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5, 제1절 양측의 병력전개

이번 포스팅에는 소련이 본 남북간 양측의 병력 전개중 국군에 관한 부분을 정리하고자 한다.

p32

1950년 5월 초반에 한국군의 전투준비태세를 평가한 로버트 장군은 미군의 규정에 따라 한국군의 편제와 훈련 그리고 무장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면서 기술적으로 비슷한 장비를 가지고 있다면 수적으로 2-3배 더 우세한 적과도 충분히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현대적인 군대라고 언급하였다

1950년 5월 말-6월초에 한국군 사령부는 인민군과 예상되는 충돌에 대비하여 훈련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한국군 사단 및 군단 참모부는 가능한 작전계획에 따라 실질적인 병력배치를 시작하였다. 6월 중순까지 한국군은 출발지역에 집결하면서 전투태세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소련의 기록에 따르면 1950년 5-6월에 한국군에 군단 참모부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군단은 한국전쟁 발발이후 7월경에 만들어진다.>

p.33

1950년 여름이 시작되기전까지는 한국군에는 8개 보병사단(제21보병연대 포함), 1개 독립연대, 2개 독립보병대대, 3개 독립포병대대 그리고 1개 항공부대가 있었다. 15개 보병연대를 포함한 5개 보병사단(보병연대 70% 이상), 독립기병연대, 1개 독립대대, 3개 독립포병대대 및 모든 항공부대가 38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장 강력한 부대는 서울에서 평양방향과 좀 더 북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38도선 근체에는 가장 잘 준비되고 인원과 물자가 완전히 보충된 사단들이 집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역사편찬에서는 한국군사령부와 미 군사고문들이 무력충돌시 모든 임무는 공격작전으로 해결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방어를 조직하는데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직전 한국군의 전투준비상태는 비교적 훌륭했다는 것을 소련군의 기술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볼때 한국군이 한국전쟁초기에 붕괴된 것을 단순히 불의의 기습이라든지 전차의 부족이라는 요인으로 설명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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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4 제1절 인민군

인민군의 당시 사단과 군단에 대한 소련의 평가가 있어서 흥미롭다

우선 포병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포병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p.6

전쟁개시 전에 대부분의 사단 군단 보병부대들은 기본적으로 편제인원과 무기가 보충되어 있었으나 포병의 보충 수준이 미흡하여 45mm, 76mm 평사포와 122mm 곡사포의 보충률을 50-60%수준이었고, 120mm 박격포는 45-55%, 82mm 박격포는 60-70%였다.

p.7

보병사단의 편제포병은 보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경험있는 장교들도 부족하였다. 그리고 대다수 장교는 포병병과가 아니었다. 포병대대와 포병중대 지휘관들의 전투지휘능력은 양호한 편이었지만 포병대대와 포병중대에는 통신수단이 거의 없었다. 포병대대와 포병연대의 전투준비는 미흡하였다 .

보병사단의 편제포병은 보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경험있는 장교들도 부족하였다. 그리고 대다수 장교는 포병병과가 아니었다.

p.7

특히 제5, 제6, 제10, 제12, 제13, 제15 보병사단은 무기, 수송 및 통신 장비를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통신장비 확보도 좋지 않았다. 1950년 3월 초에 총참모부와 최고 사령부간 통신을 지원하기 위해 독립통신연대가 창설되었으나 통신장비의 부족과 운용인력의 능력부족으로 부여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전선으로부터 120km-200km 떨어진 총참모부를 위한 상설 유선 통신이 필요하였다. 통신연대에서는 1개 전신중대만 있었고, 그 중대는 상설통신선로를 설치 및 유지하고, 유사시 복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전시에 이러한 연대들을 전개할 수 있는 통신기지조차 없었다. 통신연대의 무선대대에는 RAF형 야전 차량탑재 단파무전기 3대, RSB형 무선 송신기 4대, RBM형 송수신겸용 무전기 10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선장비로 사용할 수 있는 무선수신기와 통신장비도 없었다. 이동통신 중대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무선 수신기와 통신장비도 없었다. 이동통신 중대가 효과적으로 운용되지 못하였을것이다. 중대가 보유한 모터찌클은 산악지형과 고온에서 고장이 잦았다. 결국 생도 60명이 속한 통신연대의 교육중대는 연대자체에서도 수적으로 부족한 초급 전문 지휘관의 교육을 지원할 수 없었다.

P.8

지휘통제기구로서 사단, 군단 및 연대의 참모들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 참모장교의 충분한 교육과 참모업무에 대한 경험부족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후방부대들이 겨우 전개를 시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전쟁개시전까지 부대로 꾸준히 공급하지 못하였다.

소련의 평가에 따르면 북한은 남침당시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병의 준비가 미흡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국군은. 상대적으로 포병이 우수했다. 화포의 성능에서는 인민군이 우수했지만, 인적자원에서는 국군이 우수했다. 국군의 포병을 구성한 사람들은 상당수가 서북청년단 출신이었다. 교육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나 북한 인민군에 대한 적대감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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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관련하여 참조할만한 자료들

특정 매체’만’을 접하지 말고 다양하게 접하는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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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서론 3. 남침인가 북침인가

한국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하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학문적인 논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일부 북한의 주장을 무조건 따르는 학자들의 주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문제의 발단은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자였다. 부르스 커밍스가 쓴 책이다. 그는 한국전쟁당시 미국이 확보한 노획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성격규명했다. 그러나 그가 본 자료는 매우 일부에 불과했다.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출하자 소련은 중요한 자료는 모두 소련으로 옮겼고 옮기지 못한 자료는 모두 소각했다. 소각하지 않은 자료가 남았다. 주료 지방인민위원회의 자료들이다.

부르스 커밍스가 본 자료는 그렇게 미국이 노획한 자료였다. 중앙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없었다. 그래서 지방인민위원회에서 발생한 일들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이라고 규정했다.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부르스 커밍스 자신은 분명하게 남침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소위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은 남침이 아니라고 우겼다.

남침과 북침에 관한 논쟁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우스운 것은 소련의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의 서문에 이미 한국전쟁은 남침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1950년대 중반에 비공개 토의를 통해서 작성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2002년이다. 아마도 서문은 본문을 작성하고 나서 쓰여진 듯 하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이 책이 출판된 2002년 이전에 소련의 입장을 남침이라고 정리되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게으른가를 알 수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국에서 나오은 한국전쟁에 관한 책들을 번역하거나 공부를 했더라면 그런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의 서문에 있는 남침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내용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에도 수백 건에 달하는 다양한 수준의 무력충돌은 있었으나 북한이 그와 같이 대규모적인 반응을 보인 적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울이 도발하였다고 해도 평양의 반응이 부적절했으며 ‘반격’이나 ‘보복’을 훨씬 넘어섰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행동을 실행하기 위해선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충분한 병력의 축적과 장비 및 연료 그리고 식량 등 필요한 예비물품에 대한 지원이 요구된다,”

“전술이론에 따르면 전과를 거두기 위해서 공격 측이 적보다 수적으로 몇배 더 우세해야 한다. 북한으로 출정하기 위해 면밀히 준비한 남한이 예상치 못한 총공격을 실시하고는 북한 지역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몇시간 만에 한국군은 인민군에 의해 격멸되어 3일후에는 인민군 연대들이 도착하고 수도 서울을 잃었다”

“스탈린은 극동의 군사정치 상황을 평가하면서 한반도에서 내전을 일으켜 군사적인 방법으로 남북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미국의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은 장개석 군대를 격멸한 1949년 중국혁명의 확실한 성공을 바탕으로 스탈린은 한반도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당원 강상호는 자신의 진술을 통해 인민군이 먼저 군사행동을 개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는 전투 첫날에 38도선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목격자였다. 전투지역의 상황을 분석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김일성이 전쟁을 개시했다는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장님이거나 바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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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사) 서론, 2, 미국의 한반도의 안보적 가치평가에 대한 소련의 인식

한국전쟁당시 주한미군의 철수는 소련이 미국이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이 쓴 한국전쟁에서는 미국의 전략적인 측면에서 한반도를 포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래는 이 책자 서문에서 기술된 것으로 당시 소련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워싱턴 지휘분에서는 동아시아 대륙의 문제와 아시아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섬들을 확보하는 문제에 대한 개입을 거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미 합참은 미국이 아시아 대륙밖의 태평양 지역에 ‘방어영역’ 을 확립하도록 제안했다. 즉, 전략적 계획목표를 위해 일종의 경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 과 그 가능성을 고려할 때 만약 지역국가들이 공격을 받을 경우 펜타곤이 방어해야만 하는 국가들을 결정할 수 있 도록 해줄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에서 미국은 남한이 자국에 방해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합참의 평가에 의 하면 세계로 힘이 분산된 미국의 군사력은 남한 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합참은 한반도 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트루먼은 이러한 권고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대외 정책적인 측면보다는 국내정치적인 이유때문에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 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연재하고 있는 웨더스비 교수의 자료를 참고하면 될 듯하다. 당시 미국내에서는 외국에 머물고 있는 장병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국무부에서는 남한에 군대를 더 주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국방부는 의회의 예산압박으로 군대를 철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은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의도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전제주의국가인 소련이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고 그 충돌 과정에서 정책이 결정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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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소련의 한국전쟁기록 1

소련은 한국전쟁이 끝나자 각종 기록을 정리해서 1950년 중반에 한국전쟁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그 책은 한국에서 번역되지 않았고 2019년 육군군사연구소에서 변역을 했다. 앞으로 당분간 소련의 한국전쟁사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제목은 **소련이 기술한 6.25 전쟁 1”이다. 앞으로도 몇년간 정리해서 발간을 한다고 한다.
이번에 발간한 책은 작전과 전투를 정리한 부분이다.

서론을 읽다가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서 갈무리를 했다. 한국전쟁 발발당시 유엔 안보리에 소련이 참석하지 은 이유가 쓰여져 있었다.

소련은 유엔안전보장 이사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은 중국건국이후에 안전보장이사회의 장개석 대표를 추방하 고 그 자리에 중국대표로 교체하려는 중국 측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그 지지자들은 공 산중국의 유엔대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릭(Y.A. Malik)이 소련은 안전보 장이사회와 유엔의 다른 기관이 추진하는 사업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장개석이 유엔에서 추방되기전까지는 미 국과 그 지지자들의 어떤 결정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1950년 1월 13일에 발표하였다. 이와같은 소련 의 중요한 실수는 5개월이 지난 후에 남한에 대한 공격에 맞서 유엔이 연합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것은 스탈린 (I.V. Stalin)의 외교적 오판이었다. 소련 정부는 한국전쟁의 시작과 미국의 개입후에 안보리에 참여해야 한다는 판 단에 따라 1950년 8월 1일에 유엔주재 소련 대표는 안보리로 돌아왔다.

이책은 언제 발간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발간일자는 2002년이라고 하는데, 한국전쟁 종료이후 50년대 중반에 비공개 토의자료를 모아서 발간했다고 한다. 이책이 쓰여진 시기가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임을 감안하면, 스탈린에게 안보리에 참가하지 않아서 미국이 한국전 쟁에 참가하는데 필요한 조치들을 방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소련대표가 안보리에 참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일부에서는 스탈린이 일부러 참가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말려들어서 유럽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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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맥북이 고장났다. 게다가 어설프게 워드프레스를 만지다가 그동안 갈무리한 것을 모두 날렸다. 황당했다. 그런데 다행이 그 기록이 스팀잇에는 남아 있으니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홈페이지는 사실 자료 갈무리하기위한 것도 있었는데 황당하다. 블록체인은 기록이 사라지지 않으니 오늘 황당한 일을 당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앞으로는 반드시 파일로 정리를 해두어야 겠다. 그동안 한일이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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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연구를 다시 시작하며

이대용 장군의 기록 정리를 마쳤다. 대충 이대용 장군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사람의 삶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좀 더 내밀한 기록들을 찾아야 한다.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과 인터뷰를 해야 하고 일기나 수첩을 뒤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숨을 돌리고 한국전쟁에 관한 정리를 이어가려고 한다. 그래서 이제까지 썼던 포스트를 찾았다. 스팀은 자료를 갈무리 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색인기능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했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하나 찾아 보니 다음과 같았다. 우선 이것부터 다시 읽고 홈페이지에 갈무리를 해놓아야 하겠다.

초기전사기술의 문제점

https://steempeak.com/wisedomandjustice/@wisdomandjustice/post-4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6-25-1-post-5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6-25-2-post-6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3(기습의 작전적, 전술적 측면), post 7.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6-25-3-post-7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다탕성에 대한 검토 4 (종합)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6-25-4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의 서사구조와 한국군의 지적 능력 저하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3wgkyg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의 단계구분에 대한 서술의 변화에 대해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6jys99

(한국 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1 (육군전사, 1952. 1)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1-1952-1

(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 초기 단계구분 문제 2 (괴뢰군 연혁 1958. 6.1)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2-1958-6-1

(한국전쟁사 연구) 전쟁 초기 단계 북한군 작전개념에 대한 기술 (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6-25-1970-12-20

(한국전쟁사 연구) [북괴 6.25 남침분석 1970. 12.20)]의 초기 작전의 제1단계 작전기술에 관해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6-25-1970-12-20-1

(한국전쟁사 연구) 북한의 초기작전 단계구분에 대한 기록 (합참, 한국전사, 1984)

https://steempeak.com/wisdomandjustice/@wisdomandjustice/1984


호르무즈해협 해군함정파견, 국회가 제역할 못하고 있다.

청와대가 호르무즈해협에 해군을 파견하는 것을 국회의 동의가 필요없다고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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