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1960년 즈음한 시기 션즈화의 중국과 북한의 우호 관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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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북한은 중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션즈화는 그것을 북한이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에서

중국편을 거들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그 우호적 태도의 연장을 1950년대 중반까지로 늘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션즈화가 북중관계가 우호적이라고 제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과 인도가 문제로 대립할때 소련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과 달리 북한은 공개적으로 중국에 대한 지지를 밝히면서 양국 충돌의 책임이 전적으로 인도에 있다고 지적하고 중국의 방안대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7, 주 237, 인민일보, 1959년 9월 14일)(당시 노동신문의 내용을 확인할 필요가 있음)

중국이 진행한 대약진 운동과 경제건설 총노선에 대해 북한은 중국의 입장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1961년 중국경제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도 북한의 김정일은 여전히 중국의 노선과 정책이 정확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중국의 대내외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447, 주 240, 인민일보, 1960년 1월 25일, )

1960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중국과 소련이 서로 갈등을 할때도 북한은 알바니아, 베트남, 일본 등 대표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중공의 견해를 지지했으며 소련을 비판했다.

모스크바 회의 이후 북한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 및 주체사상을 확립하기 위한 운동에서 맹목적으로 소련을 따라하거나 소련의 경험을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중국을 따라 배워 자신의 특성을 살리자고 주장했다.

즉 소련의 수정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녔다는 것이다.

1961년 4월 유엔총회에서 남북한대표가 참가해서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자는 의안을 통과시켰을 때, 1956년 중국과 소련이 이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것을 고려해 북한은 대표를 출석시키면서 사전에 중국의 의견을 구했다. 션즈화는 이런 과정을 북한과 중국의 우호적인 협력의 예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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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3-2, 1960년대 즈음한 북중 관계

김일성 모택동.jpg

북한은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절묘하게 이용해서 등거리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중국이 아니라 북한이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션즈화는 북한이 중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중국이 북한을 잘 관리했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그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중국은 북한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1959년 2월 13일 마오쩌뚱은 국무원외사판공실에서 정리한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일부 동지들이 조선 동지들의 결점을 많이 언급하면서, 성과는 비교적 적게 언급하여 문제를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다.(446, 주 235, 건국이래모택동문고, 제8책, pp.41-43)

1960년 10월 진행된 중국과 조선의 추구시합 중 발생한 조선심판에 대한 비난에 대해, 조우언라이는 직접 국가체육위원회의 관련부서를 비판하면서, 군중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446, 주237, 중국외교부당안관 116-00498-07, p.51)

상기한 내용은 중국이 북한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중국의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그기간에도 북한이 공개적으로 중국에 반발하는 것을 무마하는 정도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북한이 중국의 편을 드는 것은 후르시쵸프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북한이 후르시쵸프를 비판한다고해서 소련과 관계를 악화시켰다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북한은 중국세력을 제거했던 결정적인 시기인 56년 반당종파사건때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60년 김일성이 항조우로 마오쩌뚱을 방문했다. 이때 마오쩌뚱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후르시쵸프의 유화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뚱의 발언에 맞추어 1955년 후르시쵸프가 자신을 불러 미제국주의에 대해 반대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을 말했다.(447, 주 238, 모택통전(1949-1976), pp. 1075 -1076)

션즈화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중국의 강경한 태도를 북한이 중소분열시기에 중국에 보다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다(447) 그러나 당시 북한이 중국이 미제국주의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소련보다 중국을 더 지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 처럼 북한은 소련의 후르시쵸프가 평화공존을 한참 주장하던 당시에 소련과 손잡고 북한에서 중국세력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시기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은 이미 북한내에서 연안파를 완전하게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소련보다는 자신과 유사한 입장의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권력장악과 유지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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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3-1, 한국전쟁 이후 중소관계의 악화와 중국과 북한의 관계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pg

1958년 중국과 소련간에는 대내외정책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다. 중국이 북한의 8월 반당종파사건을 무마시키고 지원군을 철수시킨 것도 북한의 지지가 필요해서였다.

1959-1960년 사이 후르시쵸프는 핵무기지원협정을 폐기했고, 이후 중국과 소련 지도자들은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중공은 1960년 6월 5-9일간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노동자 연맹회의에서 소공의 이론과 지도방침에 공개적으로 도전했다.

소련은 루마니아 수도 부크레슈티에서 중국을 공격했다.

소련정부는 갑자기 중국에 있던 소련전문가들을 철수시켰는데 이런 사건들은 중소관계가 이미 악화되고 있으며 중소동맹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과 소련 모두 사회주의 진영내부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중국은 이미 소련과 갈등이 필요하다고 보고 북한을 중국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중국은 소련과 관계 단절로 인해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중국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1960년 10월 중국과 북한은 차관협정에 서명했고, 차관상환을 연기하는 문서의 교환과 기타 설비 제공 및 기술원조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북한 부수상 이주연은 중국의 지원에 대해 “중국 인민의 조선인민에 대한 형제같은 깊은 우애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원조에 대해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446, 주 233, 주은래연보 중권, pp.355-356)

김일성은 북한의 7개년 경제개발계획중 전반기에 수공업과 경공업을 중점 발전시킨다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중국이 지원한 18개의 공장이 모두 경공업이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중국의 지원을 평가했다.

중국은 이후 북한과 접촉할때 북한의 민족감정을 건드지 않도록 특히 조심했다.

8월 반당종파사건과 그 이후 중소관계의 악화로 인해 북한은 중국군의 철수로 김일성의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중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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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중국군의 북한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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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커뮤니티에 올라갔던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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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중국군의 북한 철수

중공군의 참전.jpeg

중국군의 북한 철수 내력은 다음과 같다.

1954년 9월 7개사단이 철수
1955년 3월 6개사단이 철수

1956년 4월까 북한에 44만명의 지원군이 주둔하고 있었다(443)

1956년 4월 중국정부는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자고 요청했다.
북한의 강력한 철수요구에 직면한 중국이 미국과 동시철수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한의 중국군 철수요구에 대해 소련은 중국편을 들었다.
1957년 1월 조우언라이가 소련을 방문하기전에 소련은 중국의 입장을 고려해 ‘조선에서 지원군의 지속적인 주둔이 조선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을 위한 관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443, 주226, 중국주재 소련대사관의 1956년도 보고, 1957년 4월 18일, АВПРФ, ф. 5, оп. 28, п. 103, д. 409, лл. 139-143.)

1957년 11월 마오쩌뚱은 그간의 입장을 바꾼다. 그 계기는 모스크바 회의로 보인다.
마오쩌뚱은 모스크바 회의기간 중 두번에 걸친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중국군의 철수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인다. ‘상황이 좋고 사회주의 진영이 서구 자본주의 진영을 압도하고 있어서 미국이 경거망동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션즈화는 마오쩌뚱이 먼저 철수를 제안했다고 하지만 그 내막은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션즈화에 따르면 “이 제안은 김일성을 경악시켰고, 잠시 동안 멈칫했던 그는 재빠르게 동의와 감사를 표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마오쩌뚱이 말한 것 처럼 미국을 압박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귀국후 회의를 소집해 이문제를 논의했고 ‘두 차례 계속해서 전보를 보내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지원군의 귀국에 찬성한다는 뜻을 표명하면서 구체적인 실시방안을 제안했다.

‘조선정부가 먼저 성명을 발표해 미국과 중국 쌍방의 철수를 요구하면, 중국정부가 다시 지지를 표명하면서 단독으로 철수를 시작해서 1958년말까지 조선에서 지원군을 전부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1958년 1월 8일 조우언라이는 이 사실은 소련군에게 통보했다(444, 주227)

1월 16일 소련 외교부는 매우 뛰어난 결정이란 회신을 보냈다.(444, 주228, 소련주재중국대사관이 외교부에 보낸 전보, 1958년 1월 16일, 중국외교부 당안관 109-01813-01, pp. 1-2)

2월 5일 북한정부는 성명을 발표해 모든 외국군이 동시에 남북한에서 철수하고, 전 조선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해 남과 북이 평화통일을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2월 7일 중국정부는 북한의 평화적 제안에 호응하면서 북한과 지원군 철수 협상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기타 관련국들도 남한에서의 철수를 요구했다

얼마후 소련정부도 이 제안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444. 주229, 인민일보, 1958년 2월 6일, 2월 7일, 2월 22일)

2월 14일 조우언라이가 방북해 지원군 철수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를 협의했다. 쌍방은 3월부터 연말까지 3단계로 나누어 철수를 완료하기로 결정하고, 연합성명을 발표하여 한국문제는 한국내부에서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며 외국의 간섭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1단계로 6개 사단, 8만여명의 병력이 3월 15일부터 4월 25일까지 철수
2단계로 6개 사단과 기타 특수병과를 포함한 10만여명이 7월 11일부터 8월 14일까지 철수
3단계 마지막으로 지원군 총사령부와 3개사단 및 보급부대를 포함한 7만여명이 9월 25일부터 10월 26일까지 철수하기로 확정

중국군의 철수로 1958년 말에 이르러 김일성은 권력을 안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즉 이렇게 보면 8월반당종파사건은 중국이 연안파를 동원해 김일성을 몰아내려는 일종의 쿠데타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중국군 철수동기에 대한 분석은 다음 내용을 참조

Division of Research and Analysis for the Far East, Intelligence Report: Implications of Communist Chinese Withdrawal from North Korea, March 17, 1958, MF2510409-0073, The University of Hong Kong Main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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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배경(션즈화 주장에 대한 반론차원)

중공군의 참전.jpeg

션즈화는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달래어 중조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지원군의 전면철수라는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션즈화는 중조관계에서 긴장이 형성된후 북한과 중국은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과정에서 의견차가 발생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조관계의 긴장이 발생한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56년 8월 반당종파사건이나, 1952년 한국전쟁 당시부터 중국과 북한간에 긴장관계는 있었다. 션즈화는 ‘평양은 의도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베이징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442,)

중국과 북한간에 이격이 발생한 것 중의 하나로 1956년 11월 북한이 중국에 유엔에 나서서 조선문제의 해결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1954년 제네바회의기간 소련, 중국, 북한이 공동으로 제정한 원칙에 위반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1956년 11월 북한이 요구했다는 그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추가로 확인이 필요함)

중국은 모스크바의 의견을 구한 다음 12월 회신에서 “유엔은 사실 법률적으로 모두 참전당사국이며, 유엔은 남한만을 승인했기 때문에 유엔이 나서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조정할 자격이 없으며, 현재 조선의 통일문제를 전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이를 위해서는 장기간의 투쟁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442)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지원군이 북한주민에 대한 행패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지원군 간부들이 조선의 법률과 풍습을 위반하고, 조선의 시민에 대해 거만하게 대하면서, 조선의 개별적인 사건들에 내정간섭을 한 것에 대해, 조선의 공민들과 심지어 지도자들도 지원군을 점령군으로 인식하면서,그들이 북한의 주권을 침략한다면 북한에서의 지곳적인 주둔이 환영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442, ,주223, 중국주재소련대사관의 1956년보고, 1957년 4월 18일 АВПРФ, ф. 5, оп. 28, п. 103, д. 409, лл. 139-143, 정전이후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의 당-정-군-민의 관계중 발생한 문제는 신화사편, 내부참고, 제2073호, 1956년 12월 8일, pp. 158-163, 중화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사이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내부참고, ‘제2111호, 1957년 1월 22일, pp. 427-429) 참조)

마오쩌뚱은 북한이 중국군의 전면철수를 요구할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1956년 9월 미코얀과 회담에서 이문제를 미리 언급하기도 했다.

션즈화는 김일성이 북한이 중국인민지원군의 전면철수를 요구한 배경으로 중국군의 대북한주민관계와 같은 것을 들었으나 실제로는 북한의 정치적 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북한과 중국의 긴장은 이미 1952년 한창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56년 8월 반당종파사건의 연속선 상에서 중국군의 철수가 논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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