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경제이야기) 안좋아지는 경제 누구책임인가 ?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고

퇴직하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어머니와 지낸다. 이제 자식도 대학을 들어가서 자기 앞길은 스스로 찾아갈 정도가 되었다. 이제 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분이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지금까지 건강하셔서 여행을 모시고 다닐 수도 있다.

어머니 집에 오면 조선일보를 보게 된다. 1면기사가 10대 그룹 중 6곳,연초 계획보다 줄였다 이다. 내용인 즉, 문재인 정부가 들어오고 나서 재벌과 대기업을 압박해서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제목도 있다. 죄인 취급, 정책뒤집기, 쌓이는 규제… 대기업 손발이 묶였다 투자하려고 해도 대기업 이유로 죄다 막더라

신문기사 내용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외국에서 생산시설을 지으면 정부 관계자와 주민들이 모두 환대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골목상권 죽는다’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한다라는 내용도 있다.

신문을 보면서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나라가 왜 지금처럼 방향을 상실하고 경제적으로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조선일보 같은 영향력 있는 언론들이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

이번 지방선거에서 왜 국민들이 자한당을 버렸을까 ? 그들이 현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정책에 반대해서 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 9년동안 그들이 보여준 민생정책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대기업들은 세계무대로 나가서 경쟁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청기업들의 피를 빨아 이익을 보았다. 그들은 하청기업들과 같이 공생하고 같이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나라 하청기업들은 한계 상황에 몰리게 되고 기술개발은 뒤처지게 된 것 아닌가 ?

대기업 규제를 확풀었더니 골목골목 들어와 겨우 장사해서 먹고사는 서민들 주머니까지 싹싹 훝어가지 않았나 ?

젊은 아이들이 헬조선이라고 하는 이유가 뭔가 ? 그 아이들이 모두 대기업에 들어가 빵빵 거리고 살고 싶어한 것 아니다. 전망있는 중소기업이도 가고 싶은데 그런 중소기업도 없다는 것 아닌가 ? 미래가 안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들어갈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서는 그 임금받아서 결혼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활도 제대로 안정되게 꾸려나가기 어렵다는 것 때문 아닌가 ?

생산설비 짓는데 주민들이 왜 반대하냐 ? 비윤리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고 하는 기업문화 때문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사를 쓴 조선일보 이성훈 기자는 자기가 직접 그 현장에서 살아보아야 한다. 공장에 가서 돈벌려고 했는데 잘못하다가 죽어나간다면 누가 거기를 가겠냐 ? 그렇게 좋으면 자기가 거기에 살고 자기자식을 그 공장에 취직시키면 될일이다

아무리 보아도 오늘자 조선일보는 대기업의 사주를 받아서 쓴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 기업은 돈 왕창 버는데 왜 국민들은 살기 어려워질까 ? 왜 청년들이 제대로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을까 ? 왜 제대로 결혼해서 아이낳고 살 수 없을까 ? 왜 인구가 줄어가는가 ?

조선일보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 누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 그리고 누가 지금의 상황이 악화되는데 일조했는가 ?

국민들은 이명박근혜를 통해 재벌과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과 삶의 향상이라는 방식이 가능한가를 실험했다. 그리고 박근혜 탄핵과 지방선거를 통해 과거의 방식이 틀렸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사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도록 방치한 데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보수언론의 책임이 크다. 그들은 재벌과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도록 하는데 방조 묵인 조장했다. 제대로 된 언론이었다면 항상 잘못될 수 있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했다. 그런데 영향력 있는 언론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겨 정치권과 재벌들의 똥꾸멍을 빨기에 바빴다. 기자놈들은 정치인들에게 잘보여서 정계로 진출하고 싶어했고, 언론사들은 재벌들에게 잘보여서 광고받기에 바빴다.

소위 정치 경제 언론의 유착이 우리 처럼 심한 나라가 있는지 모르겠다. 정론은 무슨 얼어 죽을 개뿔 ?

오늘 조선일보가 쓴 것 처럼 앞으로 경제상황이 어렵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은 우리 정부의 정책 때문이 아니다. 지금은 전세계적인 경제적 문제에 봉착해 있다. 제대로된 언론이라면 문제가 무엇이고 상황이 어떤가에 대한 인식자체가 지적이어야 한다. 겨우 재벌들 기획실에서 가져다 주는 자료 받아서 쓸 정도라면 이것은 무식 혹은 무지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상황에 대한 인식자체가 덜 떨어져 있으니 어떻게 제대로된 진단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

물론 조선일보는 앞으로 예측되는 경제적 어려움을 지금의 문재인 정부에 옴팡 뒤짚어 엎어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래서 그렇게 하겠지. 그렇다면 너네 들이 언론이냐 ? 자한당 기관지이지.

정신 차려라 조선일보.

참 그리고 난 조선이라는 말이 싫다. 여기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냐 조선일보라고 하게.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경제이야기) 안좋아지는 경제 누구책임인가 ?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고’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우리 나라 교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이번 지방선거에 교육감 선거를 했다. 난 교육감 선거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교육감이 선거로 선출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안간다. 원래 지방자치단체장이 교육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
만일 지자체마다 교육감을 선출한다면 왜 교육부 장관은 선거를 통해 선출하지 않는 것인가 ?

국가란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를 운영하는 원칙이 있는지 아니면 소신이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필요한 것은 판사와 검사를 선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승태 대법원장이라는 작자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정말 가관이다. 그는 자신이 3권 분립의 한 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겠다.

검사들이 정권의 개노릇을 한 것은 우리나라 정부수립이후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바뀌지 않았다. 검찰조직은 군대보다 더 확실한 상명하복의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권력자의 개노릇을 했다. 시간이 가면서 검찰들은 정치도 지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미국처럼 지방검찰청장이나 지방법원장을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대로 할 것 아닌가 ? 지금의 검찰과 재판소는 국민을 개돼지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 행정부의 그 어떤 국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원래 오늘 쓰려고 하는 글은 우리나라에서 교육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가하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옆길로 샜다. 다시 돌아가자.

얼마전 차에서 교육부 장관이 교육을 잘해서 창의적인 능력을 가진 인재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찹찹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 그런 이야기를 보수정권의 교육수장이 했다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자칭 진보적 정당이라는 민주당 정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말은 인간을 도구적 존재로 볼 때는 아주 옳은 말이다. 창의적 인재를 만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육부 장관의 이야기인 즉, 암기위주의 교육에서 창의력을 가진 능력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암기위주의 교육을 받아서 창의력이 없는 사람이 나왔으니 앞으로 암기위주의 교육은 지양하고 창의적인 인간을 위한 교육을 하겠단다. 이사람 뭘 알고 하는 소린지 모르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창의력은 어마어마한 암기를 통한 지식의 융합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제가 말도 안되는 암기교육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입시 만을 위한 말도 안되는 암기교육에는 반대한다.

문제는 우리가 암기교육이냐 창의적 교유이냐를 논하기에 앞서 어떤 인간을 만들어야 햐는가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현재의 교육부 장관도 여전히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이고 수단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적어도 진보정당이라면 인간을 도구적 존재로 보는 교육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보적 정당이 아니라도 교육의 목적이 인간을 경제생활의 수단이나 국가적 경쟁력의 도구로 보는 시각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인간을 목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해 전혀 다른 접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목적으로 본다면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다는 것 정도가 옳은 답 아닐까 ?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나보다는 남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게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

우리보다 못산다는 멕시코에서 얼마간 학교를 다니다가 온 조카 녀석이 지방교육청에다가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막 걸어다녀도 교사들이 아무런 제재로 하지 않는다고. 조회시간에 아이들이 줄을 서지 않는다고. 웃긴 일 아닌가? 중학교 1학년 짜리가 보기에도 우리나라 교육의 현장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게 무슨 학교인가 ?

이제까지 암기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야한다고 했던 교육이 남을 배려하지 않고 지하철에서 노인이 아파서 절절 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얼굴 빤히 세우고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 보고 게임하고 있는 아이들을 만들었다.

소위 교육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오히려 도구적이고 수단적인 의미에서의 기계 부속품 같은 인간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

교권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교육이 진정 스스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는,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까 ?

만일 내가 돈이 있다면 내 손자들은 절대로 우리나라 학교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돈 많으면 외국에 보낼 것이고 능력이 되면 제주도의 외국학교 분교에 보낼 것이다.

그래서 암호화폐 가격이 확 오르길 바란다. 백배 천배 올라라.

왜 인간같지도 않은 것들 만들려고 우리나라 학교에 보내나 ?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우리 나라 교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양심적 병역거부의 헌재 판결을 보면서, 시민적 의무와 권리사이

헌법재판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했다. 며칠전에 이문제와 관련해서 @scottbrian 님께서 아래와 같은 포스팅을 올렸다. 상당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반응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생각]전 비양심적이라 군필한 남자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후에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요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는 상황이 그렇게 굴러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군대갔다 온사람들은 대부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 내가 비양심적이라서 군대에 가서 개고생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scottbrian님이 포스팅에서 제기한 것 처럼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서 양심적이라는 수식부분을 빼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 교리에 입각해서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것이지 양심적이어서 군대에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며칠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이리 저리 생각을 해보았다. 저는 양심적이니 비양심적이니 하는 말이 문제의 본질을 흐트리게 했다고 생각한다. 비양심적이라서 군대에 가고 양심적이라서 군대에 가고 하는 말은 감정을 자극하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듯하다.

헌법 제19조의 양심에 대한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이다. 결국 여기서 양심의 자유가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의 문제일텐데 헌법재판소는 병역을 거부할 양심을 인정해 준것이다. 모든 판결이 그렇듯이 다양한 입장과 주장이 가능하다.

저는 문제의 핵심을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란 개인의 소신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했을때 우리사회는 개인의 소신에 손을 들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결정을 하던 세상이 결단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먼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관용도가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 세상 나쁜 것만 보고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주장까지도 마음대로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사회의 관용도가 넓어지면 역동성도 동시에 늘어난다. 안그래도 꽉막힌 우리나라 사회에 무엇인가 변화를 위한 물꼬를 터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젊은 남성들이 폭증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수도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일 여호와의 증인 신도라고 하는 젊은 남성들이 폭증하면 그에 따른 방법을 모색하면 된다. 그런데 그정도까지 될까 ? 우리나라 사람들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빙자해서 자신의 양심을 헐값에 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런 판단에 앞서 국민이 져야하는 병역의 의무가 어떤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원래 서양에서는 모든 국민이 군대를 가지 않았다. 그리스 시대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소수의 제한된 시민만이 군대에 갈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은 자신이 지켜야한다는 원칙이었다. 그 이후 점차 용병이 운용되었다. 군대라는 것은 돈을 받고 운용하는 사업과 같았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의 숫한 많은 전투는 모두 용병들에 의해서 치루어졌다.

전문직업군인인 용병에서 국민개병시대로 넘어온 것은 프랑스 혁명 때였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군대도 사라졌다. 돈을 안주는 국가를 위해서 전쟁을 해주는 용병은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보내서 프랑스 혁명을 토벌하려고 했다. 프랑스인들은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 모두 같이 모여 군대를 만들었다. 오합지졸이었으니 당연히 연전연패였다. 그러다가 파리 북방지역인 발미지역에서 기적과 같이 프랑스 인민군대가 전문직업군인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후 국민개병제는 국민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국민국가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최우선의 의무이자 권리가 군대복무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런 의식이 강하다. 일부국가에서는 전문직업군으로 전환하기도 했지만 또 일부국가에서는 시민적 권리이자 의무로 병역의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민적 권리이자 의무인 병역을 담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군대를 좋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별로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나는 군대에 가는데 너는 왜 안가 ? 라는 상대적 박탈감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너는 왜 시민적 권리를 누리면서 의무는 행사하지 않으려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별로 제기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 우리의 경우 군복무라는 것이 그냥 귀찮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 스스로 국가를 만든 것이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 경험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도 당사자가 아닌 제3자로 전쟁을 치루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주도해서 치룬 전쟁이지 우리가 주도한 전쟁이 아니다. 한국전쟁에서 자유대한민국을 지켜준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다.

우리가 병역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주인으로서 국가를 지켜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보다는 어찌하면 피해가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병역을 거추장스런 부담으로 생각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재벌들이었다.

국가를 유지함으로써 가장 이익을 보는 집단은 재벌이다. 그런데 그들 자녀중에서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 얼마나있는지 한번보라.

현재 재벌 회장들중에서 군대에 제대로 갔다 온사람들이 몇명이나 되나 ?

심지어 국방부 민간 공무원 중에서 군대에 갔다 온 사람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로부터 그리 큰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군복무가 어떻게 신성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 이미 우리 사회의 귀족들은 오래전부터 군대에 가지 않았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귀족들의 병역회피에 비하면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그들은 귀족적 권리를 향유하면서 시민적 의무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병역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재벌들이 군복무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받아 들인 것은 그들이 쌓은 부가 정당한 노력의 댓가라서 내가 피를 흘려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희박하기 때문이 아닐까 ? 그들은 온갖 편법과 특혜로 부를 쌓았다. 기회주의적으로 부를 일군 사람들에게 병역이란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지배층들이 왜 군복무를 가치있게 생각하는가를 한번 보면 우리나라의 재벌들과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이미 내려졌다. 다시 바뀔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대체복무를 힘들게 해서 군대에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생각이 좀 다르다.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자랑스럽고 보람있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지금처럼 간부들이 병사들을 마치 종놈 대하듯이 하고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것으로 아는 상황이라면 보람차고 자랑스런 군대복무란 요원하다.

군대내에서 복지를 대폭 향상시키고 군복무한 사람들에게는 인센티브도 주어야 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 그리고 여자들도 군대에 가야한다.

모든 국민들이 병역의무를 져야 하는 것 아닌가 ? 북구라파 어느나라에서는 여자들도 군대에 가더라. 여성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란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양심적 병역거부의 헌재 판결을 보면서, 시민적 의무와 권리사이’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예멘 난민, 당신의 입장은 ?

예멘 난민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갑자기 제주도에 예멘 난민 500명이 집단으로 들어왔다. 무비자로 들어올 수 있는 제주도로 들어와서 난민 신청을 했다. 난민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주장과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혼란스럽게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난민 대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배우 정우성이 예멘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갑론을박이다. 어떤 사람들은 난민 수용하자고 하려면 먼저 너네 집에서 데리고 살아라 하는 주장도 있고 우리도 한국전쟁때 난민이 많이 발생했던 국가니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유시민은 썰전에서 예멘 난민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했다. 전적으로 수용하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수용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평소 어떤 사안에 대해 일도양단하던 그의 태도와 많은 차이가 있다. 어떤 한 입장에서 섰다가 상당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타산 때문일 것이다. 평상시의 그 답지 않다. 어정쩡한 입장에 서는 유시민이 우습게 보인다.

예멘 난민의 수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보편적 인도주의 정신을 근거로 제시한다. 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옳다는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언급한 것 처럼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후 난민을 많이 배출(?)한 나라니 그에 대한 응분의 보답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 같다.

예멘 난민의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인들이 대거 들어간 유럽에서 보여준 그들의 부작용을 든다. 이슬람의 난민들이 서구의 전통적 삶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으며 집단강간 같은 일들도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형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 국가들도 수용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왜 우리가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오기전에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지아에 갔다가 다시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제주도로 들어왔다.

여기에서 제주도의 무비자는 이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관광객들을 편하게 수용하기 위해 무비자를 도입했다. 그런데 이제 제주도는 본국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는 곳으로 점차 변하는 것 같다. 작은 이익을 위해 큰 손실을 초래하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당장 수익을 조금 더 얻는 것이 좋다면 나중에 제주도 사람들의 자식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예멘 난민 수용문제는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문제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를 관통하는 주의 주장으로 볼 때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문재인 정부가 또 다른 곤경에 처할 위험이 많다. 마치 암호화폐 거래소 폐쇄한다고 하다가 된통 혼난 것 처럼 말이다.

오늘날 모든 국가는 국민국가다. 국민국가란 구성원인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이익에는 안보, 경제, 치안 등과 같은 분야가 포함되어 있다. 국민들은 국가가 안보와 경제 그리고 치안을 책임져주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금 낼 필요가 없다. 만일 나의 이익을 보호해주지 않고 세금을 거두어 가면 그것은 조폭보다도 못하다.

서구유럽국가들이 이슬람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을 무슨 대단한 인류애적인 고상한 주의주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완전 오산이다. 그들은 1970년대 이후 줄어드는 인구로 인해 고민하다가 이민정책의 일환으로 이슬람 사람들을 받아 들였다. 하층 노동자로 사용해야 했지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인구의 약 20%가 터키 인들이다. 대부분 잡일과 단순노동에 종사한다.

경제적인 성과는 있었다. 그러나 부작용은 상당히 심각했다. 경제적으로 이익을 본 계층은 상층 자본가들이었다. 싼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서구의 중하계층은 이슬람 사람들과 대립하였다. 갑자기 들어온 이슬람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가니 당연히 이슬람사람들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종주의는 바로 이슬람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유럽의 경쟁력이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값싼 노동력에 취한 유럽의 기업들이 미국과 일본보다 뒤쳐지기 시작했다. 고급인력들은 끊임없이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럽은 혁신의 정신을 상실했다. 인구가 줄어들면 생산성을 높이거나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가장 안일한 길을 택한 것이 이민을 수용한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유럽 사회주의가 기반하고 있었다. 인도주의적인 정책이 사회주의의 근간인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오히려 유렵의 약화를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럽의 전통노동자계층이 사라지면서 유럽의 사회주의도 그 힘을 잃어 버렸다. 역설적으로 사회주의 이론에 가장 근접한 인도주의적 조치가 결국은 자본가들의 이익에만 기여하게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역사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앞으로 몇십년 이후면 유럽의 이슬람 인구가 지금보다 매우 많이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인구학자들은 유럽은 이슬람 국가로 변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이제까지 한 이야기는 유럽에서 난민을 수용했던 것은 단순히 고상한 이념과 인도주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복잡한 인구학적 문제와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고상한 이념의 주의 주장에도 그 뒤에는 추악한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의 이념과 주의주장은 그런 계산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서 제기되고 있는 난민 수용 찬성은 그런 복잡한 계산과 타산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순수하다. 그러나 순수함은 간혹 이상한 결과를 초래한다. 한국인의 이념적 순수성은 마치 고질병과 같다.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유럽이 이슬람 인들로 인해 겪은 부작용을 우려한다.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사회에 절대로 동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파괴한다. 이런 우려는 이유없는 것이 아니다. 결국 유럽에서 더 이상 난민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가 그런 결과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슬람 난민을 수용하려면 그런 우려에 대해서 분명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만일 그런 우려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인도주의적이라는 말만을 한다면 상당한 후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국민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슬람 난민과 다른 난민은 매우 다르다. 아마 베트남 난민들이 보트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면 지금과 같은 소란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일본에서 땅이 가라앉아서 난민이 발생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면 지금과 같은 소란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소란은 이슬람 난민들이 그동안 유럽에서 보여준 사회, 정치, 문화적 우려와 부작용의 결과다.

아마 우리나라 정부는 난민 심사를 길게 끌 것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소란을 더 이상 키우지 않으려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기회에 이런 난민들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주도 무비자 정책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

대책없는 주의주장은 반대다. 늘 그렇듯이.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예멘 난민, 당신의 입장은 ?’

(올드스톤의 스팀잇 이야기)스팀가격 시원하게 올라간다. 이때 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얼까 ?

암호화폐 가격이 올랐다. 스팀이 그 중에서도 많이 올랐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그런데 또 걱정이 앞선다. 스팀은 가격이 올라가면 올라가는대로, 또 내려가면 내려가는대로 걱정이다.

가격이 올라가면 보상 문제가지고 또 싸우고 터지고 하지 않을까 지레 걱정된다. 그런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 것을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어떤 주의주장이든지 모두 나름의 타당성과 진실을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당시에는 아주 말도 안되는 주의주장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타당성을 지니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주의 주장을 무조건 말이 안된다고 비판하기가 저어된다.

젊을때는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무조건 비난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쓰라린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때는 바보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했던 것들이 점차 올바른 것으로 드러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는 것이 정말로 어렵구나하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결국 세상을 관통하는 강력한 힘은 운이었다. 이론과 논리보다도 운이 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느꼈다면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것도 있다. 우선 도덕적인 측면에서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효용성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대충 지나갈 수 있다. 가치관과 도덕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할 경우에는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닐 경우, 서로 의견이 다를때 이를 정리하고 수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저는 그런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도 문화라고 생각한다. 의견이 다를때 이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문화가 없고 맨날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싸운다면 어떻게 발전이 있겠는가 ?

이글을 쓰게 된 것은 다름아닌 스팀페이와 모이또를 둘러산 논쟁과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때문이었다.

저는 다양한 시도는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팀페이도 그렇고 모이또도 그렇고 그런 시도가 모이고 모여서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든다. 실패를 할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실패와 잘못 또한 스팀잇 생태계의 커다란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적인 문제는 잘 모른다. 그래도 제가 아는 범위내에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스팀페이는 누가 나쁜 의도로 만든 QR을 이용하게 되면 암호가 유출될 수 있다. 모이또도 오염된 OS를 사용하면 암호를 탈취당할 수 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QR로 스팀코넥트의 암호를 탈취하는 시연을 하기도 했다. 오염된 OS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으나 만일 OS가 오염되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아닌가? 그럴경우 다른 컴퓨터로 오너키를 이용해 액티브키를 싹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저 같으면 스팀페이는 악의를 가진 사람이 QR로 암호를 탈취할 수 있으니 스팀페이 유저에게 안전한 QR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혹은 모이또는 OS가 오염되어 있을 경우 암호가 탈취될 수 있으니 주의를 해야한다면서 구체적인 주의를 제시했으면 어땠을까 ? 서로가 서로를 도와줄 수 있지 않았을까?

스팀페이와 모이또를 예로 든 것은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다. 이예로 인해 당사자들이 기분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같은 코딩 무식한들은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기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해결책이 없으면 의미도 없는 것이고 말이다

논쟁의 과정을 보면서 또 누가 옳으니 틀리니 하면서 편가르기까지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좋지 못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왜 우리는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

서로가 상생할 수 있고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문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우리를 편을 지어 매일 싸우기나 하는 사람들로 평가했다. 우리민족을 비하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그속에 그들이 보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잘못되고 있는 듯 하다면 틀렸다고 비판하는 방법이 있고 그것이 잘되기 위한 조언을 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주로 틀렸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좀 잘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바꾸자는 것이다.

스팀잇에 바람직한 문화가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래야 뉴비들이 들어왔을 때 기분좋게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 조그만 일인 듯 하지만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문화를 만드는 것 말이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문화는 포용력과 여유가 있으며 서로 서로 잘되는 방향으로 격려하되 문제가 생기면 어떤 사람이 독점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의견을 모아 방향을 잡아가는 문화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배려는 기본적인 것이다.

세상살기 팍팍한데 여기까지 와서 서로 네가 옳으니 틀리니 하고 싸우는 장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스팀잇 이야기)스팀가격 시원하게 올라간다. 이때 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얼까 ?’

(올드스톤의 스팀잇 이야기) 스팀잇에서 성공하는 것, 그거 쉽지 않다.

글을 쓰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서 많은 사람들이 스팀잇에 들어오고 또 실망해서 떠난다. 떠나는 분들을 보면서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든다. 세상에 공짜로 돈준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믿는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릴때 부터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씀이 있다. “길가에서 땅을 아무리 파보라 돈 1원이라도 나오는 줄 아냐 ?” 그때 어머니께서는 돈이 소중한 존재니 함부로 쓰지말고 절약해라 하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씀에 다른 뜻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돈이 될일이 있고 돈이 안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스팀잇에서 글을 쓰면 돈준다는 이야기를 자꾸하자 저는 스팀잇에서 글쓴다고 돈준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글을 올린적이 있다. 그야말로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은 우리사회에서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변을 둘러보라. 글을 써서 돈을 제대로 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 내가 잘 아는 시인도 시써서 생계유지하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했다. 오죽하면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시인도 월세방에서 쫓겨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

사실 스팀잇에서 우수한 작가니 뭐니 하는 것은 진짜 작가들에 대한 모독인지도 모른다. 사실 스팀잇은 글만 써서는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스팀잇에서 보상을 제대로 받으려면 스팀파워를 많이 보유해야 한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스팀파워 살 돈 있으면 다른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특히 스팀은 가격이 올라갈때는 찔끔 찔끔이지만 내려갈때는 급전직하이다. 다른 것 보다 두배는 빨리 빠진다. 그런 스팀을 사서 스팀파워로 충전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바보같은 일이나 마찬가지다. 유감스럽게도 스팀보다 더 유력한 암호화폐도 많다.

지금 현재 스팀파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운좋게 가격이 많이 빠졌을 때 많이 사서 떨어져도 손해보는 국면이 아닌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돈이 무지하게 많아서 스팀가격 하락 정도는 우습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니면 손해를 봐도 스팀잇에 대한 미련에 어쩌지도 못하고 매달려 있는 사람이거나…

이런 상황에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 많은 사람들이 가입이후 한두달 혹은 몇달간 글을쓰고 활동을 하다가 사라진다. 생각보다 보상을 받지 못했고 나보다 글을 잘쓰지도 못하는데 보상을 많이 받기 때문에 기분나쁘다며 나간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 살아보면서 느낀 것은 스팀잇 보다 더 못한 곳은 있어도 스팀잇 보다 더 나은 곳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스팀잇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 박탈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 평생 지고가야 할 짐이다. 스팀잇이 그런 상대적 박탈감까지 해결해줄 전지 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빈둥거리는 임원들이 나보다 수십배 더 많은 월급 받아가는 것을 보고 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 나의 떡복기 가게에 오는 손님보다 옆의 떡복기 가게에 오는 손님이 더 많은 것을 보고 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가 ? 게다가 그 옆가게는 내가 만든 것보다 별로 맛도 없는 것 같고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것은 그런 차이가 당연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스팀잇에서도 그런 당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스팀잇에서의 상대적 박탈감은 스팀잇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니다. 원래 세상이 그렇다. 돈을 벌지 않겠다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보상을 원하지 않으면 아예 스팀잇을 할 필요도 없다. 얼마간이라도 보상을 받겠다고 한다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결국 보상을 생각하고 활동하는 스팀잇에선 상대적 박탈감은 당연하다. 보상을 받으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겠다면 스팀잇을 떠나는 것이 좋다. 물론 스팀잇이 이런 상대적 박탈감을 완화시킬 수 있는 노력은 해야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음습하게 깔려있는 스팀잇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자신의 계정을 가치있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그들이 가치있는 계정을 만들 수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오랫동안 글을 쓰는 인내심이다. 오랫동안 글을 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야한다. 그런 색깔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오랜기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남들 50달러 보상받을 때 0.1달러도 제대로 찍히지 않았던 분들이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포스팅을 통해 몸값을 올려가는 것을 보았다.

확고하게 자신만의 영역을 정하고 그런 글쓰기를 통해 비슷한 사람들과 소통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올려가는 사람들도 많다. 결국 그런 사람들이 결국 스팀잇에서 살아남는 것 같다. 굳이 자본을 많이 투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오늘 아침 보니 암호화폐 가격이 슬슬 올라가는 것 같다. 비트코인 선물 때문에 그런 듯하다는 평가가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만일 다시 가격이 올라가면 또 공평한 분배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이 나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온 분들은 나름대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결국 스팀잇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 가야한다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불평불만을 하는 것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성공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주변의 환경과 남의 호의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여건에서도 실패할 사람은 반듯이 실패한다.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서도 성공할 사람은 반듯이 성공한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은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이 아닐까 ?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스팀잇 이야기) 스팀잇에서 성공하는 것, 그거 쉽지 않다.’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