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27, 제1단계 작전의 결론과 특성. 전술적 측면 2

전차와 자주포 그리고 포병의 운용에 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먼저 전차와 자주포의 경우다

“전쟁 제1단계에서 전차와 자주포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 거의 예외없이 운용되었는데, 그것은 전장상황에서 적절하였다. 그러나 전차를 운용하는데 결함이 있었다. 우선 전차를 운용하기 위한 포병의 지원능력이 없었고, 전차의 공격시 공병의 지원이 미흡하여 그 결과 적의 지뢰지대에서 전차가 피해를 입었다. 또한 전차병들의 행동이 결정적이지 못하였다.(83)”

한국전쟁후 한국에서는 북한의 전차운용이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전차의 충격력을 이용해서 기동을 극대화하지 못하고 보병의 지원을 지원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그와 달리 평가했다. 전차가 보병을 직접지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한국적 지형에서 전차의 운용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차와 자주포가 보병을 지원토록 하는 운용개념은 옳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포병과 보병의 협조체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북한의 전차운용과 포병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을 지적한 바는 없다. 아마도 소련이 이런 평가를 내린 것은 유사한 사례가 매우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차병의 행동이 결정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전차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을 뒤받침할 수 있는 전례가 어떤 경우가 있었는지는 궁금하다.

두번째 포병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포병부대의 숫적인 제한으로 포병대의 창설은 어려웠다. 특히 보병연대들이 독립적인 방향에서 활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려움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므로 2개 포병대대로 구성된 연대포병군은 주로 주타격 방향에서 활동하는 보병대대에 편성되었다. 보조타격 방향에 전개한 연대는 일반적으로 1개 포병대대로 증강하였다.

적의 방어선 돌파시 포병의 공격준비 사격후에 보병 및 전차를 위한 포병지원사격이 이루어졌으며, 적의 방어종심 전투에서는 호송사격이 이루어졌다.

적의 방어성격과 포병 및 탄약의 보유 규모에 따라 포병공격준비 사격 시간은 20분-40분이었다. 보병 및 전차를 위한 포병지원사격은 종심 2.5km-3km 지역에 집중하여 실시하였다.

종심전투시 보병과 전차를 위한 호송사격은 연속집중사격으로 실시되었고 편제상 보병이 직접 운용하는 수하포병사격으로도 실시되었다.

공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부대가 추격을 실시할 때 연대 및 사단 군단 지휘관들이 편제포병의 적시적인 진지변환에 관심을 항상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하여 연대 또는 사단 군단이 종심에서 적의 저항에 부딪혀 적시에 포병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결함은 경험을 축적하고 공격을 전개하면서 점차 제거되었다.

미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미 공군이 절대적인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포병의 진지변환 여건과 기동 가능성이 더욱 제한되었고 포병은 큰 피해를 입었다.(83-84)”

소련은 포병의 운용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적시적인 진지변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들고 있다. 연대 사단 군단의 지휘관들이 포병진지변환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아 결정적인 순간에 포병화력을 운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들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 공군의 경우와 해군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큰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공군의 경우는 숫적인 열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해군의 경우 6월 25일 강릉지역에 해병대를 상륙시켰으나 그 이후에는 숫적열세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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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26, 제2단계 작전의 결론과 특징, 전술적 문제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잘 정리했지만 내용별로 구분을 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자들을 힘들게 만든다.

전략적 혹은 작전적 차원에서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문제들은 전번의 포스팅에서 정리해 놓았다. 이번에 정리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술적 차원에서 북한군의 문제이다. 전술적 차원의 분석으로 이책은 기동, 주야간 공격, 전차와 포병의 운용, 공군의 운용, 지휘통제 등을 간략하게 분석했했다.

1 기동의 문제

먼저 공격방식, 즉 우회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면공격에만 의존했다는 분석이다.

“공격간 인민군은 적의 연대와 대대급 이하 부대를 포위격멸하면서 포위와 우회기동을 실시하였다. 적을 우회하기 위해 소대와 중대급 병력을 자주 운용하였으며 대대와 연대는 가끔 운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폭넓게 활용되지는 않았다. 몇몇의 경우 정면 공격이 이루어졌고, 전투는 장기전의 성격을 띠었다. 적은 격멸되지 않고 밀려났을 뿐이다.

이런한 상황은 특히 서울지역 전투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제3, 4 보병사단과 제105 전차사단 예하 연대들의 지체와 제2보병사단과 모터찌글연대의 만족스럽지 못한 활동으로 인해 서울지역에서 적이 격멸되지 않았다. (82)”

서울지역에서 결정적이지 못한 부대 운용으로 한국군을 제대로 격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한국전쟁 초기에 대한 기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울지역뿐만 아니라 대전지역과 그 이후의 전투에서도 결정적인 기동을 하지 못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 제24보병사단 역시 대전지역에서 완전히 격멸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결함은 제2집단군의 부대들이 전투하던 용궁-안동 방어선에서도 나타난다. 인민군 부대들은 약 15일동안 적의 강력한 거점을 점령하기 위해 정면공격을 지향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82)”

용궁-안동 방어선에서 용궁이라는 지역이 어디를 가르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추후 확인이 필요한 듯 하다.

2 주야간 전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전쟁초기의 전투는 주로 주간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7월 중반에는 적의 제공권 장악으로 인민군은 거의 야간에만 전투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인민군의 성공적인 진격을 저지할 수는 없었으나 공격속도를 현저히 저하시켰다. 때때로 포병공격준비사격없이 실시하는 적에 대한 집중공격은 야간에 실시되는 인민군의 작전에서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82)

한국전쟁에서 야간전투는 매우 특징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북한군 뿐만 아니라 중공군들도 주로 야간을 이용해서 이동을 했다. 한동안 우리군은 야간전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야간투시경과 같은 과학장비의 발달로 인해 한국전쟁 당시와 같은 야간전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3 도하작전 준비의 부족

인민군들은 한강 금강 남강 낙동강 과같은 대규모의 강을 제대로 준비없이 도하해야 했다. 대부분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광정면에서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직접조준사격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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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25, 제1단계 작전에 대한 평가, 예비대의 부족에 대한 지적

소련이 북한군의 작전수행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로 제기한 것중의 하나가 예비대의 부족이었다. 이는 북한이 충분한 준비없이 납침했다느 것을 의미한다.

예비대의 부족에 대한 지적은 전략적 작전적 수준의 판단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민군 사령부, 사단장 및 연대장들은 주타격 방향에서 병력과 장비의 월등한 지원과 공격 전개시 타격력의 증강 그리고 적의 기습 공격으로 부터 후방과 측방에 대한 엄호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적의 방어선 돌파시 주타격 방향에서의 전투서열은 원칙적으로 2개 제대로, 보조타격 방향에는 1개 제대로 변성되었고 마지막에는 예비대를 할당하였다. 주타격 방향에서 공격하던 사단급 및 연대들은 비교적 좁은 전투지역을 할당받았다.

앞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민군들은 적의 공군과 포병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예비대의 부재와 제2제대의 소모로 인민군은 선택된 방향에 병력을 증강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고, 공격은 둔화되었다. 부족한 예비대로 부대의 보충은 매우 어려웠고 전투와 생활을 위한 필수물자의 지속적인 공급이 거의 불가능했다.

인민군 사단 군단의 전력운용 분석에 따르면, 만약 반격 초기에 제2제대에 3개 사단, 총참부 예비에 1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면 6월 말과 7월에 4개 사단중에 3개사단은 전투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통상 작전 예비대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단들은 한달이상 끊임없이 전투를 실시했다. 8월의 전투부대에 대한 병력증강은 거의 예외없이 새로 편성된 사단 군단에 이루어졌다. 9월에 모든 인민군 부대는 전투에 투입되었다.

예비대는 병참부대가 제외된 105 전차여단과 새로 창설된 제17기계화 사단만 남아 있었다. (81-822)”

소련은 북한군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결정적인 순간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아마도 이는 작전적 수준에서의 평가라고 하겠다. 특히 북한군 6사단이 순천-마산-부산방면으로 진출했을 때 여기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한 것을 뼈아프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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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24, 제1단계 작전에 대한 결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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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중의 하나는 매 작전단계 마지막분에 전체적인 평가를 했다는 것이다. 주로 작전적 수준에서의 분석과 평가를 해놓았는데 매우 높은 수준으로 보인다.

먼저 작전배치 및 작전수행 여건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인민군 사령부는 한국군의 공격준비를 예상하고 부대들을 후방에서 38도선 가까이 이동시켜 제2제대로 방어선에 배치하고 예비를 두었다. …

서울 지역에서 적의 주력을 격멸하면서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공격를 전개한다는 인민군의 전반적인 공격개념은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여 계획한 것이다. 왜냐하면 적의 이러한 병력을 격멸할 경우 38도선 이남의 모든 방어가 와해되기 때문이었다.

서울축선은 인민군을 가장 단거리로 적이 주요목표 지점으로 투입하였다. 이곳은 도로망과 철도망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드넓은 서울의 평지는 모든 병종의 기동에 용이하였다.

북쪽에서 서울로 향한 주타격과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동시에 공격하면서 북동쪽에서 서울을 우회하여 수원방향으로 지향한 보조타격은 성공시에 넓은 정면에서 적의 방어를 분열시키고 서울지역에서 적의 주력을 포위 격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80)”

북동쪽에서 서울을 우회하여 수원방향으로 지향한 보조타격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군 6사단의 선전때문인데 그 결과 북한군은 제2군단이 전체적으로 서울방향으로 진출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15사단과 12사단이 그대로 6사단을 추격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북한군은 원래 제2군단을 수원쪽으로 진출시키려고 했으나 춘천과 홍천방향에서 진출이 기대만큼 빨리 이루어지지 않자, 제2사단만 수원방향으로 보내고 15사단과 12사단은 국군 6사단을 견제하도록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한 인민군의 공격에 대해 국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적은 넓은 정면에서 공격함으로써 정면으로 기동하고 후방지역에서 자신의 부대를 철수하여 인민군의 주타격방향으로 자신의 부대를 증강시킬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80)”

초기에는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으나 미군이 개입하면서 인민군의 작전은 전체적으로 어려워졌다.

“미군의 전쟁개입은 상대적 병력 수준에 변화를 주었고 인민군은 극도로 불리한 조건에서 전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강도하 이후 인민군의 공격속도는 하루 4.5km-5km에 불과하였다.”(80)

이와함께 인민군이 융통성있는 부대 운영이 어려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공격간 인민군사령부는 수차례 부대를 재편성 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규모면에서 제한되었다. 부대의 재편성은 운송수단의 부족과 적의 공군력 그리고 지형적 조건으로 어려웠다.

또한 이런 융통성있는 부대운영의 제한으로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위에서 북동쪽에서 서울을 우회하여 수원방향으로 지향한 보조타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과 함께, 7월 이후 작전에서는 인민군 제6사단의 순천에서 마산 방향에 대한 작전적 지원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적 주요부대의 약한 측방을 집중 타격하고 부산 방향으로 공격을 전개하기 위해 영동에서 남쪽지역으로 신속히 부대를 증강시켜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상기 언급된 이유로 이 지역에 적시적인 병력의 재배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인민군 사령부는 제1집단군의 부대를 증강시키는 대책을 마련했으나 시기를 놓쳤다. 적이 대규모 병력을 이곳에 투입하여 자신의 좌측방을 견고히 방어했기 때문이다.(81)”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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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했다고 우리 안보 걱정할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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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23, 부산교두보에서 미군의 대응과 작전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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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대응

미군은 부산교두보 지역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했다. 예비대를 효과적으로 운영했고 공군과 해군의 화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병력과 장비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면서 적은 위험지역을 적시에 강화하였고 미 공군의 집중포격과 포병의 지원하에 강력한 역습을 실시하였다. 부산교두보 확보를 위해 미 공군은 지상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하루에 1500회의 비행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전투수행과정에서 미군사령부는 해안을 방어하는 육군의 역습을 지원하기 위해 함포사격을 폭넓게 사용하였다. 적의 군함은 청진, 성진, 함흥, 인천 등 해안과 후방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사격으로 인민군 집결지와 시설물을 파괴하였다. 적의 해군과 공군의 항공대는 도시들을 체계적으로 공습하면서 인민군의 전투대열에 타격을 가하였다.(78)”

작전결과 평가

소련은 9월 8일이후 더 이상 공세가 무의미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인민군의 공세는 미미한 성공만을 얻었을 뿐이며 자의적인 철수하여 부대를 이탈시키는 것이 적절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9월초에 시작한 부산 교두보를 정리하기 위한 공격에서 인민군은 미미한 성공을 거두었다. 인민군은 전선의 장애물로 넓게 펼쳐진 낙동강 도하를 강행하였고 일부 방향에서는 15-25km를 전진하였으나 공격을 확대하여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인민군은 적에게 큰 손실을 입혔지만 자신들도 병력과 장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8월 20일에 비해 인민군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주어진 상황에서 방어로 전환하거나 적의 계획된 타격에서 자신의 부대를 이탈시키기 위해 자의적인 후퇴를 실시하는 것은 적절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수행 과정에 대한 분석결과에 따르면 9월 8일후에 인민군사령부는 공격을 계속하려고 했다(78)”

당시 인민군사령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을 것이다. 부산이 바로 눈앞인 상황에서 공세를 중지하고 자발적으로 전선을 이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그 어떤 작전가나 전략가도 그런 결정을 하기 어렵다.

부산 교두보 상황과 중공군 개입당시 맥아더 원수의 철수명령은 서로 비교할 부분이 많다,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의 개입이 예상을 넘는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자 마자 바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철수명령을 지체없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맥아더의 철수결정을 마치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항명 비슷하게 평가하는 시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느끼면 지체없이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을 운에 맡겨선 안되기 때문이다.

군사작전가로서 맥아더 원수의 능력이 가장 뛰어난 순간은 인천상륙작전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중공군의 개입을 인식하는 순간 지체없이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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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22, 북한군의 마지막 전투 부산으로

제1집단군 지역의 전투

제1집단군 지역 그러니까 낙동강 지역에서 주로 미군이 점령방어하고 있는 지역의 공격은 먼저 순천-마산 축선으로 제6사단이 공격을 했고, 8월 31일부터는 함안- 창념 영산 축선으로 공격을 집중했다.

“1950년 8월 31일 21시에 인민군 제1집단군은 함안과 부곡리 지역에서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첫날밤에 낙동강을 도하하여 낙동강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적의 완강한 저항을 극복하고 강력한 포병사격과 대규모 항공포격의 지원을 받은 미 연대들의 역습을 격퇴하면서 제1집단군은 8일간 5-15km를 진격하였으며 9월 8일에는 영산과 창념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미군 사령부는 인민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이지역으로 대구지역에 위치한 제25사단 예하 제27보병연대를 이동시켰고, 영국군 제27보병여단도 이동시켰다.(77)”

다부동전투에 투입되었던 미제27연대가 창령과 영산지역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은 창녕지역에서의 전투가 치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의 전투가 치열했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례적이다.

“특히 일진일퇴를 거듭한 창녕에서의 전투가 치열하였다. 미군과 한국군은 이 지역에 많은 병력과 장비를 집중시켜 제1집단군 예하 연대들을 창녕지역에서 서쪽으로 밀어냈다. 9월 8일부터 제1집단군은 적의 수많은 역습을 점령한 방어선에서 격전을 벌였다.(77)”

제1집단군의 전투는 8월 31일부터 9월 8일까지 약 9일까지 이루어졌다. 나머지는 공격을 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했다. 이미 9월 8일 경 제1집단군은 공세 종말점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제2집단군 지역

“제2집단군은 9월 2일 18시에 짧은 포병공격준비사격 후에 공격으로 전환하였다.(77)”

“우측방에서 공격하던 제3, 13, 1, 8 보병사단들은 미제1기병사단과 한국군 제1,6사단의 방어를 돌파하고 이틀 동안 10km를 전진하였다. 적의 완강한 저항을 극복하면서 그들은 4일간 이어진 대구북쪽에서의 공격으로 미제1기병사단의 연대를 포위 격멸하였다. 미공군의 집중 폭격과 지상군의 지속적인 역습으로 제2집단군의 우측방에서 공격하던 부대들이 9월 8일에 공격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77)”

대구북쪽에서 4일간 공격하여 미제1기병사단을 격멸했다는 기록은 미제7기병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전투기록과 비교해 보아야 할 것같다. 만일 북한 제2집단군이 주력의 공격방향을 미제1기병사단으로 지향했다면 작전적인 실수다. 당시 투입된 미 제1기병사단은 장비나 물자가 충분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강력한 부대에 주력을 지향한다는 것은 잘못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한국군 6사단이나 8사단에 주력했어야 한다.

북한이 미제1기병사단을 격멸시키려고 한 것은 대구를 포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당시 북한군이 대구를 작전의 목표로 삼았다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미 북한은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결정적으로 전쟁을 종료시키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한다. 중간목표로 대구를 선정한 것은 당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좌측에서 경주방향으로 공격하던 제15, 12, 5 보병사단은 적의 방어를 성공적으로 돌파하여 9월 5일 전에 영천-경주-포항 북쪽을 연하는 선으로 진출하였고 적은 대항하기 위해 제24보병사단을 경주에 투입하여 인민군 제12 보병사단을 물리쳤다. 9월 8일 전까지 적은 이 방향에서 제2집단군의 지속적인 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77)”

영산을 점령방어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경주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 제12사단은 경주를 통과하지 못하고 돈좌하고 말았다. 결국 제1집단군과 제2집단군이 동시에 결정적인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미군의 제25사단과 제24사단 그리고 영국 제27여단을 전환하기 못하게 했더라면 한국군과 미군을 이 위기를 극복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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