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8, 심일의 허위공적에 관한 비사

춘천전투는 심일의 공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6월 25일 비상이 발령되자 심일이 부대에 일찍 들어갔다. 심일은 부대 근처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연대장은 대전차포 출동을 지시했다. 부대에 복귀한 병사들이 얼마 없어서 대전차포 한대만 끌고 전방으로 추진되었다. 아침 8시경 역골앞에 까지 갔으나 이미 적이 진출하고 있었다. 심일과 대전차포 부대는 전차에 사격을 했으나 꿈적도 하지 않았다. 당시 춘천을 공격한 북한군 2사단은 전차가 없었고 자주포만 있었다. 심일을 자주포에 사격을 했던 것이다.

대전차포로 적 자주포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심일은 옥산포 쪽으로 철수했다. 거기에서 올라오고 있는 대전차포 1문을 만나 진지를 편성했다. 적 자주포가 접근하자 1대는 두고 한대만 끌고 철수했다. 대전차 중대장은 대전차포 1문을 잃어버리고 온 심일을 두들겨 팼다. 그리고 연대장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그놈의 새끼가 포를 하나 뺏끼고 왔습니다”라고 울면서 심일을 총살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연대장 임부택은 이왕 그렇게 된 거 앞으로 잘하라 그래하면서 용서했다. 그 이후 심일은 사단 포병으로 가게 된다.

포병 제16대대에서는 심일을 다시 제7연대 포병연락 장교로 보냈다. 북진과정에서 심일은 압록강에서 90 km 남쪽에 있는 고장이란 곳 까지 갔다. 연대본부는 고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공세를 실시하면서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심일은 안태석 중위와 같이 중공군에게 포위가 되어 있었다. 심일은 중공군에게 사살당하고 안태석은 다른 병사와 함께 붙들려서 벽동포로수용소로 잡혀갔다.

1951년 1월 17일경 연대장이 심일의 부모를 만났다. 당시 연대는 광혜원에 주둔하고 있었다. 심일의 부모는 심일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후 연대장이 사단 작전참모하던 양중호 중령이 왔고 임부택 대령은 부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심일의 부모는 연대가 용문산에 있을 때 다시 찾아왔다. 거기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안태석을 만나서 심일의 사망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연대장 양중호는 심일의 3 형제가 모두 전쟁에서 죽고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일에게 훈장을 주라고 했다. 심일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태극무공훈장을 주었다. 갑자기 춘천에서 전차를 육탄으로 파괴했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 이후에 심일을 육사에서 교육을 시켰던 손희선 장군이 자신이 교육을 잘시켜서 심일이 영웅적으로 춘천에서 육탄으로 영웅적 무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 손희선이 거짓말을 꾸며내서 심일상을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졸업생들에게 상을 주기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대용 장군이 심일의 공적이 사실과 다르다는 증언은 2012년 11월 10일 구술한 것이다.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2016년 6월 17일 “北 탱크를 부순 ‘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심일의 공적이 허위임을 보도했다. 이대용장군이 심일의 공적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그 이전부터 했으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이를 확인하거나 검토하지 않았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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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7, 6월 26일 한국전쟁 최초의 공세행동, 파쇄공격을 실시하다.

아침에 안기수 하사로부터 전쟁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았던 때가 8시 30분이었다. 북한이 남침하고 4시간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길로 부대에 들어갔다. 군화와 철모를 찾았다. 가져온 군화가 모두 작아서 신을수 없어서 방한화를 신었다. 가져온 철모에다 반창고를 오려서 계급장을 붙였다. 부대를 나선 것이 9시 30분경이었다. 1950년 4월과 5월에 걸쳐 육군본부에서 진지를 구축하라는 지시를 했다. 당시 작전국장 강문봉 장군의 지시였다. 북한의 계속적인 공세가 있었기 때문에 대비하라는 지시였다.

이대용이 지휘하던 1중대는 1대대의 제일 북쪽에 있었다. 1대대의 지위소는 우두산 164고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1대대가 진지를 점령했을 때가 10시 30분경이었다. 전방에 있는 부대는 다 무너진 것 같았다. 전방에 있던 중대장과 소대장들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전방에 보병이 거의 무너진 상태에서 16포병대대는 계속 적에게 포를 발사했다. 16포병대대가 보유하고 있던 대포는 105미리로 사거리가 7500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76미리포가 13300미터였다. 122미리 포는 20800미터를 넘는 사거리였다. 16대대 포병이 압도적으로 불리했지만 제1대대가 앞으로 나아갈때까지 진지를 지키며 대포를 쏘면서 북한군 보병의 진출을 저지했다.

제1대대가 진지로 투입하던 시간이 9시이전 이었다. 당시에는 이미 전방을 지키고 있던 7연대 2대대와 3대대가 붕괴되었던 상황이었다. 10시 30분정도에 1중대가 진지에 배치될때까지 제16 포병대대가 한계울과 역골로 들어오는 북한군 보병의 진출을 차단하고 있었다. 만일 그 당시 포병이 이들의 진출을 막지 못했더라면 제1대대는 진지를 점령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제1대대가 진지를 점령하여 전투태세를 갖추는 동안 제16대대는 계속해서 북한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6월 25일 12시 경부터 저녁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증언이 엇갈린다. 우선 심일과 육탄 5용사가 한계울에서 남진하는 북한군의 자주포를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공적으로 심일은 나중에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태극무공훈장에는 심일이 자주포를 육탄으로 파괴했다는 기사는 없다. 적이 공격해오는데 물러서지 않았다는 공적이 있을 뿐이다.

이대용 장군은 당시 164고지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6월 25일에는 심일이 옥산포에서 대전차포 2대를 가지고 있다고 1문을 잃어버리고 1문만 가지고 도망갔다고 증언했다. 당시의 북한군이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한 것은 포병의 활약때문이라고 한다. 포병의 활약에 대해서는 많은 증언과 기록들이 있다. 우선 소련의 군사고문관 라주바에프 보고서에도 제6사단 포병의 활약으로 인해 계획대로 진출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북한군 포로의 증언에도 제16포병대대의 사격으로 인해 진출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25일 오후의 전투기록은 매우 혼란스럽다. 읽어도 사건의 전후를 파악하기 매우 어렵게 정리가 되어 있다. 특히 포병의 활동은 제대로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전쟁이 끝난후 제16포병대대 장병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춘천은 포병들이 목숨걸고 지켰는데 공은 엉뚱한 사람들이 다 차지했다는 것이다.

당시 연대장은 소양강 남쪽의 봉의산에 있었다. 25일 저녁이 되자 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있던 봉의산에 가서 북한군에게 역습을 가하겠다고 건의를 했다. 당시는 소양강 북쪽이 있는 제1대대를 철수시켜 소양강에서 방어를 하자고 하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소양강에는 다리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방어를 하기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용배 소령이 역습을 제안했다. 우두산 164고지 근처까지 내려온 적의 측면을 역습으로 공격하면 적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용배의 기습공격 계획을 들은 이대용은 아연실색했다. 26일 오전에 이미 북한군은 자주포 5대와 함께 옥산포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규모면에서 북한군과 1대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용배는 연대장의 허락을 득했다면서 기습을 달성하면 병력의 열세는 문제가 안된다고 설명했다. 전병력이 100미터 달리듯이 공격하면 박격포와 포병이 지원사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26일 동이 트기전에 김용배는 중대장 3명을 모두 모아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10시 30분에 전대대 병력이 옥산포에 있는 북한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3개중대 약 400명 정도의 병력이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포병도 정확하게 옥산포의 적을 타격했다. 기관총과 박격포도 지원사격을 했다. 혼비백산한 북한군은 자주포 5문을 남겨놓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도망가면서 자주포 1대는 스스로 파괴시켰다.

대대는 도망가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한계울 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연대에 보고해서 북한군 자주포를 가져가라고 보고하고 계속 추적했다.

한계울쪽으로 적을 추적하던 제1대대는 다시 진지로 철수했다. 북한군이 우두산 164고지 방향으로 진출해오면 제1대대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수하면서 북한군이 남겨둔 자주포를 파괴하지 못했다. 수류탄으로 포신을 파괴하면 된다는 것을 알 고 있었으나 연대에서 가져간줄 알았던 것이다.

이작전이 한국전쟁 처음 방어시 실시한 방어시 공세행동이다. 세계전사에 유례가 없는 작전이다. 물론 이 작전의 성공은 대대장의 작전구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제1대대의 기동을 지원해준 포병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아마도 포병이 정확하게 타격을 하지 못했으면 적도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전을 구상하고 시행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용배 소령은 연대장때 전사를 했고 장군으로 추서진급했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전술에 있어서는 거의 군신이나 마찬가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 누가 그를 기억하는가 ? 우리는 진정한 영웅은 잊어 버리고 기회주의나를 영웅이라고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녹취록 1, 2, 3, 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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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6 김용배 장군과의 인연,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

김용배는 육사 5기로 임관했다. 8연대에서 8중대장을 마치고 연대 작전주임으로 부임해서 이대용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49년 인대 관대리 신남지역에 북한군 1개 여단이 넘어오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제7연대가 전투를 담당했으나 신통치가 않았다. 특히 1대대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사단장이던 유재흥 장군이 김용배를 7연대 1대대장으로 보직을 시켰다. 당시는 3기생들도 아직 대대장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5기생인 김용배가 대대장으로 보직된 것은 특수한 조치였다. 7연대에서는 소란이 일어났으나 사단장의 조치라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대용은 1949년 11월 홍천에 있다가 보병학교 초등군사반 교육을 들어갔다. 3개월간 교육을 마치고 1950년 2월 사단 수색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당시는 가장 우수한 사람들만 수색대로 보냈다. 그런데 미군 고문관들이 4월에 새로운 연대를 창설하면서 사단 수색대를 해체했다. 연대 수색대가 있느니 사단 수색대는 필요없다는 이유였다. 이대용은 새로운 연대 창설요원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이를 알게된 김용배는 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자신이 훈련을 시켰는데 가장 우수하다면서 이대용을 데려 오라고 권유를 했다. 임부택은 이대용을 불러 “김용배 소령에게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다. 가장 우수한 중대장이라고 하니 딴 데 가지 말고 우리 연대에 와서 중대장을 해라”고 했다. 그런데 8연대에서도 이대용을 데려가려고 했다. 8연대 부연대장이 이대용을 꼭 데려와야 한다고 한 것이다. 결국 7연대장과 8연대장이 이대용 문제로 티격태격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단 인사참모 김인철이 이대용을 불러 어디로 갈것이냐고 물었다. 이대용은 “제가 육사들어갔을때 김용배 대대장이 구대장을 했고, 작전주임할때 작전보좌관으로 모셨으니 그 분에게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하여 1950년 5월 초에 7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 보직이 되었다.

원래 7연대는 청주에 있었으나 8연대의 일명 강표사건 (대대장이던 강태무와 표무원이 하루사이로 나란히 월북한 사건)이후 춘천으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8연대는 원주로 빠져나갔다.

중대장으로 보직된지 한달이 조금 지나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대용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6월 25일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가고 있었다. 이 도서관은 원래 미국의 군정원이 있던 자리였으나 군정이 끝나면서 도서관이 되었다. 도서관에는 일본어로 된 책들이 많이 있었다. 책을 좋아 했던 이대용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이면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었다. 그중에 앙드레 모로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캐나다로 망명을 하는 배위에서 쓴 책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미 두번이나 읽었지만 나라를 잃은 앙드레 모로아가 캐나다로 가는 배위에서 4-5살 먹은 아이들이 막 뛰어 노는 것을 보고 “너 조국에 충성하라’고 울면서 쓴 대목은 읽을 때 마다 감명이었다.

특히 북한에서 구사 일생으로 살아남았기에 앙드레 모로아의 말은 가슴에 와 닿았다.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영혼을 울렸던 것이다. 이대용은 앙드레 모로아를 읽으면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7난8고라도 이겨내야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것이다.

6월 25일 아침 앙드레 모로아를 한번 더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멀리서 포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6사단 16포병대대가 훈련을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마침 비가 내려서 장화를 신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 우의를 입고 길을 나선 이대용은 도서관을 가기 위해 역전을 지나 봉의산으로 향하려고 하는 순간 중대 연락병 안기수를 만났다. 철모를 쓰고 카빈총을 든 안기수 하사가 정신없이 뛰어왔다. 그를 발견한 안기수 하사는 경례를 하더니 “중대장님,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북에서 쳐 내려 왔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그 이전에 북한군들이 가끔 내려와서 소도 잡아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면서 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녹취록 1, 2, 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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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38

웨더스비 교수 씀

트루만과 스탈린.jpeg

이번 포스트에서 웨더스비 교수는 미국의 한국정책이 매우 다양한 견해가 종합된 결과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글에서는 웨드마이어 중장이 한국문제에 대한 보고를 함에 있어서 중국과 소련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와함게 웨더스비 교수는 동유럽 문제에 대한 인식이 한국문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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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트에서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이 1947년 9월 웨드마이어 중장을 중국과 한국으로 보내 사실을 확인토록 한 이유를 확인했다. 우리는 모스크바가 전후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는 전에 우리가 논의했던 바와 같이 스탈린이 1945년 국민당 정부와 서명한 협정을 충실하게 유지함으로써 극동에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웨드마이어는 그가 이용가능한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인민해방군의 성공이 소련이 아시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마스터 플랜을 수행하는 증거라고 결론을 맺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보낸, 마샬 국무장관에 대한 그의 첫번째 리포트는 행정부에게 최악의 공포를 확인시켜 주었다.

웨드마이어는 한국에 대하여, “다른지역에서 민주화와 부흥 프로그램을 위협하는동일한 사악한 세력들이 한국에도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소련은 남한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지만 대신 침투와 소요를 이용하여 전체 한반도를 장악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과 관련하여 소련과 협조를 계속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런 협력은 소련이 정치적 지배를 팽창시키는 것만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있다. 그는 또한 만일 미국이 한국에서 빨리 철수한다면, 소련이 한반도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는 소련이 아시아 전체에서 지위를 높이고 일본에서 미국의 위치를 약화시킬 것이었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웨드마이어는 남한에서의 군대가 소련의 소요에 대처할 만큼 충분히 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인정했다. 미국의 점령기구는 경찰과 민족주의 청년운동에 의지하여 질서를 유지했으나 이들 집단은 그들의 잔혹함과 임의적인 구금으로 광범위한 증오를 받고 있었다. 잠재적인 유권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해, 극우주의자들이 선거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드마이어는 만일 미국이 상당한 경제지원을 제공하고 미국이 지도하는 “한국의 경비대를 만들어 경찰력을 희석시킨다면, 한국이 아시아에서 중요한 “자유의 방벽”이 될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에서 완충지역을 유지하고자 하는 소련의 희망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비현실적으로 이러한 미국의 방안들이 결과적으로 소련에게 “중립화된 한국”을 완충지역으로 받아 들이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웨드마이어의 결론은 유럽 상황에 대한 우려로 인해 행정부내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동유럽 과장 프랜시스 B. 스티븐스는 한국은 “동서간 영향력과 세력을 향한 투쟁과 아시아인들의 민족주의적 목표의 후원에 대한 미국의 보장을 세계에 보여주는 상징이다. 만일 우리가 한국이 원점으로 돌아가 소련의 세력에 떨어지게 되도록 한다면, 세계는 우리가 소련과의 게임에서 졌다고 느낄 것이며,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우리의 권위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극동에서, 미국의 지원에 대한 민족주의운동의 기대는 심각하게 흔들리게 될 것이며, 그 결과는 더 커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스티븐스는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완전한 승리는 반란과 간접적인 침략으로 확장하겠다는 스탈린의 전략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자신의 분석을 결론 맺었다. 스티븐스가 동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에 대한 우려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 포스트는 동유럽의 상황을 검토하고 이것이 어떻게 한국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행동을 만들어 갔는가를 살펴보겠다.

[참고자료]
이 포스트는 다름 자료를 참고로 했다.

William Stueck, The Wedemeyer Mission: American Politics and Foreign Policy During the Cold War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4)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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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5 육군사관학교 교육과 임관

이대용 장군 녹취록 5 육군사관학교 교육과 임관

이대용은 육사 7기생으로 입교했다. 당시 6기와 7기가 같이 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6기는 사병중에서 시험을 보아서 선발했고 7시는 일반인들 중에서 시험을 보아서 선발을 했다. 6기와 7기는 선발시험이 달랐다. 7기는 일반대학시험과 같았다. 국어, 국사, 영어, 수학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사병출신이었던 6기는 군사학으로 시험을 치루었다.

6기생들은 입학하자 마자 태능의 육사에서 교육을 받았고 7기생들은 8개의 부대로 나뉘어져서 당시 8개의 연대에 각각 위탁교육이 보내어졌다. 입학생들이 8개의 부대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대용은 원주에 있던 8연대로 보내어졌다. 3개월을 야전부대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3개월은 태능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8연대는 우수한 장교 2명을 선발하여 교육대장과 구대장으로 임명했다. 교육대장은 조득만 대위였고 구대장은 김용배 소위였다. 8연대에서 위탁교육을 받게된 생도들은 연대본부에서 약 6km 정도 떨어져 있었던 원주농업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구대장이던 김용배 소위와는 이때의 인연으로 나중에 이대용이 6사단 7연대 1대대에 대대장과 중대장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3개월 동안 받은 교육은 각개훈련, 사격술과 같은 기초적인 내용이었다.

당시는 창군과정이라 육사입학도 복잡했다. 7기생들은 먼저 시험을 쳐서 210명을 선발해서 교육을 받고 있는 도중에 하사관 출신 300명이 추가로 입학을 했다. 그리고 이후에 40명 정도가 추가적으로 두어번 더 입학을 했다. 그래서 7기생으로 졸업한 사람들은 약 600명 정도였다. 처음 이대용이 시험을 칠 때의 경쟁률을 약 8대 1 정도였다. 경비대라고 했을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군이 생긴다고 하니 많이 응시했다.

동기생 중에 이청천 장군의 아들 이정계도 같이 교육을 받았다. 이정계는 중국군에서 중위로 복무했기 때문에 7기들 보다 조금일찍 졸업했다.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해서 빨리 장교들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청천 장군은 자신의 외아들 이정계를 제일선에 나가 싸우도록 했다. 이정계는 전투에서 전사를 하고 말았다. 이청천 장군의 후대가 끊어진 것이었다.

11월 11일 졸업을 하고 임관을 했다. 당시 교장은 최덕신이었다. 그는 중국군에서 중령까지 근무했다. 육사교장으로 근무하면서 군사지식과 군인으로서의 자세로 생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월북을 했다.

박정희는 7기생들에게 전술학을 가르쳤다. 교관중에서 가장 잘가르쳤고 머리가 좋았다. 당시는 혼란한 시기였다.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이후 숙군작업에 걸려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박정희로 부터 교육을 받았던 육사 5기생들이 박정희를 구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냈다. 박정희가 5기생들의 중대장을 했고 5기생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임관을 하고 제일 먼저 배치받은 곳이 6사단 8연대였다. 동기생 30여명이 8연대에 갔다. 보직은 성적순으로 받았다. 가장 성적이 좋은 사람, 즉 군번이 빨른 사람이 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이 되고 두번째가 연대 인사장교로 보직을 받았다. 이대용은 작전주임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8연대 같이 갔던 동기생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았던 것이다. 당시 8연대장은 김형일 소령이었다. 당시 연대장이나 작전주임도 작전명령을 작성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이대용은 육사에서 교육을 받을때 박정희로부터 제대로 배워서 어려움없이 작전명령을 작성할 줄 알았다. 연대장과 작전주임으로 부터 인정을 받았다. 얼마있지 않아 작전주임이 좌익으로 드러나 체포되었고 이대용은 작전주임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 이후에 다시 작전주임이 보직되었으나 그도 역시 좌익으로 드러나 체포되었다. 그 이후 세번째 작전주임으로 온사람이 구대장을 하던 김용배였다.

녹취록 1,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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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38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스탈린 트루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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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st post we looked at the reasons President Truman sent Lieutenant General Albert Wedemeyer on a fact-finding mission to China and Korea in September 1947. We now know that Moscow’s postwar support for the Chinese Communists was quite limited, since Stalin was determined to hold onto his territorial gains in the Far East by remaining faithful to the treaty he had signed with the Nationalist government in 1945, which we discussed in an earlier post. Wedemeyer, however, with the limited information available to him, concluded that the success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 was proof that the Soviet Union was carrying out a masterful plan to establish dominance throughout Asia. His first report to Secretary of State Marshall, sent from China, therefore confirmed the administration’s worst fears.

Continuing on to Korea, Wedemeyer reported that the “same sinister forces that militate against a program of democratization and rehabilitation in other areas of the world are present in Korea.” He thought the Soviets would not invade the South, but instead would use infiltration and subversion to gain control of the entire peninsula. Consequently, he argued that it would be useless to continue to try to cooperate with Moscow regarding Korea. In fact, it would be dangerous to do so because such cooperation would only help the Soviets expand their political domination. He also concluded reasonably that if the US withdrew its forces from Korea prematurely, the Soviets would win a complete victory on the peninsula. This would boost Soviet prestige throughout Asia and weaken the US position in Japan.

Given this analysis, Wedemeyer insisted that military forces in the South must be made strong enough to counter Soviet subversion. He recognized, however, that it would be difficult to create democracy in southern Korea. American occupation authorities relied on the police and the National Youth Movement to maintain order but those groups were widely hated for their brutality and arbitrary arrests. Given their power over potential voters, the far right could guarantee that election results would favor them.

Nevertheless, Wedemeyer optimistically argued that southern Korea could emerge as a vital “bulwark of freedom” in Asia if the US provided significant economic assistance and diluted the power of the police by forming an American-led “Korean Scout Force.” Understanding that the Soviets hoped to maintain a buffer zone in Korea, he unrealistically imagined that such American measures would eventually compel the Soviet Union to accept a “neutralized Korea” as a buffer.

Wedemeyer’s conclusions were strengthened within the administration by concerns about the situation in Europe. Francis B. Stevens of the Division of East European Affairs argued that Korea “is a symbol to the watching world both of the East-West struggle for influence and power and of American security in sponsoring the nationalistic aims of Asian peoples. If we allow Korea to go by default and to fall within the Soviet orbit, the world will feel that we have lost another round in our match with the Soviet Union, and our prestige and the hopes of those who place faith in us will suffer accordingly. In the Far East, the reliance of national movements on American support would be seriously shaken, and the consequences might be far reaching.”

Stevens concluded his analysis by warning that a complete Communist victory in Korea would reinforce Stalin’s strategy of expansion through subversion and indirect aggression. Since Stevens was driven by concerns over Soviet encroachments in Eastern Europe, the next post will examine the situation in that part of the world and how it shaped American and Soviet actions toward Korea.

[Sources: This post relies on William Stueck, The Wedemeyer Mission: American Politics and Foreign Policy During the Cold War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4); and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Korean War History) Post #38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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