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연구) 북한의 초기작전 단계구분에 대한 기록 (합참, 한국전사, 1984)

합동참모본부가 1984년 11월 1일 발간한 ‘한국전사’ p.338에는 북한이 자신들의 공간사 ‘조국해방전쟁사’에서 구분한 작전 단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국해방전쟁사’에 대한 서지사항을 기록하지 않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전반에 대해서는 다음 3단계로 구분했다.

제1단계 : 개전-낙동강선 공격

제2단계 : 한 만 국경선으로의 패퇴

제3단계 : 중공군의 침략과 전선의 고착화

그리고 초기 제1단계는 다음 5단계로 구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1차 작전기 : 서울 - 홍천 - 강릉선 (1950. 6.25 - 28)

제2차 작전기 : 평택 - 충주 북방 - 울진선 (1950. 6.29 - 7.6)

제3차 작전기 : 군산 - 대전 - 문경 - 영덕선 (1950. 7.7 - 7.20)

제4차 작전기 : 진동 - 왜관 - 의성 - 포항선 ( 1950. 7.21 - 8.20)
낙동강 도하 및 총공격 준비 (8월 공세)

제5차 작전기 : 마산 - 다부동 - 포항선 ( 1950. 8.21 - 9.15)
총공격 실시 (9월 공세)

합참은 이 작전단계는 사전에 계획단계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전후 상황경과를 분석하면서 전사편찬을 위해 구분했다고 밝히고 있다.

위의 북한군 자체 작전단계 구분은 육군본부 정보참모본부가 1970년에 발간한 ‘북괴 6.25 남침분석’과 유사하나 그 세부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다. 북한자료에 대한 서지사항이 없어서 추가로 찾아 보아 확인해야 할 사항이다.

[(한국 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1 (육군전사, 1952. 1)]
(https://steemit.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1-1952-1)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2 (괴뢰군 연혁 1958. 6.1)]
(https://steemit.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2-1958-6-1)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3-1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
(https://steemit.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3-1-6-25-197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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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정리)미국의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폐기관련 자료 3

미국과 소련의 중거리핵전력협정은 미소간 냉전종식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의 위협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중거리 핵전력 협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와함께 미국과 소련은 전술핵 무기에 대한 군축도 추진했으며 이는 양국 대통령의 핵구상으로 나타났다. 조약과 같은 외교문서의 형태가 아니라 양국의 대통령이 자신의 구상을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먼저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발표를 했고 뒤이어 소련의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발표를 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전술핵 무기 철수 구상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술핵 철수로 나타났다. 이로인해 한반도 비핵화 구상도 가능했다. 결국 한반도 비핵화라는 개념도 미국과 소련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냉전종식의 산물이었다.

양국 대통령의 핵구상은 다음과 같다.


부시 대통령의 핵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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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27일 미국의 전술핵무기의 제한과 감축에 대한 구상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미국은 해외에 배치되어 있는 모든 지상발사 단거리 무기 국내로 철수시키며 미국에 보관되어 있는 동일한 무기들을 모두 제거한다.
또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지상함과 공격잠수함 그리고 지상기지 해군항공기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 미국은 위기에 직면했을때 이러한 무기들을 재배치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

소련/러시아 대통령의 핵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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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5일 소련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쵸프는 부시의 연설에 대해 상응한 소련의 조치를 발표했다.
소련은 모든 핵포병탄, 전술미사일의 핵탄두와 핵지뢰를 제거한다.
또한 모든 지상함과 다목적 잠수함에서 전술핵무기를 제거한다. 이런 무기들은 지상기지 해군항공기의 모든 핵무장과 함께 중앙보관소에 저장될 것이며, 방공미사일의 핵탄두를 분리시키고 핵탄두를 중앙보관소에 저장한다. 비율에 따라 파괴될 것이다.

(자료정리)미국의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폐기관련 자료 1

(자료정리)미국의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폐기관련 자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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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정리)미국의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폐기관련 자료 2

지난 포스팅의 아래 자료에 이어서 추가적으로 자료를 정리함

(자료정리)미국의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폐기관련 자료 1

러시아는 미국도 INF 조약을 파기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거를 제시했다.
미국이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MK41 VLS (수직런칭시스템)을 배치했으며 이 시스템이 중러리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MK41 VLS 시스템은 일본에도 설치되어 있다.

러시아가 MK-41 VLS를 INF 위반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듯 하다. 기본적으로 MK41VLS는 이지스함의 대공미사일 방어체계로 상대방의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체계는 이미 파기된 ABM 조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미 미러간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방어와 관련된 협정은 파기되었으므로 MK41VLS의 비치는 미국과 러시아간 조약의 대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체계는 요격 미사일을 수직으로 발사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미사일 자체를 대상으로하는 INF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듯 하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 체계를 통해서 지상발사 순항미사일을 발사 할 수 있도록 개량할 수 있다며 미국도 INF 조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MK41 VLS를 통해 러시아가 주장한 것 처럼 중거리 핵 순항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미국이 INF를 위반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듯 하다. 발사대는 발사대고 미사일은 미사일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미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INF 조약의 폐기를 감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력이 약해진 러시아는 나토의 동진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중거리 핵미사일의 재배치를 고려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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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정리)미국의 중거리핵전력협정(INF) 폐기관련 자료 1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냉전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했던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을 폐기를 선언했다. INF에 대한 언론소개가 없는 것 같아 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았다.

1987년 12월 8일 소련의 고르바쵸프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서명한 중거리 핵전력 조약은 크게 두가지 분야의 핵전력에 대한 감축을 규정하고 있다. 사거리 500km에서 5500 km의 지상발사순항미사일(GLCM)과 지상발사탄도미사일(GLBM)의 시험, 생산과 보유를 금지하는 조약이다.

조약 결과 미국은 800여개의 중거리 미사일을 소련은 1800여개의 미사일을 폐기하게 되었다. 이미 폐기된 대탄도미사일 조약(ABM)과 더불어 냉전당시 미국과 소련의 군축의 양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INF 폐기를 선언함에 따라 냉전시대에 체결했던 핵군축 조약이 폐기되었다.

미국의 INF 폐기선언은 러시아의 중거리 핵미사일 개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러시아는 냉전이후 지속적으로 중거리 핵미사일을 개발해왔다.

오바마 대통령 2014년 7월 28일 푸틴에게 서한을 통해 러시아가 조약을 위반하고 있다는 우려를 전달
이미 러시아는 2013년 6월 크레믈린 총참모장 세르게이 이바노프를 통해 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미국보다 손해를 보고 있다고 발표.

2014년 7월 29일 백악관 대변인 조쉬 어네스트(Josh Earnest)는 러시아가 조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밝힘
2017년 3월, 폴 셀바 미 합참차장은 미 의회에 러시아가 신형 크루즈 미사일(Novator 9M729)을 배치했으며 이는 INF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미국이 증거없이 비난하고 있다며 미국이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MK41 VLS 런칭시스템을 배치했으며 이 시스템이 중러리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으며 INF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러시아가 INF 를 위반하여 두개 대대의 순항미사일(GLCM) SSC-8을 개발했다고 2017년 2월 밝힌바 있다. 당시 1개대대는 시험중이고 1개대대는 이미 작전배치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중거리 핵미사일 개발에 대해 유럽은 매우 반발하는 상황임.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INF 폐기 선언이 마치 일방적인 것 처럼 보도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사실은 오랜기간 동안 미국과 러시아간의 갈등이 결국 파국으로 끝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함.

이번 INF 폐기선언은 원래 미국의 유럽에 대한 안보에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 그러나 만일 미국이 INF를 폐기하게 되면 그 영향은 동북아 정세 및 북핵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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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7

웨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트루만.jpg

이번 포스팅은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절차를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후 추진하는 과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분단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는 순간 한국의 분단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1947년 여름 한국문제가 대두되자, 북쪽의 권력기관들은 남한에서의 독자정부 수립이 한국의 공산주의자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도 해롭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양측은 자연스럽게 북한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임시정부를 원하게 되었으며, 이는 반도의 다른 쪽으로 관할권을 넓혀갈 수 있는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의 토의가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남부지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은 소련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정치적 전복을 통해 남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를 기대했다.

학자들은 아직 이기간 동안 남한에서의 스파이 활동이나 교란을 위한 소련의 지원에 관한 완전한 자료들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나, 1947년 8월 미국이 미소공동위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이동할때 이러한 ‘행동 방책’들이 증가했다는 것을 보유주는 증거들은 있다. 이러한 활동에 대한 대응으로, 하지 장군은 경찰에게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문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좌파들의 신문을 폐간했으며, “예의가 공산중의자들과 러시아인에게의해 약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간을 끝났다”라고 선포했다.

동시에, 미국관리들은 이전 포스트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정치적 해결을 위한 계획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슈티코프 장군에게 소련이 공동문서의 작성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경우,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의 상황에 대한 초안을 작성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8월 23일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이러한 움직임을 중지시키거나 최소한 지연시키기 위해, 공동보고서에 대한 미국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미소공동위의 참가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몰로토프는 과거의 입장을 되풀이하여 반탁위원회에 참가한 한국의 정당들은 그들이 모스크바 회담에 대한 반대를 번복하지 않으면 미소공위에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몰로토프는 또한 하지 장군의 좌파들에 대한 최근의 체포와 구금을 “비정상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미소공동위 미국대표단장 브라운 소장(Albert E. Brown)은 슈티코프 장군을 모든 합법적인 정치단체의 참가에 대한 모스크바의 거부를 헷갈리게 만들기 위한 잘못된 이슈를 확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련의 위선을 벗기기 위해서, 브라운 장군은 소련이 북한에 있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미소 공동위의 광범위한 참가에 동의한다면 수감되어 있는 좌파들을 석방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3일 이후 국무부 차관 로베트(Robert A. Lovett)는 몰로토프에게 소련이 마샬 국무장관과 맺었던 협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는 서신을 썼다. 반탁위원회에 참가한 한국인들은 제시된 협조 약속 문서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여 선동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 했으나, 소련의 대표들은 그들이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거부했다. 미소공위의 지속적인 토의가 무용해지자, 로베트 차관은 (중국과 영국이 포함된) 4개국 위원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9월 9일 워싱턴에서 최의를 개최하여 정치적 해결의 진전에 대한 공동보고서를 작성하자고 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의 통일과 경제적 회복에 관한 계획을 제안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9월 4일 미국무부는 몰로토프의 답신을 받았으며 그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소련 외무장관은 미국이 한국에서 민주적인 정부의 수립을 봉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영국과 중국의 신탁통치 참여는 모스크바가 3:1로 불리하기 때문에, 몰로토프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트루만 대통령은 몰로토프의 서한에 마샬 국무장관이 9월 9일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를 의제에 상정하는 연설을 할 것을 지시했다.

많은 학자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결정을 원치않는 부담을 제거하려 한 것이라고 비난해왔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실제 미국의 이유에 대해 이것이 국제적인 상황에 대한 광범위한 우려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본인의 논문 “Making Foreign Policy Under Stalin: The Case of Korea,” in Niels Erik Rosenfeldt, Bent Jensen and Erik Kulavig, eds., Mechanisms of Power in the Soviet Union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0)과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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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36.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스탈린 트루만.jpg

#
As the Korean issue developed in the summer of 1947, the authorities in the North understood that the establishment of a separate government in the South would be harmful to the interests of Korean Communists as well as of Moscow. Both naturally wanted the Soviet-backed proto-government in the North to extend its jurisdiction over the rest of the peninsula. While discussions in the Joint Commission remained deadlocked, the political and economic chaos in the southern zone gave the Soviets and Korean Communists hope that they could gain control of the South through political subversion.

Scholars do not yet have full documentation of Soviet support for espionage and agitation in the South during this period, but the evidence we do have indicates that such “active measures” increased as the US moved toward abandoning the Joint Commission in August 1947. In response to these activities, General Hodge ordered the police to arrest communist leaders and seize their documents. He also closed leftist newspapers, proclaiming that “the time for politeness, accepted as weakness by the Communists and by the Russians, is ended.”

At the same time, American officials moved forward with the plans for a political settlement outlined in the last post. They informed General Shtykov that the US would unilaterally draft a report on the situation in Korea if the Soviets refused to participate in compiling a joint summary. To try to stop, or at least delay, such a move, on August 23 Foreign Minister Molotov accepted the American proposal for a joint report. Moscow had not softened its position on consultations, however. Molotov reiterated the earlier position that Korean parties in the Anti-Trusteeship Committee would not be consulted unless they renounced their opposition to the Moscow Agreement.

Molotov also condemned Hodge’s recent arrests and imprisonments of leftists as “abnormal and inadmissible.” In return, the head of the US delegation to the Joint Commission, Major General Albert E. Brown, accused Shtykov of exploiting a false issue to distract from Moscow’s refusal to consult with all legitimate political groups. In an attempt to unmask Soviet hypocrisy, Brown offered to release the imprisoned leftists if the Soviets would free political prisoners in the North and agree to broad consultation at the Joint Commission.

Three days later Undersecretary of State Robert A. Lovett wrote to Molotov accusing the Soviet Union of violating the agreement it had concluded with Secretary of State Marshall. Koreans who were members of the Anti-Trusteeship Committee had signed the required pledge of cooperation and had not agitated against the Moscow Agreement, but the Soviet delegation still refused to allow them to participate in consultations. Since continued discussion at the Joint Commission would be useless, Lovett called for a four-power conference (adding China and Great Britain) to convene in Washington on September 9 to consider the joint report on progress toward a political settlement. He explained that the US would propose a plan for Korea’s unification and economic recovery.

On September 4 the State Department received Molotov’s reply which rejected the US proposal. The Soviet foreign minister accused the US of blocking the creation of a democratic government in Korea. Moreover, since British and Chinese participation in the trusteeship would mean that Moscow would be outvoted 3 to 1, Molotov rejected this suggestion. President Truman responded to Molotov’s letter by instructing Secretary of State Marshall to address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on September 9 and place the Korean issue on its agenda.

Many scholars have criticized President Truman’s decision to turn the Korean question over to the UN as a desire to get rid of an unwanted burden. In the next post, we will look more closely at the actual American motives, which, predictably, involved a broad range of concerns about the evolving international situation.

[Sources: This post relies on my article “Making Foreign Policy Under Stalin: The Case of Korea,” in Niels Erik Rosenfeldt, Bent Jensen and Erik Kulavig, eds., Mechanisms of Power in the Soviet Union (New York: St. Martin’s Press, 2000); and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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