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4,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 그리고 박정희와 첫대면

어렵사리 우신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지만 군대에 입대해야 겠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국방경비대에서 국군이 되었으니 의미가 더 있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다. 시험과목은 영어, 수학이었다. 시험에는 자신이 있었다. 학교에는 병원에 간다고 이야기 하고 시험을 쳤다. 사람들은 시험이 어렵다고 쩔쩔 메고 있었지만 이대용은 쉽게 문제를 풀었다.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영어였는데도 다들 어렵다고 했다. 시험을 보고 나서 곧바로 합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필기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구술시험이 있었다. 요즘 말하는 면접이었다. 시험이니 만큼 없는 돈으로 싸구려 검은 양복을 하나 사 입었다. 면접시험장으로 들어갔더니 조그맣고 까만 사람이 않아 있었다. 들어가자 마자 그가 당찬 목소리로 “네 이놈, 너 어떻게 이태리 구로 샤스대가 여길 왔나 ?” 하고 일갈을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검은 셔츠단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이대용은 “제가 왜 무솔리니의 구로 샤스대 입니까?” 라고 응수를 했다. 박정희는 “이놈이 너 검은 옷을 입지 않았어!”라고 이야기 했다. 응시생이 얼마나 당찬가를 알아보기 위해 강하게 몰아치려고 했던 것이다. 이대용은 “검은 옷은 다 그렇습니까 ? 그건 아닙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랬더니 박정희는 웃으면서 면접을 끝냈다. 그것이 박정희와의 첫대면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담당한 장교는 강문봉 중령이었다. 강문봉은 “영어 시험도 잘쳤고 수학 시험도 잘 쳤네, 선생이구만, 선생이 없어지면 아이들이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하겠어 ? 왜 그만 두려고 해 ?” 라고 물었다. 이대용은 “국민학교 선생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간성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교가 되어 나라를 지키려고 사관학교에 지원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강문봉 중령은 “성적이 다 뛰어나군” 했다. 그말을 듣고 사관학교에 합격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가 되어 구세제민하려고 했으나 북한의 체제를 몸소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용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만 북한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 마음대로 독재하는 사회였다.이대용은 자신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사관학교에 들어갔다고 이야기 했다. 과연 그런 생각이 전부였는지는 알 수 없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이대용이 남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학교 교사만 하기에는 이대용의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녹취록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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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3. 38선을 넘어서 2, 꿈에 나타난 어머니와 노숙자 생활

상인들을 따라 38도선 150미터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당시 상인들은 증명서를 발급받아서 검문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같이 가던 학생들은 중간에 모두 어디론가 없어지고 말았다. 38선은 러시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월경을 하려면 차고 있던 돈을 것을 주어야 했다. 상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이대용에게 솔밭쪽에서 돌아서 넘어가라고 이야기했다. 이대용은 300미터쯤 지나가다가 길가에 전화선이 깔려있는 것을 보고 38선을 넘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길가에서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국수를 얻어 먹었다. 가지고 있는 돈은 하나도 없었지만 행색이 워낙초라하니 그냥 준 것이었다. 국수를 얻어먹고 아카시아 그늘에서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잠을 자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났다. 왜 다른 방향으로 가냐며 정신차리게 세수를 하고 다른 길로 가라고 말씀을 한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논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길을 물어보니 큰길로 가면 서북청년단원들이 그길로 오는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매질을 한다고 하며 작은 길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 길이 꿈에서 어머니가 가르켜준 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38선을 넘은 이대용은 서울로 와서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집에서 신세를 잠시 지던 이대용은 군대에 들어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미 육사 5기들은 모집이 끝나 1년은 있어야 응시를 할 수 있었고 병사들도 모두 모집이 끝났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효창공원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취직이라고 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정교사 자격증이 있지만 서울의 학교 교사들도 모두 만원이었다.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든 차에 취직부탁하러 아현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친구 이석준을 찾아갔다. 이석준 방앞에서 3000원 줏었다. 당시 짜장면이 한그릇에 1500원 정도할 때였다. 수중에 돈도 한푼 없었고 그전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굻었다. 이석준은 이대용에게 점심은 먹었냐 물어보았다. 이대용은 이미 늦은 시간이라 식사를 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석준에게 주인찾아 주라고 할려고 했던 3000원을 넘겨주지 못했다. 교사자리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2주 정도 뒤에 찾아오마라고 하고 돌아서는 이대용은 내가 도둑질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가 비참해졌다.

더 이상 교사자리를 찾는 것도 어려워서 막노동이라도 해서 입에 풀칠이라고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쓰레기를 치우는 인부들에게 일을 시켜 달라고 했으나 그것도 자리가 없었다. 인부들은 서대문구역소(지금의 구청)에 가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 찾아가보라고 했다. 서대문구역소를 찾아갔더니 강원도에 갈 광부를 모집한다고 공고가 붙어 있었다. 이대용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광부로 가서 평생 살겠다고 결심했다. 거기서 광부의 딸하고 만나서 살면서 자유를 누리면 되는 것이지 뭐가 더 중요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지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일주일 지나서 다시 찾아가보니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3000명 이상이 왔다면서 경력이 있는 사람들 먼저 선발한다고 해서 광부모집 마저 탈락하고 말았다. 한 열흘 정도를 거의 굶으며 지내다가 우연히 정교사 자격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사 모집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길로 한걸음에 달려가 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으로는 어디라도 붙을 자신이 있었다. 당당하게 합격해서 우신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겨우 하루 하루 입에 풀칠하는 신세를 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녹취록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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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정리 2. 38선을 넘어서

이대용은 인민학교와 교원양성소이 수업 도중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당국에서 내려오는 지시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물론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당국의 지시를 그대로 이야기 했지만 사족을 붙인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한때 우리나라를 위해 열렬히 투쟁한 과거도 있다”고 한 것이다. 이대용이 한 이야기는 그대로 지나가지 않았고 결국 그가 북한을 탈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대용이 수업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당원들이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민학교 5학년 반의 그중 나이가 많았던 학생이 1947년 6월 28일 최상권이란 공산당원이 김구와 이승만에 대해 교육시키는 것을 물어 보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시 이대용은 공산당의 선전물이 교실에 붙어 있으면 그것을 떼고 아이들 사생화를 붙여 놓기도 하곤 했다. 그때 이대용은 북한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자 불길한 생각이 되어 이남으로 도망을 가야 되니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나고 일요일 아침이 되자 김명훈이란 공산당원이 아침에 찾아와서 민청회의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밖으로 나가니 소총을 둘러맨 보안대원 2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검사라는 사람이 두명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은 인민학교도 나오지 못한 미장이였다.

마침 학교 교장이던 남궁이라는 사람이 이런 사건은 민청에서 해야할 것이 아니라 확대회의를 해야 한다고 했고 결국은 그 확대회의는 인민재판으로 이어졌다. 확대회의는 자아비판부터 시작되었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자아비판을 했고 마지막에 이대용이 자아비판을 했다. 자신이 이남에서 잘 못 들은 것이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분골 쇄신하겠다고 이야기 했다. 먼저 사람들의 긴장을 풀고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자 곧바로 탈출을 감행했다. 도망을 가자 마자 바로 추적대가 따라 붙었다.

이대용은 어릴때 원족을 갔었던 제석산으로 숨어 들었다. 방향을 잃어 버려 어느 외딴 집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 보았는데 마침 바로 이어서 추적대가 들이 닥쳤다. 이대용은 길가 옆으로 바로 숨었고 아주머니는 4-5시간전에 추적대가 찾던 반동이 지나갔다고 하면서 이대용이 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느듯 밤이 되어 헤메이던 중 외딴 집을 찾아 들었다. 주인이 어디에 사시던 분이냐고 묻자 부지불식간에 ‘금천군 우방면 우봉리 사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인장이 자신의 그곳에서 12년을 살았으며 자신이 평창이씨로 그곳이 집성촌인데 이중식이라는 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대용은 이중식이 자신의 백부라고 밝혔다. 도망하는 중에 일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항렬을 보니 이대용보다 형님뻘이었다. 그는 이대용에게 ‘자네가 원식 아저씨 아들인가’ 하면서 집안으로 들였다. 이대용은 그에게 자신이 인민재판을 받다가 도망치는 상황임을 설명했다. 마침 그의 집에는 이대용을 잡으러 온 보안대원들이 묶고 있다면서 곧바로 원당쪽으로 도망을 가라고 일러주었다. 이대용을 잡으러 온 보안대원들이 비가와서 움막이 젖어버리자 옷을 말리기 위해 자신의 집에 와있으니 원당쪽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원당으로 도망가다가 마늘밭에서 마늘쪽을 뽑다가 농부에게 걸렸다. 농부가 소리를 지르자 보안대원들이 쫓아왔다. 이대용은 곧바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아 남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양합이란 곳에 도착했다. 마침 거기서 월남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중에서 서울대에 다니다가 김일성 종합대학에 들어갔는데 이게 아니다 싶어서 월남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따라서 이동하였다. 그러나 38선을 넘기는 쉽지 않았다.
이대용 장군 녹취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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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1. 녹취록 정리를 시작하면서

서울대 규장각은 ‘한국현대사와 군’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실시하면서 이대용 장군에 대한 녹취록을 작성했다. 이대용 장군은 월남의 마지막 공사로 알려져 있다. 당시 주베트남 대사관 공사로 근무했으며 월남이 패망할때 교민들 보호때문에 철수를 하지 못하고 월맹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외교관은 포로로 잡지 않는다는 국제법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이대용 공사를 5년간 감옥에 가두고 북한으로 보내려고 했다. 이대용 장군은 끝까지 이들의 회유와 억압을 거부했고 결국 귀환했다. 2012년 11월부터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의 녹취록을 읽고 있다.

이미 전에 언급한바 있지만 이대용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한국전쟁 당시의 영웅으로 알려진 심일 소령의 전설이 거짓말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중간첩 이수근이 재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당시 이대용 장군은 사이공에서 이수근을 직접 체포했다. 나중에 포로에서 석방된 이후에 이수근이 간첩이 아님을 증언했고 당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중이던 이수근의 조카가 무죄로 풀려난 바 있다.

이대용 장군은 한국전쟁 3년을 중대장과 대대장으로 130여차례의 전투를 치루었고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이후에는 대쪽같은 삶을 살다가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하고 준장으로 군문을 떠났다. 이후 주월남 공사로 근무했으며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 있다가 포로가 되어 5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감옥에서 풀려나 귀환해서는 과거에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이 허구라는 것을 밝혔다. 만년에는 한국전쟁 당시 육탄으로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했다는 전사기록이 사실이 아니고 허구라고 밝혔다. 당시 이대용 장군이 중대장으로 직접 그 상황을 보았으며, 기실 심일은 자주포 파괴는 커녕 가지고 있던 대전차포 1문을 잃어버리고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이대용 장군이 그런 사실을 밝힌 것은 군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판치면 안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원래 심일의 전공조작 사건때문에 이대용 장군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에 녹취록을 읽으면서 정리를 시작하려고 한다.


1925년 11월 20일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우봉리 142번지에서 출생했다. 삼형제중 막내였던 아버지는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 못해 형제들 중에서 빈한한 생활을 해야했다. 모두 6남매로 2남 4녀중 장남이었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다가 8세쯤에 백마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보통학교 6년을 마쳤으나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공부를 잘했기 때분에 백마보통학교 교장이 배려를 하여 학교를 1년 더 다닐 수 있도록 해주었으나 결국 그 다음해에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이후 중학교 2학년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독학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나온 강의록을 보고 혼자 공부했다. 그 이후 전액 관비였던 경성사범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할 수 있었다. 1년과정의 교사과정과 6개월의 연구과정을 마치고 교사가 되어 황해도 고향으로 배치되었다. 해방이 되자 서울사범학교에 다시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나 치질과 폐병에 걸려 병석에 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울 사범학교에 들어간 이대용은 신문을 돌리면서 고학을 했으나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사범학교 김기수 선생의 배려로 서울대학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서 치질은 치료를 했으나 먹지 못하고 쉬지못해 폐병은 차도가 없었다.

이대용의 북한의 김일성 대학에서는 무료로 공부시켜 준다고 하여 서울사범학교 교수들에게 상의를 했다. 당시 정순택 교수와 사범대학장이던 신기범 교수는 통일되면 김일성 대학이나 서울대학이나 마찬가지니 당장 돈이 들지 않는 김일성 대학으로 가라고 권유를 했다. 마침 먼저 월북했던 이극로 박사와 연락이 되어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1946년에 북한으로 넘어간 이대용은 1947년 봄이되자 우선 교사로 취직을 했다.

그러나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김구가 장개석에게 광산권을 팔아먹었고 이승만이 미국이에 철도권을 팔아먹었다며 학생들에게 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한국민주당이 민족반역자라고 가르키라고 했다. 한편 이대용에게 조선공산당 당원이 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이대용은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고 사양을 하면서 회피했다.

당시 북한에는 교원이 부족해서 교원학교를 만들었다. 능력있는 교사들이 모두 이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교원을 시급하게 양성해야 했다. 이대용은 인민학교 5학년 담임을 담당하는 동시에 교원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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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 post 37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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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트는 미국이 소련과 합의에 의한 한국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포기한 이후의 과정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이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결심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가 중국의 상황이었다는 점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점이었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때 중국이 공산화되기전에 남한만이라도 빨리 확실하게 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결국 당시의 상황을 우리 내부적인 요인만으로 해설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47년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소련과 수용가능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포기하면서, 유엔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런 접근의 목적은 남한의 한국지도자들에게 소련의 우세를 거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별도의 정부가 남한지역에 수립되고, 이 정부가 국제사회로 부터 정당하게 인정을 받으면, 정치적으로 강력해질 것은 분명했다. 둘째로, 트루먼 행정부도 서울에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의회를 설득하기 쉬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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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관리들은 1946년 이란에 대한 소련의 압력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국경문제에서 소련의 철수에 기여했었다고 믿었다. 일부는 만일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서의 자유선거를 만장일치로 강력하게 지지한다면, 동일한 결과가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결론지었다. 미국이 국제적 협조에 대한 약속을 준수하고 그 의무를 수행하는 경우에는 소련이 물러 설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미국의 마지막 제안을 거부하고 나서, 국무차관 로베트는 9월 16일 모스크바에 그 다음날에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겠다고 통보했다. 총회에서의 연설에서, 국무장관 마샬은 한국에서의 교착에 대한 주요한 이유는 모스크바가 한국정치지도자들의 표현의 자유원칙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 양대 점령국가들이 한국에 대한 합의를 수행할 수 없으므로, 먀샬은 국제적 행동으로 한국에서의 상황으로 야기된 세계평화에 대한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무부의 계획은 유엔이 6개월이내에 시작될 제헌국회의 선거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 입법기관은 헌법을 만들고 임시정부를 위한 관리를 임명해야 했다. 이 계획은 “한국 유엔 임시위원회(UNTCOK)의 설립을 요구했으며, 이는 11개국의 대표로 구성되어 선거를 감독하고 이것이 얼마나 공정하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해 유엔총회에 보고해야 했다.

중국에서의 변화하는 상황들이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제안을 시급하게 요구하도록 했다. 1947년 여름 중국공산당 군대는 국민당에게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에서 권력을 장악하면, 미국의 관리들이 생각하기에, 미국의 한국 점령군은 위험해 질 수 있었고, 아마도 미국의 일본 통제도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을 준비하기 위해, 트루만 대통령은 웨드마이어 중장을 중국과 한국에 보내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그리고 군사적 상황”을 점검하도록 했다.

웨드마이어의 임무는 유럽에 대한 우려에 의한 것이었다. 트루만 행정부는 의회에서 장개석을 지원하기 위해 자원을 예비하기 위한 강력한 “중국 로비”가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지원과 유럽회복을 위한 펀드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봉쇄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트루만은 웨드마이어가 장개석을 설득하여 공산주의자들을 패배시키기위해 필요한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개혁을 수행하도록 설들할 것을 기대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웨드마이어의 중요한 보고서를 살펴보고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대한 영향에 대해 알아보겠다.

[참고자료]

이번 포스트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로 했다.
William Stueck, The Wedemeyer Mission: American Politics and Foreign Policy During the Cold War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4);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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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37'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스탈린 트루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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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47, as the Truman administration gave up hope of reaching an acceptable agreement with the Soviet Union to create a government in Korea, they turned to the United Nations. The purpose of this approach was to increase the chances that Korean leaders in the South could resist Soviet domination. It was clear that a separate government would be created in the southern zone, and if that government were recognized as legitimate by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t would be politically stronger. Secondly, it would be easier for the Truman administration to persuade Congress to provide significant economic aid to Seoul.

US officials believed that international condemnation of Soviet pressure on Iran in 1946 had contributed to Moscow’s withdrawal from that border state. Some optimistically concluded that the same outcome might happen in Korea, if UN member states were unanimous and firm in support of free elections in Korea. The Soviets might then back down, and in any case, the US could demonstrate its commitment to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to fulfilling its obligations.

Thus, after Foreign Minister Molotov rejected the latest American proposal, Undersecretary Lovett informed Moscow on September 16 that the US would place the Korean issue on the UN agenda the following day. Speaking to the General Assembly, Secretary of State Marshall declared that the main reason for the impasse over Korea was Moscow’s refusal to accept the principle of freedom of expression for Korean political leaders. Since the two occupying powers had been unable to carry out their agreements on Korea, Marshall asked for international action to remove the danger to world peace represented by the situation in Korea.

The State Department’s plan was that the UN would supervise elections for a constituent assembly to be held within six months. This legislature would then formulate a constitution and appoint officials for a provisional government. The plan also called for the creation of a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 made up of representatives from eleven countries, which would supervise the elections and report to the General Assembly on how fairly they were conducted.

For the US, changing conditions in China added urgency to the proposal for Korea. In the summer of 1947 military force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won significant victories over the Nationalists. If Communists came to power in China, American officials reasoned, US occupation forces in Korea would be in danger, and perhaps American control of Japan would be threatened. To prepare a strategy for coping with these threats, President Truman sent Lieutenant General Albert C. Wedemeyer to China and Korea to examine the “political, economic, psychological, and military situations.”

The Wedemeyer mission was also driven by concerns over Europe. The Truman administration feared that the strong “China Lobby” in Congress might block US assistance to Greece and Turkey and funds for the European Recovery Program in order to reserve resources for supporting Chiang Kai-shek. Truman therefore hoped Wedemeyer could persuade Chiang to carry out the military, economic, and political reforms that appeared necessary to defeat the Communists.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Wedemeyer’s important report and its impact on American policy toward Korea.

[Sources: This post relies on William Stueck, The Wedemeyer Mission: American Politics and Foreign Policy During the Cold War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4); and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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