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30

Prof. Kathryn Weathersby

스탈린 트루만.jpg

It seems odd that just a year after the end of the war,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would find themselves competing for the support of the German people, but that was the effect of the new superpower rivalry. As we discussed in the last post, Moscow desperately wanted Germany to remain united so that the Soviet Union could get reparations from the industrial regions in the Western zones. As the United States, Britain, and France took steps to coordinate occupation policy in their zones, the Soviets feared, quite correctly, that such measures would lead to the creation of a separate state out of the three Western zones.

To put pressure on the Western powers to deter them from dividing Germany, Moscow began to appeal to German public opinion. Already in the summer of 1946, Foreign Minister Molotov abruptly changed Moscow’s harshly punitive approach to the occupation and began instead to accuse the Western powers of plotting to prevent German unity and restoration. He claimed the United States was destroying German industrial potential by imposing restrictions on its coal and steel production. He called for the creation of a single German government while denouncing France for demanding that the industrial Ruhr area be detached from the rest of Germany. In their own zone, the Soviets posed as friends of German nationalism by allowing the Communist Party to challenge the postwar border with Poland, which had left about a third of German territory in the new Polish state. It was the Soviet Union that had redrawn this border at the end of the war, as a way to compensate Poland for land Moscow took in the East. It was thus important that the Soviets counter this reality by presenting themselves as the true champion of the German people.

In response to these efforts, Secretary of State Byrnes delivered a major speech in Stuttgart to a gathering of 1400 German dignitaries. He called for the economic rehabilitation of Germany to help the Germans win back “an honorable place among the free and peace-loving nations.” He announced that the French proposal to detach the Ruhr area would not be carried out and called for the prompt formation of a provisional government for all of Germany. The Secretary of State also endorsed German protests against the new Soviet-drawn border with Poland.

Despite their public statements in support of German unity, the Americans and British took steps to merge their zones. Nonetheless, at the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meeting in Moscow in March 1947, they made one last effort to reach an agreement with the Soviets on occupation policy for Germany that would avoid creating a separate state in the West. The most immediate concern of the Western allies was that Moscow refused to send foodstuffs to the Western zones from their agriculturally rich region in the East. As a result, American and British taxpayers had to provide food and other basic needs for the German population in the Western zones. The US and UK were therefore desperate to create a governing body in Germany that could make the country self-sufficient. At the same time, however, given the worldwide political rivalry with the Soviet Union, they did not want to suffer the political damage that would come from being seen as responsible for dividing the country.

The discussion at the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broke down over questions of how nationwide governing bodies for Germany should be established and who should run them. Nonetheless, since they wanted to be seen as supporting national unity in principle, the Soviets and Americans agreed to resume meetings of the Joint Commission in Seoul, as we discussed in Post #28. We will examine in the next post the reaction within Korea to the news that the Joint Commission would resume its meetings in the late spring of 1947.

[Sources: This post relies on the discussion of the German issue found in William R. Keylor, A World of Nations: The International Order Since 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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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의 단계구분에 대한 서술의 변화에 대해

이전의 포스팅에서 북한군이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제1군단에 전투력의 주안이 주어졌다가 수원이후부터는 제2군단의 중동부 지역으로 전력이 더 집중배치 된 것을 확인해 보았다.

서울 - 수원

제 1군단 6사단 1사단 3사단 4사단 105 전차사단
제 2군단 2사단 12 사단 5사단

수원 이후

제1군단 6사단 3사단 4사단 105 전차사단(-1)
제2군단 1사단 2사단 12사단 8사단 5사단(+2)

북한군의 전투력 배치의 우선순위에 대한 자료를 확인하다 보니 그 배치가 작전단계에 대한 기술에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서울방어선부터 낙동강 방어선까지 작전단계를 어떻게 구분했는가를 살펴보았다.
한국군이 제일 먼저 작성한 전사책을 찾아 보았다.

“육이오 사변 육군전사”라는 책으로 모두 본문 7권에 부록 2권으로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것은 4285년 1월이니 전쟁이 발발하고 2년만에 전사책을 편찬했던 것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책을 보고 놀랐다, 당시 한국군이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이정도의 자료를 정리하여 책을 편찬할 능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경외심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52년 1월에 당시 진행되고 있는 전사책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전사 연구자들로부터 이책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듣지를 못했다. 다행이 이책을 찾게 되었다. 이책은 전쟁 진행중에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에 장단점이 존재한다. 단점은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상황을 기술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장점은 한국전쟁사의 고질적 문제인 조작에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책을 읽어보면서 느낀 점은 이책을 작성한 사람들이 군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성한 기법이나 기술한 방법을 보건데 당대 최고 수준의 역사학자들이 모여서 작성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작전단계별로 북한군의 편성과정을 확인하는 것이 쉬울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작전단계에 대한 기술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에서 만든 대표적인 전사책에서 제시한 작전단계를 하나씩 검토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오늘은 1952년 (단기4235년)에 작성된 육군전사에 기술된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작전단계를 정리해보겠다.
편의상 “육군전사1952”로 명명하고자 한다.

북한군의 남침이후 한강부근 전투까지인 7월 4일까지를 제1기로

그리고 국제연합군의 참전과 충북의 제천 단양지구, 진천 무극리 충주, 충남의 오산 천안 금강, 경북 동해 영덕지역의 전투까지를 제2기로

금강 방어선 철수 부터 낙동강 방어선 구축까지를 제3기로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을 제4기로 구분했다.

시기구분을 날짜로 굳이 정하지 않았으며 이는 전투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보다는 상황으로 작전단계를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구분은 단기 4291년(서기 1958년) 발간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괴뢰군 연혁”은 5개 단계로 늘어난다. 그와 관련해서는 다음에 기술토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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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편성에 관한 국방부와 육군본부 기록의 차이에 관한 소고

한국전쟁에서의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각각의 편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북한군의 편성과 장비가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중에서 편성에 대한 이해는 기초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초기 작전과 전투의 진행과정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의외로 한국군의 작전과 전투에 관한 연구에서 상대방인 북한군의 편성 즉 군사용어로는 전투서열이라고 하는 부분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존의 자료를 살펴본 결과, 대부분의 한국전 당시 작전과 전투에 대한 기록은 북한군의 의도와 한국군의 대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규명하기 보다는 한국군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데 치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군에서 전사연구를 오래한 전문가들에게 필자가 가지고 있던 의문점을 물어 보았다. 그들의 답은 아직까지도 한국군의 전사기록은 작전과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규명하고 거기에 대한 교훈을 도출하기에 앞서 참전자들이 보상을 받기 위한 근거자료로서의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기록보다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공을 세웠다하는 것을 방증하기 위한 자료로서 전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당연히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에 관한 기록은 상대방과 나의 의지의 싸움이라는 전사 본래의 의미에 부합되도록 다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전쟁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이다.

각설하고 앞에서 북한군의 전투서열 변화를 통해서 그들의 작전의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우선 38선과 수원선이후 북한군의 전투서열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동안 통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과 달리 북한군은 수원이후 주공을 서부 전선의 제1군단이 아니라 중동부 및 동부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제2군단으로 전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그 과정에서 잘 알지 못했던 북한군의 사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군 제7, 8, 9 사단들이다.
한국 국방부의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편찬한 공간사 기록에 의하면 북한군 제 7, 8, 9사단에 관한 기록들이 없었다. 그들 사단들이 어떻게 편성되었는지를 공간사에 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가없었다.

그러던 중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단기 4292년 즉 서기 1959년 경 펴낸 “괴뢰군 연혁”이라는 자료를 찾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공간사 기록보다 수십년 일찍 펴낸 육군본부의 괴뢰군 연혁이 초기 북한군 전투서열을 훨씬 정확하게 기술해 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제시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전투서열을 다음과 같다.

북한군 전쟁직전 전투서열.png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제13사단과 제15사단을 제1군단 예비로 기술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전차사단은 제195 전차여단 1개부대만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군사편찬연구소가 제시한 전투서열표는 북한군 여단급이상 부대를 망라한 것이다.

그러나 1959년에 편찬된 육군본부 정보본부의 전투서열을 국방부의 전투서열보다 훨씬 더 자세한 것 같다.
우선 육군본부의 “괴뢰군 연혁”은 전쟁당시 이미 북한군이 제7,8 2 개 보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제 16및 제17 전차사단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괴뢰군 연혁”은 제105 전차여단을 사단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사단과 여단의 규모에 대해서는 일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전투서열 1.jpg

전투서열 2.jpg

상기 페이지에서 제12 사단은 제13사단의 오타이다.

그러나 이미 당시 제16, 17 전차여단은 편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괴뢰군 연혁”은 제16전차여단이 제105 전차여단과 함께 38선을 넘어 서울로 진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한다.

전쟁직전 배치도.jpg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괴뢰군 연혁”에서 표시된 부대의 위치를 보건데 제13, 15사단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기록처럼 제1군단의 예비라고 하기는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괴뢰군 연혁에 따르면 북한군 제13, 15사단은 각각 신의주와 회령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중인 제1군단의 예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황해도 일원에 있었던 7사단이나 8사단을 제1군단의 예비로 활용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일단 육군본부의 “괴뢰군 연혁”은 7,8, 10, 13, 15 5개 보병사단과 제17전차여단을 북한군의 예비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군단의 예비에 관해서는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만 가지고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 공간사 기록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괴뢰군 연혁”중 어떤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시 “괴뢰군 연혁”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록과 증언을 참고하여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추가적인 연구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점점 더 재미있는 내용이 많아지는 것 같다. 혹시 관심있는 분들 중에서 이부분과 관련하여 포스팅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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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초기 북한군 군단급 부대 편성변화와 작전의도의 상관관계

한국전쟁초기 북한군은 서울방향에 주공을 지향했다. 이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군은 2개의 군단으로 남침을 시작했다.

그중 제1군단은 서울과 서부지역을 지향했으며 주요부대는 6사단 1사단 3사단 4사단 그리고 105전차사단이었다. 예비는 13사단과 15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제1군단은 7개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는 전체 북한군의 70%를 넘는 수준이었다.

제2군단은 춘천과 동해안을 지향했는데 제2사단과 12사단 그리고 5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사단급 보다 작은 여러부대들이 있었으나 제2군단은 1군단의 진출여건을 보장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군은 전력의 약 70%를 서울에 집중했다. 한쪽 방향에 약 70%정도의 전력을 집중한 것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수원으로 넘어오면서 군단의 편성에 변화가 발생했다. 정확한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료를 더 살펴보아야 하겠으나 북한군 제1군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제1사단과 제1군단의 예비이던 13사단과 15사단이 제2군단으로 넘어간 것이다.

3개사단이 제2군단으로 넘어가면서 제2군단이 수원이후의 작전에서 주공이 되었다. 우리는 수원이후에도 경부축선을 지향하던 제1군단이 북한군의 주공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3개사단의 전력을 중부전선의 제2군단으로 전환하면서 중동부 지역의 제2군단을 주공으로 선정한 것이다.

특히 북한군 최정예 1사단과 아직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아서 전투력 수준이 높았던 제13, 15사단을 제2군단으로 넘겨준 것은 북한군이 중동부 방면에 전투력을 집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여 파견한 스미스 특수부대를 위시한 제24사단이 경부가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바로 그순간 북한군의 주력은 한국군이 담당하고 있던 중동부 전선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군 제1군단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으로 미 제24사단을 견제하고 있었고 북괴군 주공인 제2군단은 중동부 지역을 지향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한다는 결정을 듣고 이미 작전의 구상을 변경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군은 당연히 세계최강의 미군에 주공을 지향하기 보다는 붕괴해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한국군에게 결정적인 전투를 강요하면서 신속하게 전쟁을 종결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전력의 전환은 작전술적으로 매우 능수 능란한 솜씨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 당시에 소련의 군사고문관들이 북한군의 작전계획구상에 참가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부분이다.

이제까지 한국전쟁의 초기전투에서 서울이 붕괴된다음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은 경부축선의 미 제24사단의 전투였다. 그러나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미 북한은 이러한 사실을 다 염두에 두고 제2군단을 주공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중동부 지역을 담당했던 한국군이 어떻게 북한군 제2군단의 강력한 압력을 견디어 냈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당시 한국군 작전을 지휘했던 인물은 혈혈단신으로 한강선 방어선을 구축했던 김홍일 장군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이후 한국군 유일의 제1군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선 구축까지 지휘봉을 잡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북한군 제2군단의 진출과 한국군의 방어작전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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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연구) 38선 돌파와 북한의 군사력 운용의도 그리고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의미

북한이 한국전쟁을 시작할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자신들이 가진 군사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운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될 즈음 북한군의 군사력은 크게 세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한내부에서 편성되고 조직된 사단들이다. 이런 사단들은 1,2,3,4 사단과 105 전차사단이다. 소련군의 지도에 의해서 창설된 사단들이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마자 북한군의 실질적인 창군은 시작되었으며 주로 소련출신과 북한내부의 인원으로 충원된 부대가 편성되었다. 물론 당시의 주요 무기들은 모두 소련제가 지급되었다.

두번째는 중공군에서 들어온 군대이다. 물론 1949년에도 일부 병력이 중공군에서 북한군으로 넘어와서 사단편성에 참가하지만 1950년 3월에 중국에서 3개사단(6, 12, 5)사단이 들어오면서 실질적인 전쟁준비가 갖추어 졌다.

세번째는 예비이다. 북한은 1군단에 2개사단(13, 15), 전략예비에 1개사단(10)을 준비했다.

북한은 서울을 지향하는 축선에 3개의 보병사단(3,4,1)과 105 전차사단을 집중투입했다. 그리고 김포방면에 6사단, 춘천축선에 2사단과 12 사단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5사단을 투입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내전에서 상당한 전투경험을 치르고 북한에 들어온 3개사단을 어떻게 운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앞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강력하게 편성된 4개의 사단을 집중투입하여 서울방향으로 진출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서울로 신속하게 진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집중적인 군사력 운용은 소련군 작전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집중적으로 군사력을 운용하여 적을 조기에 붕괴시키면 신속하게 계속진출하여 상대방이 대비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상대방이 예비대를 투입하여 강력하게 편성된 주공의 진출을 저지하면 주공의 양측면에 위치한 조공부대가 신속하게 진출하여 상대방이 투입한 예비대의 후방까지 진출하여 조기에 작전을 종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독일과의 동부전선에서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당연히 상대방도 건곤일척의 싸움을 하는 바이기 때문에 중앙이 돌파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런 노력을 역이용하는 것이 소련군 작전술의 일반적인 경향인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공의 좌우에서 우회기동하여 투입된 상대방의 예비대 후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침 북한은 국공내전을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갖춘 3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제일 먼저 6사단으로 하여금 김포를 거쳐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함으로써 한국군을 한강선 북방에서 섬멸하고자 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미흡할 경우를 고려하여 춘천에서 수원방향으로 신속하게 진출하여 한국군에 대한 이중 포위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한국군 지휘관들은 빨치산 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예비사단들을 전방지역으로 투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 고문관들은 한국군의 그러한 조치가 오히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하여 전방지역 투입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한국군 7사단지역으로 집중하여 공격했고 7사단 장병들의 용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 이후 한국군은 2사단을 축차적으로 투입하였으나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시키지 못한채 제2사단 전체가 소멸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북한군 6사단의 진출과 관련된 것이다. 만일 북한군 6사단이 신속하게 진출하여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했더라면 한국전쟁은 바로 끝나버리는 상황이 될수도 있었던 것이다. 북한군 제6사단의 초기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백선엽이 지휘하던 한국군 제1사단은 6월 25일 하루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1사단의 붕괴와 육군본부는 6월 26일부로 김포지구에 남산학교라고 불리던 육군정보학교를 중심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수립하여 북한군이 김포반도로 도하해서 진출하는 것을 대비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 이후 잡다한 부대로 편성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북한군 6사단과 격전을 벌였다. 당시 김포지구전투 사령부 소속 병력 거의 전부가 전사하는 상황을 겪었다. 초대 사령관이었던 학교장 계인주 대령은 현지 이탈하여 도망쳐 버렸다. 부교장이던 최복수 중령과 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이 그 이후 제2대, 3대 사령관을 맡으면서 분전한다. 그 전투과정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병옥 중령은 김포공항으로 진출한 북한군 6사단에 대한 공격에 앞장서서 짚차에 기관총을 달고 사격하면서 산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최복수 중령은 김포개화산에서 북한군 6사단의 공격에 맞서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자 그 자리에서 권총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육군 예비이던 3사단과 제1사단의 13연대가 북한군 6사단의 진출을 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과정도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인지 분명하게 알수는 없지만 국공내전을 치른 북한의 정예 6사단은 신속하게 영등포로 진출하여 서울을 후방에서 포위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한국전 초기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이 바로 북한군 6사단의 진출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국군 6사단이 춘천전투에서 승리를 함으로써 북한군이 한국군이 포위되는 위기를 넘겼다고 하면서 춘천전투를 춘천대첩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이런 평가는 일본의 자위대 장교가 쓴 전사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의 전사연구는 1970년대 중반 일본의 전사연구 수준에서 단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만일 한국군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북한군 6사단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했었다면 지금 우리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살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진정한 의미에서 친일을 극복하고 일본을 넘는 것은 우리의 역량에 달려있다. 그저 구호만가지고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극일은 불가능하다. 능력과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자기나라에서 수백만명이 죽은 전쟁 하나도 제대로 새롭게 해석하고 정리하지 못하는 나라를 누가 존중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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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칼럼)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중국의 전략해부, 정부의 대북특사단 파견을 보면서

북한 핵문제가 다시 난관에 부딪친 모양이다. 그런 징조는 미북 정상회담이 끝나자 마자 예견되었다. 트럼프는 중국이 미북간 협상에 개입한다고 이미 여러번 경고했다. 미국은 북한이 지금과 같이 비협조적인 태도로 돌변한 이유를 중국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런 경고가 그냥 개인적인 비정상적 행태의 일환으로 치부되는 것 같다. 그러나 트럼프의 문제제기를 그냥 개인적인 성향만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북핵문제는 우리문제이기도 하지만 주변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정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특사단을 파견한다고 한다. 북핵문제가 특사단 파견이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미북정상회담을 통해 쉽게 해결될 문제도 아닌 듯 하다. 우리는 제왕적 대통령제하게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한과 역할이 대우 크지만 미국의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 미국의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직책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내의 정책추진과정에서 대통령의 역할과 기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미국은 공화국이다. 공화국이란 수없이 많은 이해 당사자의 상호입장이 조정되는 과정을 통해 정책이 추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을 공화국이라고 하기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트위터를 개인의 일탈적 소견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트럼프의 트위터는 미국이 지금의 상황을 보는 입장과 견해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왜 트럼프는 북핵문제 해결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때 마다 중국 책임론을 들고 나올까 ? 그 이유를 살펴보자.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혈맹이라고 불린다. 한국과 미국이 그러듯이 말이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비추어 볼때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 듯 하다.

중국은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시험을 하면 목소리 높여 반대를 하다가도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에 대한 결의를 하면 반대하기 일수이다. 매우 이중적이다. 이런 중국에 대해 우리는 북한이 핵실험을 해서 중국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최근에 북한이 수중탄도탄미사일과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 시험을 했을 때도 그런 입장이었다. 우리 언론이나 정부 심지어 미국 정부나 언론도 북한의 이러한 무법한 행태가 중국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고 하면서 중국의 입장을 두둔해준다.

아마 이런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중국에게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하라는 의미의 제스츄어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와 미국 정부와 언론의 이런 입장이 사실을 제대로 정확하게 파악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북한의 미사일 이동 발사대는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미사일 발사에 대한 기술도 중국과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SLBM에 들어가는 고체연료는 중국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ICBM급으로 알려진 화성 15호는 화성 14호와 기술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으로 단기간에 그런 기술을 축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견해와 함께 외부의 기술적 지원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물론 화성 15호에 들어가는 추진체는 중국을 통하지 않고는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기도 하다.

중국이 북한의 미사일 기술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에 대해 외부적으로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내 놓는다. 물론 이와함께 북한에 대한 제재는 단연코 반대한다.

중국의 입장과 태도는 분명히 이중적이다. 우리는 중국의 이중적 입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 지금 진행되는 상황을 보건데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기술 발전을 북한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성과라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연 중국의 입장은 무엇일까 ?

여기서 우리가 추정해 볼 수 있는 중국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북한의 핵 미사일 기술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북한을 중국의 편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한다.

두번째 북한의 핵 미사일 기술개발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지나친 대북제재로 인해 북한이 중국의 편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고려해 보아도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을 자신의 편에 붙잡아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 이익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은 베트남마저도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로 변화하는 마당에 북한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입장일 것이다.

특히 북한과 중국은 인접한 거리이기 때문에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후 어떤 경우에도 북한의 핵위협하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어떤 미사일을 가지고 있던지 전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중국은 북한의 핵능력안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무엇일까 ? 중국은 북한을 자신의 곁에 붙들어 놓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김정일 시대부터 북한은 중국과 관계를 접고 미국과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시그널을 수없이 보냈다. 1994년 미국과 북한이 체결한 제네바 핵합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은 북한이 언제고 때만되면 미국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이 미국과 관계가 정상화되기만 하면 당장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국이 북한과 미국관계를 이격시키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 그것은 미국이 절대로 북한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해주는 것이다. 미국은 절대로 자신들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할 수 없다. 미국을 위협하면 미국이 양보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순간 미국은 세계질서 유지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북한이 전략적 능력을 갖추게 하면 북한도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한마디도 간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 같으면 충분하게 합의하고 타협할 수 있는 것도 수용하지 않게된다. 만일 북한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북한이 미국과 대응한 입장에서 협상을 할 수 있고 굳이 중국과 미국사이에서 선택을 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모두 이익을 확보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상황은 미국이 수용할 수 없을 확률이 훨씬 높다.

중국이 북한에게 미사일 기술지원을 하지 않을 어떤 이유도 없는 것이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북한은 미국에게 보다 더 큰 요구를 하기 마련이다. 이번에 북한 김영철이 폼페이오 미국무장관에게 선물을 요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에게 경제제재 해제 뿐만 아니라 안보구조의 변화도 요구할 것이다. 바로 평화협정을 통한 미북간 적대관계 해소이다. 그리고 북한이 생각하는 미북간 적대관계의 해소는 결과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와 연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점에서 북한과 중국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중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종전선언에 자신들도 참가하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활용해서 동북아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중국 내부의 전략가들은 세계최고 수준임에 분명하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 북한은 중국의 이런 전략적 구상하에 미사일 이동차량이나 미사일 기술을 협조받았을수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많이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미국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얻을 것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까지 북한은 전술적인 차원에서 항상 승리를 했다 그러나 전략적인 차원에서는 실패했다. 소탐대실이라고나 할까.

북한은 지금 자신들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많다. 장기를 두는 것은 중국이고 북한은 기껏해야 장기말에 불과할 가능성이 훨신 높다.

중국은 수천년동안 책략과 모략을 생활속에서 익혀왔다. 북한은 상대가 안된다. 미국은 이런 상황을 읽고 있다. 그래서 자꾸 중국이 북핵문제 해결을 방해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필자가 말한 것 같은 입장이라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 갈까 ?
전략은 결국 상상력의 세계다.

정부의 대툭특사단 파견 뉴스를 보면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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