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31.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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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내용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관련하여 한국내 민족주의자들의 입장과 미국의 입장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에게 한국이란 전세계 정책중 극히 일부의 작은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황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내에서도 한국에 대한 입장이 다 다른 듯 합니다. 특히 미국무부의 입장이 결과적으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어 갔던 측면도 부정하기 어려운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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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은 1947년 4월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여 1947년 5월 20일 공동위원회를 재개키로 했다. 그들은 1945년 12월 신탁통치 합의에 반대한 모든 정당들의 정부수립 참여를 배제하지 않도록 했으며, 이는 소련이 1946년 3월 부터 요구했던 것이었다. 대신 공동위원회의 과업에 대해 “자극적이고 선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한 어떠한 한국의 정치단체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의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7년 봄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을 국가통합의 옹호자로 내세우고 싶어했으며. 이는 주로 독일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에 대한 그들의 합의는 유럽의 대중들을 대상으로한 정치무대를 지향한 것이라고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만 대통령은 정말로 새로운 합의에 대해 낙관적인 것 같았으며, 그 합의는 전 한반도를 위한 통일되고 민주적인 정부를 향한 주요한 일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미국 전쟁성 장관 로버트 패터슨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그는 소련이 실제로 한국에서 물러날 것인지 의심했으며, 지정학적으로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입장은 미국의 입장보다 강력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펜타곤의 줄어드는 예산에 의해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패터슨은 미국의 지속적인 주둔이 부족한 예산의 지출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만과 그의 새로운 국무장관 마샬은 미국의 군사력을 투입하지 않고 수용가능한 조건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낙관주의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신탁통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공동위 참여 자격을 상실한 한국의 우파 정치지도자들의 반응이었다. 그 전달에 이승만은 트루만 독트린 선언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트루만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서신에서. 이승만은 트루만의 “공산주의에 대한 용기있는 입장”을 환영하면서, 한국에 있는 미국의 기관들에게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간에 연합과 협조를 이루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을 폐기”하도록 지시하고 요구했다. 그는, 한국이 그리스 처럼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방파제”와 같다고 하면서 트루만이 2년후에 취하게 되었던 입장을 예측하였다.
그러나 1947년 4월의 합의와 함께,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의지를 상실했다. 김구는 이러한 상황의 전개를 우려하면서 한국 임시정부를 재수립할 것이며 그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미군정장관 아처 레치는 한국 임시정부가 정치적 집회를 여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는 대한국민대표민주위원회가 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정치권력을 과도정부에 넘겨줄 것을 요구하도록 촉발했다. 위원회는 공동위 참여나 신탁통치에 대한 합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해, 공동위 미측 대표인 알버트 브라운 중장은 이승만과 수차례 회동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소련과 신탁통치에 대한 비난을 계속하면 공동위 참여를 배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항적이었다. 북한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에 바탕하여, 그는 미국의 공동위원회 참여가 공동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며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또한 미국이 신탁통치의 분명한 성격을 밝히지 않으면 남한 전체에 폭력적인 반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정확하게 예언했다.

핵심적인 문제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집중하는 반면, 미국은 소련과의 전세계적 경쟁에서 자신들의 목표를 지원하기 위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무부 차관보 존 힐드링은 하지 장군에게 이승만의 요구를 거부토록 지시했으며, 이는 미국이 1945년 모스크바 합의 조항의 실행을 준수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모스크바와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만, 워싱톤은 남한에서 별도 정부수립을 선택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미소공동위가 재개되었을 때 무슨일이 발생했으며 미국 정부가 이런 과정을 어떻게 봉쇄정책의 연속으로 해석하는가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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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31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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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ited States and Soviet Union reached a compromise on Korea at the Moscow Council of Foreign Ministers in April 1947 that allowed the Joint Commission to resume its work on 20 May 1947. They agreed that the Commission would not exclude from consultation all parties that opposed the December 1945 agreement on trusteeship, as the Soviets had demanded since March 1946. Instead, I t would consult with any Korean political group as long as it had not “fomented or instigated” active opposition to the work of the Commission.

As I discussed in previous posts, in the spring of 1947 both the Americans and the Soviets wished to present themselves as protectors of national unity, mainly in order to gain support from the German people. Their compromise on Korea may have therefore been mainly political theater aimed at a European audience. Nonetheless, President Truman seemed to be genuinely optimistic about the new agreement, stating publicly that it represented a major step toward a unified and democratic government for all of Korea. US War Secretary Robert Patterson, however, was more realistic. He doubted that the Soviets would actually back down over Korea, pointing out that geographically their position on the peninsula was stronger than that of the US. Moreover, since he was constrained by the Pentagon’s diminishing budget, Patterson argued that the benefits to the US of continued occupation were not worth the expenditure of scarce funds. Nonetheless, Truman and his new Secretary of State, George C. Marshall, believed they could resolve the Korean issue on acceptable terms and without a major commitment of American power.

Complicating that optimism, however, was the reaction of Korean political leaders on the right, who would be disqualified from consultation because of their “active opposition” to trusteeship. The previous month Syngman Rhee had welcomed the declaration of the Truman Doctrine with enthusiasm. Writing personally to the president, Rhee congratulated Truman for his “courageous stand against communism” and urged him to instruct American authorities in Korea to “abandon their efforts to bring about coalition and cooperation between nationalists and communists.” He anticipated the position Truman himself would take two years later, arguing that Korea was as much a “bulwark against communist expansion” as Greece.

But with the agreement of April 1947, it appeared that the US had lost its resolve on Korea. Kim Ku was so alarmed by this development that he announced he would reestablish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attempt to seize power in its name. In response, US Military Governor Archer Lerch prohibited the KPG from holding political meetings, which prompted the 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to demand the immediate withdrawal of US forces and the transfer of political authority to an interim government. The Council declared that it would accept neither the compromise conditions for consultation nor trusteeship itself.

In an effort to smooth over this situation, the head of the American delegation to the Joint Commission, Major General Albert E. Brown, met several times with Syngman Rhee. He warned Rhee that if he and Kim Ku continued to criticize the Soviet Union and the trusteeship agreement they would be excluded from consultation. Rhee remained defiant, however. Based on what had happened in northern Korea and Eastern Europe, he predicted with some reason that American participation in the Joint Commission would lead to the creation of a coalition government and an eventual Communist takeover. He also forecast accurately that violent rebellion would break out throughout southern Korea unless the United States clarified the exact nature of trusteeship.

The essential problem was while Korean leaders focused on the future of the peninsula, the US shaped its Korea policy to support its goals in the global contest with the Soviet Union. For this reason,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John Hilldring instructed General Hodge to reject Rhee’s demands, since the United States was committed to fulfilling the provisions of the 1945 Moscow agreement. Washington would favor the creation of a separate government in southern Korea, he explained, only if negotiations with Moscow failed.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what happened when the Joint Commission resumed and how the US government interpreted the proceedings as a success of its containment policy.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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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장준익의 북한인민군대사를 보고(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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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당시 북한군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북한 인민군대사’라는 책을 찾았다. 1991년 발간된 이책은 육사 14기로 예비역 육군중장 장준익이 썼다. 그는 전역이후 김대중에 의해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는 군사정권이어서 육군 중장 출신이 야당인 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김대중 총재로서도 경상도 육사출신의 장성을 비례대표로 발탁한다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준익 장군도 그당시 분위기에서 야당의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준익 장군은 야당의 국회의원 활동을 마치고 우리가 북한을 이기려면 북한에 대해서 잘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북한 인민군대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준익 장군은 근동과 만주지역을 돌아다니며 당시 조선 의용군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각종 자료를 취합하여 북한군의 창군과정에 대해 자세히 정리했다.

최근 언론을 보면서 우리나라 장군들은 모두 정치군인인줄 알았다. 그런데 장준익 장군처럼 이렇게 책을 써낸 것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한국 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편성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살펴보려고 했으나 이책은 창설과정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직접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이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학문적으로 충분하게 훈련되지 않아 구성에 짜임새가 떨어지는 측면은 없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잔재주 부리지 않고 충실하게 연구를 했나를 알 수 었었다.

이렇게 사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앞으로 우리나라 군인들이 장준익 장군만 같다면 모두 칭송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육군장군들은 왜 맨날 X별 소리를 듣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장준익 장군을 제외하고는 군출신의 본분에 맞는 일을 한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 군대 특히 육군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모델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장준익 장군을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발탁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참 훌륭했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실력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했던 이야기다.

현재 활동하는 정치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과 김영삼에 의해서 발탁되었다. 훌륭한 정치인은 훌륭한 정치인을 발탁하는 것이리라. 훌륭한 군인은 훌륭한 군인을 발탁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점에서 과거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훌륭했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요즘 들어 눈에 띄는 정치인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 정치지도자들에게 장준익을 알아본 김대중과 같은 안목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

이명박과 박근혜는 훌륭한 정치인을 발탁하고 키우지 못했다. 그들이 지금과 같은 처지에 처한 것도 바로 그런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3김시대를 구시대라고 하지만 가만보면 그때는 그래도 사람을 키웠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정치가 3김시대보다 더 역동적이며 발전적이라는 생각이들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지금은 어떤 정치지도자도 사람을 발탁하고 키우는 일을 하지 않는 듯 하다. 정작 우리 정치의 한계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준익의 ‘북한 인민군대사연구’를 뒤적이며 그를 국회의원으로 발탁했던 김대중의 안목이 생각났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런 생각을 해보고 시도한다는 것은 범인의 경지는 넘는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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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칼럼) 3000 톤급 도산안창호 잠수함 진수식을 보면서, 국가안보를 생각한다.

SLBM을 발사할 수 있는 3000톤급 도산안창호함이 진수되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강한 힘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정도의 잠수함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해 좀 더 잘 대응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한다. 그렇다. 평화는 힘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이다. 외교적 수사나 약속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정부에서 육군을 배제하고 해공군 위주로 국방을 경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듯 하다. 아마 그동안 우리 현대사에 정치에 개입한 군인들이 대부분 육군 출신이니 그런 것 같다. 그러면서 육군에게 너무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도산안창호함에 대한 관심도 그동안 육군에 치중된 국방운영에 대한 반성과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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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우리가 SLBM을 발사할 수 있는 잠수함을 보유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도산 안창호함을 단순히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잠수함은 그 성격상 전략적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에게 전략적 성격이란 무슨 의미일까 ? 만일 중국이 한반도에 개입하려면 이를 저지 억제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만일 일본이 독도영유권에 대한 말의 수준을 넘어 행동을 하려 할 경우 이를 근본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정도 잠수함은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이정도의 전략적 능력은 남북통일 과정에 중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할 것이다. 앞으로 지금 보다 더 많은 3000톤급 잠수함을 진수시켜야 할 것이다. 결국 평화는 힘이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군이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한 것도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의미가 있다. 단순히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정도를 넘어서 유사시 중국이 한반도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전략적 수준의 잠수함 진수와 함께 우리 나라 육군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국민들은 육군을 사시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렇다. 우리 나라 육군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현대사에 두번이나 쿠데타를 일으켜서 헌정 질서를 문란시켰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나라 육군장교들은 전술전기를 연마하는 것 보다 인맥을 쌓는데 더 열심이었다. 실력보다는 정치력을 쌓는데 더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 장군들 중에서 제대로 실력이 있는 군인이 없다는 이야기가 많다. 미군들은 한국군, 그 중에서 특히 국방운영의 중추를 담당하는 육군 장군들의 실력과 수준을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육군의 전력 발전을 도외시 해서는 안된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육군을 배제하고 해공군을 발젆시키는 것이 국방을 한단계 더 높이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듯 하다. 육, 해, 공군을 따로 떼어 놓고 서로 경쟁하는 구도를 만드는 것은 국방의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육군은 육군 대로, 해군은 해군 나름대로, 공군은 공군나름대로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 해군을 아무리 발전시킨다고 해도 육군이 해야할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공군을 아무리 발전시킨다고 해도 육군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다.

군함과 항공기를 기반으로 작전을 운영하는 해,공군과 달리 육군은 자신이 가진 것 보다 남이 가진 것을 통합운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군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육군도 전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핵을 가진 상황에서 우리 육군의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전략이란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왜 핵을 보유하려 했을까 ? 그것은 재래식 전력으로는 더 이상 한국과 한미동맹을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군을 중심으로 한 어마어마한 공군능력은 북한이 더 이상 재래식 군사력이 아닌 핵을 개발하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우리나라 군이 3축이니 뭐니 하면서 북한의 핵능력에 대응하는 전력을 개발한다고 하는 것은 뒷북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한군의 강점에 대응해봐야 무슨 전략적 이점이 있을 것인가. 편집자는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우리가 3축체제를 기반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실패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북한의 핵개발에 대응하려 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지상군을 강화하여 전쟁 양상을 재래식 방식으로 끌고 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매우 신속하게 우리 육군이 북한 내부로 진출하여 피아가 혼재되도록 만들어서 핵무기를 쓸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함께 북한이 핵개발로 자신들의 안보가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만들어야 한다. 북한이 핵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보가 더 불안해졌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

전략폭격기로 북한을 위협하는 것이 북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을까 ?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상군을 강화시켜 북한이 지상군에 더 많은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즉 자신들이 핵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전력 강화에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육군이 길이 낙후되어 북한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전차나 잔뜩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야 말로 예산 낭비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지상군을 강화해서 북한의 핵개발 효과를 상쇄할 수 있는가 ? 지상군을 어떻게 강화해야 핵을 가진 북한이 지상군에 돈을 쏟아 붇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느냐 하는 방안을 만드는 것이 육군 수뇌부와 우리나라 국방당국자들의 역할이다.

도산 안창호 함의 건조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런 자랑스런 느낌을 육군이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위정자들은 육군과 해공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보는 시각을 거두어 주었으면 좋겠다. 육군과 해공군은 서로 총질해야 하는 적이 아니다. 육군을 악으로 해공군을 선으로 나누어야 속이 시원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국가 안보에 어마어마한 죄를 짓는 것이다.

일부 육해공군 장교와 장군들 중에는 서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자군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군을 폄훼하는 행동이 용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국가안보와 국방에 육해공군 모두 중요하다. 만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없애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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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칼럼)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살것인가? 이대용 장군과 심일 문제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많이 사라졌지만 월남전쟁때 마지막 한국대사관 공사였던 이대용 장군이란 분이 있었다. 그분은 황해도 출신으로 해방이후 북한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월남해서 군인이 되었다. 원래 소작인 출신이라 성분은 좋았으나 수업시간에 김구를 위시한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말을 했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북한을 탈출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왔으나 먹고살일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중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장교가 되었다. 춘천에 있는 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전체를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약 130여번 이상의 전투를 치루었으나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문경지역에서는 허벅다리와 복부에 총상을 입어 후송되었으나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배에 붕대를 매고 다시 전선에 복구했다. 북한이 마지막으로 총공세를 하던 8월과 9월 경북영천 신령지역에서 북한군과 죽고 사는 전투를 치루었다. 100여명이 넘던 중대원은 20명으로 줄었고 3명의 소대장이 모두 전사했다. 며칠간 밥을 먹지도 못하고 전투를 치루었다. 이제 북한군이 한번만 더 공격해 오면 꼼짝없이 죽거나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북한군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다. 북한군도 힘을 완전히 소진한 것이었다.

그 이후 북한으로 진군해서 평양 북방지역에서 김일성이 타던 승용차를 노획했다. 지금 용산 전쟁기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초산지역으로 진격해서 압록강물을 떠서 대대로 보냈는데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중공군이 침략했을때 한국군 전 부대중에서 유일하게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철수했다. 철수하는 길에 간호병으로 종군했던 여고생 출신 3명을 데리고 후방에까지 내려왔다. 철수하는 3개월 동안 한번도 군화를 벗지 못했다. 철수이후 군화를 벗었더니 발바닥까지 같이 떨어져버렸다고 한다.

준장으로 예편하고 월남전 당시에는 한국대사관에 공사로 근무했다. 사이공이 붕괴될때 교민들 철수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탈출하지 못하고 월맹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5년동안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북한으로 입북하라고 회유를 받았다. 북한은 황해도에 있던 이대용 장군의 누나 목소리까지 녹음해서 월북하라고 했다. 끝까지 거부하고 1980년에 석방되어 귀국했다.

귀국해서 얼마있다가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에게 이중간첩 이수근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보도하게 했다. 월남을 거처 스위스로 탈출하려던 이수근을 사이공에서 체포한 사람이 이대용 장군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이수근을 이중간첩으로 몰아가서 사형시켰던 것이다. 그 당시 이수근의 조카도 간첩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수감중에 있었다. 이대용 장군의 증언으로 이수근 사건은 재심을 받게 되었고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로 결정되었다. 이수근의 조카도 바로 석방되었다.

1990년 이후에는 한국전쟁 당시 춘천전투의 영웅으로 알려진 심일 중위의 공적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심일 중위는 춘천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온 북한군 자주포를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육탄공격하여 2대를 파괴한 영웅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1990년대 중반에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중 뛰어난 사람에게 심일상을 주게 했고, 육군의 전투중대장 중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심일상을 주게했다.

이대용 장군은 심일이 육탄으로 자주포를 파괴하지도 않았고 가지고 갔던 대전차포 2대중 1대는 두고 1대만 가지고 철수했다고 증언했다. 심일이 자주포를 육탄으로 파괴한 것은 사실이 아니므로 고쳐야 한다고 했다. 아마 이대용 장군은 그정도의 일은 쉽게 고쳐질 수 있는지 알았나 보다.

그러나 심일문제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심일의 공적문제는 조선일보에까지 보도되었다. 이후 국방부와 육군본부간 사실여부에 대한 입장차이가 발생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심일의 공적이 사실이라고 주장했고 육군본부 군사연구소는 심일의 공적이 사실이 아니며 이대용 장군의 주장이 옳다고 했다.

결국 국방부 주관으로 심일공적확인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심일공적확인위원회는 공청회를 열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말한 것 처럼 심일의 공적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공청회에서 육군본부 군사연구소는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공청회는 짜여진 각본대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주요신문은 심일의 공적과 관련한 공청회 진행과 관련한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일부 소수언론만 문제를 제기했으나 찻잔 속 태풍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에 서서 심일공적확인위원회의 일방적 공청회 진행도 눈을 감고 말았다. 심일공적확인위원회는 심일의 공적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다가 계속 모순이 발생하자 심일이 당시 춘천에서 북한군 자주포 6대를 파괴했다고 사실을 정정했다. 원래 6.25일 정오경 2대를 파괴했다고 했다. 그러나 바뀐 자료에는 심일이 6월 25일에 3대, 6월 26일에 3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고 그에 따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6.25 전쟁 공간사 내용까지 바꾸어 버렸다.

이후 이런 사태에 분개한 이대용 장군은 기력을 잃어 버리고 얼마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전의 포스팅에서 심일의 공적과 관련한 연구를 계속할 것임을 밝힌바 있다. 그런데 최근 주변사람들로 부터 더 이상 그문제를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인데 누가 옳으니 틀리니 하면서 따질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당시 모두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 그런데 그것이 조작된 것임을 뻔히 알고도 모두 묻어 두고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이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다름아닌 이대용 장군이다.

사람 다 거기가 거기다. 그러나 다 똑같은 사람같지만 모두 다 다르다. 며칠전 심일문제에 대해 더 이상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사람으로 부터 듣고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 그냥 그렇게 대충 묻혀 지나가면 아무일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인가 ?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나의 문제이다. 내 실존의 문제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항상 선택을 한다. 그러고 그런 선택의 누적이 나의 실존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아닌 권유에 실망을 했지만 절대 그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시 다진다. 나는 나고 그들은 그들이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고 그들은 그들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것이다. 나는 절대 그들이 살고 싶어하는 방식대로 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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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30

웨더스비 교수 씀

트루만과 스탈린.jpeg

웨더스비 교수께서 오랜만에 포스팅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독일문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이 입장에 대한 것입니다. 독일통일에 대해 소련과 미국의 입장이 각각 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분할도 결국 독일문제와 많은 부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패전국이라서 그런 상황에 놓였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무슨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패전국은 일본인데 일본이 분할되지 않고 우리가 분할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국들의 상황을 잘 살펴보고 우리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전쟁이 끝나고 1년정도 지난후에 소련과 미국이 독일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했고, 이는 새로운 초강대국의 경쟁의 결과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모스크바는 독일이 통일되어 소련이 서독지역의 산업지역으로부터 배상금을 얻을 수 있기를 고대했다.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자신들의 지역에서 협력적인 점령정책을 조율하기 위한 단계에 들어갔으며, 소련은 이러한 방법이 3개의 서독지역에서 분리된 국가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매우 합당한 걱정을 했다.

서방국가들의 독일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모스크바는 독일의 여론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미 1946년 여름에,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모스크바의 강력한 징벌적 점령정책을 갑자기 바꾸었으며 대신 독일의 통일과 회복을 방지하기 위한 서방국가의 책략을 고발했다. 그는 미국은 독일의 석탄과 철 생산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독일의 산업 잠재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가 루르산업지역을 독일에서 분리하려는 프랑스의 요구를 비난하면서 단일 독일 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소련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일공산당이, 독일영토의 1/3이 새로운 폴란드 국가에 속하게된 폴란드와의 전후 국경문제를 제기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독일 민족주의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 국경을 재설정한 것은 소련이었으며 이는 모스크바가 폴란드 동쪽의 땅을 차지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이 독일국민의 진정한 참피온이라고 자신들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현실에 대처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시도에 대한 반응으로, 국무장관 번즈는 1400여명의 독일 고위관리가 모인 슈트트가르트에서 연설했다. 그는 독일인들이 “자유 및 평화애호국들 가운데 명예로운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독일의 경제적 부흥을 요구했다. 그는 루르분리에 대한 프랑스의 제안은 이루어지 지지 않을 것으며 전 독일 임시정부의 즉각적인 구성을 요구했다. 국무장관은 독일이 소련이 그어놓은 폴란드와의 새로운 국경에 대해 독일의 항의를 지원했다.

독일 통일지지에 대한 공식적인 성명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은 자신들의 지역을 합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3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외무장관 회담 위원회에서, 그들은 서부에 별도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독일 점령정책에 대해 소련과 합의를 위한 마지막 노력을 하였다. 서방동맹국들의 우선관심은 모스크바가 동부의 풍부한 농업지역에서 서부지역으로 식품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납세자들은 서부지역의 독일대중들이 필요로하는 식량과 여타 기초 생필품을 제공해야 했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을 자족적인 국가로 만들 수 있는 통치기구를 수립하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동시에 소련과 전세계적인 정치적 경쟁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독일의 분단에 대한 책임으로 비춰질 수 있는 정치적 데미지를 감당하고자 하지 않았다.

외무장관 위원회에서 독일을 위한 전국적인 규모의 통치기구를 어떻게 수립하며 누가 이것을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토의가 진행되었다. 한편, 원칙적으로 국가통일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춰지고자 했기 때문에, 소련과 미국은 28번째 포스트에서 언급한 것 처럼 서울에서 공동위원회 회담의 재개에 합의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1947년 늦은 봄에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이 재개된다는 뉴스에 대해 한국내에서의 반응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독일 문제에 관한 내용은 아래의 자료를 참고함.
William R. Keylor, A World of Nations: The International Order Since 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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