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연구)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의 초기 작전의 제1단계 작전기술에 관해

정보참모부의 ‘북괴 6.25 남침 분석(70)’에서 제1단계 작전에 관한 기술을 읽어보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파악하게 되었다.
먼저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육본 정보참모부는 제1단계를 북한군이 서울 - 홍천 -강릉까지 진출한 6.25 - 29일까지로 잡았다.

제1단계 작전의 내용을 읽어가는 중 다음과 같은 두가지 문제를 찾을 수 있었다.

1. 6사단에서 춘천전투의 심일소위의 북한군 자주포 파괴에 관한 기록이 없다

상게서는 p.118에서 아군 제1사단 용사의 육박공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했다는 기술이 있는 반면, 춘천에서는 수리산맥의 험준한 지형과 6사단 포병의 활약으로 북한군 제2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성은 25일 09:30시경 북괴 6사단 주력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문산 동북방과 임진교 부근의 전투에서는 아군 제1사단 용사의 적 전차를 파괴하는 등 용전분투하면서 임진강남안의 진지로 철수하였다.”(p.118)

한편 당시의 춘천상황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춘천지역은 아 제6사단의 강인한 저항과 춘천 북방의 험준한 지세로 인하여 적은 전혀 진출하지 못했다.”(p.118)
“북괴 제2사단의 공격은 아 제6사단의 강인한 저항과 유리한 지세의 천연적 이점을 비록하여 6사단 포병의 사격효과등으로 인해서 적의 행동은 일시적이나마 좌절되고 말았다.” (p.126)

제1사단의 예를 보건데 만일 춘천의 아군 6사단의 방어 작전에서 심일소위가 북한군 자주포를 육탄으로 파괴했다면 그 내용이 수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까지 심일 소위의 북괴군 자주포 육탄파괴에 대한 전과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여기서 심일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제1사단장이던 백선엽은 이후 자신의 부대에서 T-34전차를 파괴한 용사에 대한 기념행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가 2003년에 심일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우수 졸업생과 전군의 우수 중대장에게 심일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사실 이때 만들어진 심일상은 백선엽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의 용사의 공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가 남의 부대원에게 상식을 벋어난 관심을 쏟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2. 홍천 전투의 의미를 재평가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북한군 제2군단의 초기 작전에서 홍천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육본 정보참모부가 홍천을 작전단계의 구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홍천전투에서 북한군 제7사단이 아군 제2연대를 제시간에 격퇴하지 못한 것을 제2사단의 춘천진출이 지연되자 북괴군 제2군단장이 홍천에서 작전중인 제7사단의 일부를 춘천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나중에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즉 북한군은 제7사단 병력의 일부를 춘천으로 전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홍천의 중요성을 재평가해야 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춘천뿐만 아니라 홍천의 진출도 늦었다. 원래는 홍천에 신속하게 진출해서 춘천을 앞뒤에서 포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북한군 제7사단을 홍천에서 전환하지 않았다면 북한군이 홍천으로 진출이 지연된 이유는 당연히 한국군 제6사단 2연대가 전투를 잘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홍천방면에서 성공적으로 북한군 제7사단의 진출을 지연함으로써 춘천의 한국군 제7연대가 포위되지 않도록 할 수 있었고 결국 그런 연유로 북한군 제2사단이 서울 방향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홍천전투의 의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제2단계의 작전과 관련해서는 다음에 정리토록 하겠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한국전쟁사 연구)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의 초기 작전의 제1단계 작전기술에 관해’

(한국전쟁사 연구) 전쟁 초기 단계 북한군 작전개념에 대한 기술 (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

(한국전쟁사 연구) 전쟁 초기 단계 북한군 작전개념에 대한 기술 (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

‘북괴 6.25 남침분석91970)’을 보다가 북한군의 작전개념을 정리한 글을 보았다.
당시 육본 정보참모부는 일본 방위청에서 발행한 조선전쟁사와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사등을 통해 다음과 같이 북한군의 작전개념을 정리했다.

P.112
‘제1군단은 서에서 주공 제 3,4 사단을 주력으로 의정부 - 서울 방향으로 진격 서울을 점령, 북한이북에서 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 제2군단은 동에서 조공 춘천을 돌파 남에서 전과를 확대하는 한편 일부를 서울 동남방으로 진출시켜서 서울 보위에 기여케 한다.’

‘제 1,2 군단은 서울-홍천을 연하는 선에서 일제히 진격 계속 남진하여 금강-소백산맥선 이북에서 포위, 섬멸한 후 제1,2 군단 주공은 경부본도와 중앙도를 연해서 신속히 남으로 진격하여 동해안 도로와 전라도 우회로에서의 공격과 합세하여 일거에 부산으로 진격한다’

당시 육본 정보참모본부는 이와 함께 요도를 통해 작전개념과 기동계획을 표시했다.

북괴군 작전개념 요도 1970 정본.jpg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미 1970년대에 제2군단은 춘천을 점령하고 그 일부를 서울의 포위작전에 가담시키는 것으로 정보본부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당시의 육본 정보참모부는 춘전전투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춘천전투의 의미가 실제 전사에 기록되는 것은 한참이후이다.

이와함께 당시 정보본부는 서울와 홍천선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2군단에게 춘천은 서울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의미였고 사실상 홍천은 다음 작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중요했던 의미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정보본부는 제1단계의 작전을 서울 - 홍천 - 강릉을 연하는 선이라고 규정하면서 작전 단계의 기간도 6.25 - 29일로 설정했다.

그 이전에는 6.25-28일로 설정했다. 비록 단 하루 차이지만 한반도 전체의 작전국면을 생각했다는 점에서 1970년대 발간된 ‘북괴 6.25 남침 분석’은 매우 수준 높은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작전요도는 2000년이후에 작성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공간사 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듯 하다.

다음에는 본 책자의 단계별 개념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한국전쟁사 연구) 전쟁 초기 단계 북한군 작전개념에 대한 기술 (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

(학회) 러시아 내전 심포지움 참관기

러시아 내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었다. 러시아에는 1917년 10월 혁명이 발생하고 바로 이어서 내전이 발생했다. 지금의 달력으로 말하자면 1918년 2월이 1917년 10월이다. 1918년이 러시아 내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된 것이다. 한국의 러시아 관련 소수의 연구자들이 모여서 러시아 내전에 관한 학술토론을 한다는 것이 매우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지내던 선생들이 참석을 권유해서 가보았다. 약 20년전에 러시아 내전에 관한 연구를 해 볼까해서 이리 저리 기웃거린 경험이 있어서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은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고 나서 러시아는 백군과 적군으로 나뉘어서 전쟁을 벌인다. 러시아 볼세비키는 러시아 혁명에 성공하자 독일과 바로 단독 강화에 나선다. 그것이 브레스토 조약이다.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강화를 맺아 러시아와 같이 독일과 싸우던 연합국들은 러시아에 간섭을 실시한다. 영국과 프랑스, 일본, 미국 등등 거의 모든 연합국들이 러시아의 백군을 부추겨 적군과 전쟁을 벌인다. 제정 러시아의 부활을 꿈꾸던 백군들은 연합국의 지원을 받고 1921년까지 전쟁을 벌인다. 결국 볼세비키들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내전에서의 승리로 비로소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이 완성이 된다. 혁명에 성공을 하고 나서 곧바로 내전의 늪에 빠져들었던 볼세비키에게 내전의 경험은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소련을 이해하는데 내전은 빠질 수 없는 정치적 대격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러시아의 내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냉전기간 내내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잘 아는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 내전의 와중에 일어나는 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영화의 고전이니 한번 볼만하다. 사랑과 운명이 인간을 어떻게 이끌어가는 가를 잘 알 수 있다. 영화에 눈이 오는 시베리아 평원이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는 핀란드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말을 듣고 핀란드를 가보리라 했는데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다.

러시아에 대한 진지한 연구자들이 모였다. 그래봐야 몇명이 되지 않았다. 미일중러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나라가 주변국에 대한 연구에 대해 이렇게 소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몇몇의 선생들이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마음을 먹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없다보니 당연히 연구의 성과도 미흡하다. 이번에는 관심을 가지자는 수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사와 한국사를 연구하는 분들이 와서 발표를 했다. 일본은 러시아 내전에 3개사단을 파견한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 백군의 최대 군벌이었던 콜차크 제독을 지원한다. 우리가 일본을 정말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당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현재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자들의 발표를 보면서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의 승리를 농민의 태도와 연관짓는 연구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역단위의 연구를 하면 당연히 농민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혁명의 향방이 좌우된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사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많은 연구 중에서 농민들의 태도를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이 많았다. 농민들이 볼세비키를 지지하면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에 관한 많은 연구자들이 농민들의 입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 지나서 보니 결국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역할은 볼세비키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혁명가들이다. 농민들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결코 동인이 되지 못했다. 농민들은 혁명의 과정을 보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달려갔을 뿐이다. 러시아 내전에서 농민들을 자신들을 대표했던 사회혁명당도 버리고 볼세비키에게 기운다. 그것은 그들이 볼세비키를 지지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농민들이 혁명의 승패를 좌우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볼세비키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간 볼세비키들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발표내용중에 구제국 군대의 장교들 중 상당수가 적군을 위해서 근무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졌지만 구 제국군대에 근무했던 상당수의 장교들은 적군을 위해 투신했다. 그들은 볼세비키를 싫어했지만 주변국을 등에 업고 있었던 백군들을 더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적군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자신의 조국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렸던 적군에 근무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구제국군 장교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러시아 내전을 간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러시아 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연구방법인 농민들이나 지역사적 연구에 앞서 간섭이라는 당시의 국제정치적 지형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심포지움에 참석해서 발표하는 것을 보다가 생각난 것을 정리했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학회) 러시아 내전 심포지움 참관기’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3-1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

한국전쟁의 조치단계 구분에 관한 군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이제까지 아래와 같이 육군이 발간했던 2권의 책을 보았다. 한권은 전쟁중이던 1952년 그리고 또 한권은 1958년에 작성한 것이다.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2 (괴뢰군 연혁 1958. 6.1)

(한국 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1 (육군전사, 1952. 1)

작전단계와 관련하여 이번에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가 1970년에 작성한 ‘북괴 6.25 남침분석’이라는 책에서 정리한 내용을 살펴보겠다. 1970년 육군 정보참모본부가 작성한 내용의 가장 큰 차이는 작전의 단계를 모두 날자별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우선 이책은 전체 작전의 단계를 크게 3단계로 구분했다.

제1단계작전은 38도선 - 낙동강선으로
제2단계작전은 서울방어 및 철수를

제2단계의 철수는 북한군의 철수를 의미한다.
제3단계작전은 중공군개입 - 방어로 구분했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1단계 작전은 모두 5차의 작전으로 구분했다. 내용은 다름과 같다.
제1차 작전(6.25 - 6.29) 서울 - 홍천 -강릉을 연하는 선
제2차 작전(6.30 - 7.6) 평택-충주북방-울진을 연하는 선
제3차 작전(7.7 - 7.20) 전주-대전-문경-영덕을 연하는 선
제4차 작전(7.21 - 8.20) 낙동강도하 및 총공격준비
제5차 작전(8.21 - 9.15) 총공격실시

작전을 이렇게 5차로 구분한 것은 북한군의 공격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정보본부에서 작성했던 북괴군 연혁은 초기 작전을 70년의 남침분석과 같이 모두 5단계로 구분했다. 그중에서 구체적인 날자를 지정했던 것은 제1, 2차 작전뿐이었고 나머지는 전체적인 작전상황을 고려하여 단계구분을 했다.

‘북괴군 연혁’에서는 제1기 작전을 6.25 - 28일까지로 북한군의 서울장악을 중요하게 보았으나 70년의 남침분석은 서울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38선 초기 작전 전반을 제1차 작전으로 구분했다. 날자는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나 작전을 보는 인식의 차이가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58년의 ‘북괴군 연혁’은 제2기 작전을 6.28 - 7.15까지로 구분했다. 이는 서울의 장악이후 UN군의 본격적인 참전까지의 상황을 고려한 것인 반면 70년의 제2차 작전은 평택방면의 조치원 작전과 중부지역 작전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작전의 단계를 구체적인 날짜로 구분하다 보니 그 기준이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70년의 ‘남침분석’은 북한군의 주 공격로인 경부선 중심이 아니라 전체적인 전선의 상황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작전전반을 보는 시각이 폭넓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70년 ‘남침분석’의 구분을 좀더 세밀하게 정리해 보겠다.

여러가지 일을 하느라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좀더 밀도있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3-1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

(웨더스비 교수의 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34.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트루만.jpg

이번 포스팅의 주요 내용은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결국 한반도는 소련이 북한을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면서 분할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소련은 자신의 한반도에 자신에게 완전하게 복종하는 완충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미국은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가능한 옵션은 소련의 통제를 받는 통일국가거나 아니면 북한은 소련의 통제를 받고 남한은 자신의 갈길을 가는 국가가 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1947년 6월이 되자, 이승만과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더욱 강화했다. 그들은 철도와 발전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했으며, 미소공동위에 협의회 참가가 배제되는 질의서 제출도 거부했다. 대규모의 폭동을 우려했으나, 하지 장군에게 그들의 전술에 대해 말도 대응하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동시에, 공동위원회가 갈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결론이 정치적 전장이 되었다. 6월 25일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국지도자들의 예비 협의체를 개최했으며, 그 구성은 통상적이지 않았다. 정치적 활동이 소련의 당국과 지역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완전하게 통제를 받고 있었던 북부지역에서, 단지 3개의 정당과 35개의 사회조직만이 참가했다. 그러나 인구가 더 많은 남쪽지역에서, 회의 참가는 가속화된 정치적 소란을 야기했다. 400개 이상의 정당들이 위원회에 등록을 했으며, 이들은 6200만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남부 지역 전체인구의 3배가 넘는 숫자였다.

소련 대표단은 예상대로 협의체가 좌파가 장악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는 숫자 이상의 우파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슈티코프 장군은 “반탁 위원회”에 속해있는 8개의 정당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이 소련 대표단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에 책임이 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미국 국무부는 반대로 미국 대표단이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여 모스크바라 지원하는 좌파정부가 한국에 수립되지 못하도록 확고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미국 관리들은 소련이 한국에서 그들이 동유럽에서 했던 것과 같은 위성국가를 만들려고 한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 대표단이 7월초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 최근 알바니아에서 근무했던 하지 장군의 새로운 정무보좌관 조셉 E. 야콥스는 북한지역의 체제가 그가 동유럽에서 보았던 괴뢰정부와 유사하다고 보고했다. 게다가 그는 소련은 이미 북한지역에 강력한 경찰과 군대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를 어떻게 만들더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에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한에서의 정치적 분열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여러 학자들이 제2차세계대전이후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소련이 어떻게 통제를 수립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새로 개방된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의 문서고를 조사해왔다. 그들은 각 지역마다 그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밝혔고, 이는 소련의 기관들이 지역의 환경에 따라 자신들의 정책과 전술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 모스크바와 목적은 일관되었다. 스탈은 소련을 미래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변방에 완충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으며 이국가들은 소련의 요구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전후 한국에 있어서, 이러한 비극적 현실은 두개의 결과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소련의 통제하에 통일된 국가든가 아니면 반쪽은 소련에 의해서 통제받고 다른 반쪽은 다른 운명을 가는 국가로 분단되는 것이었다. 7월초 평양여행이후 미국이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나서, 미국은 협의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확고하게 거부했다. 하지 장군은 슈티코프의 주장했던 반탁위원회의 멤버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임시정부에서 모든 우파의 참석을 방지하기 위한 단순한 책략적 계획이라고 선언했다. 하지장군은 대신 미소공동위원회의 정회를 초래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단체의 완전한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탁통치에 대한 공개적인 시위 금지를 해제했다.

다음에는 7월 19일 여운형 암살의 여파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워싱턴의 점진적인 계획의 구성을 알아 보겠다.

[참고문헌]

소련의 전후 점령에 관한 연구는 Norman Naimark, Jordan Baev, Laszlo Borhi, Mark Kramer, Vladislav Zubok의 연구를 참고했으며, 또한 북한의 소련 점령에 관한 본인의 저서를 참고했다.

또한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를 참고했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웨더스비 교수의 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34.’

(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Post #34

Prof. Kathryn Weathersby

스탈린 트루만.jpg

As June 1947 progressed, Syngman Rhee and Kim Ku intensified their opposition to trusteeship. They organized strikes of railroad and power station workers and refused to submit questionnaires to the Joint Commission, which ruled out participation in consultations. Fearing large-scale violence, General Hodge responded with nothing more than verbal rebuke of their tactics.

At the same time, the political theater that was the Joint Commission moved toward its inevitable conclusion. On June 25 the Commission convened a preliminary Consultative Body of Korean leaders, which had an unusual composition. From the northern zone, where political activity was firmly controlled by Soviet authorities and local Communists, representatives came only from three parties and thirty-five social organizations. From the more populous South, however, participation reflected the escalating political tumult. More than 400 parties registered with the Commission, and they claimed a combined membership of 62 million people, more than three times the entire population of the southern zone!

The Soviet delegation predictably refused to accept enough of the rightists to guarantee that the remaining Consultative Body would be predominantly leftist. General Shtykov insisted that the eight parties belonging to the “Anti-Trusteeship Committee” be excluded, on the grounds that they were responsible for the violent attack on the Soviet delegation. The US State Department, in turn, believed it essential that the American delegation resist this Soviet demand, to ensure that a Moscow-backed leftist government would not be established in Seoul.

American officials had good reason to believe that the Soviets would create a satellite state in Korea like the ones they were creating in Eastern Europe. After the US delegation’s visit to Pyongyang in early July, General Hodge’s new political adviser, Joseph E. Jacobs, who had recently served in Albania, reported that a regime similar to the puppet states he had seen in Eastern Europe was in control in the northern zone. In addition, he noted that the Soviets had already created strong police and military forces in their zone. Consequently, even if the Joint Commission could somehow create a representative provisional government, the Communists would be able to exploit the political divisions in the South in order to seize control in Seoul.

Since the end of the Cold War, several scholars have mined newly opened archives in former communist countries to investigate how Soviet control was established in the areas the Red Army occupied at the end of World War II. They have revealed that the pattern differed somewhat in each place, as Soviet authorities adapted their policies and tactics to local conditions. In every case, however, Moscow’s goal was consistent. Stalin was determined to protect the Soviet Union against future attack by establishing buffer states around its periphery that were thoroughly subservient to Soviet wishes.

For postwar Korea, this tragic reality meant that there were two possible outcomes – a unified state under Soviet control or a divided country with one half controlled by Moscow and the other half left to work out a different fate. Once the Americans recognized this situation after their trip to Pyongyang in early July, they firmly rejected the Soviet position on consultation. General Hodge declared that Shtykov’s demand that they exclude members of the Anti-Trusteeship Committee was simply a ruse designed to prevent all rightist participation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Hodge insisted instead on complete freedom of speech for all groups, even if that led to the adjournment of the Joint Commission. To substantiate this position, he lifted the ban on public demonstrations against trusteeship.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the impact of the July 19 assassination of Yeo Un-hyung and the gradual formation of plans in Washington for a separate state in southern Korea.

[Sources: This post relies on work on Soviet postwar occupations by historians such as Norman Naimark, Jordan Baev, Laszlo Borhi, Mark Kramer, Vladislav Zubok, as well as my own work on the Soviet occupation of North Korea. It also relies on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Post #34’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