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22, 연대장 시절 2 연대장을 마치고

당시 군대는 매우 부패해 있었다. 장교들도 먹고 살기 어려웠다. 이대용이 스스로 깨끗하게 처신을 하자 연대의 부패도 점점 줄어들었다. 대대장이나 중대장들도 부대에 나온 쌀을 집으로 가져가기 일쑤였다. 당시는 식용유도 귀했는데 이 식용유는 거의 연대장이나 대대장에게 다 보냈다. 이대용은 대대장이나 중대장들에게 혹시 생활이 힘들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판공비를 나눠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절대로 부대에서 쌀을 가져가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대용이 부대쌀을 가져가지 않고 쌀가게에서 쌀을 사가자 쌀주인이 이대용이 쇼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지 3-4개월이 지나니까 연대가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부대는 깨끗해졌지만 연대의 참모들과 장교 하사관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잘 먹일수 있었다.

이대용은 연대장을 하면서 훈련도 훈련이지만 병사들 관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병사들이 휴가갈 때에 항상 신고를 받았다. 어려운 점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별의 별일이 다 있었다. 휴가에서 늦게 들어오거나 아기를 업고 귀대하는 병사도 있었다. 살기가 팍팍해서 아이를 놓고 부인이 도망가버린 것이다. 이대용은 병사들에게 한달이건 두달이건 못와도 좋다. 그런 사정이 생기면 언제까지 온다고 이야기를 해라 그러면 탈영조치를 하지 않겠다고 병사들에게 이야기 했다. 당시에는 연대당 통상 1년에 30 - 40 명 정도의 탈영병이 있었다. 그러나 이대용의 23연대에서는 1년동안 단 한명도 탈영을 하지 않았다. 연대장의 판공비를 사정이 딱한 병사들에게 주기도 했다.

연대장을 마치고 이취임식을 했다. 후임 연대장은 한민석이었다. 이대용은 “군인이라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현역에 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있어야 한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잘 있어 달라”고 했다. 이취임식에 모은 병사들 1500 명이 ‘엉엉’ 울었다.

사단장 이동하 장군도 이대용에게 “당신 어떻게 저렇게 병사들을 이끌었소? 나도 눈물이 나오더라고. 오죽 하면 울겠어 ?” 라고 했다. 병사들은 아무말없이 이대용을 지켜 보고 있었지만 그를 존경했다. 그리고 이대용을 보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연대장을 마친 이대용은 마땅하게 갈 곳이 별로 없었다. 육군대학부터 워낙 대쪽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모두 싫어 했다. 아무리 전쟁을 잘하고 군사이론에 밝아도 승진은 어려웠다. 중령 때 대령으로 진급하기 조차도 어려웠다. 연대장을 마치고 중요한 보직으로 진출해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이대용은 군대라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직책만 충실하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연대장을 마치고 국방연구원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합동참모대학 창설준비 요원으로 보직이 되었다. 합동참모대학 교수부 차장으로 명령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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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1. 연대장 시절 1.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권유를 거부하다.

혁명의 와중에 육군대학 교관을 마치고 3사단 23연대장으로 취임을 했다. 3사단장이 미국 지휘참모대학 졸업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해서 육군본부에서 이대용에게 연락이 왔다. 이대용은 동의를 했다. 8월에 연대장에 취임했다. 23연대는 운천의 문혜리에 있었다. 거기에서 약 1년 2개월 정도 근무를 했다. 연대장을 하러가서 4달정도 되었을 때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하라는 요청이 왔다. 11월 정도였다. 한참 훈련을 하고 있는데 김계원 장군과 사단장을 거처 연락이 왔다.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하라는 연락이었다. 이대용은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 했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지르면서 군인으로서 교육을 받을 것도 다 받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에 나가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저 군인으로 그냥 있고 싶었다.

이대용은 가지 않겠다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했다.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명령을 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김재춘 장군으로부터 이대용이 추천을 받은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육사 8기생들 중에서 김종필, 강신탁 그리고 오치성이 이대용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김종필을 잘 알지 못했으나 강신탁과는 매우 친하게 지냈다. 김재춘장군은 이대용의 의사를 확인하고 이후락을 추천했다. 이대용은 순수한 군인으로 나갈 사람이니 그냥 두는 것이 좋겠고 재주가 좋은 이후락을 기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2주일 지나서 이후락이 공보실장으로 임명이되었다는 발표를 들었다. 공보실장이 비서실장이었다.

연대장을 하는 기간은 매우 즐거웠다. 당시 연대장을 1년 하고 나면 서울에 집한채씩은 산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연대장은 연료비가 나왔는데 그 양이 꽤 많았다. 난방하고 밥해먹으라고 주는 돈이었다. 대부분 병사들이 해오는 나무를 쓰고 연료비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판공비도 쓰지않고 그냥 모았다. 어떤 사람들은 쌀도 팔아먹고 휘발유도 팔아 먹었다. 그렇게 하면 집한채씩은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대장 관사가 산골짜기 외딴 곳에 있었다. 연대장 부임한지 한 10일 정도 되었는데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았더니 소고기 갈비 두짝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식용유 통도 같이 놓여 있었다. 팔아 먹든가 누구를 주든가 하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아침에 이것들을 다시 들고 부대로 들어가서 이게 뭐냐 ?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매주 목요일 소를 잡고 나면 갈비짝을 연대장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쌀도 보내고 다그렇게 한다고 했다.

이대용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말것을 단단히 이르고 소를 잡을 때 직접 입회를 했다. 절대 다른데로 고기를 빼돌리지 말고 모두 가마솥에 넣고 끓이라고 엄명을 했다. 그랬더니 병사들에게 밤톨만한 소고기 두서너개 씩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11월 20일이 생일이었다. 이대용은 부인에게 빈대떡과 만둣국을 만들라고 하고 대대장들을 불러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대대참모들과 연대참모들 30여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더니 싱거 재봉틀을 내려다 놓았다. 당시 싱거 재봉틀은 5만원 정도였다. 당시 연대장 봉급이 1만 8천원이었다. 우선 운전병에게 돈을 줘서 문혜리로 나가 빈대떡이니 안주거리를 사오게했다. 지금은 군사혁명기간이라서 아주 깨끗하게 연대장 생신을 축하하지만 예전에는 정말 쟁쟁하게 크게 해서 올리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대용은 기가찼다. 그래서 “이렇게 가지고 온 것은 고맙지만 우리가 고칠 것이 있다. 군인이라는 것은 청렴결백하게 살다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했다. “스위스같은 나라는 아무것도 없지만 물건을 잘 만들어서 돈을 벌어 잘 사는데 우리도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가 깨끗해야 하고, 우리가 부패하면 군대는 미래가 없다. 장개석 군대가 그래서 망한 것 아니냐”라고 했다. 그날 저녁은 다들 같이 즐겁게 마시고 놀았다.

아침에 연대 인사장교를 불러서 싱거 재봉틀을 어디서 사왔느냐고 물었더니 운천에서 사왔다고 했다. 이대용은 무슨 돈으로 사왔느냐고 추궁했다. 그랬더니 우선 외상으로 사오고 대대장들과 연대참모 그리고 대대참모들이 봉급에서 얼마씩 지불하기로 했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모두들 모인 자리에서 그 사인한 종이를 난로에 넣어서 태워버렸다. 그리고 운천의 가게로 재봉틀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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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20. 3.15 부정선거에서 5.16까지

1960년 4.19가 발생했다. 그 이전에 3.15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대용이 2군단 인사참모로 있을 때였다. 부정선거 지시가 내려왔다. 부정선거를 하라고 지시한 기관은 헌병 수사단 CIC 였다. 당시는 CIC라면 꼼짝 못할 때였다. 송요찬 참모총장이 이승만 박사를 찍으라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 CIC가 감시를 했다. 학교에서 투표를 하는데 CIC가 유리창 밖에서 다 감시를 하고 있었다. CIC는 제2군단 투표함을 모두 모아서 불을 질러서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투표함을 개표토록 했다. 소위 투표함 바꿔치기였다. 그리고 야당에 친척이 있는 군인들은 투표하기 하루전날 모두 강제로 휴가를 보내버렸다.

군단장 김형일 장군도 울분을 터트렸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6군단장 하던 강영훈 장군이 M-9 비행기를 타고 2군단으로 왔다. 김형일 장군과 둘이서만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를 했다. 이대용은 김형일 장군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었다. 김형일 장군은 이대용에게 강영훈 장군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법은 없지만 방법이 없다며 움직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CIC가 저렇게 설치는데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군에서 부정선거는 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이 정점에 서 있었다. 송요찬 장군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 송요찬 장군은 전쟁을 잘했던 군인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무자비한 군인이기도 했다. 자신의 부하 대대장이 전장에서 이탈하여 허위보고를 하자 찾아가서 직접 총살을 집행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김형일 장군은 송요찬 장군이 참 좋은 사람인데 배운 것이 없어서 머리가 비어 있었고 그래서 잘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4.19 이후 박정희 장군도 직접 편지를 써서 부패한 고위 장성의 용퇴를 주장했고 김종필을 위시한 육사 8기생들이 정풍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대용은 그런 미국에서 지휘참모대 교육을 받고 있었다. 교육을 마치고 다시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사회는 혼란이 극단을 치달리고 있었다. 학생들 중에서도 4.19의 중추적역할을 했다는 이들의 행태는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61년 4월 육군대학에서 벚꽃놀이를 한다고 장교들이 가족들과 야외에서 점심을 하고 있었다. 불과 18세 19세 정도되는 학생들이 담배를 피면서 “담배 떨어졌는데 담배 좀 주쇼”라고 했다. 기도 차지 않을 정도로 사회는 혼란했다. 장면 정권은 이런 혼란상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다들 이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 나겠다고 생각을 할 정도였다.

5월 16일 아침에 정원혁 대령이 부르는 소리에 일어났더니 “박정희 장군이 구데타를 했다”고 이야기했다. 오전에 육군대학에서 회의가 있었다. 이대용은 “나라를 위해서 옳다면 우리가 지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8군 사령관이 반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육군대학의 분위기도 일변했다. 이대용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인데 어떻게 미8군사령관의 말을 그대로 들을 수 있냐”고 주장했다. 그러자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 하면서 구데타에 반대한다는 주장들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서 5.16이 성공하면서 상황은 바뀌어 갔다. 혁명이 성공하자 육군 대위들이 경찰서 서장으로 나갔다. 장교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재빠르게 혁명주체세력으로 변신했다. 이기면 관군이고 지면 반란군인 세상이었다. 회의에서 이대용이 혁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할때 이대용에게 반대하던 사람들이 다 혁명주체세력으로 변신했다.

혁명세력들이 이대용을 불렀지만 그는 개입하고자 하지 않았다. 혁명이 일어났으니 나라를 위해 잘되길 바랬지만, 순수한 군인으로 적과 싸워 죽는 것이 군인의 할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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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녹취록 19. 제6관구에서 박정희와의 인연

6관구로 이동하게된 것은 동기생 강완채 덕분이었다. 당시 강완채는 육군본부에서 장교들의 보직을 관리하는 과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강완채는 “좋은데 있는데 왜 자꾸 거기서 나올려고 하느냐”고 했다. “돈이 없으면 안되지만, 너무 지저분해서 있을수 없다”고 했다. 이대용은 자신은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후생금을 나누어주는 것을 받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6관구로 가기로 결정하고 있는데 박정희가 6관구 사령관으로 왔다. 제6관구로 가자마자 미제8군으로부터 서울철수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박정희는 참모장과 이대용만 불러서 철수계획을 수립하라고 했다. 서울에는 철수해야할 부대가 60개가 넘었다. 그 중에 이대용을 피곤하게 한 것은 헌병들이었다. 계획을 수립하고 나서는 해당부대의 협조와 동의를 얻어야 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은 “6관구가 왜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라고 했다. 수사단(CIC) 본부에서는 “우린 우리대로 할테니 걱정하지 마시요”라고 했다.

경찰 철수에 관련한 계획도 이대용이 세웠다. 경찰에 협조를 하러갔다. 철수할 때 차량을 통제하기 위해 교통과장과 협조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교통과장을 만나러 갔으나 만나기 어려웠다. 교통과장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 책상에 들어 있는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일이었다. 운수업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돈을 뭉치로 놓고 가는 것이었다. 박정희에게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각하가 좀 말씀 해주세요”라고 했더니, “나쁜 놈들” 그러더니 “내가 간다고 되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제2군단에서 이대용을 작전참모 요원으로 요청했다. 김형일 장군이 직접 요청한 것이었다. 군단의 작전참모로 가면 바로 대령으로 진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대용을 보내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대용을 불러서 “임자는 안돼 ! 작전참모 못가 ! 임자가 떠나면 철수계획을 누가 만드나?”라고 했다. 철수계획을 다만들고 관련기관과 부대의 협조를 얻어 결재를 받는데 3개월 정도 걸렸다.

철수계획을 마치고 제2군단에 갔는데 이미 작전참모는 다른 사람으로 임명이 되어 있었다. 군단에서도 몇개월 동안 작전참모를 비워둘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어있는 인사참모를 했다. 인사참모를 하다보니 재미도 없고 답답했다. 마침 미국 참모대학의 시험이 있다고 해서 응시를 했다. 합격을 했다. 세번째로 합격했다.

1960년 8월부터 61년 1월까지 단기과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시험을 치는 것은 거의 A를 맞았지만 회화는 시원치가 않았다. 교육을 마치고 3월에 다시 육군대학에 교관으로 복귀했다. 대령으로 진급도 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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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18. 육군대학 교관시절

52연대 부연대장으로 있다가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들어갔다. 1955년 2월부터 10월까지 8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미국 교재를 번역해서 교재로 썼다. 교육을 마치고 육대 교관으로 남았다. 졸업성적이 10%안에 들어야 교관이 될 수 있었다. 육대교관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지형을 고려한 전술교육내용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미국의 평탄한 지형을 바탕으로 전술교육을 했다. 그러나 당시 육대총장이던 이종찬 장군은 전술이란 지형이 중요하다며 한국의 지형을 고려한 전술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다. 사단공격방어와 군단공격방어를 한국지형에 맞게 교육내용을 만드는데 약 2년이 걸렸다.

당시 육대교관들은 시험문제를 장교들에게 팔아먹었다. 약 90%정도가 시험문제를 팔아먹었다. 교관들은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군생활하면서 쌀 팔아먹고 휘발유 팔아 먹은 장교들이 돈을 벌어서 문제지를 샀다. 중령급 교관들 한달 봉급이 6천원이었는데 시험문제 한번 팔면 5만원에서 10만원이 들어왔다. 당시의 어떤 장교는 그렇게 문제지를 사서 육대에서 1등을 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의 교관들 중에서 문제지를 팔아먹지 않았던 사람은 딱 세사람이었다. 이대용과 이희성 그리고 이석재였다. 나중에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육대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박정희는 올곶은 성품의 이대용을 눈여겨 보았다.

육군대학 교관을 1959년까지 4년간 했다. 그리고 1958년 교관신분으로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미국 참모대학에 합격을 했으나 폐가 나쁘다는 이유로 가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장도영 장군의 5촌 아저씨가 있었는데 성적이 이대용보다 나빠 보결로 되어 있었다. 신체검사결과 과거에 폐결핵을 앓은 것을 지금 앓고 있다고 해서 출발하기 직전에 이대용 대신 장도영의 5촌 아저씨를 보냈다.

두번째로 오키나와에 미국 태평양 사령부가 운용하는 국방대학 시험에 합격해서 교육을 받으러 갔다. 약 2개월 코스의 교육이었다. 당시 미국은 NATO를 본떠서 SEATO라고 동남아연합을 만들려고 했다. 이대용이 교육받으러 간 국방대학은 SEATO의 테스트 과정이었다. 교육내용은 전역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육대교관을 하면서 결혼을 했다. 그러나 생활은 어려웠다. 육군대학 관사에서 살았는데 겨울이 되면서 난방할 돈이 없었다. 새벽 3시경 진해의 뒷산에 올라가 죽어가는 소나무의 곁가지를 잘라서 난방을 했다. 나무를 못하게 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갓난아이를 추운 냉골에 둘 수는 없었다. 밥 세끼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시험문제를 팔아먹을 사람들은 모두 고기반찬을 사왔지만 이대용의 아내는 콩나물밖에 살 수가 없었다. 육군대학을 떠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논산훈련소는 소장이 후생사업을 해서 밥이라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6개월 정도만 근무하면 다른 곳에 갈 수 있는 전세자금이라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종오 장군에게 편지를 했다. 셋방 살 돈이 없어서 어려우니 논산 훈련소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김종오 장군이 이대용을 논산훈련소 27연대 부연대장으로 보내주었다. 4개월 정도 있으니 셋방살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

후생사업이라는 것이 훈련병의 등을 처먹는 일이었다. 이대용은 그런 분위기에 더 이상 있는 것이 싫어서 셋방구할 돈이 모이자 바로 서울의 6관구로 이동을 했다.

녹취록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https://steemit.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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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 17. 미국에서의 초등군사반과 육사교관시절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기억

이대용 장군 17. 미국에서의 초등군사반과 육사교관시절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기억

미국으로 가는데 15일이 걸렸다. 부산에서 일본을 거쳐 하와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중간 기착지에 내리지도 못하고 꼬박 15일간 배를 탔다. 당시 한국군들이 받은 교육은 위관급들이 받는 초등군사반 교육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들은 전부 중령이나 대령들이었다.

미군으로 부터 한달에 150불 정도 봉급을 받았다. 비프스테이크가 90센트 정도였다. 미국의 풍요로운 생활이 부러웠다. 시간이 나면 여행을 했다.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도 그때 처음 구경을 했다. 교육을 마치고 귀국을 했더니 ‘웨스트포인트 구경한 사람 손들으라’고 했다. 그래서 손을 들었더니 이대용을 육사교관으로 발령을 냈다. 육사 11기가 2학년일 때 교관으로 부임했다. 그때부터 6개월정도 근무를 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대 부대장을 했다. 그리고 전술학을 가르쳤다. 후방에 있는 이대용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자꾸 전방으로 가고 싶었다.

육사에서 눈에 뛰었던 생도들은 대부분 소장급 정도로 군생활을 마쳤다. 가장 눈에 띄었던 사람은 이범천이라는 사람이었든데 그도 소장까지 하고 죽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그렇게 눈에 띄었던 사람들이 어니었다.

마침 육사교장이 사단장을 하던 김종오 장군이 부임해서 이대용을 놔주지 않았다. 김종오 장군은 시간만 나면 생도들앞에 이대용을 세워놓고 압록강에서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육사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사실 한국전쟁은 최초 3개월 정도가 매우 치열했다. 그리고 약 1년간은 싸움을 했지만 처음처럼 치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휴전회담이후부터는 별로 전투가 없었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면 기자들이 모여서 크게 기사화되었을 뿐이었다. 3개월간 전사상자가 37개월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 전체 사상사의 70퍼센트 정도였다.

낙동강전투는 이제까지의 전투중에서 가장 치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오키나와전이나 이오지마전 혹은 사이판전투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가 발생한 전투였다.

그러는 차에 김종오 장군이 군단장으로 영전을 했다.이대용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고등군사반 교육을 지원했다. 1953년 12월에 들어가서 54년 3월까지 광주에서 교육을 받았다. 광주에서의 교육은 미국의 교육과 달랐다. 미국의 교육은 모두 실제 행동위주였다. 참호에 대한 교육을 하면 직접 뎣센티가지 다 직접 파보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주로 말로했다. 이론으로만 가르치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교육을 마치기 전에 당시 1군단장이던 김종오 장군에게 연락을 했더니 12사단 정보참모로 보직을 시켰다. 그리고 몇개월 있다가 52연대의 부연대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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