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전쟁사포럼 내용

제2차 국공내전기 미 해병대 중국 파병과 북-중 군사 동맹의 형성, 진영기(고려대)

5월 25일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개최된 전쟁사 포럼은 우리 사회전반의 전쟁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추진되었다. 전쟁이란 현상을 군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문제인식에서 출발한 전쟁사 포럼에는 전쟁 학계, 법조계, 언론계, 영화 및 출판계 및 군출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가했다.

전쟁사 포럼은 내년이 6.25 전쟁 70주년이라는 점에서 우선 6.25 전쟁과 관련한 내용을 주로 다루기로 했다. 이번에는 두사람의 발표가 있었다. 먼저 고려대 역사연구소 진영기 연구원이 ‘제2차 국공내전기 미해병대 중국파병과 북-중 군사동맹의 형성’을 주제로, 그리고 서울경제신문의 권홍우 기자의 ‘시민과 군인, 그 승리의 역사’를 주제로 각각 발표를 했다. 아래 내용은 진영기 연구원의 발표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진영기 연구원은 중국 북부 파병에 관련된 미 해병대의 작전 사료와 미 합참의 군사 정책 관련 자료들을 중심으로, 제2차 국공내전 시기의 미 해병대의 중국 북부 파병이 중공군에게 미친 영향과 동시기에 이뤄진 중공에 대한 북한의 군사원조와의 연계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발표내용
미 해병대의 중국 북부 파병은 ‘포위작전’(Operation Beleaguer)이라는 명칭으로 1945년 10월 1일부터 국공내전 끝나는 949년 5월 16일까지 이루어졌다. 본 발표에서는 미 제3상륙군단이 중국 북부에 상륙한 1945년부터 제3상륙군단의 주력인 제1해병사단과 제6해병사단이 미국 본토로 송환되는 1947년까지의 작전 내역을 다루었다.

1945년에서 1947년까지 중국 북부 지역에서 주둔하는 동안 제3상륙군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접수했다. 동시기에 제3상륙군단은 중국 북부에서 중공군과 충돌하였다 . 중공군은 미국의 전후 안정화 활동에 반대하고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과 충돌을 불사했다. 해당 시기에 북한은 중국에 본격적인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결국 미 해병대의 개입으로 입지가 어려워진 중공군을 북한이 지원하면서 북중 동맹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해병대의 중국개입과 긴밀한 북중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종식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자, 마오쩌둥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 해제를 서두를 것을 명했다. 소련군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중국 공산당은 만주와 중국 북부에서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고 전후 중국의 주도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한편, 장제스는 일반명령 제1호에 근거하여 중공군에게 현 위치를 벗어나지 마라고 요구했으나, 중공군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 와 만주 지역의 확보를 위한 군사 활동을 지속했다. 국공합작 기간 동안 잠재해 있던 국공간의 균열은 일본군 무장해제 및 항복 접수 문제로 인해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국공 내전이 재발할 경우, 소련의 개입과 영향력이 확장될 것을 우려하여 국민당과 중공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하고, 연합 정부를 구성하여 중국대륙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미 해병대 제3상륙군단의 파병은 전후 중국 내 국공 분열 양상과 소련의 확장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군사적 대응전략이었으며 전후 안정화를 고려한 강온 양면 성향의 대외 전략이었다.

미 해병대의 중국 파병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본국 송환, 그리고 중국 내 연합국 거류민 및 자산 보호 등 전후 안정을 주목적으로 했다. 중국 북부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본국 송환을 개시하는데 있어 충칭 정부를 지원하는 임무가 있었으나, 중공군을 자극하지 말라는 중립적인 군사 작전 수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만주와 화북에서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제3상륙군단의 관할지역인 베이핑, 친황다오, 톈진 등 주요 도시와 주요 교통로 및 통신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다. 미 제3상륙군단은 중공의 전략에 차질을 초래했다. 결국 중공군은 1945년 말부터 1947년 초까지 특히 허베이 지역 내 미 제1해병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대 중국 정책방향으로 인해 제3상륙군단은 중공군의 적대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대응조치는 취하지 못했다. 미 해병대는 화북의 중요 거점들을 지키면서 전후 안정 지원 활동을 수행했다. 이는 미 해병대의 중국 파병이 국공 합작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대 중국 정책에 따라 중립적이고 평화 유지 작전 차원에서 시행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 해병대의 전후 안정화 작전은 만주 및 화북 지역에서 전략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중공군에게 위협이었다. 미 해병대에 대한 중공군의 압박 실패는 전략적 기반의 약화로 이어져 중공군이 남만주에 고립되는 위기를 초래함과 동시에 북한과의 군사적 동맹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공군의 위기 상황에 대해 북한은 1946-47년에 걸쳐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중공군에게 전력 회복의 기회였으며 국민당에 대한 공세의 전환점이 되었다. 중공군은 북한을 회랑으로 삼아 전략적 철수를 완수할 수 있었으며, 병참기지로서의 지원을 받아 재정비의 시기를 거칠 수 있었다. 그리고 북한의 항구 및 교통로를 통해 북만주 근거지와 전략적 연결을 되살리면서 총반격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 중공에 북한군의 증강을 목적으로 한 조선족 부대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미군정과 적대적인 남한 정부로부터 동맹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중공은 2개 사단급의 조선족 부대와 14,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켜 북한의 군대 창설에 기여했다.

국공내전을 통해 미국은 중공의 중국 본토 장악과 북한-중공 관계를 고려하여, 전후 극동 안보 전략과 대외 군사원조를 통해 공산 세력의 확장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과 필리핀을 주요 전략 거점으로 삼고, 군사 원조를 통해 남한이 북한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중공 및 북한 정권을 봉쇄하고 있던 미국은 북한이 남침을 개시하자 신속하게 참전했다. 이렇게 볼 때,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의 미 해병대와 중공군의 충돌, 그리고 북한의 군사원조는 전후 동북아 지역에서의 냉전 형성에 있어 군사적 대립 구도 및 동맹 관계의 초기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었으며, 국공 내전과 6.25 전쟁의 연계성 연구에 중요한 군사(軍史)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토의내용 요약
상기 내용 발표후 진행된 토론에서 미국의 제3해병군단의 파견이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미국이 국부군과 중국 공산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국 국부군에 대한 지원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미해병대가 상륙한 지역이 1920년대 중국의 군벌이 활동하던 지역으로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미해병대의 작전지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의 진로와 유사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군대는 미해병대를 침략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이렇게 중국의 핵심이익 지역에 미 해병대가 참가한 것만으로도 미국이 중국에 대한 안정화작전은 부차적인 목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중국에서 미해병대가 수행한 작전과정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갑자기 세계질서를 책임지는 상황에 봉착하면서 보여준 미숙한 점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중국공산당 군대가 북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 대한 추가설명도 있었다. 북한에는 일본군이 패망하면서 남기고 간 무기가 있었는데 김일성은 거의 7-80%정도를 마오쩌뚱에게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도 군수품과 무기가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김일정은 전폭적인 지원을 결정했다고 한다. 북한은 무기부족으로 군대를 창설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군대를 우선적으로 지원했다. 결국 중국은 국공내전의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의 지원을 받아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군의 군수관련한 기록중에서 일본무기와 장비가 많이 있었다는 추가설명도 있었다. 따라서 중국이 6.25 전쟁이 벌어지고 인천상륙작전이후 참전하게 된 이유도 국공내전시 북한의 지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린바오가 세력투쟁에서 패배하자 만주지역에서의 공산군대 활동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과 함께,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만주에서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조선인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연변대학교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도 있었다.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었으나 국공내전 당시 북한의 역할을 고려해 보면, 북한이 중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지원을 받았다는 관점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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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1948, POST#55 2019년 7월 16일

대한민국이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할때,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들”로 규정했으며, 이는 38선 이북에서 수립될 수 있는 어떤 정부도 합법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9월 5일, 북한에서 별도의 국가를 수립하기 4일전에, “소련의 괴뢰체제를 이끌고 있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에 합류할 것을 선포했다.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에 자신의 조국을 팔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주의 지도자에 대한 비난을 북한 주민으로 확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북한 주민들을 인권을 빼앗긴 포로로 묘사했다. 이런 관점으로 인해, 서울이 대한민국을 “도덕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북한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우기, 이런 의무는 “공산주의 악마에 대한 신성한 전쟁을 통해 북한을 군사적으로 정복”함으로써 수행될 수 있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정책을 “무력 통일”로 이끌었다.

그러나 미국의 관점은 한국에서 전쟁으로 빠져들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서울에 있던 미국의 관리들은 이승만에게 만일 이승만이 “북한으로 진군”을 시도하면 즉각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중지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더우기, 미국은 공세적 군사작전에 필요한 무기들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국제연합에 통일을 위한 방안을 호소했다. 9월 12일 국회는 북한주민에게 “우리는 북한의 우리 북한주민들이 우리가 했듯이, 유엔 결의안에 따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인민의 진정한 대표자를 선출하고, 이들은 국회로 보낼 것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북한의 대표자들을 위해 국회는 100석을 남겨놓았다.

미국이 재통일을 위한 군사적 방법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미국은 유엔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이승만의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유엔임시한국위원회가 유엔 제1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한 후, 미국은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한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선언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소련은 이 결의안을 거부하면서, 유엔이 한국을 “독립적인 민주국가’로 재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자신들의 제안을 제출했다. 유엔총회는 소련의 결의안을 부결시키고 12월 12일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통과시켰다.

유엔 결의안의 문안은 주의깊고 중요하다. 유엔 결의안은 “한국에서 압도적 다수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임시위원회가 관찰하고 조언할 수 있었던 한국의 지역에 효과적인 통제와 관할권을 지닌 합법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다”으며, 이정부는 “한국의 선거구역의 자유로운 의지의 유효한 표현”의 선거에 바탕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유엔 결의안은 대한민국을 전체 한반도의 정부라고 선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유일한 정부”라고 묘사했다.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다음, 이승만 정부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세가지 이유를 강조했다. 첫째, 분단은 전체 한국인들이 건전한 국가 및 경제생활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둘째, 분단은 하나의 몸을 둘로 나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통일된 한국이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적합한 정치적 경제적 단위이다. 셋째, 분단은 상당한 비극과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통일은 한국의 불운을 종식시킬 열쇠이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대한민국의 상기 요구에 대응하여 1948년 9월 북한에서 어떻게 정부가 수립되었는가를 살펴보겠다.

[참고자료]

이 포스트는 다음 자료를 참고했다.

Kim Hakjoon, The Domestic Politics of Korean Unification: Debates on the North in the South, 1948-2008 (Seoul and Edison NJ: Jimoondang, 2010).


[partiko] 비 오는 날 뜻밖의 우산

오늘도 야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을 합니다~ 회사에서 버스 탈 때까지 괜찮더니 버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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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전쟁사 포럼

지난 3월 22일 전쟁사 포럼이 첫 연구발표회를 진행했다. 이 모임은 학계, 법조계, 언론계, 영화계, 군출신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전쟁사 연구와 관련된 발표와 토의를 통해 학제간 교류 및 해당 직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영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했다. 전쟁사 포럼은 결월로 개최되며 이번 포스트는 3월 22일 개최된 제1차 전쟁사 포럼의 발표내용을 요약했다.

일소전쟁 개설-정밀(靜謐)확보의 종착점, 최종호 변호사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관동주(關東州)와 남만주철도의 권익을 손에 넣었다. 이와 같은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육군의 부대가 관동군이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관동군은 요동반도의 여순에 사령부를 두고 2년 교대로 본토에서 파견되는 주차(駐箚) 사단 1개와 독립수비대 6개 대대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였다. 

  1928. 6. 4. 봉천군벌 장작림을 만철선과 경봉선(京奉線)의 교차점 황고툰에서 암살한 관동군은 1931. 9. 18. 만주사변을 통하여 장작림의 후계자 장학량을 몰아내고 만주 전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에 1932. 3. 1. 청나라의 폐제 부의가 집정에 취임하면서 만주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같은 해 9. 15. 일본과 만주국 사이에 일만의정서가 체결되어 만주국의 방위를 위한 관동군 주둔이 승인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가상적은 러시아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러시아는 사라지고, 소련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에 1923. 2. 28. 개정된 제국국방방침은 소련을 가상적국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소련은 1928년부터 10년간의 경재개발계획을 통해 중공업을 육성했고, 국가 전체가 안정화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극동의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1936년 말 일본군과 극동소련군의 군사력의 비율은 1:3으로 평가되었다. 

 1935년 이후 일본과 소련간에는 사소한 국경분쟁이 빈발했다. 1938. 7. 29.부터 8. 11.에 걸쳐 만주국 동남부의 장고봉 부근에서 소련군의 공격으로 전투가 발발했다. 이를 장고봉사건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 임한 일본군 제19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나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1938. 5. 11.부터 9. 16.에 걸쳐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 사이에서 발생한 노몬한 사건은 최대의 국경분쟁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제23사단이 사실상 전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고, 결국 일본군의 실질적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일본군은 12,220명, 소련군은 25,655명의 손실을 낸 것으로 파악된다. 

 노몬한 사건 이후 일본과 소련은 표면적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사건 이후 관동군사령관에 취임한 우메즈 요시지로는 1944. 7. 18. 참모총장으로 전임되기까지 5년 간 재임하면서, 대소정밀확보(對蘇靜謐確保)의 기치를 내 걸었고 양국 간에는 특별한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1941. 4. 13. 일본과 소련은 5년의 유효기간으로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1941. 6. 22.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다. 동맹국 독일에 호응하여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관동군특종연습(關東軍特種演習), 약칭 관특연이다. 이에 따라 평시 28만의 관동군은 74만 이상으로 증강되었고, 1941. 8. 29. 개전하여 10월 말 작전을 완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1941. 7. 28. 일본의 남부베트남 진주를 통하여 촉발된 미국과의 관계 약화로 인하여 소련을 상대로 개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1942년 이후에도 극동소련군의 병력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에 따라 관동군 역시 만선(滿鮮)에 사단 16개, 전차사단 2개 등 병력 약 65만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극동소련군은 21개 저격사단을 기간으로 약 70만의 병력으로 양국의 지상병력은 호각의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1943년 이후 남방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의 반격이 본격화되었고, 이에 관동군에서의 병력 추출이 본격화되었다. 1945년까지 관동군에서는 정예 사단 16개가 남방으로 이동했다. 1945년 8월 시점에서 관동군은 24개 사단의 병력 70만이었지만, 이는 과거의 사단 전력으로 환산하면 약 8개 반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독일의 패전 이후 유럽에 배치된 소련군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극동으로 수송되었고, 1945년 8월 시점의 극동 소련군은 약 130만, 항공기 5,400기, 전차 3,000량 정도로 평가되었다. 

 일소중립조약이 유효한 1945. 8. 9. 소련군은 만주국을 침공했다. 소련군은 북만(北滿)의 제2전선군이 관동군을 구속하면서, 동만(東滿)의 제1전선군과 서만(西滿)의 자바이칼전선군이 양익포위를 통하여 관동군을 거대한 포위망 속에서 섬멸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관동군의 방어계획은 경원선(京圖線) 이남과 연경선(連京線) 이동의 지역을 확보하여 지구전으로 이행한다는 것이었다, 

 물량과 병력을 앞세운 극동소련군 앞에 관동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국지적으로 진지를 고수하는 등의 활약은 있었으나, 전반적 정세에서 관동군의 불리는 명확했다. 소련군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1945. 8. 14. 이후에도 진격을 계속했다. 1945. 8. 19. 관동군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는 소련군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고, 본격적인 정전과 무장해제가 개시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1945. 9. 2. 일본의 항복문서에 대한 조인도 무시한 형태로 진격을 계속했고, 결국 소련군이 만주, 한반도 북부, 사할린, 쿠릴열도 및 일본의 북방 4도에 대해 완전한 점령을 달성한 1945. 9. 5.에야 이르러 모든 공격을 종료했다. 

6⋅25전쟁 군사사 연구의 선결조건 구축, 김상규 박사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6⋅25전쟁 관련 기밀문서들이 대량으로 공개되면서 적군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중국에서도 중국 특유의 방식으로 공산권의 최고지도부들 간에 오고갔던 電文을 공개하고, 참전한 지휘관들의 회고록 등을 발간했으나 문서 공개에 있어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중국은 실제 6⋅25전쟁의 참전국으로서 당시 전쟁의 단계별 전략임무를 명령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와 관련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동일한 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군과 유엔군의 작전과 전술을 어떻게 판단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는지를 중국인민지원군 관점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6⋅25전쟁을 보다 실증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발표는 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중국인민지원군 문서들과 정전협정 이후 그들이 전쟁에서 경험한 바를 정리하여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편찬한 전사를 소개함으로써 6⋅25전쟁 군사사연구에 일조하기 위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산하의 연합국통역번역국을 중심으로 한 미군 수집부대들은 한반도 全域에서 적군자료를 노획했다. 이러한 문서들은 현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RG242문서군의 일명 ‘북한노획문서’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 당시 작성하거나 휴대했던 문서들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는 2000년도에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 500건을 영인해 『한국전쟁기 중공군문서』(전4권)을 발간하여 실제 모습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마이크로필름 복사형태로 영인 출판했기 때문에 글자 식별에 상당한 제약이 있어 현재까지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를 활용한 연구가 진행된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북한노획문서’(40만 5천 8백여 면)를 일일이 확인한 결과, 약 1,500건에 달하는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이미지파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 문서 유형을 보면, 각종 작전문서(명령서와 보고서), 상황도, 진지편성도, 전술연구교재, 외국어(조선어⋅영어)교재, 통계표, 개인메모장, 신문, 편지 등으로 다양한데, 이러한 1차 사료는 6⋅25전쟁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몇 건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中國人民志願軍 第60軍 命令(1951.3.17)」를 통해 제60군 예하부대가 安東(現, 丹東)에서 압록강을 도하하여 伊川까지의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데, 제대 이동 시 연대간의 거리를 5里, 대대간의 거리를 2里, 중대간의 거리를 250m로 각각 규정했다. 「中國人民志願軍 第567團 命令(1951.11.2)」은 경기도 연천의 馬良山, 高旺山 일대에 대한 반격작전계획을 작성했는데, 한국군 전사와 교차 분석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엔군이 주둔한 고지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어 전사자 유해 발굴에 일조할 수 있다. 「‘四組一隊’戰術硏究」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중⋅소대급 전술로서 당시 전장에 운용된 전술을 분석할 수 있으며, 이외에도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군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한국군과 유엔군 포로로부터 군사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20여 종의 외국어(조선어⋅영어)교재를 편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軍內에서의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는 정전협정 이후 6⋅25전쟁에서 경험한 바를 정리하여 이를 간부교육과 부대훈련에 활용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60여 명의 간부를 선발하여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전쟁적경험총결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1년(1954년 8월~1955년 8월) 간의 편찬작업과 다시 1년 간의 감수정리작업을 진행하여 1956년 10월 『抗美援朝戰爭的經驗總結』을 편찬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발간한 최초의 6⋅25전쟁사이다. 총4권으로 구성된 책자는 제1권에서 전쟁개관(簡史), 제2권은 전술(戰術), 제3권(上⋅下)은 병단에서부터 소대까지의 전례(戰例), 제4권은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분석(對敵軍硏究)이 기술되어 있다. 내용의 중요성이 국내에서 인식되어 육군사관학교(제2권)와 육군군사연구소(제1⋅3⋅4권)에서 번역되었다. 

  본 서는 사료적 측면에서 볼 때 정전협정 이후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된 전사서이며, 여러 작전과 주요 전투에 대한 중국인민지원군의 제대별 계획과 경과를 구분하여 기술함으로써 작전과 전술적 측면에서의 분석이 가능하다. 특히, 다른 전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224장의 대형 상황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장진호지역에 대한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전투 상황도를 예로 들어 확인해보면 「軍首長決心圖(1950.11.24.)」, 「敵軍狀況圖(1950.11.27.)」, 「攻擊戰鬪經過圖(1950.11.27.~12.4)」 등으로 구분하여 전장을 가시화했고, 작전계획과 경과를 비교 분석할 수 있다. 

  물론, 상술한 중국인민지원군 노획문서와 『抗美援朝戰爭的經驗總結』의 기록이 실제 사실과 상이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군 전사기록과의 교차 분석작업은 필수불가결하며, 이를 기반으로 6⋅25전쟁 당시 전투상황을 보다 객관적이고 상세하게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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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관련하여 참조할만한 자료들

특정 매체’만’을 접하지 말고 다양하게 접하는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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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Post # 55, The Division of, 1945-1948

Prof. Kathryn Weathersby

When the Republic of Korea adopted its first constitution on 17 July 1948, it defined its territory as “the Korean Peninsula and its adjacent islands,” indicating that it would not accept as legitimate any government that might be created above the 38th parallel. In keeping with this principle, President Syngman Rhee declared on September 5, four days before the leadership in the North established separate state, that “Communist Koreans leading the Soviet puppet regime in the North should repent their crimes” and join the only legal government in Korea. He also accused Communist Koreans in the North of “selling their fatherland to the Soviet Union.”

The condemnation of communist leaders in the North did not extend to the population of the northern zone, however. Instead, the Syngman Rhee government described the people of the North as captives who were deprived of all human rights. Given this perspective, it is not surprising that Seoul declared the ROK “morally and legally obliged to liberate North Korea.” Moreover, this obligation could only be fulfilled by “the military conquest of the North through a holy war against the communist devil,” which led to official ROK policy of “unification through armed forces.”

The US view, however, was that it did not want to be dragged into a war in Korea. American officials in Seoul therefore made it clear to Syngman Rhee that all US support would immediately cease if he attempted to “march north.” Moreover, the US refrained from providing the kinds of weapons needed for a military offensive. In this situation, the ROK appealed to the authority of the United Nations as a route to unification. On September 12 the National Assembly passed a resolution addressing the people of the North saying, “We hope you, our countrymen in North Korea, will hold a general election soon in a free atmosphere, in accordance with the United Nations resolution, as we did, and elect the true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and send them to the National Assembly.” It then reserved 100 seats for such North Korean representatives.

While the US refused to back a military approach to reunification, it did support Rhee’s efforts to gain UN recognition of the ROK’s legitimacy. After 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submitted its report to the UN First Committee, the US introduced a resolution to the General Assembly in December 1948 to declare the Republic of Korea to be the legitimate government of Korea. The Soviet Union challenged this resolution and submitted its own proposal that the UN create a new means to reestablish Korea as “an independent democratic state.” The General Assembly voted down the Soviet resolution and on 12 December approved the American resolution by a vote of 48 to 6, with one abstention.

The wording of the UN resolution was careful and important. It declared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e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and that this government was based on an election that was “a vali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It described the ROK as “the only government in Korea” even though it did not declare that the ROK was the government of the entire peninsula.

After receiving this endorsement from the United Nations, the Rhee government emphasized three reasons that unification must be realized as quickly as possible. First, division makes it impossible for all Koreans to lead a sound national and economic life. Second, it is tantamount to cutting a body into two pieces, and thus, a unified Korea is the only natural and appropriate political and economic unit. Third, since division causes much tragedy and confusion, unification is the key to ending the misfortune of Koreans.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how the government established in the north in September 1948 responded to the above claims of the ROK.

[Sources: This post relies on Kim Hakjoon, The Domestic Politics of Korean Unification: Debates on the North in the South, 1948-2008 (Seoul and Edison NJ: Jimoondang,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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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26, 옛 월남친구와 안 영사를 보다.


석방직전의 이대용장군

AH 동 구대장은 북월 출신의 늙은 경찰 대위였다. 성질이 급하고 차가웠지만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자주보면 친해지는 것은 감방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대용을 오랫만이라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경비원들이 휴지로 쓸 수 있는 종이를 압수하기에, 변소에 갈때 쓸것이라고 돌려달라고 했더니 그는 자기 책상 서랍에서 신문지 10여장을 주면서 사용하라고 했다. AH동 제2동 제1호 감방에 들어가면서 25개월간의 격리감방 생활을 면하게 되었다.

AH동의 감방에는 반장이라고 하는 왕초 죄수가 있었다. 이대용이 들어간 감방의 왕초는 ‘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대용의 자리를 복도쪽 벽 구석에 정해주었다. ‘완’이 통역으로 데리고 온 수감자는 티우정권 당시 경제계획성 차관보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던 미국 MIT 출신의 레 만 홍 이었다. 이대용은 레만홍과 한월경제각료회담을 비롯하여 각종 한월 경제협력 관계로 1974년과 1975년간 자주 만나 서로 잘 아는 사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이대용과 레만홍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레만홍은 체중이 많이 줄었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고 겨우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울 뿐이었다. 이대용도 너무 초라하게 변해있어서 레만홍도 이대용을 알아보지 못했다.

레만홍은 감방왕초’완’의 말을 통을 하면서 이대용을 알아보았다. 서로 놀라 손을 잡았다. 모습은 변했으나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이대은 ‘완’이 정해준 자리에 거적대기를 깔고 짐정리를 했다. ‘완’은 이대용을 자기 부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짐정리를 마치고 AH동 마당에 있는 노천 물탱크로 물을 길러갔다가 안 영사를 만났다. 무려 2년 5개월만의 재회였다. 안 영사는 다행히 옛모습 그대로였다. 까무잡잡하고 통통했다. 스쳐지나가는 순간적인 만남인 데다가 타층의 수감자와의 대화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인사이외의 이야기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산책시간도 있었다. 제 1호감방부터 제4호감방까지 200여명의 수감자들이 모두 복도로 나왔다. 이대용은 여기에서 자유월남의 전 수장 환 휘 꽡(Phan Huy Quat), 전대통령 후보 웨 된 꽡(Ngugen Dihn Quat)을 위시한 고위급인사들과 이외에도 대령급 고위장교, 국회의원, 대법관, 언론인, 교수, 은행원, 경찰관, 학생, 상인, 회사원, 하사관, 병사, 종교인, 농민들 할 것없이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모두 갖혀 있는 것을 보았다.

오전과 오후에 산책시간이 있었다. 오후에는 햋볕이 복도를 비추어 일광욕을 할 수 있었다. 이대용은 러닝셔츠를 벗고 강력한 오후 햋볕에 피부를 태웠다. 격리감방에 있다가 이곳으로 오니 마치 낙원에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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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24, D동의 수감자들 그리고 재분류

치화형무소 수감자 인원은 수시로 바뀌었으나 적을때는 4,500명 많을 때는 6,000여명이 빽빽하게 수용되어 있었다. 8각형의 본관 건물 외곽에는 형무소 본부, 취사장, 병원, 경비대 본부, 특별 감방 한 동, 그리고 사형장이 있었다. 여성 수감자들은 각 동에 분산 수감되어 있었으나, 건물이 부족해서 100여명 정도는  D동에 바짝 붙어 있는 2층 건물의 특별동에 수감되어 있었다. 

자유 월남이 패망한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치화형무소 수감자들은 고된 옥고에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 중에서도 격리감방에 수감되어 있는 정치범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대용이 있던 D동 2층에서도 2명의 정치범이 정신을 놓아 버렸다. 해괴한 기성을 지르기도 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듯 황소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고, 이따금씩 기관지가 끊어져 버린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를 듣는 이대용의 마음은 아팠다. 

이대용이 수감되어 있는 감방 복도 건너편 벽에는 각 감박의 수감자 수를 기입한 상황판이 걸려 있었다. 남 대위는 글을 모르기 때문에 구 티우 정권 때 사이공 탄산눝 국제공항 세관장을 하던 수감자가 숫자를 적어 놓고 있었다. 이대용은 물을 길으러 갈때 마다 곁눈으로 그 상황판을 보면서 각 감방의 인원수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수감자 총원은 수시로 변동이 되고 있었다. 공산 월남의 유엔가입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확정되자, 공산 월남은  D동 2층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에 대한 대대적인 재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D동 2층에는 천주교 신부들, 와하우교 반공 게릴라 장교들, 티우정권 당시의 반공 육군 대령들을 포함하여 약 73명이 수감되어 있었으나 이대용만 독방생활을 하고 있었다.

형무소측은 73명을 다음 4개 부류로 구분했다. 

첫째, 사형집행

둘째, 북월 형무소로 후송

셋째, 남월 타형무소로 이감

넷째, 치화형무소 타동 감방으로 이감

사형집행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1977년 내에 처형할 것이며, 다른 곳으로 이감되는 사람들은 공산측으로 전향하지 않으면 종신형으로 형무소에서 일생을 보내야 했다. 또 설사 전향한다고 하더라도 몇년동안 형무소에 잡아놓고 장기간 그 동태를 살핀후에 석방하거나, 아니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냈다. 

총살형이 집행된 정치범은 와하우교 반공 게릴라 청년장교 5명이었다. 

비좁은 감방에 수감되어 있는 수감자들은 재분류되어 이리저리 이감되어감에 따라, 8월 8일에는 27명으로 줄어들었다. 10월 초순에는 와하우교 골수 반공게릴라 장교들, 록 신부와 탄 신부 그리고 이대용 등 2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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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에어드랍 완료된 BTSMD 지갑 이기도한 Bitshares 지갑 https://wallet.bitshares.org/?r=newid (추천인 코드 포함) 에 서, 이름

Q. 최근 에어드랍 완료된 BTSMD 지갑으로도 활용되는 Bitshares 지갑 (추천인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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