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시어스도 무너지다”에서 “유통 공룡” 시어스가 매출 감소와 자금난 끝에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시어스의 화려한 비상과 이어진 추락에 대한 글을 2부에 걸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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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5일 시어스 홀딩스(Sears Holding Co.)는 113.4억 달러의 부채 상환을 피하기 위해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이렇게 1887년 처음 카탈로그를 발행하고, 1925년 첫 번째 매장 문을 열었던 미국의 아이콘이 끝이 났다.
당시까지 미국 증시 역사상 최대 소매업체 IPO를 진행했던 1906년부터 주가가 최고점에 도달했던 1972년까지, 시어스의 시가총액은 1,500만 달러에서 180억 달러로 1,200배 넘게 증가했다. 주가 역시 1908년부터 1972년까지 연평균 12%씩 2,000배 상승했다.
배당금을 재투자했다고 가정했을 때, 1908년 시어스에 1달러를 투자했다면, 1972년까지 연평균 16%의 수익률로 2만 달러가 넘었을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투자처 중 하나였다는 말이다. 그런 시어스는 2005년 K-마트에 매각되었고, 주가는 2007년 195달러에서 현재 30센트까지 꾸준히 하락해 왔다.
189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매 시장을 주도했던 시어스는 더 이상 소매 시장에서 활력을 찾을 수 없었고,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혁신도 시도했고, 새로운 제품 라인도 선보였지만, 회사의 몰락을 조금 더 미루는 정도에 불과했다.
지난 50년 동안 자기 혁신에 게을렀고, 다른 경쟁자의 추격을 허용했던 시어스는 뒤늦게 경쟁자들의 혁신을 따라 하려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아마존이 21세기의 시어스가 되었고, 아마존 또한 앞으로 100여 년 후 시어스의 실수를 되풀이할지 궁금한 시점이다.
시어스, 첫 번째 카탈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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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스의 원래 사업은 시계 판매였다. 아마존이 처음 책을 팔았던 것처럼 말이다. 1886년 창업자 리처드 W. 시어스(Richard W. Sears)가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루이스에서 화물 운송업을 하고 있던 당시, 한 지역 보석상에게서 우연치 않게 잘 못 배송된 것이며 회중시계 하나를 사게 된다. 시어스는 이 시계를 되팔았다.
이문이 짭짤했던 시어스는 이후 더 많은 시계를 사서 되팔기 시작했고, 이윽고 운송업을 중단한 다음 미니애폴리스에 R.W. 시어스 와치(R.W. Sears Watch Co.)를 세웠다. 1887년 시계 수리 기사 알바 로벅(Alvah Roebuck)이 합류했고, 시카고로 업장을 이전해, 1888년 처음으로 우편 주문 카탈로그를 발행했다.
처음 80쪽으로 시작한 카탈로그는 1890년 322쪽으로 늘어났고, 1895년 532쪽으로 두꺼워졌다. 100년 전 미국인들의 삶이 어땠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재발행된 시어스의 카탈로그를 사서 수천 종의 물품을 살펴보면 된다. 유감스럽지만, 아마존의 카탈로그는 지금부터 100년 후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893년 로벅을 인수해, 두 명의 신규 파트너 아론 너스바움(Aaron Nusbaum) 및
줄리어스 로즌왈드(Julius Rosenwald)와 함께 회사의 자본 구성을 150,000달러로 재편성했다. 전형적인 기업가였던 시어스는 항상 회사의 확장을 꾀했다. 누군가 말했듯이, 시어즈는 “공기”도 팔수 있었을지 모른다.
19세기 미국은 아직 농업 국가였다. 농부들은 지역 잡화점에서 비싼 가격이라도 물품을 사야 했고, 종류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골라서 살 수도 없었다. 이때 시어스가 농부들에게 필요한 온갖 물품이 실린 수백 쪽의 카탈로그를 들고 나온 것이다.
시어스는 카탈로그에 실린 모든 물품에 대해 무조건 환불을 보증했고, 어떤 방법으로 대금을 결제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였다. 시어스가 밝혔듯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 나는 그걸 안다. 두 방법 모두를 시도했다.” 시어스는 농부들이 지역 잡화점에 가는 대신 우편으로 물품을 사도록 하기 위해 이윤을 낮췄고, 이 계획은 성공했다. 이후 30년 동안 놀랄만한 성장을 즐겼다.
그동안 우편 정책이 두 차례 바뀌었고, 시어스가 농촌 시장에 침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896년 농촌 무료 배달법(Farm Free Delivery Act)이 도입되었고, 1913년 소포 우편이 시작되었다. 농촌 무료 배달이 시행되기 전까지, 농부들은 먼 우체국에서 가서 소포를 가져와야 했다. 실제, 1863년 전까지 편지도 한 우체국에서 다른 우체국으로만 배송되었었다. 택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1863년이 되어서야 주요 도시 가정까지 우편배달이 시작되었고, 1896년부터 시골 농장까지도 우편이 직접 배달되었다. 하지만 우편배달 가능한 우편물의 중량이 4파운드로 제한되었다. 그 외의 모든 물품은 철도 화물 또는 철도 속달을 통해야 했다.
우편 소포 제도가 시행되기 전까지, 4개의 속달 회사들이 거의 경쟁 없이 배달 시장을 나누고 있었다. 이 카르텔을 없애고 싶었던 정부는 1913년 우체국을 통해 미국 전역에 소포 배달을 시작했다. 우체국이 소포 배달에 뛰어들자, 시어스 같은 회사들은 미국 내 어느 곳으로든 우편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우편 제도의 변화로 시어스는 농촌 지역의 충성 고객들에게 수백만 종의 물품을 우편으로 쉽게 보낼 수 있었다.
시어스, 소매업체 최대 I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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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시어스에게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 시카고에 약 28,000제곱미터 크기의 시어스 물류 센터 건물을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물품 판매를 시작했다. 우편 주문 사업에서 시어스의 지배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1970년대 시어스 타워가 건설될 때까지 시어스의 본사가 상주했다.
둘째, 뉴욕에서 재법인화를 거쳐 상장을 단행한 것이다. 주당 50달러에 주식을 발행해 회사의 자본금을 1,500만 달러를 끌어올렸다. 1893년 대비 100배 증가한 것이었지만, 성장의 시작에 불과했다. 1929년 시어스는 시가총액 7억 7,500만 달러 회사가 되었고, 1906년 대비 50배로 더 커졌다.
1906년 이후 시어스는 자본금을 기반으로 미국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 결과, 1906년부터 1920년 사이 매출도 6배로 늘었으며, 1911년 신용 판매를 개시함으로써 더 많은 매출을 신장시켰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미국 인구는 농촌 지역에서 도시와 도시 교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924년 시어스는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로부터 “제너럴”(1차 세계 대전 당시 미 육군 병참감으로 복무해서 붙은 별명) 로버트 워드를 영입했고, 이후 30년 동안 시어스의 성장을 이끌게 된다.
1925년 워드가 도입한 주요 혁신 중 하나가 우체국을 통해 물품을 배달하는 주문 사업에서 벗어서, 고객들이 시어스에서 직접 물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실제 매장을 여는 것이었다.
로버트 워드는 미국 인구 조사와 미국 통계 초록을 사용해, 어느 곳에 시어스 매장을 열어야 성장을 극대할 수 있을지 계획했다. 화하기 위해 소매점을 어디에 건설할지 계획을 세웠다. 1926년 몽고메리 워드도 처음으로 매장을 열었다. 시어스는 1924년 다우 존스 산업평균 지수에 편입되었으며, 1999년까지 회원사 자격을 유지했다.
시어스의 성공의 열쇠는 고급 백화점과 경쟁해야 했던 도심이 아닌 교외에 매장을 열었던 것이다. 또한 주차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매장 이용을 더 쉽게 했다. 몽고메리 워드는 농촌 지역에 매장을 열었고, 울워스(Woolworth)는 도심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시어스는 사람들의 주거지가 될 교외에 매장을 열었다. 잇따른 매장이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30년 불과 5년 만에 시어스는 미 전역에 3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게 됐다.
1931년이 되자, 매장 매출이 우편 주문을 넘어섰다. 나인틴 헌드레드(Nineteen Hundred Corp.)를 월풀( Whirlpool)로 전환하는 것을 필두로, 공급 업체들과의 보다 긴밀한 협력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1931년 올스테이트 보험(Allstate Insurance)이 시어스 고객들에게 자동차 보험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2년 쿠바 아바나에 미국 밖 처엄으로 매장을 열었으며, 이후 1947년 멕시코, 1952년 캐나다에 각각 첫 매장을 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시어스와 몽고메리 워드의 매출은 각각 약 10억 달러 수준으로 비슷했다. 하지만, 전후 1952년이 되자, 시어스의 매출은 30억 달러로 증가한 반면, 몽고메리 워드의 약 10억 달러에 머물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시어스가 인구 증가를 보이던 ‘선 벨트’ 주들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어스는 기존 교외 매장을 중심으로 신규 매장을 세워나갔다. 1967년이 되자, 월간 매출 10억 달러를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시어스가 저가 소매업체들에게 시장 점유율을 뺏기기 시작한 것도 1960년대였다.
1962년 타깃(Target), 월마트(Walmart) 및 K-마트(K-Mart)가 속속 설립했고, 이후 이 세 곳이 미국 소매 시장에서 시어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시어스는 K-마트에게 인수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물가 상승이 심해졌고, 저소득층은 타깃과 월마트 같은 저가 할인 매장으로, 고소득층은 더 세련된 매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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