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 27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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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st post we saw how the US considered extending $200 million in economic and technical aid to Korea in the wake of the announcement of the Truman Doctrine in March 1947. The idea was that this assistance would help create a viable government in the southern zone, which would enable the US to withdraw its occupation forces without leaving southern Korea vulnerable to a Soviet takeover. This overly optimistic view was fueled by growing pressure within the US to “bring the boys home.” Some soldiers in Korea even wrote letters to their local newspapers complaining about their poor living conditions and accusing their officers of corruption and mistreatment.

In other words, the Truman administration faced political pressure to end the occupation at the same time as it drew up plans for its Korean aid program. The plan the State Department sent to Assistant Secretary of War Patterson called for providing $540 million to a new provisional government and replacing American military officials with civilian advisors, overseen by a new political advisor for Korea with wide decision-making powers. With Cold War battle lines solidifying, US officials were less concerned with cooperating with the Soviet Union to create a government for Korea. The State Department thus called for the administration to implement this plan even if the Joint Commission resumed its meetings.

Patterson, a clear-eyed military man, doubted that economic aid would improve conditions in southern Korea. He advocated instead that the US withdraw its forces from the peninsula as early as possible. In Seoul, however, General Hodge publicly expressed support for economic and political aid. “If we can’t get Russian cooperation,” he stated at a press conference, “we must carry out our commitments alone.” Trying to avoid an open violation of the Moscow Conference agreement, Hodge declared implausibly that the US was not creating a separate government, only attempting to foster freedom, democracy, and sound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Through the spring of 1947 President Truman denied that the US had reached a decision on aid for Korea. However, by that time the administration had decided that if the Soviets refused to reopen Joint Commission negotiations, the US would carry out this aid program. Moreover, as a last resort it would take the issue to the United Nations. On April 8 John Carter Vincent summarized this view to Dean Acheson, writing that “our program seems to us to be the only feasible way of accomplishing [the reduction of our commitments] once we rule out the alternative of abandonment of Korea to USSR domination.”

The impossibility of cooperation between the Soviets and the Western allies became more apparent at the meeting of the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in Moscow in March/April 1947. The conference failed to reach agreement on the main items on the agenda – peace treaties for Germany and Austria. Secretary of State George Marshall reported at the conclusion of the conference that the Council was unable to agree because “the Soviet Union insisted upon proposals which would have established in Germany a centralized government, adapted to the seizure of absolute control of a country which would be doomed economically through inadequate area and excessive population, and would be mortgaged to turn over a large part of its production as reparations, principally to the Soviet Union….Such a plan…not only involved indefinite American subsidy, but could result only in a deteriorating economic life in Germany and Europe and the inevitable emergence of dictatorship and strife.”

Secretary Marshall also raised the Korea issue at the Moscow conference, blaming the Soviets for the failure to reestablish economic unity and create a provisional government.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how the two sides discussed the absence of progress of the Joint Commission and how, surprisingly, they agreed to resume its meetings.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The text of Secretary Marshall’s report is found online in The Avalon Project, Documents in Law, History, and Diplomacy of the Yale University Law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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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연구) 6.25 초기 개화산 전투에 관한 보충

개화산 전투는 1000여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우리의 뇌리에서 잊여졌다. 그러나 당시 개화산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은 개화산 지역에서 이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당시 육군정보학교 장병을 중심으로 잡다한 부대들이 모여서 전투에 참가했다. 아마도 제대로된 화력지원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방어작전을 수행하던 장병들은 탄약도 제대로 지니지 못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고 약 1000여명의 시신이 산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비가 오면 시신이 마치 통나무 내려오듯 흘러 내렸다고 한다. 주변에 살던 주민들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기간에는 시신수습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단다. 어떤 시비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란다.

한국군도 개화산 전투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 중에서 이들의 원혼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들이 모아지기 시작해서 충혼탑을 만들고 기념비를 세웠다. 이들의 원혼을 달래는 행사를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사고나 나거나 동네에 안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항상 그렇듯이 공무원들이나 정치인들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개화산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공무원들은 예외없이 승진에 탈락하거나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정치인들 중에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사람들도 예외없이 낙선했다고 한다.

최근에 한국전쟁사 연구자들과 같이 개화산을 답사한적이 있었다. 우연히 개화산 전투 충혼비와 기념비를 한참 만들고 있었다. 그중에 나이드신 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전투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야기 해주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개화산 전투 기념비에 백선엽의 이름이 버젓이 새겨져 있었다. 사실 백선엽의 1사단이 최소한의 역할만 해주었어도 개화산 전투의 비극은 없을 수도 있었다. 이전투의 비극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버젓이 기념비 제일 높은 곳이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굳이 기념비 사업회장에게 이러니 저러니 말은 하지 않았으나 찹찹한 마음이 들었다. 제대로된 역사를 정리하지 않으면 파렴치한들이 주인노릇을 하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개화산 전투와 시흥과 안양지역에서의 전투 상황에 대한 전모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영원히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세세한 전투의 경과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희생으로 전쟁초기 국군의 파멸을 조금이라도 막았는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화산 전투의 의미는 북한의 전사기록을 제대로 확인해야 제대로 밝혀질 것이다. 지금은 지나갈 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잊혀지거나 왜곡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가 삶을 제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의 서사구조로 인한 전사기록의 왜곡문제(홍천 전투와 개화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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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의 서사구조로 인한 전사기록의 왜곡문제(홍천 전투와 개화산 전투)

앞에서는 한국전쟁 기습남침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남침은 기습이라고 보기에는 여러가지에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전략적 작전적인 측면에서 기습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전술적인 측면에서 기습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총체적인 측면에서 기습이라고 하기보다는 고의적인 혹은 무능에 의한 총체적인 상황관리 능력의 부재를 기습이라는 말로 덮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전쟁의 초기 작전실패를 북한군의 기습으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치지도자였던 이승만 뿐만 아니라 작전지휘에 실패했던 백선엽과 유재흥을 위시한 만주군 혹은 일본군 출신에게 서로 도움이 되었다. 한국전을 거치면서 중국군과 일본군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았던 장군들이 모두 물러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한국작전의 초기작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바로 그 다음해부터 한국전쟁의 상황을 정리하여 발간한 육군본부의 전사자료를 보면 당시 전사작성과정에서 작전상황일지등이 매우 잘 활용되었다는 정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존안된 자료를 보면 전쟁초기의 작전상황일지가 누락되어 있었다. 특히 존안된 자료집에서 자료들이 고의로 삭제되었다는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정황도 많이 존재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한국전쟁 초기를 기습으로 규정함으로써 드러난 문제점의 하나인 다른 전투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게 된 내용을 살펴보려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전편에 춘천전투의 의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6사단의 홍천전투와 김포 개화산 전투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홍천 지역의 전투는 중공군 출신으로 구성된 북한군 제 12사단과 함병선 중령이 지휘하던 6사단 2연대의 전투이다. 홍천지역에서 한국군 6사단 2연대는 춘천지역과 달리 처음에는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전투를 수행했다. 중공군 출신의 제12사단은 당시 북한군의 최정예 사단이었다. 1950년 3월까지 국공내전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전투경험도 풍부했다. 6사단 2연대는 북한군 12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함병선 중령의 6사단 2연대는 약 5일동안 홍천에서 원주까지 이르는 도로에서 지연전을 실시함으로써 춘천지역의 6사단 7연대가 원주로 철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춘천으로 들어온 북한군 2사단이 수원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이 춘천지역에서의 초기전투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판단한 소련군사고문단의 평가는 단순하게 춘천지역의 전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춘천과 홍천지역 전체에 대한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구상과 그에 대한 한국군 6사단의 방어작전 전반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전사는 홍천지역의 빛나는 전투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지않고 있다. 실제 홍천지역에서 함병선의 제6사단 2연대는 세계전사에도 쉽게 찾아 보기 어려운 방어시 공세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하에서 아무런 화력지원을 받지 않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당시의 모든 전투와 작전을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던 육군본부의 상황때문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초기 작전의 의미가 훼손된 것은 춘천과 홍천지역뿐만 아니다. 가장 크게 의미가 훼손된 전투중의 하나가 개화산 전투이다. 개화산은 김포공항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이다. 백선엽이 지휘하던 제1사단은 전쟁초기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백선엽의 제1사단을 초전에 격파했던 북한군 6사단 또한 홍천지역에 투입된 북한군 제 12사단과 마찬가지로 중공군 출신의 부대로 국공내전이 끝나고 50년 3월에 북한으로 들어온 부대였다.

북한군 제6사단은 초전에 백선엽의 제1사단을 붕괴시키고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북한군 제3,4사단이 서울방면으로 공격하는 한편, 북한군 제6사단은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여 한국군을 완전히 포위하고자 한것이다. 그러나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개화산에서 전투를 한 다음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했다.

당시 육군 본부는 육군정보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반도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포반도에는 잡다한 부대들이 집결했으나 김포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 대령은 도주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후 부교장이던 최복주 중령이 사령관으로 개화산 방어를 실시했다. 작전경과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복주 중령이 지휘하던 김포사령부는 개화산에서 1000명 이상의 부대원 전원이 옥쇄하는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전언하는 바에 의하면 최복주 중령은 당시 부하들의 죽음을 보고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최복주 중령이 자결한 이후 정보학교 작전참모(일설에는 3사단 참모장이라고도 함)이던 우병옥 중령은 김포공항까지 진출한 북한군 제6사단을 향해 짚차에 기관총을 달고 사격을 하면서 김포공항으로 돌격했다고 한다. 우 중령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산화하면서 기관총을 사격했다고 한다.

그 이후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초까지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한다. 왜 진출을 하지 못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알수 있는 것은 개화산전투이후 임충식 중령이 지휘하던 한국군 제3사단 제18연대가 시흥과 안양방향으로 진출하여 방어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시흥과 안양방면에서의 전투 상황도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개화산 전투의 전후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작전이 전황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북한군 제6사단은 개화산에서 김포사령부의 강력한 방어작전 이후 차후 진출에 신중해졌을 가능성을 배제 할수 없는 것이다. 만일 북괴군 제6사단이 계속 진출하였다면 한국군의 한강 방어선 구축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전쟁은 초전에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북한군 제6사단의 진출을 지연시켰는지 알수는 없다. 개화산에서의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임충식 중령의 3사단 18연대의 방어작전이었는지 불문명하다. 그러나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의한 불가항력론은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전투에 대한 연구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없애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 전쟁사 연구) 6.25 초기 작전과 자료의 문제

(한국전쟁사 연구) 6.25 초기 전투가 잊혀진 이유와 한국군의 지적 능력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다탕성에 대한 검토 4 (종합)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3(기습의 작전적 전술적 측면), post 7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한국전쟁사 연구) 초기 전사기술의 문제점 post 4

(한국전쟁사 연구) 잘못한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가 소중한 이유, po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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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연구) 6.25 초기 작전과 자료의 문제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참가한 국제적인 규모의 전쟁이다. 유엔군도 참전했으니 참전국 규모만 해도 20개국이 넘는다. 전쟁에 관한 자료들은 모두 각국이 보유하고 있다. 당연히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자료들은 아직 제대로 개방되어 있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는 민감한 자료들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 자신들이 필요하거나 유리한 자료들만 선별적으로 개방한다.

미국이 가장 폭넓게 자료를 개방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선별적으로 개방된 자료들에 입각하여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당연히 아직까지 개방된 자료들만 가지고는 한국전쟁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 한국전쟁이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과거의 문제가 되어야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가 개방될 것이고 그래야 우리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 접근의 제한성을 볼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의 진행과정도 상당히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국의 전사기록은 완전하게 개방되어 있는 반면, 북한의 전사기록은 아직까지 하나도 개방되지 않았다. 실제 전투와 작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전사기록과 우리의 기록을 서로 대조해야 할 것이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공군이 개입했을때는 각각 기록이 작성되어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래도 전투경과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유엔군과 중공군이 참전하기 이전의 전투에 대한 기록은 한국과 북한에만 남아 있다. 중국은 자신들이 참가한 이후의 전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정리했고 미국은 낙동강 이후 작전부터 본격적으로 정리를 했다. 따라서 미군과 중공군이 참가한 전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제대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초기에 대한 기록은 매우 객관성이 떨어진다. 우리는 북한군의 전사기록을 전혀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사를 기록했다. 아마 북한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사를 기록했을 것이고 한국군은 한국군이 유리한 방향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최소한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북한군의 전사기록을 참고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전사기록을 일반으로 공개하는 우리와 달리 북한은 상세한 전사기록은 군사비밀로 취급한다고 한다.

북한군의 기록을 구하기 어려우면 우리의 기록이라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면 된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기록들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한국전쟁에 관한 국방부와 육군의 자료는 모두 공개적으로 발간이 되었는데 그 양이 책 100여권에 불과하다. 전쟁 당시의 작전명령과 전투상보등이 게재되어 있는 책으로 지금 현재 육군군사연구소에서 탈초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자료는 국회도서관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한국전쟁사료, 육군본부)

문제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에 관한 자료가 100여권 정도의 책자에 수록될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들이 그 정도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에 관한 상당수의 기록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6.25 전쟁 발발이후의 초기 기간 동안에 관한 기록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우리가 당시의 기록을 많이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육군본부가 발간한 한국전쟁사료를 살펴보면 전쟁초기 부분의 기록들이 제대로 수록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초기의 상황의 긴박하여 자료를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서일까 ? 물론 그럴 수고 있다. 아니면 고의로 없애 버렸을까 ? 아무런 증거도 없다. 무엇이라고 추측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전쟁초기 주요 지휘관들의 작전지휘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서 당시 기록을 고의적으로 없앴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중에서도 전쟁초기의 기록중에서 당시 초기 작전과 전투의 패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관한 부분들이 없는 것을 우연이라고 해야할지 고의라과 해야할 지 알수 없다.

결국 한국전쟁 초기 작전에 관해서 보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서는 북한의 전사기록과 한국전 당시 북한에 고문관을 파견했던 소련 문서고의 자료가 제대로 발굴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사 연구) 6.25 초기 전투가 잊혀진 이유와 한국군의 지적 능력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다탕성에 대한 검토 4 (종합)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3(기습의 작전적 전술적 측면), post 7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한국전쟁사 연구) 초기 전사기술의 문제점 post 4

(한국전쟁사 연구) 잘못한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가 소중한 이유, po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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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의 서사구조와 한국군의 지적 능력 저하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에 관한 기록을 읽어가다 보면 이상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서사구조가 점점 단순해지고 그 내용도 편협해진다는 것입니다. 한국군은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미 전사에 대한 기록을 위한 부서를 만듭니다. 아마 미국의 군사조직을 참고로 했을 것입니다. 미군은 대대급까지 전사장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전사를 기록해서 남깁니다. 조선시대의 사관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은 그런 기록을 바탕으로 전사를 작성한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영화중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Band of Brothers는 대대의 전사장교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10부작 시리즈 입니다. 2001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들었습니다. 혹시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전쟁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지. 전쟁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잘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미군의 조직을 참고로 한국군 육군에서는 전사감실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전쟁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고 보관했습니다. 그런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 육군은 전쟁초기 부터 활발하게 전사기록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전쟁이 끝나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에 대한 기록들이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전쟁초기에는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와 교수들이 전사기록에 많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전쟁통에 대학도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 전사를 기록하는데 학자들이 동원된 것이지요. 제가 들었던 바에 따르면 당시 군에서 주는 봉급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의 폭과 방향이 좁아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북한군의 기습으로 인해 불가항력의 패배를 당했다는 방향으로 전사를 기술하다보니 왜 패배했는지 어떻게 성공했는지에 대한 검토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당시 초기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내용들은 거의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춘천에서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던 6사단이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막아낸 것을 춘천대첩이라고 하면서 국방부 차원의 전승기념 행사를 합니다만 1970년대 중반까지 춘천전투는 승리한 전투로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1970년 중반 일본의 자위대 장교가 한국전쟁에 대한 전사를 작성하면서 당시 개방된 소련의 자료를 확인하면서 춘천전투를 승리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당시 북한군 2군단은 춘천 방면에서 수원으로 진출하여 한국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전쟁을 종결시키려고 했으나, 춘천지역에서 6사단이 2군단을 성공적으로 저지함으로써 북한군의 작전구상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그 이후 춘천전투는 6.25전쟁의 대첩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군은 춘천전투를 승리한 전투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 두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당시의 한국군이 생각하는 승리의 개념에 비추어 볼대 춘천전투를 승리라고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춘천전투에서 6사단은 적의 전진을 저지하기는 했지만 괴멸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3일간 춘천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했으나 춘천시에서의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육군본부의 지시를 받아 전선조정을 위해 철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전투를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철수한 전투를 승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두번째 춘천전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는 북한군의 초기기습에 따라 불가항력으로 패배했다는 한국전 초기의 서사구조의 타당성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에서 해당부대의 전사는 지휘관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에 따라 좌우되었다. 6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1966년 46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또한 춘전전투를 지휘했던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5.16 군사정변에 반대하다가 온갖 고초를 당했다. 결국 주요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의 주도권은 자연히 초기전투에서 패배를 당했던 군인들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두드러지게 만들 수 있는 춘천지역의 전투를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당시의 한국군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과 평가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춘천전투를 승리라고 한 것도 소련의 자료가 나왔기 때문이지 스스로 평가한 결과가 아니다. 스스로 한국전쟁 전체를 평가하여 어떤 작전이 중요했고 어떤 전투가 중요했는지에 대한 자체적인 평가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군이 작전과 전투를 재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의미에서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의 한국전쟁사를 볼 때 한국군의 지적인 능력과 분위기는 1970년 중반과 비추어 큰 차이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국 초기 북한의 기습에 의해 불가항력으로 패배했다는 서사구조는 초기작전과 전투를 보다 다양하게 바라볼수 있는 기회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이 작전과 전투를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지적능력 마저도 제거해 버린 것이다.

다음에는 초기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에 관해 정리하겠습니다.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다탕성에 대한 검토 4 (종합)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3(기습의 작전적 전술적 측면), post 7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한국전쟁사 연구) 초기 전사기술의 문제점 post 4

(한국전쟁사 연구) 잘못한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가 소중한 이유, po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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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다탕성에 대한 검토 4 (종합)

기습이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와 방법으로 적에게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는 점은 이전의 포스팅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즉 알고 있더라도 미처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 기습의 의미이다. 기습이란 내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적에게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기습이란 적이 내가 공격한다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에게 나의 의도를 숨기는 것은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전문 군사적인 용어로는 허위, 허식, 양동과 같은 방법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 차원에서 보았을때 북한의 남침을 기습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적어도 전략적, 작전적 측면에서는 전혀 기습이라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술적인 측면에서 기습을 당했다는 것도 뭔가 석연치 않다. 북한은 6.25일 새벽 4시에 일제 공격을 개시하기 한참 전에 이미 공격개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한국군은 6월 중순부터 경계강화를 하고있었고 6.25일 북한의 공격바로 직전에 경계강화지시를 해제했다. 따라서 북한이 한국군의 경계강화 해제를 기회로 삼아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했다는 것은 앞뒤 논리가 맞지 않는다. 한국군의 경계강화 해제를 이용한 일부지역의 도발은 가능할 수 있으나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면서 한국군의 경계강화 해제시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 처음부터 한국군 고위급에게 간첩이 잠입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특히 일본의 관동군 대대장으로 중국 팔로군과 전투를 했던 김석원은 1950년 초부터 지속적으로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6.24일 육군회관 낙성식을 빌미로 전전선의 사단장을 다 서울에 불러모아 술을 먹여서 떡이 되도록 만들었던 이유와 6.25 남침 바로 직전에 경계태세를 해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 당시 참모총장이던 채병덕은 하동지역에서 의용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려다가 갑자기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채병덕의 죽음을 놓고 말이 많았다. 채병덕을 저격한 사람이 국군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채병덕이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당시에는 서북청년단이 채병덕을 북한의 간첩이라고 보고 사살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기습의 정의를 고려해서 북한의 6.25 남침을 고려해보면 전술적 차원에서의 기습을 넘어가지 않는다. 아마도 기습의 요건중에서 많아도 20%이상을 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전선에 있던 병사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전면 남침이 기습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인 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6.25 전쟁은 기습이 아니라 일방적인 방심의 결과였다. 그 방심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무능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6.25 당시 한국군 고위급에 간첩이 있었다고 주장한 김석원은 당시의 무방비적 상황이 고의적이지 않고는 발생하기 어려웠다는 상황인식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채병덕은 전쟁직전까지 북한에 장비를 팔고 북어를 들여오는 등의 거래를 했던 사람이다. 즉 북한군과 전투를 하는 상황에서도 서로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이 채병덕을 간첩이라고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당시에 6.25전쟁을 북한군의 기습남침이라고 했을까 ? 필자는 여기에는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는 얄팍한 계산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당시의 자유당 정권은 초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북한의 기습남침을 강조하면서 정치 지도자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당연히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희석시킬 수 있는 기습남침이 면죄부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무도한 기습남침으로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당시의 현장 지휘관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되었다. 채병덕 한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자리를 지켰다.

이후 한국군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시 초기작전에서 패배한 패장들이었다. 1사단의 백선엽과 7사단의 유재흥이 대표적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북한의 기습남침은 완전하게 고정되어 버렸다. 그들은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초기의 패배를 북한의 기습남침에 의한 불가항력이라고 규정하면서 한국전쟁이 지니고 있는 풍부한 내용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한국전쟁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 놓기 위해서는 기존의 잘못된 서사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잘못 기술된 전사는 당연히 검토하고 개선해야할 것들을 그대로 남겨 놓은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전쟁의 경험을 군의 전투력을 개선하는데 활용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후 제대로된 검토가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 왜 한국군은 김일성이 별오리에서 자신들의 과오를 점검한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

전쟁은 비극이고 슬픈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인간의 삶이 가장 치열하게 부딪친 결과이다. 그 내용은 인문학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서사구조를 단순하게 왜곡시켜 버림으로써 우리는 한국전쟁이 담고 있는 많은 내용들을 깊숙하게 드려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해 버렸다.

초기 작전의 패배를 불가항력으로 인한 패배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한국전쟁을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다. 군사적인 측면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전쟁의 서사구조를 새롭게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3(기습의 작전적 전술적 측면), post 7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한국전쟁사 연구) 초기 전사기술의 문제점 post 4

(한국전쟁사 연구) 잘못한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가 소중한 이유, po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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