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군 연역)3, 괴뢰군 창설 배태기 2

보안 간부 훈련대대의 중요간부는 다음과 같다

사령관 김무정

참모장 안 길

정치위원장 김 책

간부부장 이 림

부참모장 황호림

후방부장 최홍극

통신부장 박영순

이들의 군복은 국산 면제로 만들었고, 부대원은 당원들을 대상으로 3개월간 훈련을 시킨 후 간부로 등용했다.

병력이 증가하면서 각중대에 1 정씩 경기관총을 배당했다. 그리고 소총은 3인당 1정씩 배당했다. 창설초기에는 일본군의 38식 소총을 사용했다.

군관은 소련군 출신자와 연안 중공군 출신자로 등용하되, 출신성분은 묻지 않았고 추천이나 소개에 의해 입대시켰다고 한다. 여기에서 출신성분을 묻지 않고 입대를 시켰다는 것이 의외였다.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참여하다보니 파쟁이 심했다고 한다.

사병은 18세부터 25시까지 지원자중에서 선발했다. 이후 기구확장에 따라 민청원이나 노동당원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동해수상 보안대 창설

1946년 7월에는 해안 경비를 위해 1개 대대병력으로 동해수상 보안대를 창설했다. 대대본부를 원산에 설치하고 7개 지방대를 속초, 장전, 서호진, 신포, 고저 등지에 각각 배치했다.

조선항공대 조직

1946년 12월 15일 일본군 항공병 출신인 이활이 중심이 되어 신의주에서 조선항공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이 남겨 놓은 10여대의 연습기와 전투기로 훈련을 개시했다.


검찰보다 민주당 개혁을

마치 오기를 부리는 것 같다. 정치가 오기를 부리면 국민이 불행해진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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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군 연혁) 2, 괴뢰군 창설, 배태기

괴뢰군 연혁은 제일먼저 북한군 창설부터 시작하고 있다.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4281년 2월 8일 괴뢰군의 창설을 선포한 것부터 시작하고 있다. 괴뢰군 연혁은 단기를 사용하고 있다. 4281년은 1948년이다.

괴뢰군 연혁은 북한군이 남침하기까지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세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1 배태기 (4278년 8월 15일 – 4279년 8월 15일) 해방에서 보안간부 훈련대대 창설까지 (1945년 8월 15일 – 1946년 8월 15일)

2 창설기(4279년 8월 15일 – 4281년 2월 8일) 보안간부훈련대대 창설부터 괴뢰군 창설까지 (1946년 8월 15일 – 1948년 8월 15일)

3 강화기(1948년 2월 8일 – 1950년 6월 25일) 괴뢰군 창설부터 남침까지”(1)

앞으로 단기는 서기로 고쳐서 정리하도록 하겠다.

먼저 배태기에 관한 기록은 주로 발생한 사실을 나열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공산당원들은 각도 각군 각면 각리에 인민위원회를 조직, 치안확보와 질서유지를 위하여 치안대외 적위대를 조직. 민주청년동맹을 편성하여 장차 ‘군무요원을 확보’

여기서 군무요원이란 군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0월 김일성이 입북하여 북한공산당 책임비서의 지위를 차지

1945년 11월 경부터 북한 전역에 걸처 각도별로 당원을 모집

철도경비사령부 창설

1946년 1월 11일에는 북조선 철도경비를 목적으로 평양에 철도 보안대를 창설

1946년 7월 초순 소련군 출신 류경수, 박우섭, 박영순, 전문섭, 전문육, 최창덕, 안영 등이 연한 출신의 주연, 유룡구, 조소향, 백락칠, 김만영 등과 회합하여 7월 13일 평약역전에 북조선 철도 경비사령부를 신설

13개 중대 병력으로 북한의 철도 교량 수도등을 경비하고 각도의 철도 보안대를 접수

기구의 확충을 위해 나남 개천에서 대대적으로 대원을 모집

1946년 6월 초순에는 개천에 보안훈련소를 설립하여 본부 및 3개 분소를 편성

보안간부훈련대대 창설

1946년 6월 상순 평양남도 강서군 성암면 대안리에 북조선 보안간부 학원을 설치, 지방 보안서원 및 면 직원 중에서 북조선 공산당 중앙위원회 추천 600명을 선발하여 교육을 실시

이어서 평양학원(보안간부 훈련대대 부 직속학원) 제3기생 중 중학 3학년 수료 정도 이상의 신체 건강한자 약 200명을 중도에 편입시켜 교육 실시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군 출신의 김책, 안길, 강건, 최옹극, 박영순 등과 연안 출신 김무정과 박일우, 주연 등이 각지의 군사단체 규합을 결의하고 김무정을 총사령관으로 공산 신민 양당의 간부 중에서 적임자를 심사하여 보안간부 훈련대대를 조직

보안간부훈련대대는 대대 본부를 평양에 두고 그 및에 참모부, 정치문화부, 간부부, 후방부, 통신부 5개의 부서를 두고 직속부대로 경비대 항공학교 평양학원이 있었음

보안간부훈련대대는 3개의 훈련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훈련 제1소를 개천(개천보안훈련소를 통합), 훈련 제2소를 나남(신설), 제3소를 평양(북조선 철도 경비대대를 통합)에 배치

패잔일본군으로 부터 접수한 약간의 일제무기로 무장하여 훈련하였으며 당시 총병력은 7-8000명 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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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군 연혁) 1, 들어가며

단기 4291년 6월 1일 그러니까 1958년 6월 1일에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괴뢰군 연혁이란 책을 발간했다. 아마도 625 전쟁 발발 8주년을 기념하여 그때까지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보유하고 있던 자료들을 종합정리한 첫번째 책자일 것이다. 당시 3급비밀로 모두 150부정도 발간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일반문서로 비밀에서 해제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제일 처음 편찬한 북한군에 관한 자료이기 때문에 하나씩 정리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로 전쟁기간중 북한군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매우 세밀하게 정리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은 조작되거나 과장된 정황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책은 전쟁이후 처음 작성해서 인지 정치적 입김이 비교적 적게 들어간 듯하다.

한국전쟁 발발부터 초기 낙동강 전투까지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있다. 일전에도 언급했지만 한국전쟁 초기에 관한 기록이 가장 왜곡이 심하다. 미군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이이기 때문이다.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쉽게 조작했기 때문이다. 패배한 전투가 승리한 전투로 둔갑하기도 하고 의미없는 전투가 중요한 전투로 탈바꿈을 했다. 정말 중요한 전투는 잊혀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당시 북한군 창설과정에 대해서도 상당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부터 조금씩 정리해 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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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보다 민주당 개혁을

마치 오기를 부리는 것 같다. 정치가 오기를 부리면 국민이 불행해진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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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30, 1단계 작전의 결론과 특성, 전차, 포병, 공병에 대한 평가

전차에 대한 평가는 특이한 내용이 없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한국군 포병을 전반적으로 수준이하로 평가했다.

“전쟁 1단계 작전에 보병사단과 독립보병연대에 구성된 포병과 예비포병이 참가하였다.

개전 첫날 전투경험은 한국군 보병사단의 포병이 보병의 사격요구를 온젛히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국군 사령부는 주요 도로와 주요 철수로를 따라서만 효과적이고 밀도 있는 포병사격을 실시할 수 있었다.(89)”

소련군이 한국군의 포병을 미흡하다고 한 것은 양적인 부족 때문인 듯하다. 당시 한국군은 사단당 1개 포병대대만을 보유하고 있어서 북한군보다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포병부대는 제한지역에서는 효과적인 지원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군 포병이 대부분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포병부대 운용에 대해서는 두단계로 나누어 평가하고 있다. 최초로 전투에 참가하여 부산교두보로 철수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아마도 미군 제24사단의 포병운용을 의미하는 것 같다. 처음 한반도로 투입된 미군 포병은 제대로 운용이 되지 못하고 철수하는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부산 교두보로 철수시 미군은 대부분의 경우 야전포병을 전개하지 않았고 자신의 보병에게 필요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포병은 제일 먼저 철수하였고 그 결과 부대는 포병의 엄호없이 남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야전 포병이 철수하는 부대를 직접 엄호화기 위해 할당되는 경우에 포병은 통상적으로 도로 가까이에 전개하였다. 미군 부대의 측방이나 후방에 인민군 사단 군단이 진출하는 작은 위협에도 포병은 진지를 정리하고 신속이 후방으로 후퇴하였다.(89)”

그러나 부산교두보에서의 포병운용은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교두보 전투에서의 포병운용은 매우 조직적이었다.

보병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105mm 포병대대와 사단을 일반지원하기 위해 155mm 곡사포 대대가 할당되었다. 포병연대의 각 대대는 1개 포병중대가 지원하였다. 사단의 방공포 대대는 1개 포대씩 곡사포 대대에 배치되었고 주로 지상목표에 대한 사격을 실시하는데 운용되었다. 인민군의 야간공격을 격퇴할 때 미군포병은 통상 저지사격을 실시 하였다. 인민군의 역습시 대규모 포병사격 및 항공사격을 실시하였다.

연대규모의 보병과 포병의 상호협조는 보병연대장과 포병대대장에 의해 이루어졌다.(90)”

공병에 대한 부분중 대전차지뢰의 중요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한국군에게 지뢰를 제공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실책의 하나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개전초에는 대전차 지뢰가 사용되지 않다가. 8월 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인들은 지뢰의 부재를 미군 지휘부가 간과한 초기전투에서의 실수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부대에 보급된 대전차 지뢰는 가장 중요한 도로에 매설되었다. 대전차 지뢰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은 부산교두보 방어에서였다.(90)

그 이외에 특징적인 내용은 전투지역을 고립시키는 임무에 대한 기술이다.

“전투지역을 고립시키는 임무는 병참선, 철도망, 교량, 창고, 철도부대 및 자동차 수송을 타격하는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또한 예비대와 전술 및 작전종심에서 병력과 장비가 집결되어 있는 곳을 타격하는 방법으로 수행되었다.”(90)

제1단계에서 미군이나 한국군이 수행한 임무중 전투지역을 고립시키는 임무라는 것이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역습작전에서나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단계 작전간 미군이나 한국군이 북한군의 후방을 지향할 수 있는 작전을 수행한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의 제1단계 마지막 부분이다. 이번으로 소련의 기록에 대한 정리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부터는 육군본부가 1962년 편찬한 괴뢰군 연혁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응원에 힘입어 영업하고 있는 어느 분식집 이야기

단골들에게 응원받아 후일 미담이 된 티라노 떡볶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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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29, 1단계 작전의 결론과 특성, 한국군과 미군의 경우

1단계 작전의 결론과 특성이라는 절의 전반부는 인민군의 문제점을 그리고 후반부에는 한국군과 미군의 작전을 전반적으로 분석평가했다. 과연 소련군들은 한국군과 미군의 제1단계 작전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제일 먼저 한국군의 미숙한 방어작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군 사령부는 방어편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인민군의 포병공격준비사격에 연이은 타격 결과, 전투1시간 후에는 이미 한국군 제1방어선의 거점 대부분이 점령당하였다. 적의 방어체계자체가 붕괴되었으며 일부 고수방어 지역에서의 저항도 무너졌다. 이와 같이 현저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의 저항은 인민군의 연대공격에 의해 빠르게 제거되었다.

적은 반격을 가하여 공격 이전의 상태로 인민군을 격퇴하기 위해 예비대와 제2제대를 투입하는 방법으로 붕괴된 방어체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역습은 포병의 사격지원하에 대대와 연대 병력으로 실시되었고 일부지역에서는 2개연대가 실시하였다.

6월 25일 하루동안 계속된 격전이 일부지역에서는 6월 26일까지 지속되었고 주방어지대 전투를 위한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다. 한국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군은 후퇴하면서 주로 거점이나 주도로를 엄호할 수 있는 고지와 같은 유리한 방어선에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통상 이러한 방어선들이 와해되었다.”(86)

요약하면 주방어선이 너무 쉽게 무너졌고 그 이후 역습으로 주방어선을 회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방어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방어선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역습으로 회복하기 어렵다. 주방어지대 유지하면서 당하는 피해보다 역습으로 회복하는 피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인민군의 포병사격에 혼비백산해서 무너졌다는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다음 언급한 것이 미군과 한국군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퇴시 인접부대와 상호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결함이 있었다. 한국군과 미군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대들이 인접부대의 상황을 모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포항지역에서는 한국군과 미군이 서로 피해를 입히면서 교전하는 일이 있었다. 한국군과 미군의 통신은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미군사령부는 후퇴하면서 한국군을 운명에 맡겨 버리곤 했다.”(87)

한국군과 미군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은 한국군이나 미군이 작성했던 전사에서는 크게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이다. 포항지역에서 우군간 교전이 있었다면 한국군 수도사단이나 3사단이 미군 25사단과 충돌을 의미하는 듯 한데 내용을 좀 더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다음에 언급한 것은 한국군의 대전차포 능력 부족이었다.

“한국군 보병은 충분한 수량의 무반동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였다. 대전차방어는 충분하지 않은 종심에서 편성되었다.

대전차포는 4-6문을 가지고 배치하였고 의정부와 서울지역에서는 좁은 정면에 8-12문의 화기를 집중시켰다. 전투 중에 60미리 무반동 대전차포는 인민군 전차와의 전투에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88.9미리 대전차화기로 서둘러 교체하였다.”(87)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들 자신의 삶에 불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지나칠 정도로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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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28, 1단계 작전의 결론과 특성, 인민군의 전투지휘통제와 후방지원의 문제

제1단계 작전수행간 인민군의 문제중 가장 마지막 부분에 배치한 것이 지휘통제체제와 후방지원의 문제다. 인민군의 후방지원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다 잘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그러나 인민군의 전투지휘통제에 관한 내용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이 거의 처음 이문제를 언급한 것 같다.

“평시 부대들의 지휘체계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부대지휘에 필수적인 전시지휘통제 기구의 전개를 적시에 재공하지 못했다. 개전초기 전선으로부터 이격되어 있던 인민군 총사령부는 사단 군단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전선사령부와 집단군사령부를 설치한 이후에 전선에 배치된 모든 부대의 작전활동에 대한 지휘통제가 가능해졌다.”(85)

인민군이 처음 남침을 시작할때 전선군사령부나 집단군사령부를 제대로 편성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소련군출신이라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지휘통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선군사령부를 편성했을 것이다. 그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남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북한의 동서해안 방어는 총참모부가 직접 통제하고 있었으나 효율적인 지휘통제는 어려웠던 것 같다.

“서해안과 동해안의 방어조직과 계획들은 총참모부의 통제하에 놓였다. 그러나 참모부들은 완전히 편성되지 못하였고 충분한 통신수단을 보유하지 못하였다. 총참모부는 여전히 지휘통제가 미약하였고 총사령부의 지휘통제기구로서의 완전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85)”

한편, 서울진출이후 편성된 집단군 사령부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급조된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집단군 사령부 역시 상당수의 사단 군단(5-7)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예하부대에 대한 지휘통제가 미흡했기 때문에 부대들에 대한 지휘통제가 항상 잘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85)

고급사령부 뿐만 아니라 사단과 연대급 규모의 참모부의 기능도 문제가 있었다.

“일부 사단과 연대에서는 참모부의 준비상태 미흡과 통신장비의 부족으로 부대에 대한 지휘통제 상태가 좋지 못하였다. 몇몇 사단 군단의 지휘관들은 하루 이상 자기 연대들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전쟁 1단계에서 인민군들의 지휘통제 결함은 단시간에 참모두를 편성하여 지휘관의 결심을 끌어내는데 미흡했고 사단장 및 연대장들의 병과 간 또는 부대들간 그리고 인접부대 간의 지속적인 상호지원에 대한 실실적인 학습이 부재하였고, 참모부의 지휘관과 참모장이 지휘소를 제대로 설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일부 지휘관들은 현대전에서 지휘통제에 대한 참모부의 위치와 역할을 과소평가했고 참모부 없이 부대를 개인적으로 지휘통제하려 했다. 또한 피아의 부대상황에 대한 정보가 적시에 보고되지 않았으며 정찰대의 편성이 약했다.”(85)

소련군이 보기에 당시 북한군은 거의 전제대에 걸쳐 제대로된 지휘통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이 초전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이제까지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의정부 축선에서는 그나마 한국군 방어가 어느정도 역할을 했으나 제1사단 지역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방업무와 관련하여 미공군의 폭격과 함께 처음부터 제대로된 편성이 미흡했고 지휘통제 및 업무수행능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는 부대편성상의 결함이 있었다. 지휘통제능력이 미흡하였으며 업무를 편성하는 능력 또한 부족했다. 심지어 전선지역 보급물자 중에는 뇌관이 없는 탄약과 포신이 없는 박격포 등 여러 사례가 있었다.”(86)


지소미아 종료했다고 우리 안보 걱정할 필요없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후 미국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반발은 우리 국내 소위 보수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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