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의 서사구조가 전사기록에 미친 영향(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의 대전전투)

한국전쟁의 기습남침으로 인한 초기전투 패배의 불가피성이라는 점에서 전사를 기술하려 했던 서사구조는 그 이후 작전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는데 많은 장애를 초래했다. 그와 관련하여 이전에 홍천 전투와 개화산 전투의 의미를 살펴본 바 있다.

한국전쟁이 한숨을 돌리게 되는 계기는 한강 방어선에서 김홍일 장군이 약 6일정도를 버티어 주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남침하자 마자 김홍일 장군은 서울의 피탈은 불가피하다고 파악하고 천혜의 방어선인 한강선에서 방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군 제1사단, 제7사단은 각각 개성과 의정부 지역에서 지휘계통을 상실할 정도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국군은 부대단위로 철수하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흩어져 버렸다. 당시 김홍일 장군이 혼자서 한강이남에서 병사들을 수습해서 한강선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1주일간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이는 미국이 한국에 지상군을 파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와 작전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작전의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바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용병술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에 처음으로 투입된 미군인 스미스 특수부대와 대전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미 제24사단의 전투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전쟁사에서 스미스 특수부대와 미 제24사단의 대전전투는 패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의미에서 작전의 의미를 파악해 본다면 스미스 특수부대의 죽미령 전투와 미 제24사단의 대전전투를 패전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특히 한국의 전사에서 스미스 특수부대의 죽미령 전투와 미 제24사단의 대전 전투는 패전으로 엄격하게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 그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군들도 북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에 한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이 개성과 의정부에서 패배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과연 우리는 미군이 참전해서 치룬 죽미령 전투와 대전전투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미국은 지상군 참전을 결정했다. 미국 본토에서 지상군이 참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미국의 참전 결정이후 작전은 미본토에서 지상군을 투입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당시 미국은 정규사단을 제대로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동원을 해제하고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지 않는 것이 미국의 전통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지만 미국은 제대로된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는 우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던 1개 대대와 포병 1개 중대를 묶어서 스미스특수부대라고 명하고 한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제24사단에게 한국에 투입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제24사단은 본토의 미지상군 투입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임무였고 스미스 특수부대는 제24사단이 일본에서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 임무였다.

맥아더는 6월 30일 24사단을 한국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바로 그날 오후 3시에 스미스 특수부대가 부산에 공수되었다.

7월 3일과 4일에 걸쳐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스미스 특수부대는 7월 5일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조우하여 약 6시간 정도를 지연시켰다. 이 전투에서 미군 포병대대장이던 페리 중령도 전사했다.

이후 딘소장의 제24사단은 약 20일까지 대전까지 전투를 치루었다. 잘아는 바와 같이 본인도 포로가 되었다. 문제는 죽미령에서 대전까지 15일간 북한군의 주공부대였던 3,4사단과 제105 전차사단을 저지했다는 것이다.

이작전을 두고 미국에서도 성공이냐 실패냐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맥아더 원수는 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의 작전으로 북괴군의 진출을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는 북한군 정예부대에 맞서 제24사단을 투입하여 중과부적의 전투를 하게 한 것을 맥아더가 잘못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일 맥아더가 제24사단을 투입하지 않았다면 본토에서 미 지상군이 미처 도착도 하기전에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넜을 것이다.

러시아는 공간을 양보하고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이용한다고 한다. 광대한 영토를 조금씩 내어주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그사이에 전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 반격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미군 병사들의 생명을 내어주고 시간을 벌었다. 즉 피를 내주고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을 바둑의 사석과 같이 운용했다. 아마 미국과 같은 문화권에서는 그런 부대 운용은 용납받기 어려울 것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그런 시각에서 맥아더의 제24사단 운용을 평가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때 만일 맥아더가 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을 사석으로 활용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9월이전에 종결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게 보면 한국전쟁에서 맥아더의 가장 빛나는 작전은 제24사단의 운용인지도 모른다.

관점을 달리보면 전투와 작전의 의미가 완전하게 달라진다. 우리가 만든 전사는 그런 해석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세계 최강의 미군도 북한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사 연구) 6.25 전쟁 기습 남침론의 함의 대한 참고

(한국 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의 서사구조로 인한 전사기록의 왜곡문제(홍천 전투와 개화산 전투)

(한국 전쟁사 연구) 6.25 초기 작전과 자료의 문제

(한국전쟁사 연구) 6.25 초기 전투가 잊혀진 이유와 한국군의 지적 능력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다탕성에 대한 검토 4 (종합)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3(기습의 작전적 전술적 측면), post 7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한국전쟁사 연구) 초기 전사기술의 문제점 post 4

(한국전쟁사 연구) 잘못한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가 소중한 이유, po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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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1947. Post 28.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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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와 관련하여 미국무장관 마샬과 소련 외교장관 몰로토프의 교섭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미국은 미군의 동원해제라는 국내적 요구와 공산주의 팽차의 방지라는 상반되는 정책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소련은 한반도 북부의 완충지대 확보라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없이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에 합의하게 됩니다.

결국 이번 웨더스비 교수의 포스팅은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현실적 한계를 보다 분명하게 하는 과정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게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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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우리는 1947년 봄 미국이 봉쇄전략을 강화해나가면서, 동시에 군대를 지속적으로 동원해제 하는 것을 보았다. 군대를 줄이고자하는 정책은 워싱턴으로 하여금 한국의 점령을 종식시키는 방향으로 밀어 부쳤으며, 봉쇄를 강화하는 정책은 북한이 남한지역으로 소련이 팽창하지 않도록 하기를 요구했다. 미국이 4월 외무장관 회담에서 이문제를 논의할 준비를 할 때, 한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련과 협조가 가능한지를 자신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양국이 모스크바 회담에서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마샬 국무장관은 회담 시작할때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매우 정확하게 소련이 한국의 경제적 통일을 방해하는 데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 지휘관은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구하였으나 소련 지휘관들이 거절했다고 언급했다. 마샬은 또 소련이 협상을 교착시키곤 했다고 통상적인 주장을 했다. 그는 이런 교착은 “민주적”이란 용어에 특정한 정의를 주장하면서 한국 지도자들의 대부분을 위원회에서 배제하려는 소련의 의도에 의해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이익을 위해, 양국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바탕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할 것을 제시했다.

마샬은 미국은 자신의 지역에서 1945년 모스크바 협상의 이행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구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만일 소련이 서울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에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은 일방적으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협박은 작동했다. 몰로토프는 그의 답변에서어떤 정당이 참가할 것인가에 대한 소련의 라인을 주장하면서도, 5월 20일 미소공동위의 재개에 동의했다. 소련 외무장관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업무는 “한국에 대한 모스크바 합의의 정확한 이행에 기초”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샬은 몰로토프가 “정확한 이행”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한국의 지도자 모두가 참가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금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이전에 표현된 정당의 견해를 이유로 협의의 자격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반복했다. 그러나 마샬은 회담의 재개를 원했기 때문에, 협상방안을 제시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점령국과 협조를 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과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양측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업무에 “자극적이고 선동적으로 ” 반대하는 어떠한 정당이나 집단을 배제하는 정도에서 마샬의 새로운 조건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마샬은, 미국무부 정무실 랭돈(Langdon)이 만일 완전한 표현이 자유를 확보하지 않으면 남한의 우파정당은 위원회에 참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5월 12일 몰로토프의 조건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련과 미국의 지휘관들이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을 재개했을 때, 한국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협상에 성공할 것이라는 어떠한 기대도 없이 회담한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한반도의 북부지역에 만들어 놓은 안보적 완충지역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으며, 미국은 서울에 공산주의 정부의 수립에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정치적 무대의 한 구석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공연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관중은 누구였을까 ?

다음 포스트에서는 1947년 외무장관회담의 주요안건이 되었던 독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알아 보겠습니다. 독일에 두개의 국가를 수립하게 된 조치에 대한 열띤 논쟁은 소련과 미국이 왜 서울에서 희망없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하였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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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28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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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Marshall

In the last post, we saw that as the US solidified its containment policy in the spring of 1947, it was at the same time continuing the postwar demobilization of its armed forces. The latter policy pushed Washington to end the occupation of Korea, while the former policy demanded that it do so without allowing the Soviet Union to expand its area of control into the southern half of Korea. As the US prepared to discuss the issue at the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in April, it had no confidence that it would be able to cooperate with the Soviet Union to create a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It is surprising, therefore, that the two powers agreed to resume meetings of the Joint Commission when they discussed Korea at the Moscow conference.

Secretary of State Marshall raised the issue in a letter sent to Foreign Minister Molotov at the beginning of the conference. He began, quite correctly, by charging that the Soviet Union was responsible for preventing the economic unification of Korea. He then noted that the American commander had requested that the Joint Commission resume but the Soviet commander had refused. Marshall also exposed the flimsy pretense the Soviets had used to deadlock the negotiations. He stated that the impasse was caused by the Soviet desire to exclude the majority of Korean leaders from consultation by insisting on a particular definition of the word “democratic.” He recommended that in the interests of Korea’s well-being, the two powers should reconvene the Joint Commission on the basis of respect for freedom of expression.

Marshall strengthened the call for resumption of the Joint Commission by stating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begin implementing the 1945 Moscow agreement in its own zone. In other words, if the Soviets did not cooperate to create a provisional government in Seoul, the Americans would do so unilaterally. This threat worked. In his reply, Molotov agreed to reconvene the Joint Commission on May 20, though he held to the Soviet line regarding which political parties could be consulted. The Soviet foreign minister insisted that the Joint Commission’s work be done “on a basis of an exact execution of the Moscow Agreement on Korea.”

Marshall understood that Molotov would define “exact execution” as requiring the disqualification of all Korean leaders who opposed trusteeship. He therefore reiterated the US position that the Joint Commission should not deny the right of consultation because of views the political parties had previously expressed. However, since he wanted to resume the meetings, Marshall offered a compromise solution. The Joint Commission would consult with all persons who were willing to cooperate with the occupying powers.

Molotov accepted Marshall’s new condition, as long as the two sides excluded any party or group that “fomented or instigated” active opposition to the work of the Joint Commission. Marshall then approved Molotov’s terms on May 12, despite advice from State Department Political Officer Langdon that rightist parties in the South would not participate in the Commission if they did not have complete freedom of expression.

We can see, therefore, that when the Soviet and American commands resumed meetings of the Joint Commission in May 1947, they did so without any expectation that the negotiations would succeed in creating a provisional government for Korea. The Soviets were not going to give up the security buffer they had created in the northern half of the peninsula and the Americans were not going to agree to create a communist government in Seoul. The Joint Commission was, in effect, going to be a piece of political theater. But what was the purpose of this performance? Who was the audience?

In the next post, we will look at the discussion of the German question, which was the main agenda item at the April 1947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The heated debate over actions that would lead to the creation of two states in Germany provides clues as to why the Soviets and Americans resumed hopeless meetings of the Joint Commission in Seoul.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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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칼럼) 전략의 우선순위, 경제와 안보 중에서

공자에게 누가 물었다. 백성과 군주가 서로 믿는 것, 백성이 먹고 살 수 있는 식량.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사 중에서 우선순서를 정하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공자는 세가지 중에서 버려야 한다면 가장 먼저 군대를 버리고 두번재는 식량을 버리되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백성과 군주의 신뢰라고 이야기 했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젊을때 들어보기도 했고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 의미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들어 맞을지 몰랐다.

우선 공자가 그런 기준을 세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자. 아마도 공자는 그 나라가 안정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공자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정치학자이자 윤리학자 정도 되지 않나 생각한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안정성을 바탕으로 국력이 커져서 그 힘이 밖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아마도 당시의 판단기준이 아니었나 한다.

오늘날에도 역시 그런 기준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그런 기준으로 먼저 북한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해 수백만명이 굶어 죽은 것을 감수했다. 공자가 말한것과 반대로 했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군사력을 위해서 식량을 버렸다. 그 결과 지금 핵을 보유했다. 북한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 핵을 보유한 북한이 더 안전해지고 더 번영할 수 있는 상황인가 ?

북한은 핵무기를 이용해서 미국의 제재를 해소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요원한 희망일 뿐이다. 북한에 만일 지금과 같은 상황이 변화없이 계속된다면 내부의 취약성은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의해서 무너질 가능성이 더 높아 진 것이다. 북한은 군사를 키우기 위해서 주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포기했다. 그 결과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군주와 백성의 신뢰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김정은이 남북정상회담에서인가 자신이 편하게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북한의 통치체제가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을 이룩한 이유가 무엇일까 ? 결국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기준으로 우리 정부의 정책을 평가해보면 어떨까 ? 요즘 우리 정부는 북한과 제3차 정상회담을 추진하느라고 바쁜 모양이다. 장관급 회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 날짜 마자 잡지 못했다. 주변사람들은 문재인 정부가 남북문제를 잘 다루어서 지지도를 끌어 올리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최저 임금문제니 고용부진 등의 문제로 인해 지지도가 올라갈 일이 없으니 남북관계로 돌파구를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하는 말은 외부적인 문제보다는 내부적인 문제 그것도 경제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우리 정부도 북한의 지도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 같다.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정치적 고비를 타개하고자 하는 현정부의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은 것 같다. 고위급 회담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 날짜 마저 잡지 못했다. 북한은 우리의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셈법에 넘어가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현재의 우리 정부도 이런 저런 상황에서 모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야기를 많이 한다. 주로 부정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트럼프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아주 간단하다. 외교나 군사를 위해 경제를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제가 제일 중요하니 자신은 여기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이 유치한 것 같지만 그야 말로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들어 중국이 미국의 위세에 밀리고 있는 듯 하다.

공자의 말을 오늘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경제는 군사와 외교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잡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쉽고 당연한 이치를 제대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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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연구) 6.25 전쟁 기습 남침론의 함의 대한 참고

기습남침론의 함의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 보았다. 아직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널뛰는 것 처럼 논지가 왔다갔다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승만과 백선엽 및 유재흥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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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기습남침으로 규정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다. 한국전쟁을 기습남침으로 규정하는 것은 당시 집권세력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게도 매우 유리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승만은 국정최고 책임자로서 기습남침론을 이유로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당시 패전한 지휘관들도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다. 특히 제1사단장 백선엽과 제7사단장 유재흥이 한국전쟁이후 이승만의 후원으로 승승장구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승만과 백선엽 그리고 유재흥은 초기 전투패배의 책임을 같이 져야 했던 인물이었기에 운명공동체와 같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쟁초기 한강선 방어선을 구축해서 북한군의 한강선 도하를 1주일 이상 막아냄으로써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던 김홍일 장군은 그 이후 석연찮은 이유로 이승만으로 부터 전역을 당하고 만다. 김홍일 장군에 대한 전기 소설을 쓴 바 있는 박경석은 이승만이 자신의 후계자로 김홍일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백선엽에게 듣고서 김홍일을 바로 전역시켰다는 것을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물론 백선엽이 중국계 출신인 김홍일을 몰아내기 위한 간계인지 모르나 그것도 이승만과 백선엽간 모종의 공감대가 없었으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미국의 한국전 참전 결정과정에서 북한의 남침기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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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남침기습론은 미국의 조야에도 매우 의미있는 담론이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북한의 기습남침을 부도덕한 전쟁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이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폭격으로 전 국민이 단결하여 전쟁에 임할 수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미국은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남침하는 것을 정의롭지 못한 전쟁으로 규정할 수 있었고 즉각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소전에서 스탈린 과오론의 의미와 한국전 남침기습론의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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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에서 소련은 초기에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이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소련 공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소련의 간첩 조르게는 독일군의 공격시간까지 정확하게 보고했다. 소련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제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공격해오리라는 정보를 정확하게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초기 패배에 대한 원인을 모두 스탈린의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돌렸다.

스탈린의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초기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주장은 초기 전쟁의 패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스탈린 혼자 뒤집어 쓰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연 스탈린 혼자 책임을 모두 지는 것이 온당할까 ? 아무리 스탈린 1인 독재국가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스탈린 혼자 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 물론 거기에는 스탈린 당시의 어마어마한 숙청이라는 상황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리면 살아 남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판단을 재고하기 위한 의미있는 시도가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것을 스탈린에게 책임을 묻고 나자 역사학자들은 당연히 해야할 질문마저 하지 않았다. 왜 스탈린은 독일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믿지 않았을까 ? 스탈린은 루즈벨트와 처칠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히틀러는 믿을 수 있어도 루즈벨트와 처칠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억이다. 우리는 처칠을 위대한 인물로 추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처칠은 그이전부터 소련에 대해 매우 강력한 대응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처칠이나 루즈벨트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처칠은 독일과 소련이 서로 싸워서 망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스탈린은 서방에서 들어온 정보가 독일과 소련이 서로 싸우게 만들고자 하는 공작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독일의 공격에 의해 당한 소련의 패배는 스탈린이 서방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한국전과 독소전에서 한국과 소련이 초기에 당한 패배의 이유는 다르다. 그러나 남침기습론과 스탈린 오판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매우 비슷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혀 다른 듯 닮은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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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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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더스비 교수께서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숙소를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로 기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늘의 포스팅은 당시 트루만 행정부가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국민들의 정치적 압력과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방안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미국은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으며 한국이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원조를 포함한 조치를 검토하는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미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유럽문제까지 맞물려 복잡한 과정속에서 한국문제가 처리되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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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트에서 우리는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 선언 직후 미국이왜 한국에 2억달러의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확대하려고 고려했는지를 알아 보았다. 이는 남한에 대한 지원이 남한지역에서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남한을 소련의 야욕에 취약하게 남겨두지 않으면서 미국의 점령군을 철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순전히 낙관적인 관점은 “병사들을 고항으로 돌러 보내라”라고하는 미국내의 점증하는 압력에 의해 점화되었다. 한국의 일부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향 신문에 자신들의 열악한 생활환경에 대해 불평하고 장교들의 부패와 가혹행위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트루만 행정부는 점령을 종식시키라는 정치적 압력에 직면함과 동시에 한국의 지원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했다. 전쟁성 차관 패터슨에게 보낸 국무부의 계획은 새로운 임시정부에 5억 4천만 달러를 제공하고 미국의 군사관리를 폭넓은 정책 결정능력으로 한국에 조언할 수 있는 민간인 고문관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냉전의 전선이 강화됨에 따라, 미국 관리들은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련과 협조하는데 점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국무부는 만일 공동위원회가 다시 개최된다면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명석한 두뇌의 군인이었던 패터슨은 경제지원이 남한의 상황을 개선할 것이라는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대신 가능한 한 빨리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하지장군은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지원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는 언론기자회견에서 “만일 우리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약속을 혼자서라도 이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3상회담의 합의를 공공연하게 위반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하지 장군은 미국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지 않으며, 다만 남한에서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건전한 정부를 강화하려고 한다고 어정쩡하게 선언했다.

1947년 봄까지 트루만은 미국이 한국에 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때 행정부는 만일 소련이 공동위원회 협상을 재개하는 것을 거부하면 미국이 이 원조 프로그램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더욱이 마지막으로 이문제를 유엔으로 넘기기로 했다. 4월 8일 존 카터 빈센트는 이러한 견해를 “우리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한국을 소련의 지배에 포기해버리는 대안을 제외할 때 우리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개입 축소]를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한 방법이다”라고 딘 에치슨에게 요약해서 보고했다.

1947년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담에서 소련과 서방동맹국간 협조의 불가능성은 점점 명백해졌다. 회담은 주요의제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평화조약에 대한 합의 도달에 실패했다. 국무장관 조지 마샬은 “ 소련은 부적절한 지역과 과도한 인구로 인해 경제적으로 재앙을 겪을 있는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을 장악하여 독일에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수립하려 하고 있으며, 생산물의 상당수를 원칙적으로 소련에 대한 보상으로 저당잡으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미국의 보조금을 명백하게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과 유럽의 경제생활을 붕괴시키고 독재의 출현과 소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회담의 결과를 보고했다.

마샬 장관은 또한 모스크바 회담에서 한국문제를 제기하여, 경제적 통합의 재건과 임시정부수립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소련을 비난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양측이 공동위의 진전이 없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며 놀랍게도 어떻게 회담을 재개하게 되었는지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이번 포스팅은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를 참고했으며

마샬장관의 보고서 내용은 온라인에 올라와 있는 The Avalon Project, Documents in Law, History, and Diplomacy of the Yale University Law School.]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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