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12, 반격의 시작, 신령에서 군위로 그리고 김용배 대대장의 부상

화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마지막으로 적들은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3일이후에 들었다. 신령과 화산지역에서는 학도병들이 많았다. 사람의 생명은 길고도 짧았다. 어떤 학도병은 사흘만에 전사했다. 반격작전은 영천에서 군위로 이르는 방향으로 시작되었다. 영천에서 군위의 조림산 방향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림산 쪽에는 유명한 인각사라는 절이 있었다. 조림산 쪽에서 샛길을 건너서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우리의 공격에 대해 적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김용배 대대장은 항상 중요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나타났다. 당시의 대대장들을 그런 곳에 잘 오지 않았다. 대대분의 대대장들은 무전으로 지시를 하고 말았다. 한참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김용배 대대장이 나타났다. 총알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대용은 “아니 여기를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김용배는 “뭐? 여긴 내가 못 오는덴가 ?” 그러더니 철모를 벗으면서 머리의 땀을 닦으려고 하는 찰나, 김용배의 머리에서 안개보다 조금 굵은 물방울이 탁튀는 것 같았다. 안개속의 물방울 같은 느낌이었다. 소총인지 기관총인지 알 수 없는 적탄이 김용배의 정수리 부분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약 5센티 정도 머리 피부를 긁고 지났다.

김용배를 수행해 온 대대 작전장교 김윤환 대위가 “머리에 피가 많이 나옵니다. 빨리 후송하셔야 하겠습니다. 빨리 가시지요”라고 했다. 김용배는 “가만있자. 뼈는 이상이 없는데”라고 했다. 위생병을 불러 설파다이아진을 가져오라고 했다. 설파다이아진을 머리에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이대용은 빨리 내려가라고 김용배를 채근했다. 김용배는 “아니 괜찮아. 아무일 없어. 뼈가 이상이 없는데”라고 거부했다. 그러면서 “여기가 무너지면 낙동강이 무너지고 낙동강이 무너지면 부산이 무너지는데 어디를 가겠나 ?”하고 했다. 당시 김용배나 이대용은 적을 공격하면서도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적은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진격을 하는데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을 하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다가 포로를 잡는 것이 일이었다.

저항이 없이 올라가다가 처음 북한군의 저항을 받은 곳이 원주 인근이었다. 그러나 원주에서의 저항도 별로 특기할 만한 것은 없었다. 원주에서 약 1개 대대규모의 적이 저항을 했으나 공격을 해가자 북한군은 그냥 물러서고 말았다. 적이 본격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은 38선 부터였다. 아마도 북한군은 38선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같았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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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11, 신령전투의 중요성에 관한 기록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신령전투의 의의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 마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신령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은 것이 있어서 이를 올린다. 짧지만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신령전투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신령전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731)

신녕전투는 영천1950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영천 북방의 신녕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영천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방어 전투이다.

북한군 제2군단은 그들의 주공이 지향된 다부동∼효령 일대에서 돌파계획이 좌절되자, 의흥∼신녕 축선에 투입된 적 제8사단에 전차부대를 증원하였다. 이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하양하양을 목표로 대대적인 돌파 및 침투작전을 전개하며 8월말에는 조림산조림산∼화산화산 선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적은 연일 계속되는 국군 및 유엔군의 지상 작전과 공중폭격으로 상당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사기마저 극도로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위천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적의 강력한 공격에 주저항선이 와해되자, 558고지∼637고지∼화산을 연하는 선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이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작정하였다.

9월초 인접 제15사단의 영천 점령에 고무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점령한 후 영천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화산 일대에 주공을 두고 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은 포격을 집중해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유엔 폭격기와 전폭기 혼성편대가 진지 정면의 적에 맹폭을 가함으로써, 적의 총공격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제6사단은 즉시 방어진지 전방으로 반격해 전과확대에 돌입하였다. 적 제8사단은 이후 공세작전을 중단한 채 현 전선만을 유지하고 야간에 중대규모 수준의 소규모 전투만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군 제6사단은 예하의 3개 연대와 배속된 2개 연대를 통합하여 동서간 32㎞에 이르는 산악정면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이 제6사단의 좌측에 투입됨에 따라 제1사단은 가산∼신원간 13㎞의 정면을, 제6사단은 운산동운산동∼화산화산간 15㎞ 방어정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투지경선의 변경과 조정으로 인해 제8사단 제10연대는 제6사단으로부터 배속이 해제되어 원대복귀하기로 결정하였고, 제5연대와 기갑연대 또한 제7사단으로 원대 복귀한 후 육군본부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8사단은 신녕을 거쳐 영천을 우회 공격하려던 기도가 좌절되었고, 이는 영천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에 나섰던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 지역에서 고립된 채 각개격파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에 국군 제6사단은 대구 외곽선인 신녕지구의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키는 한편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낙동강선방어작전 (군사편찬연구소, 2008)
『신녕-영천전투』(전사편찬위원회,1984)
한국전쟁 (국방군사연구소, 1995)
한국전쟁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0)


여기에서는 6사단으로 모두 뭉뚱그려 나오지만 신령전투의 핵심은 화산지역의 전투였다. 화산이 신령지역의 가장 중요한 감제고지였기 때문이다. 이대용은 바로 이 지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했던 것이다.

필자는 11월말부터 12월 초사이에 신령전투에 대한 연구를 위해 이 지역을 답사할 예정이다. 실제 지형에 가보면 책에서 보는 것과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답사를 다녀와서 신령지역 전투를 다시 정리해 보겠다.

다음 녹취록 부터는 반격작전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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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10, 잊혀진 전사, 신령 전투

음성에서 부상을 당한 후 부대로 복귀하기까지 7연대는 많은 전투를 치루었다. 먼저 무극리의 동락국민학교 전투가 있었다. 7연대 2대대는 동락국민학교에 북한군 포병부대가 주둔하는 것을 확인하고 포위공격을 했다. 한국전쟁이후 한국군이 최초로 북한군을 포위섬멸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으로 포획한 장비를 제1사단에 나누어 주었다. 당시 백선엽의 제1사단은 임진강 전투에서 사단의 대포나 박격포등 포병화기를 모두 버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7연대 2대대가 동락리의 북한군 포병부대를 섬멸하면서 획득한 무기를 제1사단에게 보내서 무장토록 했던 것이다.

부상에서 복귀한 이대용은 영천 서북쪽의 신령지역으로 배치되었다. 신령에는 화산이라는 산이 있었고, 그 화산지역에서 전투를 했다. 처음에는 적 1개대대와 우리 1개 대대가 서로 싸웠다. 전투중에 손실이 계속 발생했다. 적도 소수로 줄어들었고 이대용의 중대도 30명정도로 줄어 들었다. 7연대 1대대의 2중대는 자꾸 후방으로 도망갔다. 우리가 적의 진지를 차지하면 적은 다시 우리 후방으로 돌아와 이전의 우리진지를 차지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북한군은 이것만 점령하면 부산이 곧바로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진격해왔다. 우리도 여기서 지면 부산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버텼다. 치열한 전투였지만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그냥 비겼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듯 했다.
전투는 8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8월 30일부터 9월 3일 정도까지 였다. 피아간의 진지가 자꾸 바뀌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탄약도 제대로 보급 받을 수 없었다.

43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버텼다. 전투간 격투사격을 여러번 해보았지만 그때 서로 총검으로 찌르는 전투는 처음이었다. 전투가 중지되면 노란 색 잎파리 하나가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는데 벌레먹어 노랗게 된 나뭇잎이 거미줄에 메달려 있었다. 저잎파리가 먼저 떨어지느냐, 내목숨이 먼저 떨어지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생각만 했다. 중대장이 앞에서 버티고 있으면 병사들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대용 옆에는 끝까지 같이 싸우던 김금동이란 병사가 있었다. “금동아 적이 많이 오냐?”하고 물으니 “개미떼 처럼 옵니다. 딱벌레 같은 놈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수류탄 던질께”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이대용의 곁은 지키며 용감하게 싸우던 김금동도 결국 전사했다.

며칠을 먹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런데 대대장은 전화를 했다. “서쪽에 있는 적을 마지막으로 공격해서 적의 목에 칼을 꽂아 달라… 마지막으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순간 대대장이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존경해왔던 대대장이지만 그 순간은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야 말로 죽는셈치고 마지막으로 공격했다. 적도 얼마 없었다. 그들도 우리를 보고 그냥 도망가고 말았다.

그날 저녁 비가 왔다. 입추도 되지 않았지만 화산에서 그냥 맞는 비는 추웠다.이가 덜덜 떨렸다. 대대장이 S300 무전기로 연락을 해 왔다. 대대장 호출명은 백두산이었다. 이대용은 압록강이었다. 2중대장은 두만강, 3중대장은 낙동강, 4중대장은 금강이었다. 대대장은 울면서 무전을 해 왔다. 그동안 하지 않았던 경어를 썼다. “압록강 대장, 압록강 대장, 기한이 얼마나 심하오 ? 지원을 해주지 못해 준 나를 용서하오” 라고 했다. 이대용은 무전기를 받아 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나를 믿어주고 알아주는 사람은 대대장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투가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적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싸운 화산 전투였지만 전사기록에 화산전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전사는 나중에 기록하는데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전사했기 때문이다. 대대장도 전사했고, 부대대장도 전사했다. 그동안 살아 있던 소대장 육사 10기생 도진환 소위도 전사했다. 전투가 끝나고 7연대 2대대가 트럭 두세대를 가지고 들어와서 소총과 같은 유류품을 줏어갔다. 그리고 화산전투는 제2대대가 수행한 전투가 되어 버렸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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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9, 음성 전투에서의 부상과 복귀

7연대는 춘천에서 원주를 거쳐 충주로 철수를 했다. 청주에서 3일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데 7월 5일 경 명령이 내려왔다. 음성에 적이 들어왔으니 이를 격파하고 전진해서 무극리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음성근처의 기름고개에서 적군을 만났다. 적은 첨병부대였다. 대대는 1중대를 우측에 3중대를 좌측에 그리고 제2중대를 예비로 공격을 실시했다. 적은 1개 대대 규모였다. 저녁까지 적을 공격하고 밀어부쳤다. 한참 전진을 하고 있는데 적의 대포가 앞에 보였다. 일몰이라서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대용은 저 대포를 뺏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중대의 예비소대인 3소대장인 손종구 소위를 불렀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너무 빨라 뛰어 나간 것이었다. 그 순간 적이 기관총 소리가 앞에서 들렸고 대포가 이대용을 향해 포를 발사하는 것을 보았다.

비가 오고 있었는데 직흙이 확올라오면서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5미터 정도 붕 떴다가 뒤로 날라가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앞에 있는 카빈 소총을 간신히 다시 잡았다. 그리고는 움직일 수 없었다. 모두 9군데에 파편과 기관총탄을 맞았다. 다행이 모두 뼈를 살짝 비켜갔다. 볼에도 맞았으나 다행히 눈에는 부상을 입지 않았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하사관 한명이 와서 업고 군의관에게 데리고 갔다.

군의관은 조현묵 대위였다. 아직 의식이 있었을때라 조현문 대위가 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연신 “아휴 야단났네. 중상이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위험한데 어쩌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팬티하나만 입히고 부상부위는 모두 붕대로 감아서 트럭으로 후송되었다. 약 10명정도가 같이 후송되었다. 병사들은 “어머니” 하면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모두 죽은 것이었다.

청주 도립병원에 도착한 다음에 바로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너무 편하게 느껴졌다. 한참이 지나 눈을 떴다. 낮인 것 같은데 컴컴했다. 왜 대낮이 이렇게 컴컴하냐라고 물었더니 지금 해가 쨍쨍한데 무슨 소리냐고 이야기했다. 시력이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벌써 미국의 의약품들이 들어오고 있어서 응급조치를 받은 다음 바로 기차로 부산 5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부산 5병원에서 이대용을 수술한 군의관은 이경용 대위였다.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이대용을 보고 바로 수술을 시작했다. 모두 두번에 걸쳐 수술을 했다. 파편을 모두 제거하고 누워있을때 간호장교 최소위가 돌봐주었다.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서 대소변을 해결해야 했다. 최소위가 모두 대소변을 받아 주었다. 의정부 출신이었고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씨가 너무 착해서 마음에 들었다. 살아 남으면 최소위에게 장가를 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처가 곪아서 다시 수술을 하고 붕대를 감고 있는데 낙동강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선으로 복귀하려고 했으나 군의관 이경용 대위가 무슨소리냐 이몸으로는 못간다고 막아섰다. 어찌어찌하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7연대 부식차가 부식을 구매하러 부산시장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7연대 중대장으로 다시 복귀한다는 쪽지를 남기고 부식차를 타고 병원에서 도망쳤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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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7, post # 49

웨더스비 교수 씀

트루만과 스탈린.jpeg

이번 포스팅에서는 미국의 한국 정책에 동유럽의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유럽 각국의 정치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이전의 포스트에서 1945년과 46년간 소련의 이란,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압력에 대한 우려가 어떻게 한국에서 모스크바의 팽창을 저지시켜야 겠다는 미국의 결정을 강화시켰는가를 살펴보았다. 1947년 가을이 되자 극동의 상황은 안정적이되었고, 이는 소련이 철수를 하도록 미국이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동유럽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련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폴란드에서 적군(소련군)이 철수하자 마자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소련이 점령한 다른 나라의 경우, 모스크바는 연합정부의 수립을 허용했다. 1947년 9월이 되자 소련이 동유럽에 공산주의 통치를 수립하려고 하는 의도가 명백해졌다.

불가리아는 부정선거이후에 1946년 9월에 군주제를 철폐했으며, 루마니아도 1947년이를 뒤따랐다. 헝가리에서는 1945년 11월 자유선거로 비공산주의 소자본가의 정당이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1947년 8월 몇달에 걸친 소비에트의 반란이후, 조작된 선거로 완전한 공산주의 정부가 권좌를 차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이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로 된 연합정부의 수립을 허용했다. 1946년 공정한 선거이후 진짜로 인기가 있던 공산당이 38%의 지지를 받았으나. 대통령과 외무부 장관은 저명한 비공산주의자가 차지했다. 워싱턴은 1947년 여름의 경제적 위기로 인해 소련의 통제하게 있는 프라하에서 적극적인 범 공산주의 선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우려했다.

서유럽에서,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입지를 강화했으며, 이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이런 중요한 국가들이 소련의 진영으로 떨어질 실질적인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1947년 6월 미국은 마샬 플랜으로 불리는 대규모 경제지원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지원은 모든 유럽국가들에게 제공될 것이었으므로, 소련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100명의 대표단을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국가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주장에 대해 미국이 거부하고 자신들의 예산을 미국의 검증에 오픈해야 한다고 하자, 소련의 대표단은 철수했다.

아직 적군(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마샬플랜 가입에 열정적이었다. 스탈린은 마샬플랜이 유럽에서 반 소비에트 블록을 형성하고자하는 수단인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공산주의 외무장관 얀 마자룩을 모스크바로 소환했으며, 거기에서 그는 프라하가 참가를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이 점령한 국가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수립하면서, 마샬플랜은 유럽의 분열을 더욱 강화시켰다. 1947년 8월 소련은 자신이 통제하던 지역에서 독립적이던 정치세력들을 모두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동유럽에서 이러한 소련의 행동은 국무장관 프란시스 스티븐스가 1947년 9월, 우리가 이문제를 저번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일 미국이 한국을 소련의 통제하게 빠지로록 한다면 “세계는 우리가 소련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고 느낄 것이다”라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마샬 플랜은 서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방지하기 위한것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만일 비동맹 인민들이 미국이 자신의 지원을 확실하게 할 것이라고 믿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이런 사건들은 워싱턴이 한국에서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 포스트에서 알아볼 것과 같이, 거기에는 또한 반대되는 트렌드도 있었다. 1947년 9월, 미국의 군지도부는 한국을 점령하고 있는 군대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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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39.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스탈린 트루만.jpg

Earlier posts examined how US concerns about Soviet pressure on Iran, Turkey, and Greece in 1945/46 strengthened American determination to resist Moscow’s expansion in Korea. By the fall of 1947 the situation in the Near East had stabilized, since American pressure had persuaded the Soviets to withdraw. However, the US was now alarmed about Eastern Europe. The Soviets had established a puppet government in Poland as soon as the Red Army moved into this strategically vital area. In the other countries the Soviets occupied, however, Moscow had allowed the creation of coalition governments. By September 1947 it was clear that the Soviet Union intended to establish communist rule throughout Eastern Europe.

Bulgaria abolished its monarchy in September 1946 after rigged elections and Romania followed suit in 1947. In Hungary, free elections in November 1945 had brought the non-communist Smallholders’ Party to power. But in August 1947, after months of Soviet subversion, rigged elections brought an exclusively communist government to power.

In Czechoslovakia the Soviets initially allowed a coalition government of communists and non-communists. In fair elections in 1946 the genuinely popular communist party won 38% of the votes, while the posts of president and foreign minister were held by prominent non-communists. An economic crisis that began in the summer of 1947 raised concerns in Washington that active pro-communist agitation would succeed in bringing Prague under Soviet control as well.

In Western Europe, the severe economic distress caused by the war so strengthened communist parties in France and Italy that there was a real chance these key countries could fall into the Soviet camp through fair elections. To head off this danger, in June 1947 the US announced a program of massive economic aid called the Marshall Plan. Since the assistance was offered to all European countries, Moscow sent a 100-person delegation to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convened in France to discuss how to respond. However, when the US refused to back down on its insistence that that countries must apply as a group and must open their budgets to American inspection, the Soviet delegation withdrew.

Czechoslovakia, still occupied by the Red Army, was enthusiastic about joining the Marshall Plan. Since Stalin understood that the plan was a means to create an anti-Soviet bloc in Europe, he summoned the non-communist foreign minister, Jan Masaryk to Moscow, where he demanded that Prague refuse to participate. The Marshall Plan then hardened the division of Europe as Stalin responded by establishing firmer control over the occupied countries. In August 1947 the Soviets began liquidating independent political forces in the areas it controlled.

It was these Soviet actions in Eastern Europe that prompted the State Department’s Francis Stevens to argue in September 1947, as we discussed in the last post, that if the US allowed Korea to fall into the Soviet orbit, “the world will feel we have lost another round in our match with the Soviet Union.” This would be very dangerous because the Marshall Plan would only succeed in preventing a communist takeover of Western Europe if the beleaguered people there were confident that the US would hold firm in its support for them.

Events in Europe thus pushed Washington towards staying the course in Korea. However, as we will discuss in the next post, there was also an opposite trend. By September 1947, the American military leadership increasingly believed that its occupation forces in Korea were more needed else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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