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29일 새벽 5시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대가 남쪽을 향해 초산읍을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안전하게 엄호하기 위해 북한 패잔병 출몰이 우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점령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대대의 맨 뒤에서 적의 추격을 경계하면서 군용트럭을 타고 남하 하고 있었다. 이때 제1중대의 병력은 중대원 약 160명, 배속된 수냉식 기관총반원 약 10명, 귀순 동화된 북한군 포로 남녀 약 25명, 적십자 간호학생 2명, 한국청년단원 약10명 등 모두 210명 정도였으며, 이중 여자등 비무장원을 제외한 전투가능인원은 약 185명이었다.
이대용의 제1중대가 고장에 도착한 것은 해가 뜬 이후였다. 고장 일대에는 제7연대 본부와 예하 제2대대와 3대대가 있었고, 북진 방면에서 중고군에게 패배한 이후 퇴로가 차단되자 제7연대를 찾아 북상한 제2연대 대전차포 중대 소속이 박중위외 소수의 제2연대 패잔병이 있었다. 아침 식사를 끝낸 제7연대는 유일한 자동차 도로를 따라 온정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과 조우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때 제7연대와 조우한 중공군은 제 4 야전군 제40군 예하의 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은 북진에서 북상하여 공격하여왔다. 약 3000명의 한국군과 약 10000만명이 중공군이 전투에 돌입했다.
숫적으로는 국군이 열세였으나, F51 프로펠라 전폭기의 공중지원을 받아 약 30정도를 전진하는 가운데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적군은 남쪽에 있었고 아군은 북쪽이 있었다. 아군은 앞길을 막고 있는 적군을 돌파하고 온정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연대는 불가피하게 단 하나밖에 없는 신작로를 따라 뱀같이 길게 행군대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도로에는 노획한 소련제 군용 트럭 300여대를 세워놓고 도로 좌우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연대 선두 부대만 좌우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적은 이미 도로 양측에 병풍처럼 험하게 우뚝 솟은 산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고 아군은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연대는 신작로를 통해 빠져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런 배치를 했으나 불안한 배치였기 때문에 연대장이하 대대장과 중대장들은 불안한 나머지 어서 빨리 날이 밝았으면 하는 생각을 초저녁 부터 하기 시작했다.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장교를 불러 사로잡은 중국군 포로를 심문했다. 심문결과 중공군은 이날 12시를 기해 일제히 공격을 가한다는 첩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야간의 재배치는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이대용의 제 1중대는 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명을 받아 제일 북쪽에 위치해 후방에서 오는 중공군을 막아내기로 되어 있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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