼마있지 않아 반장 감투도 박탈당했다. 그러자 수감자들을 등칠 힘을 상실했고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얻어 먹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대용이 수감된 3호 감방의 반장은 전 월남 경찰 소위 융(Duong) 이라는 사람이었다. 착한 사람이라 새벽과 밤에 변소옆에서 음식물을 끓여 먹었다. 최기선은 매일 한국인 4명이 먹을 라면을 끓였다. 한국인 4명 매끼 같이 식사를 했다. 이순흥 회장의 차입덕분이었다.

물론 간수들이 감방에 첩자를 심어 놓았지만 3호 감방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과거 베트콩 활동을 하다가 자유월남으로 전향했던 메콩 델타 우 민 산림지역 출신으로 67세의 고령 수감자였다. 원래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 밀고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특히 한국인들과는 차입된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는 사이였다.

이대용은 수감되어 있으면서 월남 정부의 고위층에 있었던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모든 면에서 국력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월남이 패망한 이유를 알아보고자 했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첫째, 티우 대통령이 좋지 못한 사람을 측근으로 등용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티우 대통령의 6촌 형으로 소년시절부터 티우와 한집에서 같이 살았던 고 깍 띤(Ngo Khac Tinh)이 그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그는 티우정권하에서 문교부장관, 공보부장관을 역임했던 사람이었다. 티우 대통령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 호앙 득 냐(Hoang Duc Nha)와 당 반 꽝(Dang Van Quang) 중장 두사람을 가장 신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특히 호앙 득 냐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 주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듣지 않았다고 한다. 호앙 득 냐는 대통령을 배경으로 부정부패를 자행했으며 결국은 티우 대통령의 지지를 상실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티우 대통령과 호앙 득 냐는 6촌간이었고, 호앙 득 냐와 고 깍 띤은 4촌 간이었다.

이대용은 고 깍 띤에게 왜 4촌 동생인 호앙 득 냐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방대한 권력을 쥔 호앙 득 냐가 자신의 말을 무시했다고 했다

고 깍 띤은 대통령 안보국방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당 빈 광 중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고 깍 띤은 티우 대통령에게 당 반 꽝의 부정부패는 천하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를 해임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티우는 다음의 두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첫번째, 북월에서 활동하고 있는 월남 게릴라 부대를 철수시켜야 하는데 그 작전을 끝낼 때까지 그가 필요하고, 두번째는, 당 반 꽝은 티우와 사관학교 동기생인데 그를 몰아내면 너무 외롭다는 것이었다. 티우는 대통령이 된다음에 점점 더 변해갔고, 결국은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반대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수상을 지냈던 환 휘 꽐(Phan Huy Qual)은 티우 대통령 잘못도 크지만, 재야 정치인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이야기 했다. 월남 패망 1개월전에 티우가 모든 반공세력을 규합하여 거국 내각을 구성하려 했으나, 재야 인사들이 거부하여 거국내각 구성이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타우의 리더십 부족이 월남 패망을 초래한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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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ko] 비 오는 날 뜻밖의 우산

오늘도 야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합니다~ 회사에서 버스 탈 때까지 괜찮더니 버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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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전쟁사 포럼, 제2차 국공내전기 미 해병대 중국 파병과 북-중 군사 동맹의 형성, 진영기(고려대)

제2차 국공내전기 미 해병대 중국 파병과 북-중 군사 동맹의 형성, 진영기(고려대)
5월 25일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개최된 전쟁사 포럼은 우리 사회전반의 전쟁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추진되었다. 전쟁이란 현상을 군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문제인식에서 출발한 전쟁사 포럼에는 전쟁 학계, 법조계, 언론계, 영화 및 출판계 및 군출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가했다.

전쟁사 포럼은 내년이 6.25 전쟁 70주년이라는 점에서 우선 6.25 전쟁과 관련한 내용을 주로 다루기로 했다. 이번에는 두사람의 발표가 있었다. 먼저 고려대 역사연구소 진영기 연구원이 ‘제2차 국공내전기 미해병대 중국파병과 북-중 군사동맹의 형성’을 주제로, 그리고 서울경제신문의 권홍우 기자의 ‘시민과 군인, 그 승리의 역사’를 주제로 각각 발표를 했다. 아래 내용은 진영기 연구원의 발표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진영기 연구원은 중국 북부 파병에 관련된 미 해병대의 작전 사료와 미 합참의 군사 정책 관련 자료들을 중심으로, 제2차 국공내전 시기의 미 해병대의 중국 북부 파병이 중공군에게 미친 영향과 동시기에 이뤄진 중공에 대한 북한의 군사원조와의 연계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발표내용
미 해병대의 중국 북부 파병은 ‘포위작전’(Operation Beleaguer)이라는 명칭으로 1945년 10월 1일부터 국공내전 끝나는 949년 5월 16일까지 이루어졌다. 본 발표에서는 미 제3상륙군단이 중국 북부에 상륙한 1945년부터 제3상륙군단의 주력인 제1해병사단과 제6해병사단이 미국 본토로 송환되는 1947년까지의 작전 내역을 다루었다.

1945년에서 1947년까지 중국 북부 지역에서 주둔하는 동안 제3상륙군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접수했다. 동시기에 제3상륙군단은 중국 북부에서 중공군과 충돌하였다 . 중공군은 미국의 전후 안정화 활동에 반대하고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과 충돌을 불사했다. 해당 시기에 북한은 중국에 본격적인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결국 미 해병대의 개입으로 입지가 어려워진 중공군을 북한이 지원하면서 북중 동맹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해병대의 중국개입과 긴밀한 북중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종식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자, 마오쩌둥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 해제를 서두를 것을 명했다. 소련군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중국 공산당은 만주와 중국 북부에서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고 전후 중국의 주도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한편, 장제스는 일반명령 제1호에 근거하여 중공군에게 현 위치를 벗어나지 마라고 요구했으나, 중공군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 와 만주 지역의 확보를 위한 군사 활동을 지속했다. 국공합작 기간 동안 잠재해 있던 국공간의 균열은 일본군 무장해제 및 항복 접수 문제로 인해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국공 내전이 재발할 경우, 소련의 개입과 영향력이 확장될 것을 우려하여 국민당과 중공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하고, 연합 정부를 구성하여 중국대륙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미 해병대 제3상륙군단의 파병은 전후 중국 내 국공 분열 양상과 소련의 확장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군사적 대응전략이었으며 전후 안정화를 고려한 강온 양면 성향의 대외 전략이었다.

미 해병대의 중국 파병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본국 송환, 그리고 중국 내 연합국 거류민 및 자산 보호 등 전후 안정을 주목적으로 했다. 중국 북부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본국 송환을 개시하는데 있어 충칭 정부를 지원하는 임무가 있었으나, 중공군을 자극하지 말라는 중립적인 군사 작전 수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만주와 화북에서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제3상륙군단의 관할지역인 베이핑, 친황다오, 톈진 등 주요 도시와 주요 교통로 및 통신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다. 미 제3상륙군단은 중공의 전략에 차질을 초래했다. 결국 중공군은 1945년 말부터 1947년 초까지 특히 허베이 지역 내 미 제1해병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대 중국 정책방향으로 인해 제3상륙군단은 중공군의 적대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대응조치는 취하지 못했다. 미 해병대는 화북의 중요 거점들을 지키면서 전후 안정 지원 활동을 수행했다. 이는 미 해병대의 중국 파병이 국공 합작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대 중국 정책에 따라 중립적이고 평화 유지 작전 차원에서 시행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 해병대의 전후 안정화 작전은 만주 및 화북 지역에서 전략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중공군에게 위협이었다. 미 해병대에 대한 중공군의 압박 실패는 전략적 기반의 약화로 이어져 중공군이 남만주에 고립되는 위기를 초래함과 동시에 북한과의 군사적 동맹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공군의 위기 상황에 대해 북한은 1946-47년에 걸쳐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중공군에게 전력 회복의 기회였으며 국민당에 대한 공세의 전환점이 되었다. 중공군은 북한을 회랑으로 삼아 전략적 철수를 완수할 수 있었으며, 병참기지로서의 지원을 받아 재정비의 시기를 거칠 수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항구 및 교통로를 통해 북만주 근거지와 전략적 연결을 되살리면서 총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 중공에 북한군의 증강을 목적으로 한 조선족 부대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미군정과 적대적인 남한 정부로부터 동맹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중공은 2개 사단급의 조선족 부대와 14,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켜 북한의 군대 창설에 기여했다.

국공내전을 통해 미국은 중공의 중국 본토 장악과 북한-중공 관계를 고려하여, 전후 극동 안보 전략과 대외 군사원조를 통해 공산 세력의 확장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과 필리핀을 주요 전략 거점으로 삼고, 군사 원조를 통해 남한이 북한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중공 및 북한 정권을 봉쇄하고 있던 미국은 북한이 남침을 개시하자 신속하게 참전했다. 이렇게 볼 때,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의 미 해병대와 중공군의 충돌, 그리고 북한의 군사원조는 전후 동북아 지역에서의 냉전 형성에 있어 군사적 대립 구도 및 동맹 관계의 초기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었으며, 국공 내전과 6.25 전쟁의 연계성 연구에 중요한 군사(軍史)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토의내용 요약
상기 내용 발표후 진행된 토론에서 미국의 제3해병군단의 파견이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미국이 국부군과 중국 공산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국 국부군에 대한 지원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미해병대가 상륙한 지역이 1920년대 중국의 군벌이 활동하던 지역으로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미해병대의 작전지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의 진로와 유사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군대는 미해병대를 침략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이렇게 중국의 핵심이익 지역에 미 해병대가 참가한 것만으로도 미국이 중국에 대한 안정화작전은 부차적인 목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중국에서 미해병대가 수행한 작전과정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갑자기 세계질서를 책임지는 상황에 봉착하면서 보여준 미숙한 점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중국공산당 군대가 북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대한 추가설명도 있었다. 북한에는 일본군이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무기가 있었는데 김일성은 거의 7-80%정도를 마오쩌뚱에게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도 군수품과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김일정은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했다고 한다. 북한은 무기부족으로 군대를 창설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군대를 우선적으로 지원했다. 결국 중국은 국공내전의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의 지원을 받아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군의 군수관련한 기록중에서 일본무기와 장비가 많이 있었다는 추가설명도 있었다. 따라서 중국이 6.25 전쟁이 벌어지고 인천상륙작전이후 참전하게 된 이유도 국공내전시 북한의 지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린바오가 세력투쟁에서 패배하자 만주지역에서의 공산군대 활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과 함께,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만주에서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인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연변대학교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도 있었다.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었으나 국공내전 당시 북한의 역할을 고려해 보면, 북한이 중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지원을 받았다는 관점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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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28, 감방의 밀고자 '완'

이대용이 수감되어 있던 감방의 반장은 완이라는 자였다. 통상 간수들은 수감자들 중에 비밀첩자들을 두고 있었는데 수감자들은 이들을 ‘안테나’라고 불렀다. 이대용이 수감되어 있던 AH동 2층 제1호 감방의 메인 안테나는 반장인 ‘완’이었다. 완 밑에는 몇명의 보조 안테나가 있었다. 완은 2층의 다른 감방에도 여러 보조 안테나를 두고 있었다.

수감자들은 완을 여우 또는 멍키 데블(악마 원숭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련 시절 호지명 군대의 꼬마 첩자로 불란서 군의 동태를 군대에 보고하는 활동을 했다. 1954년 불란서가 철수하고 17도선으로 남북이 갈라지자, 이번에는 호지명 군을 버리고 남월정부군의 첩자로 활동했다.

1975년 4월 30일 남월이 패망하자 후에(Hue)시를 탈출하여 사이공에 와서 눈치를 보다가 후에시의 반동인사들을 공산당에게 밀고해서 이들을 모두 투옥시켰다. 그는 공산열성분자 행세를 하면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장인까지 밀고해서 투옥시켰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가 탄로나면서 치화형무소에 갇히게 된 것이었다.

완은 치화형무소에서도 재주를 부려 경찰 준위인 디엔(Dien)이라는 간수에게 접근하여 그의 신임을 차지했다. 그는 1년 12달이 가도 차입한 번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가족들도 그를 버렸을 것이라고 수감자들은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는 반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수감자들의 차입품을 등쳐 먹고 살았다. 옷도 잘입고 다녔고, 입에는 귀한 시거를 물고, 매일 고기와 야채 그리고 과일을 먹었다.

완은 차입을 많이 받는 중국계 월남인 한의사 장을 자기 옆자리에 두고 보급관 겸 당번으로 쓰고 있었다. 둘을 항상 같이 밥을 먹었고 설겆이는 한의사 장이 했다. 완을 수하에 두고 있었던 간수 디엔은 고 딘 디엠 정권 당시 공산당 지하조직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콘손 형무소에서 10년 가까이 복역하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정글로 들어가 베트콩 경찰이 되어 월남군 포로 감시 임무를 수행했다.

사이공이 함락되자 디엔은 정글에서 사이공 치화형무소로 전근하여 정치범들에게 과거 자신이 겪었던 것을 보복했다. 그리하여 디엔은 치화형무소에서 가장 악명높은 간수가 된 것이었다. 완은 디엔으로 부터 AH동 2층 4개 감방 전원에 대한 밀고권한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완은 영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대용은 레만홍이나 여타 월남자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대용은 감방안에서 여러사람들과 많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법관, 국회의원, 대통령 경호원, 정부관리, 신문기자, 의사, 건축가, 텔레비젼 방송과장, 은행간부, 비누회사 사장, 군인, 종교인등으로 부터 월남 패망의 원인 그리고 자신들의 현재 심정, 장차 해외로의 탈출계획 같은 것을 들었다.

이대용의 왼쪽에서 잠을 자던 농촌 민방위 책임자 출신으로 57세의 꼬이(Coi)라는 사람이, 오른쪽에는 52세의 정(Duoung)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대용은 식사때마다 차입받은 반찬이나 고기 통조림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과자와 간식도 같이 먹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끔씩 차입 식품을 나누어 주었다.

감방에 감기가 유행할 때나 치통으로 고생하는 환자가 있으면 차입받은 아스피린도 같이 나누어 주었다. 하루는 레만홍을 통해 완이 세수비누 하나를 달라고 했다. 레만홍의 권유도 있고, 이순흥 회장과의 비밀연락망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미제 세수비누를 하나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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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해야 한다

등뒤에서 두번이나 칼을 맞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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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장군의 사이공 억류기)27, AH 동에서의 생활, 한국말이 어눌해지다

AH동으로 이감된지 얼마되지 않아, 어느날 아침 물을 길은 후 목욕을 재빨리 하고 바케츠를 들고 제1층 계단 밑에 까지 갔을 때, 거기에 서 있던 자그마한 경비원 한명이 이대용을 붙잡고 뭐라고 했다. 이대용이 월남어를 못알아 듣자, 이대용의 물통을 빼앗아 바닥에 내려 놓았다. 이대용이 영어로 ‘왜 이러느냐?’고 하자, 그는 이대용을 계단 밑 창고 속으로 떠밀어 넣고 밖에서 문을 잠궈 버렸다. 창고속은 캄캄했다. 조금 있다가 또 한명의 월남인이 들어왔다. 그는 구정부군 대위였으며, 영어를 잘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창고에 갇힌 이유를 알았다. 목욕하는 시간이 아닌데 목욕을 했다는 것이다.


구정부군 대위는 지금 이대용을 창고속으로 밀어 넣은 경비원은 매우 악질적인 사람으로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라는 의미라고 설명해주었다. 수감자들 중에서 돈이 많은 사람들은 경비원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질러주어서 편하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부화가 칠밀어 올랐다. 외교관 신분으로 형무소에 불법 투옥된 것만해도 억울한데, 물통으로 물 몇번 끼얹었다고 이렇게 하다니 참기가 어려웠다. 약 20분 후에 문이 열리더니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용은 나가지 마자 경비원에게 큰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서 수도로 내쳐치려고 했다. 그러자 그 경비원은 물러 나면서 ‘저기 간수가 있다’고 했다.


간수는 다가와서 자초지종을 듣더니 알았다고 했다. 며칠후인 11월 14일부터 이대용에게 매일 아침 목욕을 할 수 있는 특혜를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받은 차입품을 취사장에 보내 끓여 먹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그러나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한번도 취사장을 이용하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 안 영사가 잘아는 간수가 일직을 했다. 일직 간수는 수감자 20여명을 불러내 마당의 배구장에서 배구시합을 시키고 있었다. 이때, 안영사도 배구시합 후보선수가 되어 배구장에 나가 있었다. 일직간수는 이대용을 불러냈다. 그리고 안 영사와 자연스럽게 배구구경을 하는 척하면서 만나게 해주었다. 둘이서 마음놓고 대화한 것은 실로 2년 5개월 만이었다. 한국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안영사는 그동안 서 영사, 최기선, 이상환, 김종옥 등과 한국말을 많이 했고, 면회 온 이순흥 회장, 이중언과도 한국말을 사용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대용은 그러지 못했다. 안 영사와 이야기를 한지 15분정도가 지나니 불편하지가 않았다.


11월 15일 이회장으로 부터 약 50kg의 차입을 받았다. 지난 11월 10일 레 만흥이 써준 편지 초안을 사본으로 간수에게 준 것이 제대로 발송되어 차입을 받게 된 것이다. 격리감방이 아닌 일반감방에 수감되어 있는 정치범들은 매월 1회씩 차입을 받을 수 있었다.


AH동으로 이감된 이후부터는 매일 오후 30분씩 일광욕도 할 수 있어서 피부색도 점점 건강한 색으로 바뀌어갔다.



응원에 힘입어 영업하고 있는 어느 분식집 이야기

단골들에게 응원받아 후일 미담이 된 티라노 떡볶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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