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16, 제2집단군의 5사단 12사단의 움직임

7월 26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작전에서 북한군의 작전주안은 2집단군에 주어진 것 같다. 훨씬 많은 부대가 집중되었다.

“7월 26일부터 제2집단군도 계속 공격하였다. 7월 29일에 상주 방향으로 제13보병사단이 투입되었고 제8보병사단이 영천 방향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제2집단군은 한국군 제1, 제6, 제8 및 수도사단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상주, 용주, 안동을 점령하고 8월 2일-4일 낙동강으로 진출하였다.(pp.68-69)”

“8월 20일전에 제15, 13, 제1 및 제8 보병사단은 인동-화수동 방어선으로 진출하였으나 이곳에서 적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쳐 공격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p.69)”

“한편 제5보병사단은 미 공군의 강력한 항공 및 함포사격을 받으며 한국군 제3보병사단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해안을 따라 천천히 진격하였다. 8월초에 사단은 청하지역으로 진출하였다. 7월 30일에 적은 평해 남쪽에 2개 중대 규모의 해병대를 상륙시켰으나 상륙부대는 격멸되었다.(p.69)”

“안동에서 남동쪽으로 진격하던 제12보병사단 예하 연대들은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포항 북쪽 지점에서 해안도로를 차단하였다. 그 결과 한국군 제3보병사단이 포위되었다. 적은 사단을 구출하면서 8월 16일 이른 새벽에 해상을 통해 이 부대를 우포리 지역으로 철수시킬 수 밖에 없었다.

포항지역에서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적은 포항에서 막 상륙한 미 제2보병사단 예하 제38보병연대를 전투에 투입시켰고, 그들은 한국군 수도보병사단의 연대들과 함께 수차례 격렬한 역습을 감행하였다. 결과적으로 인민군 제5보병사단의 진격이 포항 북쪽 방어선에서 저지되었고 제12보병사단은 포항북서쪽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p.70)

이시기 한국군 3사단은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의 진출을 저지하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8월 20일 이후에는 적의 작전이 주로 동쪽 3사단 지역에 집중되었다. 한국군 3사단이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미군 제2보병사단 제38연대와 수도보병사단이 역습으로 북한군 제5사단 12사단의 진출을 격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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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했다고 우리 안보 걱정할 필요없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후 미국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반발은 우리 국내 소위 보수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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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15, 8월 20일까지 낙동강 전선 남동쪽의 전투. 인민군 6사단을 중심으로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는 북한군 6사단과 5사단 그리고 12 사단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3개 사단은 국공내전을 마치고 북한에 들어왔다.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에서 이들 중공군출신 사단들의 활동이 여기저기 나뉘어져 기술되고 있다.

7월 26일이후 인민군의 공격방향은 동쪽과 남동쪽이었다.

“인민군은 총사령부의 결정에 따라 7월 26일에 동쪽과 남동쪽 방향으로 계속 공격하였다.(p.65)”

여기에서는 우선 남동쪽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여기저기 산만하게 기술되어 있어 정리하기 어렵다.

북한군 총사령부의 결정에 따라 제1집단군은 8월4일부터 남동쪽으로 공격을 지향했으며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제1집단군은 8월 4일 자정까지 합천, 김천 동쪽 지역의 낙동강 우측 강변으로 진출하였고, 강을 건너기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제1집단군의 우측에서 공격하던 제6보병사단과 제603 모터찌클 연대는 진주를 점령하고 남강을 도하하여 함안을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실시하였다.(p.67)”

“미군 사령부는 남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돌파하는 인민군의 위협을 심각하게 고려하여 마산-창녕-현풍 방어선으로 새로운 부대를 긴급히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7월 31일부터 한반도의 남동쪽 항국들에서 상륙을 시작한 제2보병사단(제38보병연대 제외)과 미 제1해병사단이 창녕, 현풍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미 제25보병사단이 마산에 재배치되었고, 제29 및 제5독립보병연대들 또한 마산지역으로 집결하였다. 이지역에서의 미군 활동은 공군외에도 진해 지역으로부터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았다(p.68)”

8월 13일 북한군 제6사단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같은 날 적은 제6보병사단의 후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사천지역에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진주지역으로의 상륙을 격멸하기 위해 제7보병사단의 주력이 투입되었고 상륙부대는 격멸되었다.(p.68)”

북한군 제7사단이 사천지역에 상륙한 해병대를 저지했다는 것은 제대로 파악하지못하고 있었다. 당시 해병대는 김성은 장군이 지휘했던 부대로 보인다.

7월 26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전투는 크게 세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첫번째 가운데 방향, 두번째 남동쪽, 세번째 동쪽이다.

여기에서 가운데 방향의 전투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인민군들의 노력이 집중되지 못했다. 인민군의 노력이 집중된 것은 남동쪽과 동쪽이라고 보아야 할 것같다. 이기간에 특히 노력이 집중된 지역은 동쪽지역이다. 다음에는 동쪽지역의 전투에 대한 기술을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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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했다고 우리 안보 걱정할 필요없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후 미국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반발은 우리 국내 소위 보수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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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14, 인민군 제6사단과 제5사단의 작전관련

이책은 한국전쟁 발발을 모두 4단계로 구성하고 있다.

제1단계는 한국전쟁발발로 1950년 6월 25일부터 9월14일이다. 약 두달반의 기간을 다시 4단계로 구분했다.

제1단계는 서울에서 적의 격멸, 한강 및 강릉계선 진출(6.28-7.2)

제2단계는 인민군의 보성, 금산, 영동, 영주, 영덕 계선으로의 진출과 공격확대(7.3-25)

제3단계는 인민군의 부산방향으로의 공격(7.26-8.20)

제4단계는 부산교두보 전투(8.21-9.14)이다.

이제까지 제1단계의 주요내용을 정리했다. 이번부터는 제2단계의 내용이다. 주로 사단급 부대의 이동을 정리했기 때문에 정리하기 어렵다. 그중에서 특징적인 것을 몇가지 집어 보려 한다.

우선 이시기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금산-영주 방어선의 중앙 방향에 집중되었으며 이는 사전에 미리 고려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사전에 채택된 결정에 따라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제1선에 위치한 9개 사단중에 7개 사단이 활동하던 금산-영주 방어선의 중앙방향에 집중되었다. (p.65)”

이와함께 측방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이 성공을 했다는 점을 특별하게 밝히고있다.

주력의 측방에서 공격하던 부대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6보병사단은 제603모터찌클연대와 함께 목포와 순천근교로 진출한 다음 한반도 남서쪽 전역을 해방시켰고, 영덕을 점령한 제5보병사단은 포항으로부터 40km의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가 불충분하여 이 방향에서 전과를 확대하기 어려웠다. (p.65)”

여기서 인민군은 작전의 속도를 높이면서 제1집단군은 영동지역에서 김천, 대구 방향으로 공격하고, 제2집단군은 예천과 영주지역에서 안동, 영천 방향으로 계속 공격했다.

한편, 측방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제6사단과 제5사단이 성공를 거두었으나 이 전과를 확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6보병사단은 제603 모터찌클 연대와 함께 일부 병력으로 목표항과 한반도 남해안을 방어하도록 하고, 주력으로 남원에서 순천 북쪽 진주방향으로 공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p.66)”

제5보병사단은 방어로 임시(탄약이 공급될 때까지) 전환되어야 했다.(p.66)”

“적의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고 있을 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요부대의 공격을 가속화하는 것이고 이 방향에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광범위한 지역을 석권했던 제6보병사단이나 제5보병사단의 지대로 병력을 재편하는 것은 시간낭비로 이어질 수 있었고 또한 지형적 조건과 적의 공군력 때문에 어려웠다(p.67)

이 기록을 보면 소련도 제6사단과 제5사단의 전과를 적시에 확대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제5사단이 탄약부족으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다. 당시 제5사단을 상대하던 국군 3사단과의 상호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제6사단은 노력을 집중하는데 실패했다. 목포와 순천으로 제6사단 예하부대를 보냄으로써 남원을 거쳐 순천 북쪽으로 진출하는 부대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렇게 보면 남원에서 순천 북쪽으로 지향한 제6사단의 진출을 처음으로 저지한 여수 순천 학도의용군의 저지작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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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결정에 대한 비판을 보면서

미국이 우리정부의 지소미아 종료결정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국무부 대변인이 나와서 지소미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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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13, 서울점령이후의 북한군

서울 점령이후 북한군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수립하고 군사력 운용 방안을 수립했다

“이번 공격의 목표는 한국군과 이미 한반도에 도착한 미군을 결정적으로 격멸하고 남동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부산, 울산, 포항을 신속히 점령하는 것이었다.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연합군이 새로운 사단, 군단 및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할 수 있었다.

주어진 임무를 속히 수행하기 위해 인민군 사령부는 중앙방향, 즉 서쪽에서 수원-대전-부산, 동쪽에서 원주-안동-포항을 포함한 축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주력에 집중하기로 결정하였다

수원, 논산, 광주 방향이 지형적으로 더 유리했으나 부산, 울산, 포항 항구로부터 측방으로 이격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업을 신속히 수행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항구를 잇은 가장 짧은 방향은 강릉, 삼척, 포항 방향이었다. 그러나 이 방향은 인민군의 주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충분한 수용력을 갖지 못해 적의 해군과 공군측에 매우 취약하였다.(P.55)”

7월 3일 이후 작전에 대한 기술은 기존의 기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무륵리에서의 패배와 같은 부분들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이전의 서술에서는 어려운 것은 어렵다고 기술했던 것에 비추어 무극리 전투에서의 패배는 심각하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공격방향을 정리한 북한군은 7월 13일 이후 상부지휘구조를 개편게한다

“지휘통제 향상과 지휘부의 전방부대들에 근접하기 위해 7월 13일 총참모부의 보조 지휘소를 모체로 전선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작전집단을 기반으로 2개 집단군(군들)이 창설되었다. 제1집단군은 제2, 제3, 제6보병사단과 제105 전차사단 및 제603 모터찌클 연대로 구성되었고 제2집단군은 제1, 제5, 제12, 제15보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제13보병사단은 전선군 예비로 배치되었고, 제10보병사단은 총참모부 예비로 배치되었다.

전선사령부와 집단군 사령부는 군사행동 지휘와 계획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과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선사령관의 결심은 총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집단군사령관의 결심은 전선사령관의 결심을 받아야 했다(p.59)”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 이렇게 상부지휘구조를 개편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아마도 전쟁발생이전에 충분하게 숙고하지 못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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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했다고 우리 안보 걱정할 필요없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후 미국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반발은 우리 국내 소위 보수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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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12, 북한군 제2군단의 임무와 역할, 기존 서술과의 차이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북한군 제2군단의 역할이다. 기존에는 제2군단의 제2사단이 수원지역으로 우회해서 한국군 후방을 차단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라주바예브 보고서의 내용에서 그런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번역된 책자에 의하면 제2사단이 아니라 제2군단 전체가 서울방향으로 우회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데 이번에 기술하는 부분은 그런 추측을 좀더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 방향으로 집중된 한국군은 전투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사실상 격퇴되었다. 그러나 인민군은 서울에 있던 한국군 부대를 포위하여 격멸시키겠다는 당초 계획을 성공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서울 방향에서 활동하던 공격부대가 느린 속도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남동쪽에서 서울을 우회하여 서울에 위치한 한국군 부대의 퇴로를 차단해야 했던 제2, 제12보병사단 및 제603모터지클연대는 대대급 이하 부대에 대한 사단장들의 지휘가 명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지형 조건과 포병이 공격부대에 뒤처져 후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p.52) 그와 동시에 서울을 점령한 제3, 제4보병, 제105전차사단 예하 연대 역시 한강도하 시기를 놓쳐 적은 전열을 갖추고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남쪽으로 자신의 부대를 후토실 수 있게 되었다.(p.53)”

한편 서울에서 적시에 한강도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는 기술하지 않았다.

다만 미공군이 북한군의 공격에 상당한 장애가 되었다는 기술을 하고 있다. 이와함께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상호협조가 원활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아마도 그 두가지가 적극적인 작전을 수행하는데 장애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6월 27일부터 지속된 인민군의 부대들과 참모부, 병참선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은 인민군의 공격속도를 늦추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북한 민족보위성의 미숙한 지휘는 성공적인 공격의 전과를 확대하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사단에 대한 지휘책임을 직접 맡은 북한 민족보위성은 통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민족보위성 소속 장교들로 구성된 제1 및 제2 작전집단의 참모들은 단결하지 못했고 통신수단은 부족했다(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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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11, 인민군의 서울공격, 홍천춘천의 지연

서울진출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들의 움직임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왔고 제3사단은 우회해서 남쪽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아마도 마포나 신촌쪽에서 용산쪽으로 진출한 듯하다.

“6월 28일 4시 30분에 제3보병사단제 제105전차여단은 적을 공격하였다. 1시간이 지난후에 제4보병사단도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6월 28일 5시 30분경 제105전차여단의 선두부대가 서울로 진입하였고, 6시에 여단의 주력은 라디오방송국, 전력발전소, 우체국, 전신국 그리고 기타 관공서를 점령하였다. 제105 전차여단 예하 연대들과 거의 동시에 서울에 진입한 제4보병사단 예하 연대들은 16시까지 서울의 북부와 중심부를 점령하였다. 제3보병사단은 같은 시간에 남쪽에서 서울을 우회하여 도시의 남쪽을 점령하였다. 적은 전투장비와 군장을 버리고 서둘러 한강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서울로 진출한 북한의 사단급 및 연대 지휘관들이 신속히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적시에 적을 추격하지 않아 적은 한강다리를 폭파할 수 있었고, 제3, 제5보병사단 예하 연대들을 이동시켜 한강 남안에 자신의 방어선을 강화하였다.(p.50)”

한편, 소련은 제3, 제5보병사단 예하연대들이 방어에 동원된 것으로 잘못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한강선 방어는 제대로된 건제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군은 거의 모든 사단 건제가 붕괴되었있었다. 김홍일 장군이 거의 혼자서 여기저기서 흘러드는 패잔병들을 모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홍천 춘천지역의 공격지연

춘천과 홍천에서의 진출지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2보병사단은 어려운 지형조건에서 포병을 잘 활용하지 못하였고 적의 완강한 저항을 극복하면서 느리게 전진하였다. 제2 보병사단은 6월 30일 전에 한강으로 진출하여 도하한 다음 7월 2일에 광주를 점령하였다(p.51)”

“제12보병사단은 어론리, 홍천, 횡성 방향으로 진격하여 7월 2일에는 원주를 점령하였다.”

“제2, 12보병사단의 공격이 처음부터 느리게 전개된 이유와 관련해서는 그 인접부대(연대들)와의 간격이 점점 넓어지면서 인민군사령부가 그 간격이 발생한 지역으로 제15보병사단을 보냈고, 6월 30일에 이포리와 홍호리 지역에서 한강으로 진출하였고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간지역에 제15사단을 투입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나온다.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지연은 부대간의 간격때문이 아니었다. 만일 제15사단을 공간지역에 투입했다면 북한군 제2군단의 예비투입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부분은 라주바예프 보고서나 여타 다른 자료와 비교를 해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12사단도 결국 한강을 도하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제2사단과 제12사단 모두 서울쪽으로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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